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섭/이규자 선교사
인터넷 검색에서 세르비아를 치면 대체로 발칸의 화약고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그 이유는 2차 대전 이후 구유고슬라비아가 7개국으로 분열되는 과정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그 중심에 세르비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사태 때 인종학살이 행하여지고 NATO가 개입하면서 세르비아가 대규모 폭격을 받았다. 그 이후 세르비아는 인류의 적으로 몰고 간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지금도 시내 도처에서는 그 당시 폭격 맞은 잔해 건물들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세르비아는 안전한 국가이다. 2025년 EU 가입을 목표로 두고 매년 가입 협상을 벌이면서 법을 수정 보완해 나가고 있다. 해외 투자 유치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한국과의 관계는 매우 좋다. 코로나 초기에 대통령 전용기를 한국에 보내서 진단키트를 가져오는 과정에서 한국으로 가는 교민들도 수송하였다. 세르비아인 중에 우리 귀에 익숙한 유명인은 손발이 없는 전도자 닉 부이치치와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노바크 조코비치이다.
정치적으로 친러 경향이 강하여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련하여 세르비아 정부의 입장은 서방국가들이 요구하는 러시아 제재에는 동참하지 않으나 우크라이나 영토보전과 인도적 지원은 지지한다는 입장이다. 둘 다 어느 쪽도 적대시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현재 세르비아에는 러시아 기업들이 많이 들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서방 국가들의 제재를 피해 기업을 유지하기 위해 이곳에 사업을 시작한다. 우크라이나 난민보다도 더 많은 러시아인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집세가 3배까지 뛰는 기 현상도 일어나기도 한다.
구유고슬라비아의(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북마케도니아, 코소보) 중심 국가로서 역할을 하다가 각 7개 국가로 독립하는 과정에서 내전을 치른 국가이다. 코소보는 아직도 미승인국으로 세르비아와 갈등 중에 있다.
국 명: Republic of Serbia (Republika Srbija)
정부 형태: 의원내각제
위 치: 남동 유럽 (44N/21E, 내륙 국가)
면 적: 88,361㎢ (코소보 포함) 77,474㎢ (코소보 제외)
인 구: 91만 명(코소보 제외, 2020년 World Bank 통계)
민족 구성: 세르비아인 83.3%, 헝가리인 3.5%, 보스니아인 2%, 기타 11%
종 교: 정교 84.5%, 천주교 6%, 이슬람 3%, 기독교 1%, 기타 5.5%
인구 밀도: 89명/㎢
출산율: 1.48명 (2020년)
국제 전화 코드: +381
국가 도메인(ccTLD): .RS
기 후: 대륙성(평균온도 : 1월 0.7℃, 7월 37.5℃)
교민 현황: 125명
공용어: 세르비아어(공식 문자인 키릴 문자를 주로 사용하나, 라틴 문자도 대부분 병기) 젊은 층들은 대체적으로 영어로 소통할 수 있다.
상호 무비자: 90일 (세르비아 국민), 90일 (우리나라 국민) ※ 2021.10월 현재 코로나19 상황으로 세르비아 국민에 대한 무사증 협정은 잠정 정지된 상태
한국과의 시차: 한국시간 -8시간 (서머타임 적용 시 : 7시간)
전기 전압 및 주파수: 220V/50Hz (한국 가전제품 변압 콘센트 없이 이용 가능)
수 도: ㆍ면적 : 322,269㏊ (세르비아 면적의 3%) ㆍ인구 : 약 137.5만 명 ㆍ고도 : 117m
ㆍ베오그라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다. 사바강과 다뉴브강이 흐르며 선사시대부터 정착지가 존재했다. 5,000년이 넘는 역사 속에 켈트족으로부터 베오그라드를 “싱기두눔”이라고 부르던 로마인들의 손에 넘겨지고 이후 비잔틴인들 손에 넘겨졌으며 이들은 베오그라드를 “알바그레카”라고 칭했다. 베오그라드의 현재 슬라브식 이름은 878년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하얀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세르비아 주요 공휴일: ㆍ신년 휴일: 1.1~3 ㆍ정교 크리스마스: 1.7 ㆍ건국일: 2.15~16 ㆍ부활절: 4.22~25 ㆍ노동절: 5.1~3 ㆍ승전 기념일: 11.11
경제 체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경제 규모(명목 GDP): 604억 3,500만 달러(약 69조 원)
경제 규모(PPP): 1,195억 3,200만 달러(약 137조 원)
1인당 명목 GDP: 8,748달러
1인당 PPP: 20,545달러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 71.0% (2017년)
실업률: 12.8%
신용등급: S&P BB+ / Fitch BB+
화폐 단위: 세르비아 디나르 (RSD)
지폐 종류는 10, 20, 50, 100, 1,000, 2,000, 5,000 등 9종이 있다. 동전의 종류는 1, 2, 5, 10, 20으로 5종이 있다.
