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ALGERIA)
정리: 김00 선교사
국명 알제리 인민민주주의공화국(People's Democratic Republic of Algeria)
위치 북부 아프리카 지중해 연안(모로코, 서사하라, 모리타니아, 말리, 니제르, 리비아, 튀니지
등 7개국과 접경, 국경선 6,343Km, 해안선 998Km)
면적 238만 2,000㎢(한반도의 약 10배, 아프리카 1위, 세계 10위)
기후 북부: 지중해성(10~30℃), 남부: 대륙성 및 사막기후
수도, 인구 알제(Algiers) 4,170만 명-수도권 지역(Greater Algiers, 483만 명),
오랑(Oran, 144만 명), 콘스탄틴(Constantine, 94만 명), 안나바(Annaba, 64만 명)
민족 아랍인(81%), 베르베르인(19%)
언어 공용어-아랍어 및 베르베르어, 상용어-불어
종교 이슬람 수니파(98%), 가톨릭(2%)
산업구조 농업 12.4%(이상 일차 산업), 제조업 12.4%, 광업 0.3%,
원유생산 22.6%(이상 이차 산업), 서비스 산업 32.4%, 건설업 19.9%(이상 삼차 산업)
가. 역사
고고학적 발굴작업의 결과 약 50∼70만 년 전 알제리 북부에 호모 에렉투스가 살았던 것이 밝혀졌다. BC 1000년 초에 페니키아 상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정착했고, 지금의 튀니지에 있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으며 후에 카르타고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BC 146년 카르타고는 로마에 넘어갔으며, 40년에 로마는 해안지방을 확고히 지배하게 되었고, 알제리는 로마인들이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라고 부르던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해안 배후지역은 로마의 통치권 밖에 있었다. 5세기에 로마가 멸망하자 반달족, 그리고 뒤를 이어 비잔틴족이 침입해왔으며,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세력이 커졌고, 라틴어가 북부 아프리카 전역에 널리 퍼졌다. 7세기에 이슬람교도의 침입이 시작되어 711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이 우마이야드족의 손에 넘어감으로써 토착 베르베르족은 이슬람교에 교화되어 갔다.
1830년 프랑스군은 바르바리 제국의 해적 행위가 수 세기 동안 지중해 무역을 위협했다는 것을 구실삼아 알제리로 들어왔다. 1847년까지 프랑스군은 알제리인들의 저항운동을 대부분 진압했으나 접전은 1884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후 1954∼55년에 알제리 독립운동이 절정에 달해 독립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프랑스는 5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해 FLN을 탄압하고 독립운동을 진압하려 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은 평화협상을 제안했고 1962년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후 정권을 장악한 FLN은 1962년 7월 3일 독립을 이루어냈고, 대부분의 프랑스인 거주자들은 알제리를 떠났다.
후아리 부메디엔(1965∼78 집권) 장군과 차들리 벤제디드(1979∼92 집권) 장군의 집권하에서 알제리는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고, 원유와 가스개발을 국가가 운영하는 중앙계획경제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FLN의 장기집권은 부정부패와 국가운영 미숙이라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1988년 반정부 운동이 격화되자, FLN은 1989년 복수정당제를 허용하는 새 헌법을 제정했다.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던 FLN은 다른 정당의 설립으로 위협을 받았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이었다.
1991년 첫 자유 총선에서 FIS의 승리가 예상되자 군부는 이를 막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반정부운동과 테러리즘으로 정부에 대항했다. 무장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정부의 진압이 실패를 거듭하여 1995년 사실상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나. 정치 상황
알제리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바탕으로 복수정당제에 의한 의회 구성과 사법권의 독립 등 삼권 분립 체제의 정치제도로 운영되고 있다. 1999년 4월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Abdelaziz Bouteflika) 대통령 집권 이후 국민화합 정책 추진으로 정치안정을 이룩하고, 고유가에 따른 경제 상황 호전으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이 크게 개선되고 있으며 대통령 직선제 시행, 복수정당제 운용 등 아프리카 대륙에서 보기 드문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다만 잔존테러, 사회주의 잔재, 경직된 관료주의, 정부 의존적 경제구조 등은 성장 저해요인으로 남아있다.
