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 (Republic of Guinea)
변성철, 지은선 선교사
(서부 아프리카 기니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기니 일반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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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명 |
기니공화국 Republic of Guinea |
정치형태 |
삼권 분립, 대통령 직선제 임기 5년 연임 가능 |
면적 |
245,857㎢ 한반도 전체 크기 정도 |
인구 |
약 12,121,600명 남한의 1/4 정도, 40여 종족으로 구성됨 |
기후 |
열대성 기후. 우기 5~10월 서북풍의 몬순형 |
종교 |
이슬람교 89.1%, 기독교 6.8% 개신교 약 2%, 정령숭배 등 4.1% |
1인당 국민소득 |
$926 남한의 1/43 |
수교현황 |
대한민국과 2006년에 아프리카 53개국 중 마지막으로 수교 주 세네갈 대사가 임명함 |
국기
빨강:독립 운동의 피
노랑: 기니의 부요, 태양
초록:기니의 산림
기니 공화국Republic of Guinea은 서아프리카의 대서양 연안에 있는 나라다. 기니비사우, 세네갈, 말리, 코트디부아르,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수도는 기니 주요 항구도시인 코나크리Conakry이다. 이웃 나라인 기니비사우와 구별하기 위해 때로 기니코나크리Guinea-conakry라고도 부른다.
기니는 자연 환경적으로 높은 기니, 중간 기니, 숲 기니, 해안가의 낮은 기니로 나뉜다. 먼저 높은Haute 기니는 고온 건조하여 우기 때를 제외하고는 푸르름이 거의 없는 곳이다. 중간Moyenne 기니는 기니의 중심 지역이며 기후가 비교적 선선하여 풀라족이 남하해 원주민들인 쑤수족을 해안가로 쫓아내고 정착한 곳이다. 기니 사람들은 그곳을 기니의 유럽, 기니의 스위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부 숲기니 Forestiere 지역은 이름처럼 숲이 울창한 곳이다. 기니에서 가장 높은 Nimba 산1,752m이 코트디부아르 국경지대에 있다. 낮은 또는 해안Basse, Maritime 기니는 대서양 해안가 주변으로 강수량이 많고 습도가 높다. 숲이 많은 기니에는 여러 강들의 수원지가 있다. 대표적으로 말리, 니제르, 나이지리아까지 4,180km를 흘러가는 니제르강의 수원지가 있고 감비아강과 서아프리카에서 가장 긴 세네갈강의 수원지가 있다.
1) 15세기 이전
기니는 서부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형성된 커다란 아프리카 제국들인 가나Ghana, 소쏘Sosso, 말리Mali, 송하이Songhai 제국들 안에 속해 있었다. '흑인의 부'라는 기니 이름의 뜻처럼 기니 지역이 부귀영화를 누리던 시기는 말리제국 때였는데 말리제국 초기의 수도가 현재 기니의 말링케 종족이 많이 사는 지역에 위치했었다.
2) 식민지 시대 15세기~19세기
(1) 풀라 종족의 이주와 풀라니 제국 : 유목민이자 강성 무슬림인 풀라족이 푸타잘롱 고원지대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16세기부터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풀라족은 풀라니 제국을 건설했고 1725년 이 지역 주민들을 이슬람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지하드성전를 전개했다. 풀라니 제국은 19세기까지 존속했다.
