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권역 | 아르헨티나  / Argentina

아르헨티나 Argentine Republic

정리 및 보고     최일근/장베레카 선교사(아르헨티나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아르헨티나(Argentine Republic)


 

아르헨티나 국기는 하늘색과 하얀색에 태양 문장이 있는데 하늘색은 애국자이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추진했던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장군이 1812년 2월 17일 처음 만들었으며, 각각 하늘과 땅을 뜻한다. 국기 중앙의 문양은 32개의 황금빛을 발하는 인간 얼굴의 모습을 한 태양이다. 1816년 7월 20일 국기로 제정되었으며, 이후 1818년 2월 25일에 국기 중앙에 문양이 추가되었다. 

 

1. 개요

표어 En Union y Libertad: 연합과 자유

국명 아르헨티나 공화국(아르헨티나는 ‘은’을 의미하는 라틴어 ‘Argentum’에서 유래)

면적 2, 780, 400km²(남극대륙의 964,847km² 및 남부도서 4,617km² 제외)

전 국토의 61%가 비옥한 경작 가능지인 평원(Pampa)으로 구성

남북 간 거리: 3,800km, 동서 간 거리: 1,425km

인구(2024년 추정치) 47,067,641명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자치시(인구 377만 명)

부에노스아이레스 주(1,756만 명)

대통령 하비에르 밀레이(2023.12.10 취임)

공식 언어 스페인어

독립일(선언) 1816년 7월 9일(스페인으로부터 독립)

화폐단위 페소

GDP(2022년) 6,327억 7,028만 달러

경제성장률(2022): 5.0% / 물가상승률(2023): 211.4% / 외환보유고(2024.1월): 239억 달러

1인당 명목 GDP(2023) 13.709달러

1인당 명목 GDP(2023년) 13,709달러

종교 가톨릭교 62.9% / 기독교 15.3% / 무종교 18.9% / 기타 2.9%

인종 유럽계 백인 95%, 메스티조 4.5%, 원주민 0.5%

 

 

아르헨티나는 남아메리카 대륙 남동부에 있는 연방제 공화국으로 수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좋은 공기라는 뜻’)이다. 행정구역은 23개의 주와 수도인 1개의 자치시로 되어있다. 아르헨티나는 커다란 나라로 세계에서 여덟 번째 큰 나라이며 남미에서는 두 번째로 큰 나라이다. 국경은 서쪽으로 칠레(안데스산맥으로 나뉘어 있다)와 접하고 있으며 우루과이, 파라과이, 브라질, 볼리비아와는 북쪽과 동쪽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강들에 의해 나뉜다). 또한 칠레와 띠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의 연안 섬 영토를 공유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말비나스(Malvinas, 영국에서는 포크랜드로 부름) 섬의 영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 나라인 동시에 한반도의 12배, 남한의 27배가 넘는 광대한 영토(약 280만km², 세계 8위)와 4,700만 명의 인구를 가진 남미의 대국이다. 한국과는 시차가 12시간 나며, 한국이 아르헨티나보다 12시간 빠르다. 아르헨티나 북부는 아열대, 중부는 온대, 남부는 한대 기후이다. 세계 3대 곡창지대로 알려진 라 팜파스평원에서는 대두, 옥수수 등 연간 1억 톤 이상의 곡물을 생산하고, 인구보다 더 많은 5,000만 마리 이상의 소를 사육하는 세계적인 농축 산업 강국이다. 아울러 석유, 천연가스, 리튬 등 에너지 광물자원이 풍부한 자원 부국이며, '남미의 파리'라고 불리는 아르헨티나 수도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영화 ‘미션’의 배경인 미시오네스주에 있는 이구아수 폭포, 남쪽에 파타고니아와 빙하 등 다양한 자산을 가진 관광대국이며, 세계적인 축구, 정열의 탱고, 말벡와인 등 문화강국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엽부터 스페인의 식민을 받아 1810년 5월 독립했으며 그 영향으로 공용어는 스페인어다. 아르헨티나는 유럽계 백인이 95%를 차지하고 있고, 메스티소가(혼혈인) 4.5%, 원주민은(인디오) 0.3%에 불과하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어로 ‘은’이라는 뜻이며, 축구와 탱고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국민의 62.9%가 로마가톨릭교, 15.3%가 기독교, 2%가 유대교, 나머지는 기타 종교를 믿고 있다.

 

2. 역사

아르헨티나는 신대륙 발견에서 반세기쯤 지난 16세기 중엽 이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한 식민이 시작되었으며, 16세기 말부터 식민지 건설을 본격화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수도 Buenos Aires ‘좋은 공기라는 뜻’) 건설의 기초가 다져졌다. 식민사업은 페루에서 남하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북서부부터 시작되었으며, 17세기까지 13개의 에스파냐인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럽인보다 인디오가 더 많았고, 광물자원도 적었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가 그곳을 소홀히 하여 이렇다 할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19세기 초, 유럽 시민혁명의 영향과 함께 나폴레옹군의 스페인 본국 정복 등이 동기가 되어 본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임시정부를(1810년 5월25일 ‘혁명의 날’) 수립하였다. 그 후 내란을 거쳐 1816년 7월 9일(독립일) 뚜꾸만 회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는 중앙집권적 공화국(라쁠라따 ‘은’이라는 뜻)의 성립을 선언함으로써 비로소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통일이 달성되었다. 