2008년 11월 국회(상·하원)에서 헌법 개정(2008년 11월 12일)을 의결한 바 있는데 대통령 연임제한 폐지 및 대통령의 권한 강화, 총리제 도입, 여성의 정치적 권리 확대 노력 등이 주요 개정 사항이다. 2011년 1월부터 물가인상, 주택난, 실업 등 민생고에 대한 시위로 시작하다가 튀니지, 이집트의 민주화 혁명의 영향으로 야당 연합이 반정부 민주화 시위로 발전시켰으나, 알제리 정부의 적절한 대응과 국민들의 안정 추구 성향으로 크게 확대되지는 않았다.
2019년 대선 관련 동향
2018년 기준, 1년도 남지 않은 총선을 앞두고 알제리 내에서는 현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5선 출마 문제로 알제리 정계는 여, 야를 가리지 않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당 내에서도 5선 출마 관련하여 의견이 엇갈리는 가운데,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2018년 3월 18일 전승기념을 계기로 대국민 메시지를 통해 정치적 다양성을 언급하며, 각 정치 주체들에게 대선 경쟁에 참여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일부 언론들은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이러한 발언에 대하여 장기집권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위기, 대통령 본인의 건강 문제 등으로 5선 연임 등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부정적인 시각이며, 향후 대통령 교체 전후로 사회적 불안과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고 관측하고 있다.
다. 사회상황
사회 불만에 대한 시위 발생 및 파업 지속
젊은 층의 높은 실업률, 제한된 정치적 표현, 부패 심화, 주거비 폭등 등 정치 경제적 불만으로 인한 소규모 폭동과 항의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특히 저유가에 기인한 정부 재정 악화로 공공지원의 감축에 따라 사회 불만이 더욱 고조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공무원, 교원, 의료인 등 각 분야 노조의 시위 및 파업이 각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알제리 정부는 특히 교원과 의료인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파업에 참여한 노조원들을 제적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알제리 내 인권 현실
비정부기구 앰네스티 인터네셔널은 2017년 국제인권 상황 보고서를 발표하여 집회·결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제한 및 이주민 부당대우 등 2017년간 알제리 내에서 벌어진 자유 침해 현황을 언급하며 알제리가 자유 보장에 관한 국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라. 교육제도
교육과정은 초등학교 5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3년 과정으로 이루어지지만, 알제리 국립기관에서 행해지는 의무교육이자 무상교육은 기본적으로 5세부터 15세까지이다. 전 교과과정은 아랍어로 교육이 진행되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배우며,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영어를 배운다. 베르베르어는 2002년부터 공용어로 채택된 만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배우지만 실질적으로 교사 부족으로 제대로 교육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등연구기관 역시 기본적으로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의학과 같이 전문성이 강한 영역에서는 여전히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알제리 교육의 문제점
교육제도에 대한 투명성과 전반적인 데이터가 없어 국가 교육 정책을 효과적으로 평가하여 개선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알제리의 높은 문맹률이 알제리 교육 현황 개선에 있어도 문제가 된다. 알제리의 높은 문맹률을 줄이고자 알제리 정부는 타개책으로 많은 프로그램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알제리 문맹률은 매우 높은 편이다. 2008년 알제리 통계청의 문맹률 통계자료에 따르면 알제리 10세 이상의 인구 77.4%가 글자를 읽고 쓰지 못하는 문맹자로 추정했다.
대학을 제외한 전 교육기관(공립, 사립)의 이슬람 의무교육이 청소년들의 가치관과 세계관 속에 이슬람을 강제로 주입하고 있다. 그 영향으로 타 종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인 종교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판단하고 사고하는 무슬림으로 성장하고 있다.
