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및 보고 하영수/변희심 선교사(짐바브웨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1) 식민지 이전 시대
고고학적 기록에 따르면,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은 화살촉과 동굴 벽화를 남긴 산족으로 알려져 있다. 약 2,000년 전 반투족의 대이동 시기에 반투어족 계통 언어를 사용하는 농경민 집단이 현재의 짐바브웨 불라와요 남부 지역에 정착했다. 현재 쇼나어의 원어를 사용한 집단사회는 9세기에 림포포강 중턱 지역에 처음으로 출현하였으나, 이후 짐바브웨의 고원지대로 이주하였다.
10세기 초, 인도양 연안 지역은 아랍 상인들과의 교역이 발달하게 되면서, 11세기 마풍구웨 왕국이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마풍구웨 왕국은 13세기에서 15세기까지 현재의 짐바브웨 지역을 장악한 여러 쇼나족 문명들의 선구자적인 국가 역할을 하였고, 보츠와나 짐바브웨 남아프리카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풍구웨 왕국의 주요 유적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건석 건축양식을 발견할 수 있다. 포르투갈에서 온 유럽인 탐험가들이 짐바브웨에 도착하였을 당시, 마풍구웨 왕국은 짐바브웨 지역에서 가장 먼저 무역 국가로 발전하고 있는 국가들 중 하나였다. 짐바브웨의 무역 국가들은 황금, 상아, 구리 등을 옷감과 유리로 물물교환하는 형태의 교역을 진행하였다.
1300~1600년 사이 짐바브웨 왕국이 마풍구웨 왕국을 능가하게 되었다. 짐바브웨 왕국은 지금의 마싱고 지역에 위치한 쇼나어를 사용하는 제국의 수도였고 식민지 이전 시대의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다. 짐바브웨 왕국은 목축, 농작물, 무역을 통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짐바브웨 지역 내에 유럽인의 영향력에 대응하여 새로운 쇼나족 국가가 출현하였는데, 바로 로즈비 제국(1684~1834)이다. 로즈비 제국은 지금의 불라와요 근처에 수도를 정하고 수 세기 동안 군사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발전을 이루어내면서, 짐바브웨 고원에서 무력으로 포르투갈인들을 축출하게 되었다. 로즈비 제국은 짐바브웨 왕국과 마풍구웨의 석조 문명을 그대로 계승하는 동시에, 머스킷을 무장 체계에 새롭게 도입하고 침략에 대비해 전문 군인들을 모집하였다.
1821년경 줄루 왕국 주변의 Mguni 어족들은 줄루왕 샤카의 강력한 무기와 전투기술로 인해 한편으로는 모잠비크, 잠비아 지역으로 들어가 왕국을 형성하였다. 한편 음질리카지 쿠말로의 아마 은데벨레족은 줄루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으나 줄루 왕국(지금의 더반과 그 위쪽)의 국왕 샤카에 밀려 지금의 남아공 프레토리아지역을 거치면서 주변의 소토어 족을 통합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2) 식민지 시대와 로디지아(1888~1964)
1880년대부터 세실 로즈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와 함께 유럽 개척민들이 은데벨레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888년 로즈는 당시 은데벨레 국왕 로벤굴라에게서 광산 채굴권을 허가받았고, 이후 이 채굴권을 토대로 당시 영국 정부에게 마타벨레란드와 마쇼날랜드 지배에 대한 칙허장을 요구하였다. 로즈는 1890년 영국 남아프리카 경찰(British South Africa Police, BSAP)과 파이오니어 칼럼(Pioneer Column, 유럽인들로 구성)을 마테벨레란드와 마쇼날랜드에 파견, 솔즈버리 요새(현재의 하라레)를 건설함으로써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1895년,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식민지 건설에 크게 기여한 세실 로즈를 기려 은데벨레 지역을 “로디지아”라고 명명하였다. 1898년 잠베지 남부 지역을 공식적으로 남로디지아(현재의 짐바브웨)로 명명하고, 잠베지 북부 지역은 별도의 관리를 받게 되며 북로디지아(현재의 잠비아)로 명명되었다. 쇼나족 세력은 1897년까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지배에 대항하며 몇 차례의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로즈는 은데벨레인과 쇼나족 세력을 완전히 진압하고 토지를 유럽인들을 중심으로 배분하였으며, 이를 위해 많은 토착민을 원래 거주지에서 쫓아냈다.
