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권역 | 아제르바이잔  / Azerbaijan

아제르바이잔(AZERBAIJAN)

H선교사(아제르바이잔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개괄정보
• 국명: 아제르바이잔 공화국(Republic of Azerbaijan / Azərbaycan Respublikası)
• 독립: 1991년 10월 18일 구소련으로부터 독립
• 정치형태: 대통령제 공화국
• 현 대통령: 일함 엘리예브(Ilham Alyev / İlham Əlyev) 2003. 10. 31~현재(3선)
• 행정: 59개 구와 11개 시, 1개의 자치 공화국(나흐치반 자치 공화국은 7개 구와 1개 시)
• 위치: 코카서스 산맥 남부, 카스피해 서부 연안
• 면적: 86,600km2(세계 112위) 남한의 70%
• 인구: 9,867,250명(2017)
• 언어: 아제르바이잔어(공용어) 외 러시아어, 터키어
• 수도: 바쿠 (BAKU)
• 1인당 GDP(PPP 구매력 평가): 17,498 달러(71위, 2017)
• 통화: 마나트 Manat (AZN)
• 기후: 주로 건조기후, 지역에 따라 건조아열대 기후에서 산자툰드라 기후까지 다양함
• 종교: 이슬람교 93.4%(시아파 85%, 수니파 15%), 기독교 3.1%(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무교 3%, 기타 0.5%(유대교 등)
• 주요 천연자원: 석유, 천연 가스

 

2. 국가 개요
동쪽은 카스피해와 접하고 있으며 북쪽은 러시아의 다게스탄 공화국, 서쪽으로는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남쪽으로는 이란과 접경하며, 바다 없는 내륙국이다. 아제르바이잔 영토 내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 공화국은 아르메니아 전쟁 이후 사실상 아르메니아가 점령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문화가 비슷하며, 이웃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남서쪽에는 본토와 떨어진 아제르바이잔의 자치 공화국 나히체반 공화국이 있다.
터키의 지배를 받았으나 러시아-터키 전쟁의 결과로 러시아에 편입되었으며 러시아 공산혁명 후 1922년 소련에 가입했다. 1991년 구소련 붕괴로 독립하였으며 1993년 독립국가연합(CIS)에 가입했다.
나라의 3면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중앙은 넓은 쿠라 아라쿠스 저지이다. 산지에는 강수량이 높으나 중앙 저지는 건조하고 스텝지대를 이루며 동남쪽 렌카란 평야는 아열대 기후이다. 주민은 아제르바이잔인이 90%, 러시아인이 3%, 아르메니아인이 2%, 다게스탄인이 3%가 있으며, 소수의 터키인과 유대인 20,000여 명이 있다. 석유와 석유제품, 기계제조, 면화, 과수, 포도의 재배, 포도주 양조, 양잠업이 활발하다. 에너지원은 석유, 천연가스, 수력전기이며 주로 바쿠 부근의 육상과 카스피해의 해저에서 생산된다. 공업은 석유업 장치류, 강관(steel pipe), 알루미늄의 제조 등이다. 관개로 면화, 쌀, 담배 등이 재배된다.

 

