■ 정리 및 보고 탁00/고00 선교사(스리랑카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인도양의 진주”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섬나라 스리랑카는 향긋한 실론티의 고향이며, 친절함이 가득한 나라이다. 신밧드, 부처, 마르코 폴로, 중국의 정화 등이 다녀간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450년에 걸쳐 포르투갈,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독립 후에는 공산 반란, 26년에 걸친 내전, 쓰나미로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하였다. 2019년 여러 곳에서 폭탄테러와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경제 위기를 맞았고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
1) 선사 시대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선사시대부터 여러 원주민이 살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스리랑카 중심부 산지에 소수만이 남아있는 베다족이 이러한 원주민의 마지막 후손인 것으로 추정된다.
2) 고전 시대
보통 스리랑카의 역사는 기원전 6세기를 전후해 벵골 지방에 정착했던 인도아리아인들 중 위자야(Vijaya)가 700여 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스리랑카섬을 침공하며 나라를 세웠다는 전설이 스리랑카의 연대기 「마하왕사」(기원후 5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에 인도에서 건너온 아리아인들과 기존의 수렵채집민인 베다인들이 혼혈되면서 이들이 싱할라인의 기원이 되었다. 기원전 377년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성립하였고 기원전 250년경에 불교가 전해져 국교로 받아들여졌다. 아누라다푸라 시대는 스리랑카의 고전시대를 이루며 기원후 1000년경까지 이어지다가 1017년 인도 남부의 촐라 제국이 침략하여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멸망시켰고, 곧 비자야바후 1세가 이를 몰아내고 폴론나루와 왕국을 세웠다.
3) 식민지
스리랑카의 유럽인 거주는 1505년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양한 향신료를 찾아 섬에 상륙하여 섬의 해안을 장악하고 천주교를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1658년 네덜란드는 스리랑카를 점령했지만 영국은 1796년에 지배했다. 영국은 스리랑카에 정착촌을 세운 후 1815년에 캔디 왕을 물리치고 섬을 공식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실론을 식민지를 만들었다.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스리랑카의 경제는 주로 차, 고무 및 코코넛을 기반으로 지배하였다. 1931년 영국은 Ceylon에 제한된 자치권을 부여하여 결국 1948년 2월 4일에 영연방의 자치령이 되었다.
4) 독립 이후
1948년 영국 연방의 일원으로 독립하여 실론 자치령이 되었으며, 1972년에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국호도 "실론"에서 현재의 국호로 변경하였다. 독립 이후에 토착 민족인 싱할라인과 영국 식민 지배 당시 이주한 타밀인 간의 지속적인 분쟁이 있어왔다. 불교를 믿는 싱할라인과 달리 타밀인들은 주로 힌두교를 믿어 종교적 차이가 있으며, 타밀인들은 주로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했던 등, 두 민족 간에는 균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타밀인들은 1976년 북부 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약 30여 년에 걸쳐 타밀 호랑이 조직과 스리랑카 정부 사이의 스리랑카 내전이 펼쳐지게 되었다. 2001년에 노르웨이의 중재로 일단 심각한 폭력적 분쟁은 수그러들었지만 갈등의 불씨는 완벽하게 꺼지지 않은 상태였다. 2009년 타밀 반군이 정부군에 항복하면서 스리랑카 내전은 막을 내리게 된다.