마. 한국기업 진출상황
대우인터내셔널, 삼성물산, 삼성전자, LG 전자, 경남기업, 대우건설, 삼성 엔지니어링, 현대건설, 현대기아차, 한국통산, 공간건축, 동명기술공단 등 지상사, 건설사 25개사 및 기타 자영업 종사자 및 현지 건설 현장 파견 인력 등 약 300여 명이 체류하고 있다. 하천 관리, 수자원 개발, 전기, 가스 개발 건설, 가전제품, 자동차 현지 조립 공장 등 다양한 형태로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최근 들어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관심 있는 청소년들이 증가하고 있다. 올해 알제 대학과 MOU를 체결하고 한국어학 강의 개설과 세종학당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이슬람 국가가 되기 전, 380년경 알제리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성 어거스틴)등의 교부들이 활동하는 등 초대교회 신학이 꽃핀 신학의 중심지였다. 이후 7세기경 아랍문화가 유입되고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게 된다. 19세기까지 기독교는 영향력을 상실했다가 프랑스 식민시절(1830~1962) 가톨릭(알제, 오란, 콘스탄틴, 라구 네 교구에서 약 80만 명의 유럽 출신 카톨릭 신자들 유입)이 잠시 확장되기도 했지만, 독립운동이 일어나며 가톨릭계 지주들에 대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알제리를 포함한 북아프리카 지역이 이슬람 국가가 되면서 현재 알제리 종교인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알제리에서 이슬람 외의 다른 종교는 사실상 차별과 탄압을 받고 있다.
가. 기독교 탄압
알제리의 종교탄압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 못지않게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그 원인은 과거 지배자들이었던 프랑스가 뿌린 원인이다. 실제로 130년이 넘는 프랑스 식민지 지배 및 알제리 내전으로 200만이 넘는 사망자를 냈고 프랑스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인해 기독교에 대한 증오가 컸다. 결국 독립 초부터 기독교에 대한 차별 및 테러가 이어져 왔다. 게다가 1996년 순수하게 의료봉사와 지역주민들을 돕기 위해 파견되었던 가톨릭 수도자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해서 집단으로 처형되는 사건이 있었으며 이슬람 과격세력과의 갈등 및 군부와 민간정부의 대립, 부족갈등과 같은 내부 문제가 깊어지면서 점차 민간 정부 및 군부까지도 이슬람 근본주의를 고집하는 경향이 커졌다.
21세기 넘어서도 이는 계속되었는데, 2003년에는 프랑스인 천주교 수녀들이 과격파에 피살되었고, 2005년에는 프랑스와의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프랑스인 천주교 신부가 보복으로 살해당했다. 2006년 오로지 이슬람만을 인정하는 법안이 통과되어 선교사들이 무조건 추방 및 입국 금지되었으며 56개에 이르는 교회들을 경찰 및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폐쇄하였다. 이후에 극단주의는 살짝 사그라지고 2011년 이후 알제리 정부가 개신교회를 인정하는 등 유화정책을 펴면서 기독교에 대한 차별도 약간은 줄어들었다. 다만, 2016년 들어서 또다시 기독교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늘었다.
나. 개신교 역사
알제리 당국이 인정한 교회의 공식 명칭은 "알제리 개신교회"이다. 개신교는 프랑스 식민지 초기부터 알제리에 존재했다. 1843년에 개혁 교회의 첫 번째 대회가 개최되었고, 감리교 회의는 1883년 프랑스 감리교에 의해 북부 알제리에서 사업을 시작했으며 재림 교인, 성공회 신자, 침례교도, 오순절 교회 등 여러 가지 다른 교단이나 선교 단체도 알제리에서 봉사했다. 1972년 알제리에 연합 감리교회와 프랑스 개혁 공동체가 함께 창립됨에 따라 연합체의 형태를 취한 오늘날의 협회가 설립되었다.