1930년 제정된 토지 분배법은 흑인의 토지 소유권을 남로디지아의 일정 지역으로 제한하였고 소수의 백인들에게만 국토 대부분의 토지에 대한 매매를 허가하였다. 토지 분배법 제정은 곧바로 급격한 불평등 심화로 이어졌고, 이후 토지개혁이 빈번히 제기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4년 10월 북로디지아가 잠비아로 독립하게 되면서, 이언 스미스의 로디지아 전선(Rhodesian Front, RF) 정권은 남로디지아에서 로디지아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스미스는 당시 영국의 식민지 정책인 "다수결의 결정이 없는 한 독립이 불허된다"에 효과적으로 거부하기 위해, 1965년 11월 11일 영국에 일방적 독립 선언(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UDI)을 선포하였다.
3) 일방적 독립 선언과 내전(1965~1980)
일방적 독립 선언(Unilatera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UDI) 이후, 영국 정부는 스미스 정권과 1966년과 1968년에 회담을 추진하였으나 별 성과 없이 끝나면서 유엔에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제재를 요청하였다. 1966년 12월 유엔이 이에 결의하면서 사상 최초로 자치 국가에 대한 강제적인 금수조치가 행해졌다. 이 조치는 1968년에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영국은 로디지아의 독립 선언을 반란 행위로 간주하였으나, 지배권을 회복하려는 어떤 무력 조치도 행하지 않았다. 한편 은데벨레 지역의 조슈아 은코모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Zimbabwe African People's Union, ZAPU)과 쇼나 지역의 로버트 무가베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맹(Zimbab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은 공산 진영과 주변 아프리카 국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로디지아의 소수 백인 정권에 대항해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이전 정부와의 협의로 로디지아 보안군, 행정부, 사법부, 그리고 입법부의 1/3 의석에서의 기존 백인들의 공직을 유지하였다. 이로써 같은 해 6월 12일, 미국 상원이 로디지아에 대한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데 결의하였다.
1978년 3월, 스미스 정부는 아벨 무조레와 주교의 주도하에 세 명의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합의를 도출하였다. 합의의 결과로 1979년 4월 총선이 실시되었고, 아프리카 연합 국민 회의(United African National Council, UANC)가 의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79년 6월 1일, UANC 대표 무조레와가 총리로 부임하면서 국명이 짐바브웨 로디지아로 변경되었다.
4) 짐바브웨의 독립 이후(1980~현재)
짐바브웨의 독립 직후 카난 바나나가 초대 대통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역할은 국가 원수로서의 의례만을 담당하였다. 한편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 연합(Zimbabewe African National Union, ZANU) 대표 로버트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첫 총리이자 행정수반으로 부임하였다.
짐바브웨 마테벨렐란드 지역에서 무가베 정권의 출범을 쇼나족의 정권 탈취로 바라보게 되며 반정부주의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후 마타벨레란드 지역에서 은데벨레인들과 쇼나족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는 구쿠라훈디(쇼나어: "봄비가 내리기 전에 일찍 겨 씻어내는 비") 대학살로 이어졌다. 짐바브웨 총리가 직접 보고를 받으며 북한의 군사훈련을 받은 정예부대인 짐바브웨 제5여단은 마타벨렐란드에 진입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을 "반체제 인사"들을 지지하였다는 혐의로 학살하였다. 5년 동안 지속된 구쿠라훈디 작전 동안 사망자 수가 20,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무가베와 ZANU-PF당은 1990년 3월 총선에서 120석 중 117석을 차지하였다. 1990년대부터 학생, 노동조합, 그리고 노동자들이 무가베 정권과 ZANU-PF의 정책에 대한 불만이 커지며 시위가 잦아졌다. 1996년, 공무원, 간호사, 그리고 의사들이 봉급 문제로 파업을 시작했다. 잇따라 짐바브웨 국민의 전반적인 건강이 현저한 변화를 보였고; 1997년에는 전체 인구의 25%가 당시 남아프리카 지역에서 유행하였던 HIV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토지 재분배 문제도 다시 한번 ZANU-PF 정권의 주요 국정 과제로 떠올랐다. 1980년대부터 토지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해왔으나, 여전히 전체 인구의 0.6%가 짐바브웨 전체 농지의 70%를 차지하였다.