 

아르헨티나 공화국 최초의 헌법은 미국헌법을 본뜬 것으로 1825년에 제정되었다. 1853년 현행 헌법이 제정되어 1860•1866•1898년에 개정되었으며, 페론 대통령 시대인 1948년에 새 헌법으로 바뀌었으나 1957년에 부활하였다. 공화국이 된 후로 아르헨티나는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정쟁과 내란, 혁명을 되풀이하였으며, 1864∼1870년에는 파라과이와의 전쟁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기도 하였다. 19세기 말부터는 유럽계 자본이 유입되고 프랑스•이탈리아•독일계의 이민이 활발해짐에 따라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 나라에도 큰 영향을 주어, 일부에서는 파시스트 지지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중립 방침이 지켜졌다. 전후에는 전시내각의 노동장관인 페론이 실권을 잡았으며, 그는 1946년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정책은 ‘사회적 정의•경제적 자유•정치적 독립’을 슬로건으로 하는 국가 사회주의적인 것으로, 노동자의 극단적인 보호, 사회보장제도 및 사회복지시설의 확충, 외국자본의 추방, 공익사업 및 중요산업의 국유화, 중화학공업을 기간으로 하는 산업육성 등 국력의 증진과 사회주의화를 기도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해 완전한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국민의 반감을 사서 1955년에 군부 쿠데타로 실각하였으며, 그 뒤에는 민정과 쿠데타에 의한 군정 등으로 정권교체가 잇달았다. 

 

1970년까지 15년 동안 공식 선거로 취임한 대통령은 프론디시(1958)와 일리아(1963)뿐이었으며, 쿠데타와 정권교체가 잦아 임기를 채운 정권이 없었다. 1966년 쿠데타로 일리아 정권을 넘어뜨린 전 육군 사령관 옹가니아는 국회•지방의회•정당 등을 해산시키고 불안정한 정정을 군사 체제로 극복하려고 하였으나, 군부내의 의견 불일치 때문에 1970년에 권좌에서 쫓겨났다. 그 후 반정부 세력의 테러리즘이 활발해졌으며, 1973년에는 정치 역량이 뛰어난 페론이 다시 대통령이 되고 이사벨(Isabel Eva de Peron) 부인이 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74년에 고령의 페론이 죽자, 이사벨이 그 뒤를 이어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76년 3월의 쿠데타로 이사벨도 실각하고, 호르헤 라화엘 비델라 육군 참모총장(군사평의회 의장)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비델라 정권은 곧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실상 헌법을 정지시켰으며, 페론파를 탄압, 반정부 활동을 억압하고 통치력 강화에 주력하였다. 또 경제자유주의 노선을 실시하고, 외화의 적극적 도입과 경제협력의 촉진을 내용으로 한 외화법을 제정하였으며, 1977년 9월에는 국유회사의 민간불하방침을 정하는 등 경제부흥을 지향하는 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1981년 3월에는 비올라 장군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나 8개월 만에 사임하고, 그해 12월 레오폴드 갈티에리 육군참모총장이 대통령에 올랐다. 그는 1982년 4월에 포클랜드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전쟁을 벌인 끝에 175일 만에 패전하였으며 심각한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82년 7월 비뇨네 장군이 대통령에 취임하였으나 국민들의 민정이양 요구에 굴복하여 1983년 10월 총선거를 실시, 같은 해 12월 급진당(Union Civica Radical)의 라울 알폰신(Raul Alfonsin)이 대통령으로 취임함으로 민간 정부가 출범하였고, 1989년 7월 페론당(정의당)의 카를로스 사울 메넴(Carlos Saul Menem)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미 달러와 페소화의 환율을 1:1로 고정 gks 태환 정책과 시장개방 조치 단행 등으로 물가를 안정시키는 한편, 전기, 철도, 수도, 석유, 항공 등 주요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였다. 1994년 8월 헌법 개정으로 대통령 임기를 4년 중임으로 변경하여 1995년 5월 재선에 성공하였다. 집권 2기에 들어 방만한 경제 운영으로 재정적자 확대를 초래하였다.   

 

1999년 12월 라디깔당(UCR)과 Frepaso당의 연합야당(Alianza) 후보인 훼르난도 델 라 루아(Fernando de la Rua)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이후 계속되는 경제정책 실패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긴축재정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 인출 제한조치가 시행되자 이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하여 2001년 12월 20일에 대통령을 하야시켰다. 결국 12월 24일에 아르헨티나는 1,320억 달러에 달하는 외채 상환 유예(moratorium) 선언으로 국가 부도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1년 12월 31일 선출된 두할데(Eduardo Duhalde) 대통령은 경제 사정 악화에 따른 사회불안과 IMF와의 교섭 부진 등 총체적 위기가 극에 달하자,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2003년 4월에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다. 페론당 내 개혁 좌파 성향의 네스또르 키르츠네르(Nestor Kirchner)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 Néstor Kirchner는 그해부터 2007년까지 선출되었으며, 그의 부인 Cristina Fernéndez de Kirchner가 두 차례 임기를 이어받은 후 거의 10년 동안 정권을 유지했다. 2015년에 마우리시오 마끄리(Mauricio Macri)가 선출되어 2019년까지 집권했고, 이 해는 알베르토 페르난데스(Alberto Fernandez)가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판데믹 이후 그의 임기가 끝나는 2023년 말에 전기톱을 가지고 등장한 한 극우파의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되어 현재 국정을 수행하고 있다.