(2) 노예무역 : 노예무역은 15세기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지만, 성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16세기부터이다. 포르투갈인들은 노예와 함께 향신료, 야자기름, 금과 상아도 거래했는데 그때 당시 기니 사람들은 화폐를 알지 못했기에 구두, 총 등과 같은 제조품과 물물교환을 하는 식으로 거래가 성립되었다. 사실 아프리카는 다양한 종족 사회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종족 간의 갈등과 싸움이 잦았고 종족끼리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잡은 포로들을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아프리카의 노예는 주인과 함께 살면서 농사를 지을 뿐 신분상으로는 일반인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대륙에서 노예의 삶이 얼마나 가혹한지 모르고 상인들에게 사람들을 넘겨주는 일이 많았다. 이런 노예무역은 약 30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3) 프랑스의 식민지배 : 1849년 프랑스군의 기니 해안지대 진출로 기니는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고 세네갈과 함께 통치된다. 1890년 프랑스는 세네갈과 분리하여 기니의 이름을 프랑스령 기니French Guinea로 개명하고 코나크리를 수도로 정한다. 1895년에는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연방에 편입되었다. 이 무렵 풀라니 제국은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프랑스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기니 내 각 지역의 저항 세력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 국가적인 영웅인 알마미 사모리 뚜레가 이끄는 군대의 저항운동은 1898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46년 기니는 결국 프랑스의 해외영토가 되었고 사모리 투레의 손자로 사회주의자인 아메드 세쿠 투레가 노동운동을 통해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3) 독립 1958.10.2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식민지에 프랑스 공동체에 가입하고 자율성을 갖는 것과 즉시 독립하는 것에 대한 선택권을 주었는데 기니는 '족쇄로부터 자유와 가난으로부터의 자유!'라 외치며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 중 독립을 선택한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분노한 프랑스는 모든 인프라를 파괴하고 심지어는 전화선까지 끊고 기니 내의 모든 프랑스 시민들을 철수시켰으며 프랑스인들의 자본 유출로 인해 기니의 경제는 붕괴했다.
4) 독립 이후
독립 후 사회주의를 선택한 기니는 처음에는 소련과 동조했으나 소련 대사가 내정에 간섭한다는 이유로 추방하며 소련과의 관계를 끝내고 중국과 더 가까워지면서 정부 운영 농장과 혁명당원들의 매주 회의가 생겨났다. 그 결과 백만 명 이상이 일을 찾기 위해 타국으로 떠나게 되면서 경작지의 25%만이 경작되어 기니에는 기근이 닥쳤고 미국의 식량 원조를 받게 된다. 또한 초대 대통령인 아메드 세쿠 뚜레는 서방 세계에 대해 폐쇄정책을 폈으며 중국을 모방하며 일으킨 문화혁명으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였다. 특히 반대 세력인 풀라 종족 정치인들을 심하게 억압하여 약 5만 명의 사람들을 감옥에서 아사시킨다. 이 시기에 인구의 25%에 이르는 기니인들이 망명을 위해 기니를 탈출하게 된다. 1970년에는 기니의 망명 인사들과 포르투갈군이 기니를 침공했으나 실패했다. 1967년에는 기니 땅에 들어와 사역하던 모든 선교사들이 모두 추방하였다.의료 사역 중이던 CMA는 제외 사실상 기독교 선교의 암흑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1984년, 아메두 세쿠 뚜레 대통령의 죽음으로 26년간의 독재가 끝나고 란사나 콩테를 수장으로 한 대령들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그는 즉시 이전 정권 기록들을 비난하고 정치범들을 풀어주며 망명자들에게 돌아올 것을 권장했다. 또한 서구 세계와의 관계를 완화하고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민심을 얻기 위한 것이었고 나라의 빈곤은 나아지지 않았고 민주주의로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도 역시 온갖 부정부패로 2008년까지 장기집권을 했다.