스리랑카의 위치는 동경 79°40'~81°55’, 북위 5°55'~9°50′사이의 인도 동남부 인도양상에 위치한 도서국이다. 중남부 산악지대(Hill Country)와 해안지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중앙 산악지대에는 최고봉으로 피두루탈라갈라(2,524m), 키리갈포타(2,388m), 토타팔라칸다(2,357m), 아담스 피크(Adam’s Peak 2,238) 등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남부와 서부는 급경사, 동부와 북부는 대체로 완만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평야 지대는 주로 해안을 따라 전개되며 북부지역으로 광대한 평야 지대가 펼쳐진다. 하천은 중앙 산악지대에서 시작되며 수량이 풍부한 편이다. 스리랑카의 연평균 기온은 26~30℃로 고온 다습한 열대몬순기후이다. 사계절의 구분과 강설이 없고 서리는 고산지대에서나 볼 수 있고, 2007년 고산지대에 눈이 내리기도 하였다. 기온이 가장 낮은 12~1월의 평균 기온은 25.5℃이며, 기온이 가장 높은 4~5월의 평균 기온은 29℃로 한서의 차이가 3.5℃ 정도인 비교적 고른 기온분포의 나라다. 동북 해안 지역은 비교적 건조하여 연 강수량이 600~1,800mm 정도이나 중부지방은 다습한 지대로 5,000mm 이상의 강수량을 보인다. 남서 지역은 4~6월 중, 동북 지역은 10월 중순에서 2월 중순까지가 우기라 할 수 있다. 최근 이상 기후 현상으로 우기가 아닌 시기에도 많은 강우량을 보이고 있으며 이 시기에는 강우와 함께 천둥, 번개가 빈번히 발생한다.
스리랑카는 인도 아래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이다. 면적이 65.6천 ㎢(한반도의 1/3정도- 남북 간 거리 433km, 동서 간 거리 226km) 이기 때문에 작은 나라이다. 스리랑카 인구는 약 2,191만 명(2020)이며, 이는 세계 58위에 해당한다.
헌법상에 국민 70% 이상이 사용하는 공용어(Official Language)인 싱할라어와 소수 타밀족이 사용하는 타밀어를 국어(National Language)로 규정하고 있다. 싱할라어는 스리랑카인 대다수가 사용하는 고유의 언어이며, 타밀어는 근대 이후 영국인들과 함께 스리랑카로 본격 유입된 인도의 타밀 지방 출신 사람들 사이에서 사용되고 있다. 의회, 교육 및 법률 용어로 싱할라어 및 타밀어를 병용하되, 행정용어로는 싱할라어를 사용할 것을 명기(다만, 동·북부지역에서는 타밀어도 행정용어로 병용 가능)하였으나, 1987.7.29 인·스평화협정에서 싱할라어, 타밀어, 영어를 모두 공용어로 인정한다.(스리랑카 한국대사관 자료) 영국 식민 시대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영어로도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1) 씽할러족(Sinhala)
BC5 세기경 인도 뱅갈 지역에서 이주해 온 위저여(Vijaya) 왕과 700인이 씽할러족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에 의해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등 고대 스리랑카 문명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스리랑카의 주 종족으로 스리랑카 인구의 74%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전국에 고루 퍼져 살고 있으며, 특별히 콜롬보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에 주종을 이루고, 북동부 지역에는 적은 수가 살고 있다. 스리랑카가 인도에 근접해 있기 때문에 씽할러족은 불교를 신봉함에도 힌두의 카스트 제도에 의해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씽할러족 가운데 카스트의 제도는 많은 영향력을 잃었지만 결혼할 때 카스트를 고려하여 배우자를 선정하는 일은 자주 볼 수 있다.
2) 타밀족(Tamil)
타밀족은 스리랑카 2번째 종족이며, 인구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아리안(Ariyan) 계통의 씽할러족과 달리 타밀(Tamil)족은 드라비다(Dravida) 계통이며 인도로부터 이주해 왔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최초로 이주한 역사적 기록은 없으나 BC 3세기경 처음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북동부 지역에 많이 거주한다. 타밀 이주는 19세기 식민종주국 영국의 필요에 의해서 인도로부터 홍차 농장 노동력으로 이들을 수입하면서 이루어졌다. 인도 타밀인들은 스리랑카에서 소외된 계층으로 고산지대 홍차 농장에서 제대로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1990년대에 와서야 스리랑카 시민권을 받을 정도로 철저히 소외된 사람들이다. 이들의 종교는 대부분 힌두교이며 나머지는 주로 기독교를 믿고 있다. 자프나 타밀은 30%의 기독교인이 있다. 이들 힌두교도 사이에는 매우 엄격한 카스트제도가 남아있다. 타밀족 언어는 타밀어이며 씽할러어와 전혀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3) 무슬림 무어족(Moor)
스리랑카의 세 번째 종족으로,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한다. 이들은 폴론나루와 시대(11~13세기)에 무역을 위해서 들어온 아랍 상인들과 스리랑카 타밀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스리랑카 전역에 퍼져 있지만, 특별히 남동부 ‘암빠러”주에 몰려 산다. 19세기에는 인도에서 무슬림들이 다량 이주하였다. 이들은 주로 이슬람을 신봉하고 주로 상업에 종사하며, 스리랑카 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를 철저하게 구성하여 서로 돕고, 가난한 자를 돌보며 무슬림 신앙을 전파한다. 순수한 아랍인종의 특징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그들의 종교, 관습 등은 간직하고 있다. 언어는 주로 타밀어를 사용하고, 장사와 생존을 위해서 씽할러어도 할 줄 안다. 무어족 사이에 기독교인을 찾기는 어려운 상태이며, 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사역자들과 기관도 거의 없다.