2000년, 무가베 정권 때 독립운동의 퇴역군인 중 짐바브웨 상비군에 예편되지 못한 상당수의 퇴역군인이 백인농장을 무단 침입 점거하는 일이 대규모로 발생하였다. 그러나 무가베는 그들을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백인 농장주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그 토지를 소수 백인 인구에게서 대다수의 흑인 인구로 재분배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토지를 매입하는 패스트트랙 토지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였다. 백인 소유의 농지를 몰수하자 짐바브웨 경제의 근간인 농업의 기반이 무너져버리고 잇따라 농산물과 관련된 400개의 회사가 도산하고, 13,500명이 일자리를 잃고, 45명의 농장 일꾼들이 일을 잃게 되었다.
2003년, 짐바브웨의 경제가 붕괴되었고 2005년 짐바브웨 총선 직후, 짐바브웨 정부는 "무람밧스비나 프로젝트"를 시행하였다. 정부는 이 프로젝트가 짐바브웨의 도시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불법 시장과 빈민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고 변명했으나, 이 프로젝트는 야당(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MDC)의 표가 집중되어 있다고 의심되는 지역에 행해졌고, 이로 인해 70만 명의 도시인구가 무주택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2008년 3월 29일, 짐바브웨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함께 실시하였다. 선거 결과는 2주 동안 보류되었는데, 이는 당시 민주 변화 운동-샹그라이(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 - Tsvangirai, MDC) 정당이 짐바브웨 의회에서 1석 차이로 과반수를 차지하였다고 알려진 이후에 발생한 조치였다.
무가베는 2013년 열린 짐바브웨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하였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이 선거를 "조작된", "도둑맞은" 선거라 표현하였다. 2014년 12월 열린 ZANU-PF 당 회의에서 무가베 대통령이 연설 도중 실수로 야당이 2008년 선거 당시 73%를 득표한 사실을 밝혀 논란이 일었다.[ 무가베와 ZANU-PF 정권은 재집권 이후 일당제를 재도입하고 공무원 수를 2배로 늘렸다. 당시 이코노미스트는 이에 대해 "실정과 휘황찬란한 부패"에 착수하였다고 보도하였다.
2017년 11월, 당시 짐바브웨 부통령 에머슨 음낭가과가 해임된 직후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무가베를 가택 연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군부는 자신들의 행동이 쿠테타가 아니라고 부인하였다. 무가베가 2017년 11월 21일에 사임하게 되면서, 37년간의 무가베의 독재도 끝나고 현재는 당시 부통령이었던 에머슨 음낭가과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다.
1) 대통령중심제
2) 국가수반
3) 의회
1) 짐바브웨는 다양한 광물자원 및 풍부한 관광자원은 물론, 과거 비교적 발달된 제조업 및 대규모의 상업 영농 등 우수한 농업 기반 등을 보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남아공 다음으로 산업화의 기반과 국제경쟁력을 잘 갖춘 것으로 평가됨.
2) 짐바브웨 경제는 독립 후 10여 년간 서방 국가들의 원조와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지원 등에 힘입어 건실한 성장세를 이어갔으나, 1990년대 최악의 가뭄 사태로 인해 경제상 황이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90년 후반 토지개혁 강행으로 불거진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대외 원조 및 자금지원이 중단된 데다, 통제 일변도의 경제정책으로 실물 및 금융경제가 심각하게 왜곡되면서 '99년 이래 9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및 세계 최고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기록하는 등 독립 이래 최악의 경제난에 직면함.
3) '09년 초 통합정부를 구성한 뒤 짐바브웨 달러를 포기하고 복수외환 통화제도를 도입하여 경제가 점차 호전, ‘10년에는 6.9% 플러스 성장으로 복귀하였으나 경제기반 붕괴 및 수출 감소 등으로 ’16년부터 성장 폭이 둔화함.
4) 음낭가과 신정부는 Vision 2030(2030년 중소득국가 진입)을 목표로 세우고 제1차 5개년 경제계획(2021~2025), 제2차 경제계획(2026~2030)을 발표함. 음낭가과 대통령은 재정경제개발부 장관에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부총재를 역임한 미툴리 은쿠베를 임명하고 신정부 경제 운용의 주요한 역할을 부여함.
5) '18년 10월초 신정부 금융당국은 재정적자 대응 및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으로 외환 계좌 분리 운영, 전자화폐 거래세 인상을 골자로 하는 경제정책을 발표하였으나 시장에서는 물가 급등 및 물품 부족 현상 등이 발생함.