3. 역사
1) 아제르바이잔의 고대국가 형성기

아제르바이잔에는 35만~40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아제르바이잔 내에는 인류가 거주했던 흔적이 있는 고고학적인 터가 여러 곳에 존재한다. 남서부에 위치한 아지크 동굴에서는 35만~4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초기 인류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또한, 카스피해(Caspian Sea) 서안 지역(바쿠 인근)에서는 신석기 및 청동기시대 농목민 거주지가 발견되었다.
BC 2천 년~3천 년경에는 쿠티, 룰루, 투르키, 수 등으로 불리는 부족국가들이 코카서스(Caucasus) 지역에 정주하였다. BC 1000년에는 아라즈(Araz)강 남부지역에 마나 왕조가 성립되었다. BC 9세기에는 스키타이인 및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메대(Medes)인이 거주하였다. BC 7세기에는 마나 왕조의 영토 확장으로 현재 아제르바이잔의 영토가 형성되었으며, 카스피해 남부지방에 미디아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미디아 왕조는 BC 6세기경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었다.
BC 4세기에는 페르시아 통치하의 아트로파탄 왕조가 성립되었다. 아트로파테스는 알렉산더 대왕(Alexandros the Great)의 동방원정 시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장군이었으나 후에 알렉산더의 편에 서서 BC 328년 알렉산더의 총독이 되어 현재의 코카서스 지역을 지배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역사가들은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아트로파테스가 이 지역을 통치하였기 때문에 아제르바이잔은 알렉산더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AD 1세기~4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코카서스 알바니아'에 편입되었다.

 

2)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 지배와 투르크왕조
AD 3세기~4세기 '코카서스 알바니아' 시대에는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387년~7세기 사이 '코카서스 알바니아'는 사산조 페르시아 및 아랍의 지배를 받았으나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유하며 사실상 독립국을 유지하였다.
7세기 '코카서스 알바니아'는 아랍 칼리프에 정복당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이 시기에 터키계 유목민이 아제르바이잔 지역으로 이동하여 코카서스 알바니아인과 함께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9세기 무렵에는 이슬람이 쇠퇴한 후 북부에는 쉬르반샤(Shirvanshah) 왕국이 16세기까지 독립 상태를 유지하였다. 한편 남부에는 여러 왕국들이 출현하다가 11세기 중반 셀주크투르크(Seljuk Turks)에 병합되었다. 셀주크투르크 발흥시대에 중앙아시아로부터 온 오구즈(Ohguz)계 터키인들이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들은 점차 숫자가 많아져 아제르바이잔은 터키계 국가로 변모하였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지배를 당한 후 14세기 중반까지 훌라구(Hulagu) 왕조의 속국이 되었다. 14세기~15세기에는 터키계 유목민인 오구즈족들이 '화이트시프(White Sheep)'라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화이트시프는 '블랙시프(BlackSheep)'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서부 이란 및 이라크를 지배하였다. 화이트시프는 타브리즈(Tabriz)를 수도로 하여 강력한 국가로 부상하였다. 화이트시프는 오스만투르크(Osman Turk)에 대항하여 1463년 베니스, 로마 교황청 및 헝가리와 동맹조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사파비 왕조(Safavid dynasty)에 의해 멸망당하였다.
16세기, 불과 14세의 나이로 화이트시프를 멸망시키고 사파비 왕조를 건설한 '샤 이스마일(Shah Isma'il) 1세'는 본래 아제르바이잔 출신으로 1501년부터 1524년까지 통치하였다.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투르크 및 우즈벡 칸과 오랜 전쟁을 벌였다. 그 결과 이란,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의 일부,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의 지역과 이라크를 통치하였다.

 