 

3. 정치체제

아르헨티나는 대통령중심제이며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1차례만 중임할 수 있다. 정•부 대통령의 자격은 아르헨티나 태생의 로마 가톨릭교회 신도로 제한된다. 아르헨티나 의회는 상원•하원으로 이루어진 양원제 국회를 갖추고 있으며, 상원의 경우 72명이며 임기는 6년으로 재선이 가능하고 2년마다 1/3씩 교체한다. 하원의 경우 254명이며 임기는 4년으로 재선이 가능하며 2년마다 1/2씩 교체한다. 1912년부터 보통 선거제가 실시되고 있다. 아르헨티나 총선은 후보 개인이 아닌 정당 또는 정당 연합에 투표하는 비례대표 선출제 형식으로 실시된다. 전국은 23개의 주와 1연방구로 이루어지는데, 각 주는 주의회를 가지며, 주지사를 선거한다. 사법제도는 연방최고법원, 연방 고등법원, 주 법원의 3심제도를 갖추고 있다. 총병력은 약 6만 7,300명이며, 남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근대화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이후 1995년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를 택하고 있다. 

 

4. 지리와 기후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길고 가늘어지는 아랫 부분 중 동쪽 반을 차지하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세부 지형은 고도와 위도에 의해 영향을 받고 변한다. 아르헨티나는 크게 네 지형으로 나뉘는데 서쪽의 안데스산맥(건조한 분지와 포도로 가득한 구릉, 빙하 산맥과 디스트릭트 호수), 동쪽의 비옥한 저지대(아열대 우림), 중앙 팜파스(다습하고 건조한 기후가 섞인 넓은 평원), 그리고 파타고니아(목가적인 대초원과 빙하 지역이 함께 공존하는 곳) 가 그것들이다. 22곳의 국립 공원은 이런 다양한 환경의 광대한 지역들과 카이만(또는 자카레, 중남미산 악어), 퓨마, 과나코(안데스산맥 라마의 사촌격으로 저지대에 사는 동물), 레아(타조 비슷한 동물), 안데스 콘도르, 홍학, 여러 바다 포유동물, 마젤란 펭귄 같은 보기 힘든 조류 등 독특한 동물들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가시 숲, 원시 열대 우림, 한창 꽃을 피우는 선인장, 광대하게 퍼져 있는 칠레 소나무 숲, 남쪽의 해변 등도 또한 보호되고 있는 곳들이다. 아르헨티나의 기후는 북쪽의 아열대에서 다습한 중앙, 그리고 남쪽의 추운 지역까지 걸쳐 있다. 안데스산맥 지역은 불규칙한 강우량, 여름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홍수, 타는 듯한 더위, 높은 고도에서의 눈, 그리고 뜨겁고 건조한 바람인 손다(Zonda)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다. 저지대는 늪지대 숲과 고원 사바나를 이어갈 만큼 충분한 비가 쏟아지지만, 강우량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며 동쪽에서는 낮은 여름 홍수가 일반적이다. 겨울의 건기도 확실하며 여름의 불볕더위는 무지막지할 정도이다. 편평한 팜파스 지역도 또한 홍수에 취약하며 파타고니아 동쪽은 연중 내내 온화하며 남쪽은 얼음처럼 차갑다.

 

기후는 국토가 남북으로 뻗고 넓기 때문에 지역 차가 크지만, 대체로 온화하다. 북부와 동북부는 아열대성으로, 우계(10∼3월)와 건계(4∼9월)로 나뉘며, 여름이 길고 덥고, 겨울철은 짧지만 매우 춥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부는 온대 기후에 속하며, 강수량은 여름철에 많으나 대체로 연중 고른 편이다. 그리고 중앙부의 여름은 더우며 뇌우를 동반한다.(때때로 세계에서 가장 큰 우박이 내리기도 한다.) 남부의 겨울, 즉 11~12월은 매우 덥다.

남아메리카에서 기록된 가장 높은 온도와 가장 낮은 온도가 아르헨티나에서 기록되었다. 1920년 1월 2일, 코르도바주에서 49.1 ℃가 기록되었다. 가장 낮은 온도로는 1972년 7월 17일, 산후안주에서 기록된 -39 ℃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지에서 기록된 최저 기온은 1918년 7월 29일 -5.4 ℃이며, 최고 기온은 1957년에 기록된 43.3 ℃이다. 최강 최근의 눈이 내린 기록은 최근 들어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한 2009년 7월 9일이다. 당시 이곳에는 엄동설한과 블리자드가 아르헨티나를 강타했다. 이것은 1918년 6월 22일 이후로 89년 만에 최초로 기록된 제대로 된 눈이었다.참고로 아르헨티나는 4계절이 정확하게 나뉘어 있는데, 봄 9월21일, 여름 12월21일, 가을 3월21일, 겨울 6월 21일이다. 