4) 스리랑카의 말레이 크레올(Malay Creole)족
스리랑카의 말레이 크레올(MalayCreole)족은 스리랑카 소수 종족 중 하나이며, 1700년 초 네덜란드인들이 인도네시아의 자바와 수마트라에서 고용해 온 사람들이다. 전체 6만 명 정도이며, 인구의 0.3%를 차지한다. 대부분이 이슬람교도이며 이민 온 지 300년이 지난 지금 소수 종족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자기 종족의 외모와 특색을 많이 유지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콜롬보(스리랑카의 수도), 캔디, 바둘러, 함반또터와 같은 주요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한다. 이들의 언어는 타밀어 구조에 말레이 어휘가 혼합된 형태로서 대부분 적어도 두 가지 말을 사용한다. 말레이족은 복음에 대해 어느 정도 개방적이기는 하지만 유럽 식민지하에서 받던 이슬람에 대한 박해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말레이 크레올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지 않아 복음 전파의 어려움이 된다.
대통령 중심제이나 의원내각제를 가미한 이원집정부제이다.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행정수반 및 국군 통수권자이고, 4개 장관직(재정기획부, 국방부, 항만항공부, 고속도로부)을 겸임하고 있다. 대통령은 국민 직선제이며 6년 임기로 연임 제한이 없다. 정부 구성을 보면 총리(Prime Minister)와 장관(Minister) 및 부장관(Deputy Minister)을 현역의원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대부분의 정부 정책은 내각 장관회의(Cabinet Meeting)에서 결정한다. (내각 장관회의가 국회의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기구가 국가 행정업무에 대해 결정 권한을 갖는 내각 책임제로 볼 수 있는 반면 대통령에게도 결정 권한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내각 책임제가 아닌 이원집정부제 형태의 정치체계라고 볼 수 있다.)
스리랑카는 불교가 지배적인 국가이며, 불교계의 정치적 영향력이 큰 편이다. 2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스리랑카는 일찍부터 인도 힌두사상 및 원시불교의 영향을 받아 벽화, 조각 및 건축물에 각종 힌두신화, 베단타 철학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불교 전래 이후 스리랑카인들은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 폴로나루와(Polonnaruwa), 캔디(Kandy) 등에 불교사원을 건축하고, 불교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각으로 표현하는 등 많은 불교문화 유적을 남겼다. 풍속은 주로 종교 명절을 위한 축제와 오랜 식민지 생활 속에서 얻은 서양 풍속이 혼합되어, 주로 불교사원이나 힌두사원, 회교모스크 등을 중심으로 북과 춤, 그리고 코끼리를 장식하여 행렬에 등장시키는 행사를 개최한다. 싱할라 달력으로 연초는 4월 15일경이다. 고유의상을 입을 때, 여자는 “사리”를 착용하며 색깔이 다양하나, 남자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스리랑카의 가장 큰 사회문제는 내전으로 발생한 민족 갈등이다. 스리랑카 정부가 2008년 1월 2일 타밀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 of Tamil Eelam, LTTE)와의 정전협정(2002년 2월 22일 체결)폐기를 공식 선언하고 북부 LTTE 장악지역에 대해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전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내전은 2009년 5월 19일 스리랑카 정부의 내전 승리 선언을 통해 군사적으로 종결되었으나,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피난민(IDPs) 인권 및 구호 문제, 동·북부 지역 개발 문제, 타밀인 등 소수인종에 대한 정치적 화해 문제 등이 주재국 정부가 극복해야 할 주요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스리랑카의 킬링필드’로 불릴 만큼 끔찍한 대학살이 벌어졌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내전 말기 스리랑카 대통령은 자유당(SLFP)의 마힌다 라자팍사였다. 