2008.3월 경제적 자립 능력을 갖추지 못한 짐바브웨 흑인들의 경제적 권한을 확대하기 위해 제조업, 광업, 금융업, 관광업 등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활동하고 있는 기업의 지분 51%를 현지인(흑인)에게 의무적으로 양도하는 내국민 지분 확대 정책을 도입했다. 내국민 지분확대 법은 50만 달러 이상 투자기업을 대상으로 독립 이전 짐바브웨 토착민에게 지분의 51% 이상 이전 의무를 부과하나, 집행에 있어 주무장관에게 광범위한 재량을 위임,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이 심히 결여되어 외국인 투자 유입의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2017년 11월 24일 취임한 음낭가과 대통령은 경제개혁 조치의 일환으로 12.7(목) 내국민지분 확대법상 51% 지분 양도 비율은 다이아몬드 및 백금 채굴 분야에만 적용하고, 여타 광물 채굴 및 여타 산업부문에는 적용하지 않도록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Shona와 Ndebele의 전통은 모든 생명체를 감독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창조주를 인정한다. 쇼나 신은 '므와리'로 알려져 있고 은데벨레 신은 '우믈리무'라고 불린다. 조상(Shona의 vadzimu 또는 Ndebele의 amadlozi)과 사망한 추장(mhondoro)의 영혼이 삶에 영향을 미치고 공동체에 계속 존재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다. 살아있는 사람은 그들을 볼 수 없지만 그들은 그들의 후손을 돌보고 그들의 경험을 공유한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조상의 영과의 의사 소통은 일반적으로 무당, '냥가'(주술사) 및 커뮤니티의 힘 있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1) 식민지 이전 시대
• 최초 개신교 선교
1800년대의 짐바브웨 개신교 선교는 주로 남아프리카에 사역하고 있었던 선교사에 의해 진행되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19세기 역사는 일련의 북향운동으로 특징지어진다. 경제적, 정치적, 인종적 요인이 모두 이 '트레킹'에 역할을 하였다. 남쪽에서 '아프리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그들은 또한 트란스발, 림포포 및 그 너머로의 선교 확장에 참여했다. 쿠루만에서 쇼숑을 거쳐 불라와요와 짐바브웨까지 가는 마차 선로조차 '선교사의 길'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선교의 처음 문을 열게 한 사람은 로버트 모펫 선교사였다. 1859년 12월 은데벨레 추장이었던 음질리카지는 로버트 모펫에게 미션기지를 세울 수 있도록 허가. 음질리카지와 로버트 모펫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펫은 1817년 런던 선교사회 소속 남아프리카 선교사로 파송되어 쿠루만 지역에서 사역하고 있었다. 1829년 음질라카지( a Zulu offshoot)는 두 명의 부하들을 보내 쿠루만 지역을 둘러보게 하였는데, 은데벨레족에 대한 반감이 큰 지역을 무사하게 통과시키기 위해 모펫이 직접 동행한 것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간직하고 우정을 쌓기 시작했다.
2) 식민시대
• 식민 지배 직전의 선교
1889년에 짐바브웨의 정치적 그림이 크게 바뀌었다. 로벤굴라왕은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보호를 받아들이고 같은 해에 영국인은 샤이어 고원에 대한 보호령을 선언하고 말라위(Nyasaland)를 인수했다. 지금의 잠비아 Barotseland의 왕은 왕국 전체에 걸쳐 회사에 광물개발권을 부여하는 서류에 서명함으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보호령이 되었다. 1890년, 200명의 병력을 보유한 Rhodes의 'Pioneer Column'이 마쇼날랜드(Mashonaland)를 침공하여 Fort Salisbury(지금 짐바브웨의 수도인 Harare)에 영국 국기를 게양했다. 은데벨레와 쇼나족은 1893년 마테벨레 전쟁과 1896년 쇼나 반란과 은데벨레 반란, 두 차례의 전쟁이 뒤따랐지만 화력이 우세한 영국식민군에게 당해낼 수 없었다. 로벤굴라(Lobengula) 왕은 어느 날 LMS 선교사에게 "카멜레온이 파리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카멜레온은 파리 뒤에 숨어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혀를 내둘러 파리를 잡아먹습니다. 영국은 카멜레온이고 나는 그 파리입니다." 로벤굴라의 치욕적인 군사적 패배로 은데벨레, 쇼나 족의 왕은 실질적인 힘이 없었고, 두 종족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불행하게도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영국이 짐바브웨를 지배하게 된 것이며 그들의 영향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은 영국식민군에 대한 전쟁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기독교 개종자들에 대한 핍박을 하기 시작하여 몇 사람의 희생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런 믿음은 후에 짐바브웨 독립전쟁시 드러나게 된다. 마쇼날랜드에서 여성주술사 네한다(Nehanda)는 기독교의 신을 거부하면서 죽었는데 많은 추종자들은 네한다의 영적도움으로 게릴라전투에서 승리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다고 믿고 아프리카 전통종교의 수호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 식민 지배 후의 선교
1890년 초에 짐바브웨 지역에 백인 선교사가 거의 정착하지 않았지만 1897년에는 20개 이상의 선교회(형제회, 감리교, 베를린 선교회, 화란개혁교회, 제칠일 안식교, 영국성공회, 카톨릭 트라피스트 선교회, 미국 해외선교회, 뉴질랜드 그리스도교회 등)가 남 로디지아로 입국하였는데 대부분 남아프리카에서 온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식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3000-12000에이커 이상의 미션 기지들을 확보하여 젊은이들의 교육을 중요한 선교전략으로 삼고 일부다처와 결혼 지참금 제도를 기독교의 거침돌로 여겨 집중 공격하였다.