3) 제정러시아의 지배와 석유 부국으로의 부상
사파비 왕조가 멸망 후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수십 개의 공국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제정러시아가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하면서 북부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1723년 러시아는 바쿠(Baku)를 점령하였고 대부분의 영토는 터키가 차지하였다. 1724년 이스탄불조약(Treaty of Istanbul)에 의거하여 바쿠를 포함한 카스피해(Caspian Sea) 연안 지역은 러시아로, 나머지는 터키로 편입되었다.
1804년~1813년간 발생한 러시아와 페르시아(이란)의 전쟁으로 제정러시아가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으며, 엘리자베트와 바쿠에 양현을 설치하였다. 1813년에 체결된 굴리스탄조약(Treaty of Gulistan) 및 1828년에 체결된 투르크멘차이조약(Treaty of Turkmenchai)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아라즈 강을 사이에 두고 북부지역은 러시아, 남부지역은 이란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의 카자르왕조(Qajar Dynasty)는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병하였으나 제정러시아 군에 연패하였다. 이란과 러시아가 충돌한 10년간의 전쟁 후 1813년 굴리스탄조약에 의해 러시아는 카라바흐, 바쿠, 섀키, 쉬르반, 구바, 더반트 등 북부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
1826년~1828년,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의해 양분되어, 아라즈강을 따라 국경이 형성되었다. 1828년 체결된 투르크멘차이조약은 기본적으로 굴리스탄조약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투르크멘차이조약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예레반(Yerevan)과 나히체반(Nakhchivan) 지역이 추가로 러시아에 양도되었다. 아울러 투르크멘차이조약에 따라 아제르바이잔 영토는 항구적으로 남북으로 분할되었다. 또한 투르크멘차이조약에 따라 오스만투르크, 이란, 러시아 등지에 흩어져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레반과 카라바흐 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로써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분쟁이 시작되었다.
1848년 세계 최초로 바쿠 유전의 상업적 개발이 성공함에 따라 노벨(Nobel) 형제, 로스차일드(Rothschild), 지멘스(Siemens) 등 국제적인 기업과 투자자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진출하여 경제적으로 발전이 이루어졌다. 아울러 유전 개발로 발생한 이익을 제정러시아를 비롯한 외국 기업들이 독식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 민족자본 고갈 및 경제공황이 초래되기도 하였다.
아제르바이잔은 이후 경제 호황과 더불어 유럽문화가 유입되면서 최초의 이슬람 오페라, 신문, 극장 등이 등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라틴 알파벳 차용에 관한 논의, 대학 설립 등과 같은 사회적 진보도 달성되었다.

 

4) 소비에트연방의 아제르바이잔 지배와 독립국가 성립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아제르바이잔은 임시정부 수립을 통해 국가 창설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세계열강의 이해가 상충하고, 민족 간 의견 대립이 발생하여 통합국가 수립에 실패하였다.
1918년 5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제정러시아가 붕괴하자 '아제르바이잔민주공화국(AzerbaijanDemocratic Republic)'이 수립되었으며(수도는 간자), 마메드 라술자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1918년 2월에 발생한 공산혁명으로 제정러시아가 붕괴하자 코카서스 지역의 민족들은 '트랜스코카서스연방(TranscaucasianSocialist Republic)'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결국 서로 간 이해의 대립으로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3국이 모두 독립을 선언하게 되었다.
1920년 4월에는 러시아 볼셰비키 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침공하여 소비에트 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1922년에 아르메니아 및 조지아공화국과 함께 '트랜스코카서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구성되어,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었다. 1936년 이후부터는 독립헌법을 가진 공화국으로 소비에트연방에 소속되었다.
소비에트연방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아르메니아인들을 앞세워 아제르바이잔인 수만 명을 숙청하는 등 대대적으로 억압정책을 시행하였다. 억압정책을 시행하는 동안 소비에트연방에 속한 공화국 중에서도 아제르바이잔의 피해가 가장 컸다. 숙청 대상은 지식층, 자생적 공산주의자, 인근 이슬람교 국가 내 혁명운동 세력과 연관을 가진 자 등이었다. 이들에게 적용된 주요 혐의는 범이슬람주의, 범투르크주의, 부르조아 민족주의 등이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해빙기가 도래하여 문학, 학문, 언론 분야 등에서 검열이 완화되고 표현의 자유가 신장되었다. 이와 동시에 소비에트연방은 새로운 반이슬람 캠페인을 야기시키면서 공화국 국민들을 러시아인으로 동화시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60년대 시베리아 유전이 개발되고, 반면에 바쿠 연안 원유층이 고갈되면서 바쿠의 산유지로서의 가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투자가 감소하였으며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연방 내에서 생산성과 경제발전 속도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아제르바이잔 국가보안위원회(KGB) 의장을 역임한 헤이다르 알리예프(Heidar Aliyev)는 1969년부터 공산당 제1서기로서 아제르바이잔을 이끌었다. 1980년대에는 소비에트연방 정치국원으로 모스크바에 진출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1987년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는 헤이다르 알리예프를 퇴진시키고 개방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로 인해 나고르노-카라바흐(Nagorno-Karabakh) 지역의 민족 갈등 및 숨가이트(Sumgayit), 바쿠에서의 반(反)아르메니아 폭동 등을 초래하였다.
1989년 9월, 아제르바이잔은 주권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1990년 1월 소비에트연방군이 바쿠 폭동 진압을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을 공격함에 따라 수백 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아야즈 무탈리보프(Ayaz Mutalibov)가 새 지도자로 선출되었으나 소비에트연방 해체 직전인 1991년 8월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1년 8월에 독립선언문을 채택한 후, 같은 해 10월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이 탄생하였다.