환율(2021.10.06. 기준): 1달러는 101.90디나르, 1유로는 117.57디나르이다. 1디나르는 11.73 대한민국 원이다. (대충 0 하나를 붙이면 한국 돈이다)
한국 기업 진출 상황: 유라, 경신전선, 한국타이어 등
성경에서의 위치는 마케도니아 일부 지역이며 또한 일루리곤 일부지역이다.
1817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1918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 수립
1943 유고슬라비아 민주 연방 수립
1945 세르비아 인민 공화국
1963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1991 유고 내전 발발
1992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수립
1998 코소보 전쟁
2003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2006 연방 해체 세르비아 공화국의 독립
세르비아 민족은 슬라브 민족으로 러시아 남쪽 부근에 거주하다 6세기 후반경에 지금의 자리로 이주하였다. 세르비아 왕국은 14세기 초반 두솬 황제 때 발칸 반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여 북쪽으로는 댜뉴브 강까지 남쪽으로는 그리스 남부까지 영토를 확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황제 사망 이후 15년 만에 세르비아는 코소보에서 있었던 터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며 터키의 500년 지배를 받게 된다. 19세기 말 터키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1차 세계 대전 후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와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형성한다. 2차 세계 대전 중 유고슬라비아는 독일의 침략에 맞서 격렬한 저항을 펼쳤는데 그중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이 효과적으로 독일에 저항하며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에게 아주 좋은 이미지를 남기게 된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자연히 티토는 전쟁 중의 능력을 인정받아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티토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이끌어가게 된다.
그러나 1948년 공산주의의 코민포름(국제 공산주의 기구)에서 축출당하게 된다. 이때부터 티토는 소련의 중앙 집권적 공산주의를 탈피하고 지주자 관리 제도라는 특이한 공산주의를 시행하게 된다. 이는 중앙 집권적 명령식 공산주의를 탈피하여 농장이나 공장 등에 자율권을 부여하는 훨씬 개방적인 공산주의이다. 외교적으로도 티토는 코민포름의 축출을 계기로 비동맹주의를 천명하며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며 비동맹 국가들의 주도적인 국가로서 유고슬라비아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런 티토의 정치적 역량으로 티토는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를 받게 된다. 이때 유고슬라비아는 동서 유럽을 막론하고 부러움을 받던 나라였다. 유고슬라비아 여권이 있으면 못 가는 나라가 없을 정도였고 월급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러나 티토가 죽고 난 후 유고슬라비아는 각 공화국 별로 분열 조짐을 보였고 92년을 시작으로 마케도니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그 해에 독립을 하고, 보스니아가 보스니아 내전의 아픔을 가져오며 독립을 했고 2007년 마지막 남아 있던 몬테네그로 공화국마저 독립하여 지금의 세르비아에 이르게 되었다. 2008년 코소보 지역 역시 오랜 진통 끝에 미국의 등을 업고 일방적으로 독립 선언하였다. 아직도 이 문제는 해결이 어려운 가운데 합당한 외교적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나라 이름도 이전 유고슬라비아에서, 신유고연방,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연합, 세르비아 공화국 등으로 바뀌게 되었다. 보스니아 내전의 영향으로 시작된 유엔 경제 제재가 10년 동안 지속되고 1999년 나토의 공습으로 세르비아 경제는 파탄을 맞았고 주위 동유럽 국가에도 20년 이상 뒤지는 결과를 맞게 되었다. 1999년 나토의 공습 이후 독재자 밀로쉐비츠가 물러나고 민주 진영이 정권을 잡아 유럽 연합 가입을 목표로 사회, 경제, 정치 전반에 걸쳐 끊임없이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지금은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사회도 안정됐지만, 아직도 과거사 문제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는 부정적 이미지가 팽배하다. 이는 세르비아군이 유고슬라비아 내전(특히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내전) 당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코소보 등지에서 대량 학살, 집단 강간 등 온갖 잔악한 전쟁범죄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에는 인종학살 문제로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과 1994 미국 월드컵에 출전을 금지당한 적도 있었다.