2008년 12월 24일 란사나 콩테 대통령의 갑작스런 사망 이후, 무사 다디스 카마라 대위가 무혈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처음에는 임시 대통령으로서의 역할만 감당하겠다고 약속했던 무사 대통령은 마약 소탕 및 기니의 지하자원을 강대국이 착취해 갈 수 있는 불평등한 계약들을 모두 파기하고 새롭게 계약하도록 하는 등 기니의 소망이 되었다가 당초 약속을 무시하고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것으로 국민들의 실망을 샀다. 또한 2009년 9월 28일, 코나크리의 한 스타디움에서 열린 대규모 반대 시위에서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하여 156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 여자들을 납치, 성폭행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러 국내 및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궁지로 몰렸다. 그 후 무사 대통령은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 기도를 당해 머리에 총상을 입고 모로코로 이동,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현재 기니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독립 이후 최초의 자유롭고 공정한 대통령 선거는 2010년에 치러졌다. 알파 콩테 대통령은 기니 최초의 민선 대통령으로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대통령 공화국 체제로 대통령과 주요 관료, 공무원이 나라를 이끌어 간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서로 분리되어 견제하는 삼권분립체제이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고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다. 국회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기니의 정치는 아직까지 불안하다. 야당의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고 있고 그때마다 시위대와 군, 경찰의 과격한 무력충돌로 인해 사망자가 수명씩 나오고 있다. 특히 시위가 많이 이루어지는 수도 코나크리의 주요 교차로에는 무장군인과 경찰들이 24시간 상주하며 시위를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2020년 알파 콩테 대통령의 임기가 끝난다. 그러나 2019년 현재, 집권당 내부에서 3선장기집권이 가능하도록 헌법을 개정하는 시도들이 있어서 다시금 정국불안이 예상되고 있다.
1) 종족과 언어
기니는 약40여개의 종족이 있는데 주요 종족은 풀라34.6%, 말링케29.4%, 수수17.7%이다. 공용어로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각 종족마다 언어가 다르다. 실생활에서 종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각자의 종족어를 사용한다. 뿐만 아니라 각 종족들은 자신들만의 고유의 풍습,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필자가 시골 마을에서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고 자기 종족어만 할 수 있는 왓수룽족 사람들과 게르제족 사람들과 같이 생활한 경험이 있는데 서로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그들 사이의 여러 문화들도 다른 것을 보면서 신기해했던 경험이 있다.
2) 일부다처제
무슬림이 대다수인 기니의 특성상 코란에서 4명의 아내를 허용했다는 이유로 일부다처제가 흔하다. 실제로 2018년 12월 기니의 국회는 일부다처제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추진했었다. 그러나 알파 콩테 대통령이 이 법안에 반대하여 국회로 되돌려 보냈고 올해 5월 9일 『기니의 모든 시민들은 결혼제도로서 일부일처제를 따른다』라는 변경된 법이 채택되었다. 법률상 일부다처제가 완전히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 새로운 부인을 얻으려는 남자는 반드시 첫째 부인의 '명시적 동의'를 얻어야 한다. 이 개정법에 반대자들은 '무슬림이 대부분인 기니에서 일부다처제가 지도층을 포함한 사회 전체의 현실적인 흐름인데 이런 관습은 고려하지 않은 채 결정된 것'이라며 비판했다. 반대표를 던진 한 의원은 '기니는 여자가 남자보다 많으며 내 딸이 남편 없이 늙는 것을 볼 바에야 차라리 둘째나 셋째 부인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했다. 가장 최근의 인구조사2014년를 보면 100대 101.7명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약간 많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여성의 성비가 압도적으로 높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지금까지 만난 여성들 중에는 둘째나 셋째 부인이 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유는 남편의 사랑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 셋째 및 넷째 부인은 민법상의 첫 번째 부인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데, 특히 부모로서의 권리와 상속의 측면에서 그렇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기니의 15세~49세 여성 중 53.4%가 일부다처제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
3) 여성 할례
기니에서 여성 할례는 법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암암리에 시행되고 있다. 유니세프의 2016년 자료에 따르면 기니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 할례가 많이 행해지는 나라이다.15세~49세 여성 중 97%가 여성 할례를 경험함. 이들 중 60%는 5세~9세 사이에 여성 할례를 경험하고 0세~2세도 20%나 됨 병원에 가서 불법 시술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마을에서 유명한 조산사나 나이 많은 할머니에게 시술을 받고, 시술 도구는 비위생적인 면도칼, 가위 등으로 마취와 소독 의료장비 없이 행해진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통증, 출혈, 용변 장애 등의 합병증을 겪기도 하고 평생 대소변을 조절하지 못하는 부작용에 시달리기도 하며, 시술 중에 죽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부작용에도 계속 행해지는 이유는 '여성 할례가 여자의 성욕을 억제해 순결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준다, 절제를 한 사람만이 정숙한 진짜 여성이다' 등의 잘못된 사고가 남아있어 여성 할례를 하지 않은 사람은 문란하거나 부족한 여자라고 여겨져 결혼을 못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의 명예와 종교적인 이유로, 또는 전통문화이기 때문에 따라야 한다는 명목으로 엄마가 자기 딸에게, 할머니가 손녀에게 여성 할례를 강요하고 강압하고 있다.