마힌다의 동생이자 국방장관으로 당시 학살을 총지휘했던 고타바야 라자팍사가 최근 반정부 시위대에 쫓겨 싱가포르로 도주한 바로 그 대통령이다. 스리랑카의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이 사임하고, 스리랑카 의회에서 라닐 위크레메싱게(내전 당시 교육장광)를 2022년 7월 21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이 정치적 유산은, 국가부도 사태로 혼란스러운 스리랑카의 사회적 불안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2020년 스리랑카의 1인당 GDP는 3,682$이다. 2020년 경제성장률은 -3.6%이다. 스리랑카는 섬나라로 대부분의 음식, 가스, 의약품 등을 수입하고 있으며 나라의 가장 큰 수익구조는 관광이다. 관광업 의존도가 높은 스리랑카는 지난 2019년 4월 21일 스리랑카 연쇄 폭탄 테러와 2019년 말부터 2022년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관광객이 급감하며 주요 외화 취득 수단이 사라졌다. 관광업은 스리랑카 GDP의 15% 이상을 차지하는데 여기에 공백이 생겼다.
그동안 정치인 가문인 라자팍사 가문의 족벌정치에 따른 폐단 등으로 인해 스리랑카 경제에 위기 신호가 감지되었음에도 IMF 구제금융을 2022년에야 신청할 정도로 위기 대처가 늦었다. 스리랑카는 경제난에 재정 정책 실패, 그리고 에너지 부족까지 겹치며 생계가 위기에 처한 민심이 폭발했다.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수도 콜롬보를 비롯해 각지에서 벌어지고 결국 정치권력을 쥐고 있던 라자팍사 가문은 성난 민심에 의해 축출되었다. 현재 스리랑카는 외환보유 부족으로 전국적으로 전력, 차량용 기름, 약품 등 공급이 제한적이다. 결국 2022년 4월 12일 대외부채 510억 달러(62조 9천억 원) 상환을 잠정 중단하면서 일시적 디폴트를 선언하였다. 최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면서 최근 고물가 등 글로벌 경제 위기와 맞물려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싱할러인들이 스리랑카의 주 종족으로 스리랑카 인구의 74%를 차지하고 있으며, 대부분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불교가 국가로부터 우선적으로 보호와 장려를 받도록 되어 있다. 소승불교(Theravada Buddhism)가 스리랑카 불교의 주요 종파로서, 약 53,000여 명의 승려(Buddhist Bhikkhus)가 6,000여 개 사원에서 생활하고 있다. 인도로부터 전래된 부처의 송곳니는 캔디시 소재 불치사(Temple of the Tooth)에 봉안되어 있으며, 특히 8월 Esala Perahera 축제 기간에 부처의 모조치아를 둘러싸고 2주간 퍼레이드를 벌이며 함께 경축한다.
힌두교는 약 12%로 주로 타밀족이다. 이슬람교는 9.7%, 기독교 약 7.4%이며 이중 개신교는 1.5%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타 0.9%로 구성되어 있다. 스리랑카는 오랜 서구 식민지 경험을 통하여 생활 습관에 기독교 영향이 많이 스며들어 있어,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에 카드와 폭죽을 파는 등 불교도들도 크리스마스를 함께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스리랑카의 기독교는 왕성한 동시에 연약하며, 핍박받고 있다. 긴 내전의 사회적 결과들로 기독교인의 삶은 어려운 상태이다. 불교 민족주의는 복음 전도를 식민주의, 회심을 반역이라고 말하고 있다. 교파에 속하지 않은 신생 교회들은 부실 운영과 개인숭배, 거짓 가르침 등에 연약하다. 기존 교파에 속한 교회들은 신학적 자유주의와 현실 안주의 구습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그러나, 위탁된 리더십과 초 교파적인 협력이 미래를 향한 길을 구축하고 있다.