 

5. 경제

아르헨티나는 과거엔 선진국이었지만 여러 가지 원인 때문에 지속적으로 경제가 쇠퇴했다. 오늘날에는 여러모로 경제가 불안한 나라로 분류된다. 1900년대 무렵에는 미국보다 1인당 GDP가 높은 세계 5대 경제 부국이었고, 1913년 무렵에는 세계 경제의 1.2%를 점유했으며, 캐나다, 호주보다도 소득수준이 높았다. 여기에 금 보유량도 5,900만 파운드나 되었고, 같은 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남미 대륙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었을 정도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 선진부국 아르헨티나로 대거 이민을 갈 정도였다. 특히 농업 대국으로 엄청난 양의 쇠고기와 밀 등을 수출했다. 1차, 2차 세계대전기에도 중립을 지키며 안정적인 번영을 구가하며 교육이나 복지수준도 높은 선진 부유국이었다. 하지만 목축업 등 농업에 치중하다 보니 1960년대 이후 점차 선진공업국의 발전을 따라갈 수 없게 되었고 정치적 혼란들이 몰락을 야기하여 결국 오늘날의 중진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난 40년간 9차례 디폴트를 경험하였다. 물론 아르헨티나가 주변 남아메리카 국가 중에선 삶의 질이 높은 편이긴 하나 실제로는 내부 사정이 좋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들이 많다. 1970년대 이후 경제위기 조짐이 보일 때마다 국제통화기금(IMF)이 개입했는데, IMF가 손을 대면 댈 때마다 오히려 경제가 망하거나, 단기적으로 괜찮아지더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면 더 크게 폭망해버렸다. 

 

아르헨티나 경제가 90여년간 추락해간 과정은 한가지 원인으로 설명하기엔 상당히 복잡하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세입을 넘어 과도한 정부 지출을 지속하면 채권자들이 정부의 부채 상환 능력에 의심을 가져 추가 대출을 거부하고 돈을 회수하기 시작한다. 이제 돈을 더 빌려오기 힘들어졌지만, 재정에 펑크를 낼 수도 없는 정부는 지출을 줄이는 대신에 무작정 화폐를 발행해서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다. 이 과정에서 해외 자본이 철수하고 아르헨티나인들조차 가치가 지속적으로 폭락하는 페소를 달러로 바꾸려고 하면서 환율이 뚝뚝 떨어지며 외환보유고가 마르게 된다. 여기에 더해서 아르헨티나는 원래 정부가 지정하는 공식 환율과 민간에서 통용되는 시장 환율의 차이가 제법 있는데, 외채를 상환하고 환율을 방어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공식 환율을 실제 시장 환율만큼 빠르게 떨어뜨릴 수 없으므로 두 환율의 차이는 점차 벌어진다.

 

이렇게 되면 아르헨티나 경제를 지탱하는 농업 분야의 수출도 급락한다. 아르헨티나에서 농산물을 수출하여 들어오는 외화는 즉시 정부가 지정한 공식 환율로 강제 환전하게 되어 있는데, 공식 환율로 팔았다가는 손해를 엄청나게 보게 된 농부들은 농산물을 그냥 창고에 쌓아두고 최대한 버티는 쪽을 택한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해외로 나가는 농산물에 수출세를 부과하여 정부 재정의 상당량을 확보하기 때문에, 농산물 수출이 줄어들면 외화를 벌어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부 재정 수지 적자도 더 심각해진다. 이렇게 정부의 과도한 재정 지출이 인플레이션, 환율 폭락, 무역 수지 적자를 발생시키고 그 결과가 다시 재정 수지 악화로 돌아오는 연쇄 구조를 관찰되는 것이다.

 

보통 아르헨티나에 우파 정권이 들어서면 긴축 재정과 함께 외채를 줄이려고 노력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장에 돈이 돌지 않으면서 경제가 나빠지고 결국 정부는 인기를 잃는다. 결국 다음 선거에서는 좌파 정권이 들어서고 바뀐 정부가 돈을 엄청나게 풀면서 처음 몇 년은 경제가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당연히 이러한 정책은 적자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쌓인 부채가 터지게 되고, 다시 우파 정권이 들어서는 등의 악순환이 반복되어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초체력이 약화하였고, 이는 아르헨티나가 장장 93년이라는 세월 동안 하락세를 거듭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다.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초 체력이 무너질수록 아르헨티나 경제는 국제 경제 상황에 더 쉽게 휘둘리게 되었고, 이제는 사실상 경제 정책의 성패가 아르헨티나인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예를 들어 1970~80년대에 아르헨티나는 서방 선진국에서 돈을 빌려 산업을 육성하려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이 세계의 돈을 흡수하면서 외채 위기를 겪고 경제가 심각하게 망가졌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중국이 진공청소기처럼 세계의 자원을 빨아들이고 동시에 미국이 농업 정책에서 실책을 거듭하면서 콩, 옥수수, 육류의 국제 가격이 폭등하여 아르헨티나 경제가 호조를 달렸지만, 2010년대에 농축산물 가격이 안정되며 좋은 시절이 지나자, 아르헨티나 경제가 오히려 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경제회복 과정에서 쌓아 올린 게 꽤 되기 때문에 2012년부터 경기침체가 장기적으로 이어졌음에도 실질임금 수준은 남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최저임금뿐만 아니라 실질임금도 남미에서 높은 축이라 임금수준이 낮은 볼리비아나 파라과이, 페루 등지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일하러 온다. 남미 경제 모범국이라고 칭송받는 칠레나 남미에서 정치적으로 부정부패가 덜하고 가장 깨끗하기로 명성이 높은 우루과이 등 다른 남미의 주변국들보다도 최저임금이 높으며 OECD에 가입한 멕시코보다 최저임금이 약 5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빈부격차가 매우 크고 부패 문제도 심각하며 인플레이션율이 상당하다. 게다가 2015년 정권교체 이후로 심각한 재정 적자를 해결하겠다고 공공요금이 폭등하자 재정을 무리하게 확장함으로써 겨우 유지하다시피 한 구매력이 급속히 위축되는 상황에 처했다. 그 대신 달러화가 싸지기는 싸져서 외국으로 물건을 사려고 많이들 오간다. 아닌 게 아니라 칠레와 파라과이, 브라질에서 물건을 사면 훨씬 싸기에 쇼핑하러 많이 다닌다. 더군다나 정권 교체 이후로 각종 공공요금과 보험료, 약값 등이 엄청나게 폭증한 탓에 아르헨티나 물가는 선진국 수준으로 비싸졌다는 말이 나오는 판이다.