사실 세르비아인들 입장에서는 슬픈 역사도 있다. 중세 시대에는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처절하게 맞서 싸우다 국권을 뺏긴 것이 세르비아 수난의 시작이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등 외세의 간섭을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크로아티아인들에 의해 대량 학살당했다. 아직도 과거사 청산 문제로 크로아티아와는 갈등의 골이 깊다.
정치 체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총리: 아나 브르나비치
민주주의 지수: 167개국 중 63위(2021)
국민의회 의장: 이비차 다치치
대통령: 알렉산다르 부치치
여당: 세르비아 진보당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해체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당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지도 아래 세르비아 사회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세르비아 급진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2000년까지 집권하였다.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고, 2000년 세르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3선에 도전했다가 야당 후보한테 밀리자 부정선거를 자행하다가 걸려서 결국 축출되었다.
2001년 새 헌법으로 의회는 단원제, 행정부는 의원내각제를 구성하고 있다. 세르비아의 의회는 국민의회라고 한다. 세르비아 국민의회는 250석이며, 명시적으로 126석 이상을 차지해야 내각을 구성할 수 있다. 세르비아의 의회는 재적 단순 과반수로 모든 것을 의결할 수 있다. 헌법 개정안도 의회 과반수 찬성을 한 이후 국민투표를 통과시키면 된다. 개헌 과정에서 세르비아의 대통령은 아무것도 관여할 수 없다. 세르비아는 100% 비례대표제를 채택하고 있다. 정당명부 비례대표이며, 정당명부 순위는 정당 내부의 전 당원 투표 경선으로 정하도록 정해져 있다.
세르비아의 대통령은 의회의 투표가 아닌 국민 직선제로 선출한다. 세르비아의 정치는 전형적인 의회제를 따르고 있다. 세르비아 북부지역 보이보디나 자치주는 세르비아 정부와 별도의 자치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선거 역시 따로 시행한다. 보이보디나 자치주 역시 의원내각제이며, 의원 수는 120석이다. 61석을 차지하면 과반수가 된다. 지방자치제도는 일찍부터 발달했다.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와 달리 세르비아의 지방선거 일정은 지역마다 다르다.
외교적으로는 친러 친중 경향이 강하여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거의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러시아로부터 석유 가스 수입도 2년이나 연장하여 서방 국가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 골루박
중세 성채의 대표적 예시인 골루바츠 성채. "중세의 성"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으로 유명하다.
수도이자 발칸의 중심 도시 베오그라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탄생지 니슈, 중세 초기와 후기의 세르비아의 수도 스메데레보 & 라스 등 유서 깊은 도시들이 많다. 이들은 모두 큰 규모의 성채를 지닌 것이 특징인데, 중세-근대 시기 헝가리와 오스만 및 오스트리아 제국 등과 여러 차례 전투를 치르며 세워진 것이다. 특히 다뉴브강과 사바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세워진 베오그라드 성채와 다뉴브 중류에 중세 헝가리에 의해 세워진 골루박 성채의 풍경이 아름답다.
• 성 사보르나 성당(Sarbona Crkva)
19세기 중엽 밀로슈 오브레노비치 왕자의 명에 따라 전통적인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금으로 장식된 17~20세기 이콘 벽화들이 성당 내부를 감싸고 있다. 정교회의 풍습에 따라 성당 안에 밀로슈,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의 무덤과 부크 카라쥐치(18세기 근대 세르비아어 및 정서법 집대성),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18세기, 근대 세르비아 문학 및 교육의 아버지)의 무덤을 안치되어 있다.
• 칼레메그단(Kalemegdan)
베오그라드 요새인 칼레메그단은 베오그라드의 생성과 함께 발전해온 베오그라드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1C부터 8C에 걸쳐 켈트족–로마인–고트족–훈족–비잔틴–헝가리–오스만 터키- 합스부르크 등 여러 나라의 침략으로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다. 요새의 구조는 본성이 위치한 upper town과 외벽이 감싸고 있는 lower town으로 구분되고, upper town에는 시계탑, 로마시대 성벽, 승리자 동상 등이 위치하고 있으며, lower town에는 외벽을 지탱하고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네보이샤 탑 등이 옛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19세기 말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왕자는 이 요새를 공원으로 개조하여 일반인들에게 개방하였으며, 현재는 동물원, 스포츠 센터 등의 위락 시설을 갖추고 있는 베오그라드 시민들의 사랑받는 휴식처이다.