 

5) 아제르바이잔의 소비에트연방 독립 이후(소비에트연방 붕괴 이후)
1992년 3월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후 1992년 6월에 집권을 시작한 민족주의자 아뷜파즈 엘치베이(Əbülfəz Elçibəy)의 국내외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아제르바이잔의 혼란이 가중되었다. 1993년 6월에는 전쟁 와중에 라힘 알리예비치 후세이노프
(Rahim Aliyevich Huseynov)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엘치베이는 쿠데타에 맞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퇴진한 헤이다르 알리예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알리예프는 그해 10월 단독 출마한 대선에서 98.9%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집권 이후 후세이노프를 비롯한 반대세력들을 제거해 정치적인 안정을 도모하였다. 동시에 서방의 석유 메이저와 석유·가스 개발 계약을 체결하여 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2003년 10월 헤이다르의 아들인 일함 알리예프(Ilham Aliyev)가 집권을 시작하였다. 일함 알리예프 정부는 유럽과의 통합 및 시장경제정책 추진 등 아버지 정부의 국가발전에 관한 주요 정책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2003년 12월에는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사망하였다. 2005년 11월 총선에서 일부 선거부정 논란이 있었으나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이 이끄는 집권 신아제르바이잔당(YAP)이 승리하였다. 2008년 10월 대선에서는 80% 이상의 득표율로 알리예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였다. 2009년 3월에는 3선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알리예프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2010년 11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신아제르바이잔당은 다시 압승하였다. 신아제르바이잔당은 총 72석을 차지했으며, 친여 무소속이 41석, 군소정당이 12석을 차지하였다.

 