 

2018년 6월 들어서 IMF 구제금융을 다시 신청하였다. 상술하였듯 2015년 정권교체 이후로 경기침체를 극복하겠다고 외국자본에 우호적인 정책을 많이 내놓았다. 그런데 주로 금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되고 제조업이나 IT분야로는 별로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중소기업들은 울상이 되었다. 경상수지 적자 폭이 대폭 확대되고 국가는 외채를 남발하는데 내수시장은 별로 살아나지 않아서 불안불안하다는 평이 안 그래도 많았다. 결국 미국이 금리 인상을 단행하자 외국자본들이 대탈출 하였고, 아르헨티나 당국은 버틸 수 없게 되어 결국 백기를 들었던 것. 아무튼 아르헨티나 경제는 격랑으로 접어들었다.

 

결국 8월 터키발 경제위기의 불똥이 튀어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45% 초고금리를 책정하여 화폐 가치를 방어하였다. 2018년 8월 기준 아르헨티나 페소-달러의 가치는 연초 대비 38% 하락했으며 2018년 8월 말에 환율 불안으로 화폐가치가 이틀에 걸쳐 대폭락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9년 물가 상승률이 54%에 육박했다고 집계됐다. 1991년 이후 최고치이다. 그래도 2020년에 36.1%로 낮아졌다.

 

2019년 8월 12일 강경 키르치네리즈모인 알베르토 페르난데스의 1차 선거 득표율이 높게 나오자, 아르헨티나 주가는 하루 만에 37.93% 폭락하였고 통화도 하루 만에 25% 평가절하되었다. 이미 강경 키르치네르주의와 이에 따른 포퓰리즘 정책이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들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다.

 

2020년 5월 22일, 5억 달러 규모 채무를 지급하지 않아 또다시 디폴트가 발생하였다. IMF는 아르헨티나가 부채를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2020년 8월에 650억 달러(약 78조 원) 규모 채무 재조정 협상에서 채권단과 합의점을 찾았다. 2021년 6월 22일에 파리클럽과 채무조정에 합의했다. 2022년 1월 13일에 아르헨티나 통계청은 2021년 12월 소비자 물가가 11월보다 3.8% 올랐으며, 2021년 연간 물가 상승률은 50.9%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2022년 3월 25일. 국제통화기금(IMF)이 440억 달러(약 53조 7천억 원) 규모 부채에 대한 아르헨티나 정부와의 합의안을 최종 승인했다. 2022년 후반기를 기준으로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기준금리는 75%로 올랐다. 미겔 페쉐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는 국회에서 2023년 예산안을 설명하면서 “올해(2022년) 물가상승률은 95%를 기록할 것이며 2023년도에는 60%를 전망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아르헨티나 국립통계청(INDEC)은 9월 공식 물가상승률을 14일께 발표할 예정인데 전문가들은 6.7%로 예상한다. 10월 물가상승률은 7% 미만은 어려우리라 전망하였다. 수도세(10%), 전화•인터넷•유선방송(19.8%), 유류비(6%), 의료보험(11.53%) 등 각종 물가 인상이 예고되었고, 9월에 추진하려던 전기세와 가스세의 보조금 삭감이 10월로 미뤄졌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JP모건의 디에고 페레이라는 “2022년도 아르헨티나 물가상승률은 100%를 기록하고 2023년도에는 112%에 달할 것”이라고 현지 경제매체 암비토에 말했다.

 

2023년 9월 13일 아르헨티나 통계청은 2023년 8월 소비자물가가 한 달간 12.4% 올라 최근 12개월 물가 상승률이 124.4%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 JP모건 체이스는 2023년 말까지 아르헨티나의 인플레율이 190%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여기에 기준금리도 118%에 육박하였다. 최근에(2024년) 하비에르 밀레이 새 대통령이 부임하면서 물가가 순식간에 200~300% 폭등하면서 아르헨티나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고, 물가 상승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6. 사회/교육

아르헨티나는 탱고와 목축으로 유명하며 교육과 문화 수준은 남아메리카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따라서 박물관, 미술관, 극장 등의 문화 수준과 대학을 비롯한 교육 시설은 상당히 충실하다. 다만 문화는 이 지역의 원주민 인디오가 볼 만한 문화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모두 이식된 유럽 문화를 기초로 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상류 계층에서는 프랑스풍이 유행했다. 반면 중•하류계 층에서는 국민의 최대 수를 차지하는 이탈리아계 이민과 그 자손을 통해 전파된 이탈리아 문화가 광범위하게 뿌리를 내렸다. 또한 식민지 시대 이후 스페인 문화의 토대 위에 생활양식, 관습, 특히 식생활, 언어, 음악 등 다방면에 걸쳐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다. 최근에는 미국과의 정치, 경제 관계가 긴밀해짐에 따라 미국 문명도 침투되고 있으나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 아르헨티나는 중남미에서 가장 교육이 진보한 나라이며 문맹률은 3%에 불과하다. 교육제도는 7년제의 초등 교육, 5년제의 중등 교육과 4∼6년제의 대학 교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등 교육은 의무 교육으로 7년간 무료이며 중등 교육(5년), 대학 교육(5∼6년)도 무료이다. 대학의 경우 입학은 쉽지만 졸업이 어렵다. 