스리랑카 선교 역사: 타종교와 타문화에 대한 태도(참조: CTS Seminar 자료)
1) 포르투갈 선교 시대(1505-1658)
① 식민 통치 배경
1505년에 스리랑카를 침략했던 포르투갈인들은 동서 해상무역의 독점이 목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에 가톨릭의 부흥으로 세계에 가톨릭 신앙을 전파하려는 동기가 동반되어 스리랑카 주요 3 지역 중 코테왕국과 정치적 이해 관계 속에 통치 기반을 내렸다.
② 선교의 전개
가톨릭 사제들이 처음에는 식민지에 체류하는 포르투갈인들을 종교적, 영적으로 돌보기 위해 왔었다. 본격적인 선교사는 1543년부터 프란시스칸이 시작(예수회 1602, 도미니칸 1606)하였다. 코테 왕은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어서 포르투갈 왕과 정부의 호의를 얻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코테 왕의 손자인 다르마팔라가 프란시스칸 사제의 교육을 받으며 개종, 세례를 받고, 이어서 그의 가족, 귀족, 관료, 카스트 족장들의 개종이 이어졌지만 순수한 영적 동기보다 정치적, 실리적 동기가 많았다. 포르투갈의 보호 속에 불교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직업이 기독교에서는 인정받고, 사회적 지위 상승 등의 요인이 개종 배경에 있었다.
③ 선교정책과 선교 방법
기독교인은 사형 면제, 신분 상승, 취업 유리, 세금 혜택, 법적 혜택 등이 선교 방법으로 활용되었다. 왕과 귀족, 상류층, 지도층의 개종이 우선되었는데, 지배층이 개종하면 일반인들도 따라서 개종될 것으로 생각했었다. 교리 교육, 기본 교육, 자선 사회사업이 선교의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사회적 영향력으로는 일부다처제를 금하고 일부일처제, 결혼의 존엄성을 강조하였다. 선교의 약점으로는 외국 선교사를 의존하고 현지 지도력 양성이 미흡하여 후에 네델란드 지배 시 현지 사제 부재의 원인이 되었다.
④ 스리랑카인들의 반응
사회적 신분 상승과 물질적 혜택 때문에 개종한 경우가 많았다. 기독교를 유럽의 종교와 문화로 보고, 기독교 학교는 개종의 수단으로 보고, 스리랑카 종교와 문화에 대한 억압에 대해 반유럽, 반기독교적 감정이 유발되었다. 화란 개혁 교회 선교 시 핍박에도 불구하고 건재하고 상당수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 가톨릭의 종교적 표현 양식이 스리랑카의 종교, 문화와 유사한 점이 있었고 호응도 얻었다. 예로는 가뭄이 오자 신에게 제사 지내는 대신, 십자가를 세우고 기도했더니 비가 오고 가톨릭 성인 상에 가서 병 낫기를 기원하는 다양한 예들이 있다.
2) 화란 선교 시대 (1658~1796)
① 식민 통치 배경
당시 유럽에서 큰 수요를 차지한 시나몬, 후추, 아이보리 등의 향신료 무역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싱할러 왕이 포르투갈 축출하는 조건으로 화란 무역권을 허용하였다. 싱할러 왕은 캔디 지역 통치, 화란은 해안과 주요 도시를 통치하였다. 상업적 군사적 팽창을 동방의 나라에 화란 개혁 신앙을 전파할 기회로 보았다.(Greenway 1963:3) 화란의 식민 지배는 선교의 수단으로 보았다. “하나님은 화란의 정복을 그의 이름과 왕국을 어둠 속에 있는 나라들에 확장할 기회로 만드신 것 같다.”(1963:64)
② 선교의 전개
“이교도 개종”을 목적으로 화란 개혁교 성직자들이 화란 함선에 동승하여 스리랑카에 왔다. 화란 정부는 선교 활동에 보호막이 되었지만, 경제적, 정치적 이익이 우선적이었으므로, 선교사역이 현지인들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목사이면서 선교사인 화란인들이 화란 정부의 통치와 보호하에 개혁 신앙을 전파하는 특권을 가지고 가톨릭은 오도된 신앙이므로 ‘참된 개혁 신앙’(true Reformed faith)으로 와야 한다고 보았다. 학교는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며 미래의 교회 회중의 토대로 여겼다.(Tennent 1850:46) 화란 정부는 상류층을 개종하여 행정력을 장악하여 개종자를 직책에 등용하였는데, 직책을 얻으려면, 세례식, 교회 등록, 개혁교회 교리에 동의해야 했다.