4. 정치
일함 엘리예브 현 대통령은 1993년부터 10년간 통치한 헤이데르 엘리예브 전 대통령의 아들이다. 2003년 10월 당선 이후 2008년 연임에 성공 후, 전쟁 시에는 대통령의 연임 제한을 철폐하여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 2013년 대선에서도 3기 연임에 성공했다. 지난해 9월 시행된 새 헌법으로 부인 메흐리반 엘리예바가 부통령이 되어 봉건제 회귀라는 비판을 듣고 있다.
민주주의의 후퇴와 석유 수출로 발생한 막대한 부의 불공정한 분배, 그리고 부패와 사회 양극화 문제 등으로 고조된 국민들의 불만은 정치적 이슬람의 성장 토대가 되고 있다. 현재 한층 더 종교에 대한 제약이 강화되어 2009년 새로운 종교 법안이 통과되면서 여러 '비공식' 이슬람 조직들과 운동들의 등록을 거부하고 조직의 해산 등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
반정부 독립 그룹들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이 있다. 2016년도 어김없이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수십 명의 인사들을 구금하고, 독립시민단체들을 무력화하기 위해 법령들을 집행하며, 정부 비판자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했다고 휴먼라이츠와치(Human Rights Watch)는 2017년 세계보고서에서 밝혔다. 작년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기소되고 구금되었던 17명의 인권 인사들과 언론인들, 그리고 정치운동가들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2016년에 체포된 정치운동가들과 블로거들을 포함한 최소한 24명의 정부 비판자들을 불법적으로 구금하였다. 현재 구금되어 있는 인사 중에는 반정부민주운동(REAL)의 리더인 일가 마마도프도 포함되어 있는데, 2014년 유럽 인권법원에서는 그에 대한 사건을 심의했으며, 유럽위원회는 여러 차례 그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청년운동가인 무랏 아디로프, 야당 APFP의 청년운동가인 무랏아리로프, 언론인 세이무르 하지, 그리고 블로거인 압둘아디로프가 포함되어 있다.
2014년과 2015년에 독립 그룹들에 대한 극도의 활동 제한과 징벌 법규들을 채택하여, 단체들의 재정 모금과 활동 수행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많은 그룹들이 활동을 중단하거나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국제적인 파트너들이 당국의 탄압 중단을 호소하고 있으나 의미 있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5. 경제
1991년 독립 후 아르메니아 전쟁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헤이데르 엘리예브의 집권을 계기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는 안정되기 시작했다. 집권 기간 동안 아르메니아 전쟁의 패배로 피폐해진 경제를 친서방과 개방정책, 시장경제로 체제 전환을 시행했다. 1990년대 아제르바이잔은 극심한 경제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서방으로부터의 적극적인 투자유치와 유가 급등으로 풍부한 에너지자원을 보유한 아제르바이잔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이후 경제성장은 지속되었지만,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지속적인 유가 하락으로 에너지산업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2015년 5월 마낫의 평가절하로 2.1배가량 환율이 인상되었다. 국가는 에너지 산업으로 부유하지만 국민의 70%가 극빈층이다.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과 이로 인한 이혼율의 증가도 사회적 문제이다.

 

6.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영토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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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 영토 안에 위치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국제법적으론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아르메니아의 지배 아래 있으며 명칭은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으로 미승인 괴뢰정부이다.
구소련 붕괴 과정에서 1990년대 초반 아르메니아계 분리주의 세력이 아제르군과 전쟁을 벌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장악했다. 이 전쟁으로 1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하여 고향을 떠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고 있다. 3만 명이 숨진 후 1994년 휴전이 체결됐지만, 이후에도 간간히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다. 석유 부국인 아제르바이잔은 이 지역을 무력으로 수복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러시아 동맹국인 아르메니아와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1992년 2월 25~26일 아르메니아군이 아제르바이잔인들(민간인 포함)을 호잘리(Khojaly)에서 살해했다. 이후 이를 호잘리 대학살이라 한다. 희생된 아제르바이잔 사람은 200명 정도(아제르 주장 485명)로 추산하고 있다.  
2016년 4월 2일에 교전이 발생하여, 1994년 휴전 이후 최대 규모로 양측 군인 30명 이상, 어린이 등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올해에도 7월 2일 아르메니아군의 총격으로 61세 여성과 2세 남아가 사망했다. 보복으로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군을 향해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팔레스타인을 세계의 화약고라고 부른다. 가라바흐 지역도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화약고이다.

 

7. 지리 및 기후
아제르바이잔의 기후는 주로 건조기후로 지역에 따라 건조 아열대기후에서 산자툰드라기후까지 다양한 기후대가 존재한다. 연평균 기온도 지역에 따라 0℃~15℃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중부와 동부의 평야는 건조한 아열대기후로 1월 평균기온이 0℃~3℃, 7월 평균기온은 -25℃~27℃, 최고기온은 43℃ 정도를 보인다. 남동부 랜캐란(Lənkəran) 지역은 습윤한 아열대기후이며, 이란과의 인접 지역은 온대 대륙성기후를, 해발 2,000m 이상의 산지는 한랭한 기후가 각각 나타난다. 아제르바이잔은 전 세계 13개 기후대 중 9개가 존재할 만큼 기후 전시장적인 특색을 보유하고 있다.
강수량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매우 크게 나타난다. 보통 강수의 대부분이 겨울에 집중된다. 압세론 반도의 남부 해안, 쉬르반 남동부, 고부스탄 남동부 지역은 연 강수량이 200mm 이하이다. 쿠라 저지의 동부, 나흐체반 지방의 이라크스 강 유역은 연 강수량 200mm~300mm, 말리캅카스 및 볼쇼이캅카스 산맥의 북동사면은 연 강수량 600mm~800mm, 볼쇼이캅카스산맥 남사면은 연 강수량 1,000mm~1,300mm 등을 보인다.
아제르바이잔은 지진, 태풍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지역은 아니다. 하지만 배수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아 강우량이 많지 않아도 차량 운행이나 보행에 불편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바람이 심하게 부는 경우도 많다.

