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화국/South Africa
2001년에 남아공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왜 꼬옥 그렇게 먼 아프리카로 가려고 하니? 삭막하고 위험한 나라로 말이야.
가까운 아시아로 가면 안되겠니?”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담긴 부탁이었습니다.
그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남아공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아버지,
저는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삭막하고 위험한 나라로 가는 것도 아니구요.
주님이 허락하신 영원한 삶을 살기위해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약속의 땅으로 갑니다.”
아들의 대답에 아무 말씀 없으시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막상 남아공에 와보니 남아공은 삭막하고 황페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사자가 길거리에 걸어다니고, 코끼리가 아침, 저녁으로 인사를 하는 곳도 아니었구요.
사람들이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 다니지도 않았습니다.
남아공은 아름다운 대자연이 살아있고,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하고.
우기가(비오는 계절) 있어 땅에서 자라는 과일들도 풍성한 땅이었습니다.
또한 비가 온 후에는 여지 없이 무지개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땅, 무지개의 약속이 있는 땅 남아공을 소개합니다.
무지개의 나라,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남아공 이야기
1. 이름도 아름다운 “남아공”
먼저, 남아공이라는 이름부터 이야기 해 볼까요?
“남아공”
정식 이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입니다. 영어로는 “Republic of South Africa”이구요.
이름에도 알 수 있듯이 남아공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럼 남아공은 어느 곳에 있을까요? 이름에 그 힌트가 있어요.
“남아프리카” 그렇습니다. 아프리카의 남쪽에 있는 아프리카입니다.
남아공은 아프리카 최남단에 있습니다.
2. 남아공은 민주공화국입니다
종교에 자유가 있고 재산의 사유화가 인정되며 성인이 된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지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이 선거권이 모든 남아공 성인들에게 주어진 것은 1994년 대통령 선거부터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선거권을 소유하기 위해 남아공은 1913년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이 1945년 이후부터 국가 정책이 되고, 이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흑인과 컬러인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 고통의 시간속에서 위대한 남아공의 인물인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우리들 역사속에 나타납니다. 넬슨 만델라의 삶은 남아공의 민주화의 시작이고 과정이었습니다. 흑인과 컬러인도 사람이라는 주권을 회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이었습니다.
3. 남아공 국기
6가지 색을 나라의 국기로 사용하는 나라는 세계에 남수단과 남아공 뿐입니다.
남아공의 국기는 1994년 4월 27일,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중단하면서 남아공을 통합할 수 있는 새 옷을 입개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1994년에 새롭게 채택된 국기의 6가지 색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차 국기의 디자인과 색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의미들을 부여하기 시작했습니다.
* Y자 모양은 나라의 통합을 뜻하고,
* 빨강은 전쟁과 여러 분쟁에서 흘린 피,
* 파랑은 하늘과 바다,
* 녹색은 농장과 자연 환경,
* 노랑은 남아프리카의 자원, 특히 금을 상징하며,
* 검정은 남아프리카의 흑인과 아프리카를,
* 하양은 남아프리카의 백인과 평화를 나타냅니다.
이 남아공의 새국기에 대한 의미를 읽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4. 남아공 인종과 인구
남아공에는 크게 3부류의 인종이 있습니다. 흑인, 백인 그리고 컬러인입니다.
남아공 인구는 2011년 통계로 5천 1백 8십만 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중에 인종 분포는 아프리카: 79.2%. 컬러인: 8.9%. 백인: 8.9%.(출처: The Department of Communications. South Africa. Web page; http://www.gcis.gov.za)
남아공 국기 색의 의미를 보면, 흑인과 백인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남아공 국민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국기에 컬러인은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인구 분포는 컬러인과 백인이 같은 8.9%인데도 말입니다. 여전히 남아공이 인종 차별적인 요소가 매우 심각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남아공 인구에 관해 좀더 나누겠습니다.(출처: The Department of Communications. South Africa. Web page; http://www.gcis.gov.za)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통계를 보면 흑인의 인구는 점차로 늘고 있고 컬러인은 답보 상태이며 백인은 줄고 있습니다. 백인 인구의 축소는 남아공의 백인 커뮤니티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5. 언어
11개의 언어군이 있고, 영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6. 종교
통계를 보면 남아공 기독교 비율은 73%입니다. 하지만 토속 종교와 융합된 쉠베(Shembe) 세인트존스(St. Jones)를 비롯하여 전체 기독교의 40.8%를 차지하는 거대한 이단 집단인 시온주의자, ZCC(Zion Christian Church)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아공의 실제 기독교 비율은 개신교 34%,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19%입니다.
(참조: http://ko.wikipedia.org/wiki/남아프리카_공화국#cite_note-7 원출처:Johann Symington, ed., South Christian Handbook, 2005.)
기독교가 처음 남아공에 유입하게 된 것은 1652년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보어인(농민)이 이민해 오면서부터였고(대부분 장로교인), 그 후에 영국의 식민 정책과 아울러 성공회를 비롯하여 영국 장로교와 감리교, 침례교 등이 함께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정권을 장악한 백인은 흑인 원주민을 자신들과 차별을 두기 위하여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이용하였으며, 교회조차도 백인의 흑인 지배원리에 종교적으로 힘을 실어 주는 잘못을 범하기도 했습니다. 그 실례로 남아공 개혁교회의 인종차별을 정당화한 잘못을 이단적인 행위 곧 기독교의 교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현재 남아공의 기독교 교단 대부분은 정체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는 반면 계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단은 남아공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독립교단입니다. 서양 열강의 식민정책과 아울러 함께 들어온 기독교가 남아공 전지역에 걸쳐 쉽게 정착은 하였으나, 식민정책이 끝이 나면서 반기독교 정서와 정책으로 무슬림 지역으로 변하거나, 전통 종교와 혼합된 이른 바 혼합주의(Syncretism) 기독교의 형태로 바뀌고 있습니다.