4) 보건의료 상황
12개월이 되기 전에 사망하는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113명으로 높다.한국은 1000명당 2.8명 또한 예방접종을 받는 아이들도 많지 않다. 정부는 무료로 예방접종을 한다고 광고하지만 현실은 예방접종을 하는 의료종사자가 돈을 받고 약을 파는 경우가 많아 돈이 없는 사람들이 접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평균 기대수명은 60.02세이다. 말라리아와 주혈흡충, 결핵, 나병, 성병, 기생충 감염 등의 질병이 많으며 인구의 1%가 에이즈HIV/ADIS 감염자이다.
기니라는 나라를 전 세계에 알리게 된 사건 중 하나는 에볼라 바이러스이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에볼라 유행이 2014년 기니에서 시작해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등 세계 여러 나라로 퍼졌다. 2년 동안 기니에서만 3,805명의 감염자, 2,536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인접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은 만 명 이상의 감염자가 나왔지만 감염자 대비 사망률을 따져보면 기니가 66.6%로 가장 높다. 발병 초기, 에볼라의 존재를 부정하며 치료를 거부하고 나중에는 병원에 가면 장기를 적출하고 죽인다는 각종 루머로 국제 구호단체의 치료소를 공격하는 사건들도 있었는데 그로 인해 피해는 더 커졌다. 또한 주변국에서 국경을 폐쇄하고 많은 외국인들이 기니에서 철수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큰 손실을 입었으며 에볼라 고아와 같은 사회적 문제도 생겨났다. WHO는 2016년 6월 2일에 에볼라 종식을 선언하였다.
5) 음악과 춤
기니는 풍부한 음악적 전통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벰베야 재즈팀은 아프리카 특유의 포크 음악을 기반으로 재즈와 아프리카 팝 스타일을 혼합한 곡들을 제작하여 기니의 음악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기니 국립발레단은 아프리카 최초의 발레단으로 아프리카 댄스와 문화를 발레에 접목시킨 신선한 시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전체 인구의 36.2%가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며 그중에서도 전체인구의 단 22.6%만이 중등 과정 진학을 위한 학위를 취득한다. 초등교육을 마치지 못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재정적 문제이다. 국립학교의 경우 초등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이지만, 실제로는 육성회비, 책상새로운 학교에 들어갈 때 납부, 책원칙적으로는 무료, 학용품비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런 경제 능력을 가진 부모들이 많지 않다. 또한 재정적인 이유로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일터로 가야 하는 아이들의 어려운 삶도 있다. 두 번째 이유로는 열악한 학업 환경이 있다. 하나의 예로 국립 초등학교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한 반에 100~120명 정도의 학생이 수업을 받는데 교실이 작아 책상을 복도에까지 놓고 수업을 듣는다. 열악한 학업 환경은 낮은 학업의 질로 연결되며 학생들은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정도의 학업 능력을 갖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전체 인구의 14.9%만이 중등 교육을 받는다.