③ 스리랑카 종교와 문화에 대한 태도
포르투갈어 사용을 금지하고, 화란어 사용을 장려하였으나 현지어를 구사하는 화란 성직자는 거의 없었다. 현지인들의 종교의식, 민간 의식을 우상숭배로 간주하고 공적으로 금하였다. 선교사들은 정부에게 켈라니아 절에서의 불교도 찬불 의식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고 기독교인과 불교도 간의 결혼 금지 칙령을 내렸다. 화란 총독 Van Goens는 “야만적이고 무질서한 사람들에게 문명화된 기독교 행정을 전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직자들은 기독교에 부합되지 않는 현지 종교와 사회적 관습들을 금지하도록 정부에 자주 촉구했다.(Arasaratnam 1958:229)
④ 스리랑카인들의 반응
싱할러 불교도 중에서는 성과가 덜했으나 북부 타밀 힌두교 중에서는 괄목할 만한 선교 결실을 거두었다. 화란 선교사 발데우스는 현지어로 효과적 선교를 하였다. 많은 수의 등록 교인이 있었지만 교회출석은 극소수였다. 예로 Gall과 Matara지역에서 89,077명이 세례를 받았으나, 출석자는 36명에 불과하였다. 화란 개혁교회가 스리랑카인들에게 큰 호응을 받지 못한 특성을 보면 예배에 Symbol의 사용 없었고 성경만을 유일한 종교적 매체로 고수하였지만 글을 읽지 못했던 다수 스리랑카 인들에게 전도지와 문서들은 효과적이지 못하였다. 반면에 가톨릭은 성경의 주요 이야기를 드라마로 표현하고 말로 전하는 토착화된 선교 방식으로 호응을 얻었다. 화란 개혁교회는 150년의 선교 기간에도 불구하고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영국 식민 시대 이후 극소수로 약화되었다.
3) 영국 선교 시대 (1796~1948)
① 식민 통치 배경
영국이 화란을 스리랑카에서 제압하고 통치를 시작하였으며 1815년에는 캔디 왕국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② 선교의 전개
동인도 회사가 스리랑카에 주둔하는 영국인들의 종교적 필요를 위해 사목(chaplain)을 두었다. 당시 영국에서 기독교 부흥으로 선교회들이 탄생하였으며 선교회들이 해외 선교사 양성, 파송하였다. 1805년에 스리랑카에 최초로 선교사가 입국(London Missionary Society)하였으며 주요 선교 단체는 침례교(1812), 감리교(1814), 성공회(1818) 등이었다. 동인도 회사는 무역과 산업을 통한 경제적 이익 증진이 주요 관심이었으므로 선교 사역이 현지인들과의 마찰을 일으켜 장애가 될 것을 우려하였다. 한편으로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을 교육하고 현지인들과 관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동인도 회사는 선교사역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18세기 후반의 복음주의 부흥 운동 속에서 선교사들은 이방의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야 한다는 열정을 가졌었다. 식민 정부의 공식적 지원이 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선교사들의 열정과 적극적인 사역으로 선교가 확대되었다.