 

7. 문화

아르헨티나는 중남미 속의 유럽(유럽 문화 중심)이라 불리며, 문화적으로 스페인 문화를 주로 계승했으나 유럽계통의 이민자들로 구성되었기에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의 생활양식도 섞여 있다. 이처럼 유럽의 영향은 아르헨티나의 미술, 조각, 문학, 생활 전반에 걸쳐 깊숙이 스며있고, 특히 문화의 분야에서는 양쪽 문화의 교류가 진행되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azar), 에르네스토 사바스토(Ernesto Sabasto), 마누엘 푸이(Manuel Puig), 오스발도 소리아노(Osvaldo Soriano)등의 국제적인 작가들을 배출하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세계적 음악으로 인정받고 있는 탱고의 발상지이며, 음악으로는 탱고 외에도 민속춤에 해당하는 삼바(Zamba), 차카레라(Chacarera), 까르나발리또(Carnavalito), 가또(Gato) 등 인디오의 전승과 스페인풍의 혼합인 아르헨티나 특유의 아름다운 리듬이 있다. 또한 세계 3대 오페라 하우스 중의 하나인 떼아뜨로 꼴론(Teatro Colon)을 비롯, 오페라, 발레, 연극, 영화, 클래식 음악, 미술 전시 등 200여 개가 넘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공연 시설을 가지고 있다. 

 

스포츠는 극단적으로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중요한 것이며 축구는 단순한 경기를 넘어 전 국민이 열광하는 운동이다. 동네마다 축구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그곳에서 어린이나 어른이 축구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거리에 나가면 국가대표팀 유니폼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클럽의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남자 어린이는 보통 어릴 적부터 축구 클럽에 가입해 축구를 배우기 시작한다. 아르헨티나 모든 남성은 웬만큼 축구할 줄 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아르헨티나는 1978년과 1986년, 그리고 2022년 월드컵에서 우승했으며 그 주역으로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와 레오넬 메시(Leonel Messi)이다. 특이한 것은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데, 대부분의 학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날은 나라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변해 국민들이 유니폼을 입고 응원 도구를 들고 신나게 행진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축구란 삶 자체이며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아르헨티나의 대표적인 음식으로는 아사도(Asado 소고기 갈비 석쇠숯불구이), 고기 붙은 뼈와 각종 야채를 삶아 만든 뿌체로, 신선한 토마토와 야채로 만든 엔살라다, 엠빠나다(Empanada 만두), 꿀꿀이 죽을 연상케 하는 로끄로(Locro) 등 맛있는 음식이 다양하다. 특히 아르헨티나는 소가 인구의 수보다 더 많아(5000만마리) 과거에는 국민 1인당 연간 190kg의 육류를 소비할 만큼 목축업으로 세계 최고 수준인데, 현재 경기침체와 물가 상승으로 소고기 소비량이 1인당 연간 약 50kg 줄어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마떼 차는 성별, 연령, 사회 계층 불문하고 물 다음으로 가장 많이 섭취하는 국민 음료에 해당한다. 셰르바 마떼(Yerba Mate) 국립기관의 정보에 의하면 아르헨티나인 1인당 연간 마시는 마떼차 분량이 평균 100리터라고 할 정도로 마떼 차는 아르헨티나 90% 이상의 국민들이 어디에서나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기다란 모양의 지형 덕분에 다양한 기후의 명소들이 동시에 공존한다. 북쪽으로(미시오네스주) 가면 브라질과 맞닿아 있는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인 이과수폭포를 만날 수 있고, 남쪽으로 가면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볼 수 있다. 

 

8. 종교

아르헨티나 국교는 천주교(Catolic)로 되어 있다. 가톨릭 교회는 16세기에 스페인 식민지 개척자들과 함께 아르헨티나에 들어왔고, 그 이후로 아르헨티나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아르헨티나 인구의 자부심의 원천이다. 아르헨티나 강력한 가톨릭 유산은 건축, 예술 및 전통에서 잘 드러난다. 콜론극장, 루한 성모 대성당,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등 이 나라의 가장 중요한 기념물과 건물 중 상당수가 가톨릭의 영향을 받았고, 도시마다 주요 공원에 가톨릭 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가톨릭 교회는 한마디로 혼합종교이며, 온갖 우상숭배로 가득하다. 과거에 인구의 약 90%가 가톨릭신자였지만, 최근에 사제들의 빈번한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현재는 63%까지 감소했다. 통계적으로 절대다수가 종교를 가톨릭으로 가지고 있고 로마 가톨릭 신자라고 고백은 하지만, 실제로는 명목상 신자에 불과하다. 정기적으로 미사를 보는 신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1년에 4번 정도(크리스마스, 부활절, 신년, 결혼식) 미사에 참여하는 수준이다. 한편, 1825년에 최초로 세워진 개신교의 경우는 가톨릭 다음으로 인구의 약 15.3%를 차지 하고 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아르헨티나에 온 유대교는 인구의 약 1%, 이슬람 또한 인구의 약 1%가 무슬림이다. 이 밖에도 여호와 증인, 제7일 안식교, 몰몬교, 움반다, 막꿈바(브라질 종교), 박옥수파, 이재록 만민교회, 이초석 예루살렘교회, 등등이 포교 활동을 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9. 기독교 역사와 선교 현황