 

8. 사람과 언어
아제르바이잔인 90.6%, 레즈긴인 2.2%, 러시아인 1.8%, 아르메니아인 1.5%, 탈리시인 1.0%, 메스케티 투르크인 0.6%, 기타 인종 2.3%.
민족적으로는 튀르크계의 아제르바이잔인이 인구의 90.6%를 차지해 압도적으로 많다. 아제리인 외에도 레즈긴인(2.2%), 러시아인(1.8%), 아르메니아인, 아바르인, 타트족이 거주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어가 공용어이며 러시아어와 터키어도 사용하며, 터키어는 국가의 서부 지역인, 나히체반 공화국에서 다수 사용되며, 러시아어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대한 영향으로 인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는 아르메니아어도 사용한다.

 

9. 종교
종교적으로는 아제르 투르크인을 포함한 이슬람교가 95%로 압도적으로 우세하고(시아파 85%, 수니파 15%), 기독교(러시아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유대교(20,000명)가 존재한다. 시아파와 수니파 두 종파 간 갈등은 없다. 투르크족인 아제르바이잔이 시아파인 이유는 16세기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가 투르크 왕국들을 정복하면서 시아파로 개종시켰다.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의 역사적 문화적 전통을 가졌지만, 이란보다 터키에 더 친근감을 가지고 있다. 정치, 군사, 경제, 종교에서 이란을 경계하고 친 터키, 범투르크주의를 따르고 있다. 이란은 세속주의 이슬람과 종교의 다양성과 공존을 추구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부담스러운 존재이다. 무엇보다 이슬람 혁명으로 신정국가를 세웠고 혁명사상을 전파하는 이란보다는 세속주의 이슬람 국가인 터키의 모델을 선호한다. 종교법도 급진주의적 이슬람 제거와 억제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7년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 시리아의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아제르바이잔인은 200명으로 추산된다. 와하비즘은 정부의 혹독한 감시와 제재를 받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이슬람으로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한다. 아제르인들은 이슬람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강화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라면 이슬람을 믿어야 한다' 혹은 '이슬람을 믿지 않으면 아제르바이잔인이 아니다'라는 식의 풍조가 유행하고 있다. 청년층의 이슬람 인구의 증가는 뚜렷해 보인다. 기독교 핍박 지수는 46위이다.

 