③ 선교정책과 방법
강압적인 방법, 물질적 혜택으로 유인하는 정책을 버렸고 다른 종교에 자유를 주었다. 세 가지 주요 선교 방법은 교육, 설교, 인쇄였으며 학교를 통해 현지인을 접촉하고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선교사 Hardy는 “성경과 전도지는 화해의 전령이 되어 교회가 없고 사역자가 갈 수 없는 산간마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고 전했다. 선교의 한계로는 선교사 의존, 현지 교회의 자유, 리더쉽 허용이 약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자생적 증가가 약했다.(Somaratna 1988:96)
④ 스리랑카 종교와 문화에 대한 태도
영국 선교사들은 타 종교에 자유를 주고 스리랑카 사람들에 대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깊었지만, 타종교를 거짓이고 영원한 죽음으로 끌고 가는 종교라고 정죄했다. 영국 선교사들은 기독교 신앙과 더불어 서구 문화와 문명을 전파한다는 생각을 가졌고 비유럽 국가들에 대해 우월감이 있었다. 따라서 영국 선교사들은 기독교화는 서구화와 맞물려 “영국의 통치가 스리랑카를 진보하게 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개종자들은 전통문화를 거부하고 서구의 문화형식을 받아들일 것을 강요 받았고, 이것이 남아시아에서 개종자들이 자신들의 주류 사회에서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교회에서 스리랑카적인 양식을 예배에 도입하는 시도가 전혀 없었고 서구에서 방문자가 온다면 동양의 교회라고 느낄 만한 것이 없었다.(Small 1971:367)
⑤ 스리랑카인들의 반응
선교사들은 개종의 동기로 선교했지만 스리랑카인들을 물질적, 사회적 혜택의 동기 때문에 기독교 선교에 반응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리적 이유로 크리스천 행정가와 선교사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거주 지역에서의 영향력과 관계 유지 위해 불교 승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불교 승려들은 선교사들을 적이 아니라 종교인, 동료로 보았으며 불교 승려가 성경 번역을 도왔고 불교를 완전한 것으로, 기독교는 가까운 것으로 보았다.(Tennent 1850:244) 이에 선교사들은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가지고 불교 경전을 깊이 연구하여 기독교가 진리임을 입증하려고 하였다. 1870~1948년경에 국민의 정체성 찾기가 불교 재건과 맞물려 민족주의가 발흥 되었다. 절에서 주일학교가 실시되었고 불교도 결혼식에 승려가 참석하였다. 그리고 Protestantism의 내용과 형식을 도입하여 신교에 저항하였다.
4) 유럽의 스리랑카 선교: 선교학적 통찰
선교사들의 구령, 열정, 헌신과 수고가 있었다. 선교사들이 식민주의 사고에 동화되어 식민 정부에 도움이 되기도 했고 한계도 있었지만 “후대의 높은 기준으로 그들의 사역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될 것이다.”(Greenway 1963:12)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심었고 역사상 처음으로 스리랑카에 교회를 세워 선교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① 문화 이해 노력
불교, 현지 문화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였다. 한계로는 물질적, 사회적 혜택으로 순수한 개종이 부족하였다. 식민 통치력은 선교와 교회설립에 보호막이 되고 신속하고 진전 있게 했으나, 장기적으로 장애 요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현지인들은 기독교를 식민 통치자의 종교로 인식하고 식민 통치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되었다. “교회가 식민 통치자와 제휴하지 않고 겸손하게 선교했다면, 기독교 신앙이 잘 전파되지 않았을까?(Don Peter 1992:235)
② 제안되는 반응들
스리랑카인의 99%는 종교가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를 보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코올 중독, 마약, 자살, 폭력 및 강간의 증가는 스리랑카의 종교적 신념 체계의 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종족 간 갈등으로 1983년부터 2009년까지 발생한 내전은 종교적, 인종적 분열을 심화 시켰고, 다수 종족인 싱할라족의 불교는 국가 종교로서 보호 장려되며, 소수 종교에 대한 억압과 폭력과 박해는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는 종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며, 모든 종족을 제자화하기 위해 모든 마을마다 전략적이고 계획적인 방식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선교적 과제를 갖고 있다. 교회와 선교 지도자들은 종족을 넘어서서 적극적인 협력과 갱신된 관계를 통해 스리랑카 교회 전체를 선교 동원하며, 제자 삼는 선교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스리랑카에서 교회 개척 운동은 여전히 시급성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