중남미의 개신교 선교사역은 19세기 중엽 이후에야 시작되었다. 1810년과 1824년에 걸쳐 스페인은 오늘의 브라질을 제외한 라틴아메리카에서 그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고 이에 각 나라들은 독립된 공화국의 건립을 후원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개신교 복음주의들이 진출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400년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거센 장벽에 개신교 선교 국가들은 중남미진출을 선교적인 효율성을 진단하면서 꺼렸으나, 이 당시 선교의 선두 역할을 한 보수적인 미국 선교사들이 라틴아메리카 개신교 선교 역사에 앞장섰다. 1960년대 이후 전반적으로 라틴아메리카에 복음의 불길이 맹렬히 확산하고 있다. 특히 60년대부터 남미에 들어오기 시작한 오순절 교회는 새로운 분위기로 개신교의 차별화를 일으켰다. 남미의 정열적인 기질과 개신교의 열정적 신앙이 만나니 놀라운 은사 운동이 일어났다.

 

스페인 식민지 하의 아르헨티나는 오직 국교인 가톨릭만을 신앙할 수 있었다. 19세기 초에 독립하면서 비로소 개신교의 종교활동을 허용했다. 1813년 영국 개신교도에게 사적 예배가 허용되었고, 1825년 영국과 ‘리오 데 라플라타 주연합(Provincias Unidas)’ 사이의 ‘친선, 무역과 항해에 관한 협약(Tratado de Amistad, Comercio y Navegación)’에 따라 공적인 개신교 예배가 가능해졌다.

이후, 특히 19세기 후반 유럽으로부터의 대규모 이민과 더불어, 1856년 스위스 장로교, 독일 루터교를 시작으로 하여, 다양한 교파의 개신교가 유입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태동한 오순절 운동은 1909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프란체스콘(Louis Francescon), 롬바르디(Giacomo Lombardi),메나(Lucia Menna) 등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도입된다. 그 후 1948년 몇몇 작은 교단들과 미국계 AG 교단과 합병하여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큰 교단인 “Union de las Asambleas de Dios”가 만들어진다. 아르헨티나의 첫 부흥이 일어난 시기는 1954년에서 1957년이다. 미국인 복음 전도자인 토미 힉스(Tommy Hicks)가 인도한 아르헨티나에서의 여러 집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신유와 구원을 경험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이때부터 오순절교회들은 서서히 성장하게 시작하고, 1960년대 후반부터 기성 교회들에서도 은사 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스(Juan Carlos Ortiz)는 그들의 지도자들 중 하나였고, 과거에 AG 목사였다. 급진적인 제자도에 대한 그의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기도 하다. 1962년 아르헨티나의 소수민족인 원주민(인디오) 또바(Toba) 부족 가운데 오순절 부흥운동으로 인해 또바 연합 기독교(iglesia Evangelica Unida Toba)이라는 자생교회(교단)이 생겨난다. 아르헨티나 오순절 교단은 1990년대 가장 빠른 성장을 일구어낸다. 라틴아메리카에서 개신교에 대한 통계는 다소 정확성에 문제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대체로 남미 나라들 가운데 아르헨티나는 콜롬비아, 우루과이, 베네수엘라와 더불어, 브라질이나 칠레와 같은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개신교, 특히 오순절 교회의 성장이 더딘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오순절교회는 191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해 왔다. 가톨릭 전통나라로 알려진 아르헨티나는 개신교가 들어와서 뿌리를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본격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세속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고 절대화됐던 가톨릭의 영향력도 급격히 약해져 가고 있을 무렵 개신교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아르헨티나 경제 환경에서 하층민에게 들어가 교회 성장이 시작되었는데, 아르헨티나 개신교의 성장 또한 신은사운동과 번영신학의 영향력에서 대부분 비롯된다.

 

아르헨티나의 종교별 통계를 보면 정확하지가 못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연구위원회(Consejo Nacional de Investigaciones Científicas y Técnicas-CONICET)를 보면 정확한 통계가 나온다. 인구센서스의 방식에 따라 2008년과 2019년 두 차례 실시한 조사(Encuesta Nacional sobre Creencias y Actitudes Religiosas en Argentina)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가톨릭 인구는 전체 인구의 62.9%, 무종교 18.9%, 개신교 15.3%로 나와 있다. 오순절교회 신자 수는 2008년 전체 인구의 7.9%, 2019년 13%이고, 개신교 인구의 85~88% 수준이다. 거의 두 배가 된다. 여기엔 분명 한국 이민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의 역할도 있다고 본다. 