남아공에서의 복음 전도의 걸림돌은 여전히 인종차별정책입니다.
교회가 인종차별은 앞장서서 선언했다는 것은 모슬렘들에게 매우 큰 모슬렘 전도도구가 됩니다. 또한 그 인종차별로 상처 받은 흑인과 컬라인들은 반기독교적 성향을 띄고, 타종교에 호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1945년 이후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은 종교적 그리고 법적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우선 백인 신도가 대부분인 네덜란드 개혁교회(DRC, Dutch Reformed Church)에서는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정책)를 통한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는데, 이를테면 바벨탑 사건을 해석할 때 바벨탑을 쌓은 인간들이 야훼의 징벌로 흩어졌으니, 인종분리정책으로 흑인, 아시아계 등의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했던 사례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정의(Justice)와 평등의 실천은 ‘민감한’, ‘미묘한’ 등의 단어를 통해 회피할 정도로 백인 기독교 신자는 그들이 만들어낸 인종차별 문제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제도적으로도 1961년 헌법 개정, 20여 개에 달하는 인종차별 법안 제정과 개정이 행해졌는데, 하나같이 흑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간주하여 차별을 정당화하는 악법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흑인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폭력 항쟁으로 백인의 부당한 지배와 차별에 저항했는데, 1961년 샤프빌 항쟁, 1976년 소웨토 항쟁, 1986년 인민 항쟁이 이에 해당됩니다. 이에 대해 백인은 흑인 항쟁의 배후에 공산주의가 있다는 공산주의자 딱지 씌우기, 경찰과 정보기관의 탄압과 종족간 분쟁 유도로 흑인의 항쟁을 잔악하고 교활하게 탄압했습니다.(참조: http://ko.wikipedia.org/wiki/남아프리카_공화국#cite_note-7)
▶첨부파일을 참고하세요.
이러한 상황에도 여전히 남아공은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Religion_in_South_Africa)
* 2001년에 80%이던 기독교가 단지 6년 만에 73.5%로 축소됩니다.
* 기독교 인구가 73.5%라고 하지만 아프리카 이단 교회를 제외한다면 상당히 범위가 작아집니다.
* 불교가 중국인들의 유입으로 새로운 종교로 생성되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상황은 백인들 사이에서도 불교가 기독교를 대신하는 종교로서 남아공에서 인식이 되기도 합니다. 기독교에 상처를 받은 백인들이 모슬렘으로 가지 않고 불교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 아프리카 전통 종교의 급성장은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아프리카 전통 종교는 아프리카 무당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료로서 첨부할 수는 없지만, 남아공 라디오 방송국에서 시사 정보 시간에 남아공 인구의 95%는 일년에 한번은 아프리카 전통 종교인 그러니까 무당을 찾아간다고 합니다.
* 모슬렘은 주로 컬러인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백인들에게도 무시당하고 흑인들에게도 외면당하는 컬러인들에게 모슬렘은 직업을 얻을 수 있는 매우 좋은 종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7.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 9, May, 1828 ~18, January, 1917)
남아공 기독교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1860년대의 남아공 부흥의 주역입니다. 특별히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우스터(Worcester)라는 농촌 지역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사건으로 우스터에서 시작된 부흥이 남아공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이 앤드류 목사님의 노후에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에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또한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선교단체를 세워 훈련하고 파송도 하였습니다.
1889년, 앤드류 목사님은 “the South African General Mission (SAGM)”을 세웁니다. 그리고 표어를 “아프리카를 하나님께로”라고 정하고 아프리카 선교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 일어납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이 1917년 1월 17일에 하나님 품으로 가시고 나서, 남아공 교회는 해외 선교보다는 점차 자국내 교회 운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인종분리정책(인종차별정책)을 시작하는데 많은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 밖의 영혼들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고 교회 운영에만 관심을 갖게 될 때에 그 나라와 그 나라의 교회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선교사 파송은 백인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남아공 교회들이 지난 과거의 잘못을 회개하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인종들이 섞여서 예배를 드리는 남아공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도 백인 교회, 흑인 교회, 컬러인 교회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10여 년 사이에 남아공 기독교에 좋은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남아공에서 해외로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서서히 선교사역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2010년 세계 각국 선교사 파송 현황에 보면 남아공은 1,465명의 해외선교사를 파송한 나라로 나옵니다.
언젠가는 남아공이 다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의 사랑과 화합의 마음이 온전히 회복되어, 교회가 연합하여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남아공이 다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아프리카의 아름다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전히 인종사이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경제는 불평등의 대명사가 되고 있고 범죄율이 상당히 높은 나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도 살아 있는 주님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기도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한사람이 귀한 나라, 남아공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부흥을 기다립니다.
정리 및 보고
김종우 김현주 선교사(남아공 주재 바울선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