다. 개신교 현황
공동체에 대한 데이터 부재로 기독교의 개별 성도 수는 정확하지 않다. 알제리 정부는 40,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있고, 일부 보고서는 10만 명으로 보고하기도 하는데 이는 다소 과장된 수치라고 현지 리더들은 말하고 있다. 이 중 개신교 성도는 5,000~10,000명 정도로 알제리 지도자는 예상하고 있다. 1982년 200명 정도에 불과했던 개신교 성도는 현재 전국에서 5,000~15,000명 정도로 확장되었다. 대부분의 개신교 공동체는 알제리 북쪽 베르베르 지역(Kabylie)에 분포하고 있고 알제리 개신교회에 의해 파악된 43개 지역교회 중 오직 15개만이 자신들의 예배 장소를 가지고 있다. 몇몇 교회들은 땅을 빌려서 예배 장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다른 교회들은 가정에서 모이고 있다. 이곳 교회들은 만약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에서 기독교 예배가 계속된다면 교회에 대한 법적 제재들을 진행할 것이라고 위협받기도 했지만, 비공식적으로 교육 프로젝트, 평생 교육 프로그램 등의 계속적인 지도자 훈련과 유치원, 출판물, 번역 프로젝트, 시청각 자료 제작, 교회 개척 사역 등을 통해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접근과 시도를 하고 있다.
라. 선교적 과제
대다수 교회가 분포된 베르베르 일명 까빌지역은 프랑스 식민통치 시절 프랑스에 협조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어 다수의 알제리 아랍인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영향으로 알제리 기독교인들도 타 종족, 지역에 대한 전도와 선교에 소극적이고 기독교 차별과 박해를 경험하면서 이슬람에 대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 지역의 성도들은 오랜 세월 강성한 이슬람의 공격 속에서도 신앙을 지킨 준비된 일군들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대 명령이 이들 가운데 묵혀 있는 장벽을 부수고 선교의 도구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쓰임 받기를 소망한다.
알제리는 2006년 종교법(이슬람 이외의 종교 행위 규제와 탄압)제정 이후 2011년과 2016년 각각 종교법이 다소 개정되어 종교적 예배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고, 헌법 36항은 분명하게 종교적 예배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교회 등록이 허가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까지도 정부가 일정 부분 교회의 활동을 묵인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때로는 불시에 이를 단속해서 교회를 폐쇄하거나 교인들을 구속하는 등 법 적용에 차별과 박해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개정된 법안이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시행되어 개신교회(외국인 교회 포함)의 인허가가 현실화하고 나아가 NGO 단체, 기독교 교육기관 설립 인허가 등이 이루어져 다양한 선교와 구제로 활동이 확장되기를 기대한다.
한편 예배 장소를 찾는 문제는 알제리 교회의 실제적인 고민거리이다. 외딴 지역에서는 숲이나 산정상에 모여서 지역주민의 적대적인 행위들을 피하고 있다. 이러한 모임들은 예배를 위한 영구적인 장소가 없으며 이는 신앙의 안정과 성장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거나 성당을 통해서 모이는 교회는 장소를 통해서 그곳에 방문한 지역사회의 관심 자에게 궁금증에 관해 설명하거나 관련 자료들을 나눠주고 있다. 알제리 48개주 곳곳에 지정된 모임 장소들이 마련되어 예배와 성경공부, 신학교 사역이 이루어지고 복음의 통로로 사용되기를 소망한다.
알제리에서 활동하는 전체 외국인 선교사 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한인 선교사는 현재 1가정, 1싱글 정도로 척박한 상황이다. 다만 지상사를 통한 근로자 성도들, 중앙아프리카에서 파송된 목회자 및 유학생 그룹들이 학교와 직장에서 평신도 사역자로서 선교에 동참하며 기도의 씨앗을 심고 있다. 외국인들의 체류지가 수도와 인근 지역에 한정되어 있는데 더 많은 사역자 내지는 평신도 성도들이 알제리 내륙지역과 전문인 사역에 투입되어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