 

아르헨티나의 개신교계는 이념적으로 크게 진보와 보수의 두 진영으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수 개신교라고 지칭할 때, 그것은 성서적 보수주의 진영을 뜻한다. 아르헨티나 성서적 보수주의 진영이 전체 개신교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오순절 부문은 전체 개신교의 60%를 차지한다고 본다. 다시 말하면 아르헨티나의 개신교는 신자 수로 보면 보수 개신교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보수 개신교 중에서도 오순절교회가 지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진영을 대표하는 기구로는 우선, 주로 해방론적인 역사적 진영을 대표하는 기구로, 1957년에 창립한 ‘FAIE’(Federación Argentina de Iglesias Evangélicas, 복음주의교회 아르헨티나 협의회)가 있다. 이 기구의 소속 단체로는 ‘IELU’(Iglesia Evangélica Luterana Unida, 루터교회), ‘IERP’(Iglesia Evangélica del Río de la Plata, 리오델라플라타 교회) 등이 있다. 성서적 보수주의 진영 가운데 오순절 부문을 대표하는 기구로는 1977년에 창립한 ‘FECEP’(Federacion Confraternidad Evangélica Pentecostal, 오순절교회 협의회)가 있다. 그리고 복음주의 부문을 대표하는 ‘ACIERA’(Alianza Cristiana de Iglesias Evangélicas de la República Argentina, 아르헨티나 복음주의교회 협의회가 있는데, FAIE에 속해 있던 보수 개신교 교파들이 FAIE의 해방 신학적 노선을 비판하면서 탈퇴해 1982년에 출범한 단체이다. 이 단체는 특히 침례교, 에르마노 리브레 등이 주도하고 급진적인 금욕주의적 종교 세계관을 갖고 있다. 또한 정치 참여를 거부하고 개인 성화와 구원의 작업에 집중하는 경향을 띤다. 그리고 나중에 이 세 기구가 모여 ‘CNCE’(Consejo Nacional Cristiano Evangélico, 전국 복음주의교회 협의회)를 구성한다

 

10. 선교적 과제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의 말씀과 연결된 동시적 선교 비전을 담고 있다. 즉, 한곳에 머무는 사역이 아니라 개척정신을 가지고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는 동시적 선교사역이다. 따라서 선교는 한 곳에서만 머물지 않고 전체를 품는 순회적인 사역이다. 또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여 제자로 삼고, 세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제자 양성, 지도자 양성이 반드시 집중되어야 할 사역이다. 선교사를 훈련하고 파송하는 일과 소명 있는 현지인들을 훈련하고 그들을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서 교회가 없는 곳에 파송하여 교회를 개척하게 하고, 교회는 있지만 지도자가 없는 곳에 파견하여 목회를 감당하게 해야 한다.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일과 함께 복음의 일꾼을 세우는 일이다. 그것만이 선교의 미래를 죄우하게 된다. 이를 위해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설립과 목회자 재교육, 재훈련, 영성 훈련이 필요하다. 아르헨티나 현지 목회자 및 지도자와 평신도 사역자들 약 70%의 교육 수준이 중학교 중퇴가 태반이며, 정규신학 과정을 걷지 않은 채 목회 사역을 하는 현실이다. 심지어 목회자로서 자질을 갖추지 못해 성도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아 가나안 성도들 및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목자 없는 양처럼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도는 성도들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 중의 하나가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사도바울도 고린도 교회에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남미 전체에 유행처럼 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행이 신사도 운동이다(Ministerio apostélico y profético). 자칭 사도들과 자칭 선지자들이 교회마다 거짓 복음과 거짓 예언의 말로 교회들을 미혹하는 일들이 가득하다. 문제는 목회자와 교회가 분별치 못하고 너무나도 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시급한 것은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서 바른 복음을 전할 일꾼들을 양성하는 일이다. 목회자가 성경적인 철학과 세계관이 바르지 못하고 복음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 

 

또 한 가지는 사역 이양 문제다. 목회자들이 은퇴의 나이에 접어들거나, 질병의 문제가 사역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이 생긴다. 문제는 사역의 바턴을 이어갈 준비된 사역자의 부재이다. 이에 따라교회에 어려움이 찾아와 성도들이 떠나거나 교회가 분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사역을 맡길 수는 없는 것이다. 반드시 같은 비전, 믿음, 영성, 그리고 순종 여부가 확실한 자라야 한다. 무엇보다도 소명이 확실해야 한다. 그리고, 목회 사역의 전반적인 부분들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사역 이양이 가능하다. 그러려면, 반드시 훈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것이 확실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목회는 반드시 실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을 세우는 일에 지성과 영성을 갖춘 전문 사역자들이 아르헨티나와 남미 더 많이 세워져서 바른 복음을 전할 목회자를 세워가고 하나님의 기뻐하는 복음적인 교회들로 세워지는 역사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아르헨티나 기도

1. 아르헨티나 위정자들의 바른 정치와 경제의 안정과, 그리고 경제의 불황이 전도의 기회가 되어 복음화가 이루어지도록

2. 거짓 사도들, 거짓 선지자들로 인해 성행하는 거짓 복음이 와해되도록

3. 목회와 선교의 미래를 위해 목회자 및 지도자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세워지도록

4. 사역의 바턴을 이어갈 후임자가 준비되어 사역 이양이 주의 뜻대로 바르게 이루어지도록

5. 목회자끼리, 교회와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고 잘 연합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