• 부흥 운동과 아프리카 독립교회 탄생
짐바브웨 교회에 두 차례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미국감리교 선교회는 개종자를 얻기 위해 캠프미팅을 자주 사용하였다. 1918년 모잠비크 국경 근처의 동네인 마니야카에서 가졌던 감리교 캠프미팅의 부흥회에서 회개와 울부짖음, 회심이 대규모로 일어났으며 1928년에는 감리교 캠프미팅에서 제2차 부흥 운동이 일어나 특별히 여성들을 부흥시켜 제2차 부흥 운동 이후 여성 모임이 결성되었다.
매우 이례적인 것은 같은 감리교 부흥운동이 강성했으나 시들해진 바로 그곳에서 아프리카 독립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첫째, 죠안 마조에(Johane Masowe)는 Vapostori(Apostles) sect를 만들고 감리교의 간헐적 캠프미팅 대신 계속적인 캠프미팅 같은 모임을 가져 회개와 귀신을 내어쫓고 주술사의 공격에서 보호하는 의식을 하였다. 이들은 선교사들의 비판에 대해, 선교사들은 귀신을 내어쫓는 능력이 없다고 대응하며, 그 세력을 남아프리카부터 케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곳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둘째, 죠안 마조에의 밥포스토리 섹트가 생겨난 지 수 십년 후에 귀신 들림, 주술사 통제, 병 고침을 강조하며 교육이나 의술을 등한시한 죠안 마랑케(Johane Maranke) 섹트가 일어났다. 셋째, 화란 개혁교회의 선교지역에서는 Samuel Mutendi의 Zion 교회가 생겨났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아프리카 독립교회는 민간신앙을 기독교에 통합시켜 혼합주의로 변질하게 되었다.
3) 후기 식민시대(1980~현재)
짐바브웨가 독립된 이후, 교회도 자조 자치 자전을 더 많이 바라고 있지만 교회운영과 선교활동을 위해 여전히 외국 선교사의 자원에 의존하고 있다. 독립 이후 무가베 대통령의 정치 경제정책의 실패로 경제가 붕괴되었기 때문이며, 아울러 에이즈로 인해 복음주의 계열의 선교사들이 계속해서 입국하여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에 집중하고 있다.
4) 코로나 이후 시대-현재 상황
2019년 코로나 발생 이후 짐바브웨는 의료시설의 열악화로 인하여 치료받으면 살 수 있었던 사람도 치료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의료시설의 확충과 적정한 임금지불을 위하여 의료파업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마땅한 의료체계가 갖추어지지 않은 이 나라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라 전체를 봉쇄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강제적으로 제한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이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지만 현재는 봉쇄가 풀렸고 정상적인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현재 얼마나 많은 사람이 코로나에 감염되었는지 정부의 통계가 발표되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국민들은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짐바브웨 통화는 짐바브웨 달러와 미국 달러를 같이 사용하고 있고 짐달라의 환율은 시간이 갈수록 오르고 있고 물가도 더불어 오르고 있는 추세이다. 국민들은 물가 변화에 맞지 않는 봉급 수령으로 인해서 고생하고 사회는 범죄가 성행하는 경향이 있다.
내년에는 짐바브웨의 대선이 있는데 국민을 사랑하는 지도자가 당선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국민이 평화롭게 사는 나라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