초등 6년 |
중등 4년 |
고등 3년 |
대학 3년 |
미취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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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수준(입학) |
36.2% |
14.9% |
6.5% |
3.2% |
63.8% |
학위 현황(졸업) |
22.6% |
12% |
5.6% |
3% |
기니 전체에 6개의 국립대학교와 12개의 국립 전문특화대학교가 있으며 그 외에 사립대학교도 계속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문맹률은 전체 인구의 65.7%로 수도 36%, 지방 70% 전체 인구의 1/3 정도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높은 문맹률은 공산주의 독재 정권의 교육 정책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있는데 프랑스로부터 독립이후, 식민지배의 잔재를 없애고자 프랑스어를 학교 교육에서 빼버렸고, 1984년까지 대학까지의 모든 수업을 기니의 8개 주요 종족어를 사용하게 하였다. 자신들의 언어를 사용한다는 취지는 좋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족어로 쓰여진 교육자료의 부족으로 초등교육까지만 주요 종족어 중 말링케 어로만 교육하게 된다. 사전 준비 없이 시작한 이 정책은 교과서의 부재에 선생님들의 실력 부족 등의 문제까지 겹쳐 실패한 정책이 되었다. 그로 인해 공교육의 기반이 무너졌다. 오히려 경제력이 있는 이들의 자녀교육은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사립학교에서 진행되었다. 또 한 가지 이유로는 코란학교를 들 수 있다. 수도에서부터 작은 시골 마을까지 이슬람 경전을 아랍어로 배우는 코란학교가 널리 퍼져있다. 종교적 이유와 경제적 이유로 부모들이 자녀들을 코란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
화폐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이후 과거 함께 프랑스 식민지였던 주변 국가들과 달리 기니프랑GNF을 사용 중이다. 기니는 비옥한 땅이 많고 지역마다 많은 양의 보크사이트, 철, 금, 다이아몬드 등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서아프리카의 잠재적 부국이다. 이점은 과거 프랑스로부터 독립 찬반 투표에서 반대투표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기니인들은 프랑스가 독립하더라도 지하자원 때문에 관계를 끊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독립 직후 프랑스는 모든 것을 끊어버렸다. 거기에 아메드 세쿠 뚜레 초대 대통령의 폐쇄정책과 사회주의로 인한 폐해로 경제 사정은 더 나빠졌다. 또한 많은 자원이 있고 지금도 그것을 계속해서 수출하고 있지만 현 대통령인 알파콩테첫 민주 정권 전까지 계속된 군부 정권과 오랫동안 사회 전반적으로 뿌리내린 부정부패로 인해 그 부가 국민에게까지 다 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일 인당 국민소득이 926달러로 기니는 아프리카 중에서도 최빈국 중의 하나이다. 그래도 기니 경제 상황은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GDP 연간 성장률이 에볼라가 발생했던 2014, 2015년 이후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2016 : 7.1%, 2017 : 8.2%, 2018 : 5.8%
자원 현황
보크사이트 |
알루미늄 원재료로 400억 톤 이상 매장 전 세계 매장량의 1/3 |
철광석 |
세계 2위의 철광석 생산국 |
금 |
매장량 190t |
다이아몬드 |
추정 매장량 5억 캐럿 |
우라늄 |
길이 2km, 폭 12m 광산 발견됨 |
기타 |
동, 아연, 니켈, 크롬, 코발트, 주석, 마그네슘, 납, 티타늄, 원유 및 천연가스 매장 |
수산 자원 |
기니 주변에 해안은 아주 좋은 어장이 형성되어 있음. 한국에 조기, 민어, 갈치, 갑오징어 등이 수출됨 |
기니인의 53%가 일차 산업인 농어업에 종사 중이다. 그러나 1996년에는 80%였었던 것을 보면 20년사이 많은 변화가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주요 농산물은 커피, 바나나, 파인애플, 야자기름, 땅콩, 목화 등이다. 내수 작물로는 카사바, 옥수수, 쌀 등이 재배된다. 주식이 쌀이지만 쌀의 대부분을 인도, 중국, 태국 등 아시아에서 수입해서 소비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는 쌀 가격이 수입산보다 30% 정도 높음을 통해 기니 농업의 변화를 유추해 보게 된다. 또한 이로 인해 도시화가 계속해서 증가함을 보게 된다. 도시화 36%
직종 |
농어업 |
상업 |
기술노동직 |
기타전문직 |
1996 인구조사 |
80.1% |
3.2% |
12.2% |
3.1% |
2014 인구조사 |
52.6% |
25.1% |
15.5% |
3% |
농, 어업과 함께 두드러진 변화를 보인 직종은 96년도에 3.2%에서 현재 25%로 성장한 상업이다. 실제로 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다. 대로변에 많은 상점이 있고 작은 상점에 3~5명이 기본적으로 일하고 있다. 게다가 구멍가게가 골목마다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이렇게 경쟁해서 얼마나 이득이 날는지 의문이 생길 정도이다. 기니의 자원 개발권이나 얼마 안 되는 공장들 그리고 큰 상권은 대부분 다국적 기업이나 레바논, 인도인 등 외국인이 소유하고 있고 작은 상점들은 풀라 종족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은 대부분 규모가 작고 수입대체 산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고 선교사 비자를 발급해주는 열린 무슬림 지역이다.