• 성 마르코 성당(Hram St. Marka)
1931년 착공하여 1940년에 완공된 이 성당은 세르비아-비잔틴 양식으로 1835년에 지어진 구 성당 자리에 세워진 성당으로, 성당 남쪽 부분에는 세르비아 최초의 법전을 편찬한 두샨( ) 왕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으며, 성당 내부는 18~19세기 이콘 벽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 스카다를리야(Skadarlija)
보헤미아 분위기가 묻어나는 지역으로 19~20세기 초에 형성된 화랑, 갤러리, 카페들이 모여 있는 베오그라드의 몽마르트라고 불린다. 유명한 작가, 배우, 화가, 기자들이 밀집해 거주하던 지역에 화랑, 갤러리, 카페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형성된 보헤미아풍의 거리로 당시 작가들과 화가들은 카페에 앉아 영감을 떠올리고 시상을 구상하곤 했다. 세르비아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였던, 주라 약쉬치의 생가가 있으며, 당시 그의 집은 예술가들의 사랑방으로 통했다고 한다. 베오그라드 유명 레스토랑들(Three Hats, Time Enough, Two Stags, Skadarlija, Golden Flagon, Two White Doves, Travelling Actor 등)이 밀집한 지역이기도 하다.
• 성 사바 사원(Hram St. Save)
1894년부터 건축을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큰 정교 사원 중 하나로, 밀레셰바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최초의 세르비아 정교회 주교 성 사바의 유해를 이곳으로 옮겨 와 안장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과 티토의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를 거치면서, 건축이 중지되기도 했으며 사원은 가장 높은 돔까지 높이 65미터, 외부 높이 79미터이며, 사원 2층에는 각 700명의 성가대를 수용할 수 있는 3개의 성가대용 갤러리가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사원 1층에는 10,000명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으며, 다양한 색깔의 대리석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 왕궁
이 왕궁은 1924년 준공되어 1929년에 건축된 왕궁으로 왕세자 알렉산더 2세와 그의 가족들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본궁이다. 세르비아-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데디녜 언덕에 지어진 왕궁은 코슈트냑 숲과 아발라를 바라보는 전망을 자랑한다. 왕궁에 속해있는 white palace라는 별채는 35,000권의 책이 소장된 왕궁 도서관과 가족 성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라조르제비치 왕가는 왕족으로서의 명맥은 이어오고 있지만, 왕족으로서 어떠한 실권이나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지 않은 왕족이다.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고 있으나 대부분의 세르비아인들은 세르비아 정교회이다. 그 외의 소수 종교를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예배에 참석하는 정교인수는 30%도 안 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세르비아 정교회는 로마 제국 시절부터 이어져 전통으로 민족의 정체성 역할을 한다.
세르비아 정교회는 1879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에 의해 독립을 인정받아 총대주교좌 교회로 격상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수장인 베오그라드 총대주교가 지닌 공식 직함은 페치의 대주교 겸 베오그라드와 카를로브치 관구장이다. 초대 대주교는 네마니치 왕가 출신의 성 사바 1세(1219~1233)이며, 현재 총대주교는 포르피리예(1961~, 재위:2021~ )이다. 정교회 내에서 베오그라드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모스크바에 이어 서열 6위이다.
베오그라드에는 발칸 반도에 위치한 정교회 건축물 중 그 규모가 가장 큰 성 사바 대성당(Hram Svetog Save)이 위치하고 있다. 발칸반도에서 제일 큰 성당, 전 세계 정교회 성당중 규모가 가장 큰 것 중 하나로 분류되는 이 건축물은 지상에서 꼭대기까지 높이가 82미터, 동서남북의 각 방향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종탑 높이가 40미터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로 정중앙에 위치한 돔형 지붕의 경우 무게가 400톤에 달하며 그 돔형 지붕 한가운데 위치한 금박이 입혀진 십자가의 경우 높이가 12미터, 무게가 4톤에 달한다. 금박이 입혀진 십자가의 경우 성당 외부 곳곳에 총 18개가 더 위치하고 있으며 성당의 전체 면적은 7,371제곱미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