10. 개신교
구소련 시절 핍박을 피해 온 러시아 침례교도들로 시작된 침례교회는 현재 러시아인들이 거의 떠나고 매주 아제르인 삼백여 명이 뜨겁고 신실하게 모이고 있다. 그레이스 교회는 시내 독일 루터교회 예배당(500명 규모, 현재 공연장으로 사용)을 빌려서 주일 예배로 모였다. 2016년 당국이 예배당 사용 불허하여 교회 사무실 겸 홀에서 매 주일 이백여 명 모이고 있다. 생명의 말씀 교회는 유럽의 오순절 교회이다. 90년대 최대 1,000명까지 모였지만, 선교사 추방, 정부의 박해, 교회 건물 불법적 강탈과 의문의 화재로 그 수가 급격히 감소하였고 현재 나누어서 모이고 있다.
가정 교회들이 여러 곳에서 모이고 있으나 정확한 집계는 되지 않고 있다. 대부분 바쿠에 집중되어 있고, 지방의 모임은 활성화되지 않고 있다. 지원이 미비하고, 지도자와 신실한 멤버들이 생계를 이유로 바쿠로 이주하기 때문이다. 한때 믿었거나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존재하지만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현지인 지도자 간 협력이 활발하지는 않다. 교회의 신앙의 성격이 다르고, 정부의 감시로 협력이 어렵다. 교회들 일부는 지방에 사역자들을 보내고 전도에 힘을 쓰고 있다.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훈련 부족은 문제가 되기도 한다. 자의적 성경해석과 외부의 이단적 가르침과 치우친 은사주의 운동의 영향에 노출되어 있다. 이는 현지 교회들의 하나 됨과 성장의 장애물이 된다. 건전한 교회론과 성실하고 적실한 목양이 절실히 필요하다.
1991년 구소련 붕괴와 독립 후 40명이던 성도가 2007년에는 18,000명까지 이르렀다는 보고가 있다. 신빙성은 없으며 1991년부터 2000년대 초까지 개종자가 급증한 것은 분명하다. 실제 입증 가능한 개신교인의 수는 약 3,000명(최대치) 정도이며 이 숫자가 설득력이 있다. 2008년부터 신구약 성경이 출간되어 배포되고 있다.
무슬림이 다수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정교회 국가인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으로 기독교에 적대적이며 개종자에게는 혹독한 사회적 차별과 가족의 반대가 발생한다. 직장을 잃은 경우도 있다. 정부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박해와 감시가 진행되고 있다.
2007년 8월 자카탈라 지역 침례교 목사 자우르 발리예브는 불법종교 활동과 고성 방음으로 2년형을 선고받았고 다음 해 3월 특사로 석방됐다. 그러나 2011년 다시 불법 집회와 종교 서적 배포로 투옥되었다. 겐제에서도 외부인의 눈을 피해서 매주 가정별로 돌아가며 모임을 가졌지만 2014년 중단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독립 후 20년 동안 13번이나 종교법을 개정해 왔다. 2011년 6월 10일 개정된 종교법은 등록 요건으로 종교지도자의 공식 교육과정 이수와 등록 성인 50명 이상을 요구했다. 미등록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의 활동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가정교회 등록 자체를 봉쇄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종교 서적 배포 금지와 위반 시 5년 징역형, 벌금(평균임금 9년 치) 부과를 명시하고 있다. 이미 등록된 교회들도 재등록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뇌물을 요구하고 있다. 외국인이 모이는 바쿠국제교회도 재등록과 외국인 목회자 비자발급거부로 수년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역자들은 현재 계속된 추방과 철수, 비자발급 거부 그리고 신임사역자 감소로 현저히 줄어든 상태이다.

 

11. 아제르바이잔을 위한 기도 제목

  1. 정치 지도자들이 사회 정의의 억압과 교회의 핍박을 중단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열악한 인권 상황을 개선하도록
  2. 경제 상황 악화와 실업 문제가 개선되고 정부 기관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부정부패가 근절되도록
  3.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는 사역자들의 체류와 사역 상황이 호전되고, 더 많은 일꾼과 교회들이 아제르바이잔과 이 민족을 품을 수 있도록
  4. 소수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한 뜻이 되어 진리의 증거와 삶을 통해 민족의 등불과 사회의 희망이 되도록
  5. 현지인 목회자들이 깨어 기도하고 올바른 교리와 말씀으로 영혼들을 돌보고 교회를 세워나가도록
  6. 지방의 신자들과 지도자들이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을 위해 불타는 사명감을 갖도록
  7. 이란과 러시아와 조지아, 유럽 그리고 터키의 아제르바이잔 디아스포라들에게 복음이 증거되고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세워지도록
  8. 코카서스 지부의 바우리 사역자들에게 열정과 지혜와 사랑과 성령의 충만함으로 코카서스 지역 복음화와 교회개척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정리 및 보고
H 선교사
아제르바이잔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