16세기 기니 내에서 강성 무슬림인 풀라 종족이 남하하여 푸타잘롱 지역을 차지하고 주변 지역 주민들을 강제 개종시킴을 시작으로 다수 종족의 이슬람화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현재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89% 이상이다. 무슬림의 일부다처제 및 다산으로 인해 무슬림의 숫자는 계속해서 자연 증가 중이다. 그러나 다수의 무슬림 구성에도 불구하고 기니는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명시되어있다. 또한 종교적 이유로 차별하는 것 또한 금지하고 있다. 기존 무슬림에게만 지급되던 성지순례 보조금이 2015년부터 가톨릭, 개신교에까지 지원되고 있다. 모든 종교단체는 라디오나 TV 방송국을 소유할 수 없다. 하지만 사설 라디오에서 다수인 이슬람 관련 프로그램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이단 포함는 전체 인구의 6.8%이다. 법적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다고 해서 절대다수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소수 기독교인의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수도의 경우 기독교인들이 집을 구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집을 구하고 계약서까지 썼더라도 또는 이사를 마쳤더라도 뒤늦게 기독교인인 걸 알게 되면 집주인이 주변의 다른 무슬림들의 눈치를 보며 계약을 파기하는 일이 허다하다. 지방의 경우 기독교 탄압은 조금 더 심하다. 종족별로 상이하지만 기본적으로 가족과의 단절, 경제적 단절, 사회적 단절, 그리고 기니 내 강성 무슬림 지역의 경우 살해나 전통적인 독약물을 복용시켜 정상인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위협이 있다. 2016년 말링케족 지역인 쿠르사에서 크리스찬으로 회심한 젊은이를 그 가족들이 죽이는 일도 있었고, 만디아나 지역에서 꿈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한 노년의 가장은 자녀들과 아내의 돌봄 없이 단절되어 오랜 시간을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모스크에 다녀오던 동네 사람들이 그의 집과 밭에 불을 지르는 일을 겪었다.
1) 기니 이슬람
기니의 이슬람은 정통 이슬람과는 많이 다른 민속 이슬람이다. 이슬람과 함께 오랜 전통으로 내려오는 미신적인 것들이 이들 신앙 안에 혼합되어 내재되어있다. 올해 초, 사우디에서 온 이슬람 선교사가 만디아나 지역에서 같은 무슬림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유는 이슬람 선교사가 이들 집 안에 있는 부적 등 토착화된 신앙을 강하게 비판하고 집들을 방문하여 그것들 불태웠기 때문이다.
민족 이슬람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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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능력) |
악마, 천사, Manna(비인격적인 힘) |
능력을 가진 사람 |
이맘, 마라부(주술사) |
능력의 대상 |
주문(주문, Charm), 부적 |
능력의 장소 |
메카, 성인의 무덤 |
능력의 시간 |
모하메드의 생일, 성지 순례 기간 |
능력의 인식 |
코란을 이용한 기도 및 기도문을 외움 |
2) 개신교 현황
1855년 성공회 선교사들이 처음 기니 해안지대에 도착하였고, 그 후에 프랑스 식민 통치와 함께 가톨릭이 들어왔다. 이후 복음주의 개신교는 1919년에 CMA 선교 단체를 통해 처음 선교를 시작하였다. 1967년~1984년까지 폐쇄정책에 의해 모든 선교단체가 추방되었지만 결핵, 나병 등의 의료사역을 하던 CMA 단체는 계속 남아서 사역을 할 수 있었다. CMA로부터 시작된 EPE 기니 교회는 현재 약 10만 성도의 교세로 성장하였고 올해 100주년 기념행사를 하였다. 그러나 남부의 산림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 키시 종족의 복음화는 서구 선교사가 아닌 인접국의라이베리아 먼저 믿은 사람들같은 종족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주변의 다른 소수종족들도 정령숭배 등에서 개신교나 가톨릭으로 회심하여 남부 산림 지역에 기독교인 수가 급성장하였고 현재 그 비율 또한 높다.28%. 가톨릭, 개신교, 이단 포함 그 다음으로 수도지역의 크리스천 비율이4.8% 높은데 대부분은 남부 산림지역의 기존 크리스천들이 도시로 이주한 경우이다. 현재 복음주의적 개신교인의 수는 약 200,000 명이고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6%에 해당된다. 하지만 이는 남부의 소수 종족 출신들의 높은 복음화율이 전체 인구에 반영된 결과이다. 다수 종족인 풀라, 말링케, 쑤수 종족의 기독교인은 0.1% 미만이다.
3) 한인선교사 현황
기니에서 한인 선교사의 첫 사역은 1999년경 풀라 종족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WEC 소속 2002년 Teachus 미션에서 파라나 지역에 학교를 세워 현재까지 사역 중이고, 2003년에는 컴미션 소속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왓수룽 등 미전도 종족을 대상으로 만디아나 지역에서 사역 중이다. 2010년 이후에는 수도 코나크리에서 태권도 선교, 대학생 사역, NGO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있다. 2019년 현재, 기니에 거주하며 사역 중인 선교사는 지방에 2유닛과 수도의 2유닛이 전부이다. 주변국들에 비해서도 한인 선교사가 적은 이유를 유추해보면, 아프리카 53개국 중 제일 마지막인 2006년에 한국과 수교가 이루어져 기니에 대한 정보가 많이 없었으며,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불어권이라는 것과 함께 사역 대상에 따라 현지어도 사용해야 하는 언어적 부담이 큰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과거 군부 정권 시절의 정국 불안과 2014년에 발생한 에볼라 사태가 한인 선교사 유입의 걸림돌이었다.
*참고로 한국에서 들어온 이단으로 구원파 박옥수 계열이 활동 중이다.
1) 외형적으로는 전체 기독교의 비율이 6.8%이지만 가톨릭과 이단을 제외하면 약 1.6%의 개신교인이 있다. 하지만 각 종족 간의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상황에서 소수 종족 크리스천들이 자발적으로 다수 종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건 이들이 타 문화권 들어가 선교사의 삶을 사는 것과 같다. 소수 종족들의 모임인 기니 교회가 다른 종족을 향한 선교에 눈이 열리고 선교사를 파송하도록 선교 동원과 선교관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2) 성경 번역이 완성된 종족이 적다. 주요 종족 중 쑤수족의 성경 번역이 완성되어 2019년에 배포를 시작하였고 풀라와 말링케 종족의 신약은 완성되었지만, 구약은 현재 번역 중이다. 기니 내에서 번역에 힘쓰고 있는 PBT 단체 선교사들을 위해 중보가 필요하다.
3) 높은 문맹률이 복음 전파와 기존 신자들의 영적 성장에 걸림돌이다. 기존 신자들 중에서도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문맹률을 낮출 수 있는 교육 개선이 시급하다. 또한 전통적으로 글로 정보를 얻는 것보다 귀로 듣고 보는 것이 더 익숙한 구전 문화권인 이곳에 복음과 말씀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종족어 별 오디오 성경과 복음 자료의 오디오, 동영상 개발이 필요하다.
4) 기니 전체에는 현재 약 100유닛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까지 기니의 미전도 종족의 수는죠슈아 프로젝트 30여 종족에 이른다. 기니는 직접 복음 전달할 선교사와 기니 교회의 선교의 문을 열어줄 일꾼들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