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유00 선교사
정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가 3,444㎞에 달한다. 면적은 33만 1,210㎢, 인구는 97,339,000명(2020년 현재), 수도는 하노이(Hanoi)이다.
주민은 베트남인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중국인과 53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베트남어이며, 종교는 불교가 80%, 가톨릭교가 9% 등이다.
베트남은 일당 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500석)이며, 정당은 공산당 하나이다.
위치: 아시아 인도차이나반도 동부
인구: 98,721,275명 (2020 추계)
수도: 하노이(Ha Noi)
면적: 331,210.0㎢, 세계 면적 순위 67위
공식 명칭: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기후: 열대몬순기후
민족구성: 비엣족(낀족) 85.7%, Tay 1.9%, Thai 1.8%, Muong 1.5%, Khmer 1.5%, Mong 1.2%, Nung 1.1%, Hoa 1%, other 4.3% (2009 est.)
note: 베트남 정부는 54개 민족을 인정함.
언어: 베트남어(공식), 영어(제2 언어로 점점 더 선호됨), 일부 프랑스어, 중국어 및 크메르어, 산악 언어(몽 크메르 및 말라요 폴리네시안)
정부, 의회 형태 사회주의 공화제, 단원제
종교: 불교 70%, 로마가톨릭 10%
화폐: 베트남 동(₫)
국화: 연꽃
전압: 220V / 50Hz
1인당 국민소득: 2,590$(2020)
세계사적으로 다른 인근 국가들의 기록에 꾸준히 등장하며, 기록을 남기고 관찰할 만할 정치 체제가 세워진 건 조타를 시조로 진나라-한나라 시절 장강 이남 오(吳)계 군벌들의 일부가 독자 세력화하며 현지 토착민들과 연합한 걸 생각하면 외세로서 '중국'의 '지배'를 천 년 동안 받았다고 표현하기도 뭣하다. 오히려 오랜 시간 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자적인 정치적 발전을 거듭하던 것이 결국 막판엔 정치체로서의 '중국'과 완전히 결별하며 독자적인 나라와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조타, 사섭 같은 명목상으로는 진, 한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들을 종묘의 시조로 숭상하던 전근대 대월 황실의 공식 사관(史觀)은 이러한 중화 문명에서 기원하긴 했으되 분명 독자적으로 발전한 굉장히 미묘한 역사를 내포하고 있다.
1954년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의 패배로 인해 제네바 협정에서 베트남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기로 하고, 1973년에는 파리 평화 협정을 통해 미군이 철수하며, 1975년 남베트남 정권을 몰아내고 베트남 통일, 1979년은 캄보디아를 일시 점령하고 중국을 물리쳤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에 항전하기도 하였다.
고대사에서는 몽케칸 시절인 1258년에 그 악명높은 몽골 제국의 침략군을 상대로 승리한 전적도 있다. 1258년에 일어난 1차 원정 말고 2차, 3차로 원나라(몽골 제국)가 쳐들어왔지만, 이것도 쩐흥다오의 전략으로 무산되었다. 그는 베트남의 지리와 그에 걸맞은 게릴라식 전법을 구사한 병법 「병서요략」을 저술했는데, 나중에 일본, 프랑스, 미국을 물리치는 데 기여를 했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태국, 인도네시아와 함께 전통적인 강호다. 더욱이 캄보디아는 크메르루주 시절(민주 캄푸치아)에 베트남에 점령당한 이후 현재까지 베트남의 영향권 하에 있다. "근성의 민족"으로 유명하며, 중국 대륙을 제패한 몽골(쿠빌라이 칸)과 청나라(건륭제)도 베트남을 정복하려다가 실패했다.
19세기 프랑스 및 영국의 식민 침략을 걱정하면서도 패권 전쟁을 위해 태국, 크메르와 죽도록 싸우는 통에 국력이 쇠퇴하여 나중에 나라를 빼앗는 프랑스가 더 좋아할 일만 벌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세계열강인 프랑스, 일본, 미국, 중국과 모두 한 번씩 싸워 본 나라다. 게다가 이들과 싸워서 결국 몰아내 버렸다. 프랑스와 미국은 공식적으로 베트남에 패전한 거로 취급되고 있다. 중국 역시 1979년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뭔가 조금 소득이 있다 싶을 때 결국 근성의 베트남인들에게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1940년에 일본이 베트남을 점령하고 1945년 3월에 베트남 제국을 세웠으나 결국 그해 8월 연합국에 항복하고, 호치민의 주도하에 있던 베트민과 독립운동 세력들이 총봉기를 일으키면서 베트남 제국도 무너지고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독립을 선언한다.
근대사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남방작전(아시아 침공) 후로는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독립운동이나 공산주의 노선, 캄보디아와의 분쟁 등의 이유로 프랑스, 미국, 중국에 맞서 싸웠고 승리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승리했다는 것일 뿐, 이 과정에서 베트남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전면전에서는 국력의 한계로 강대국들에 털릴 수밖에 없는 게 기정사실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자국의 정글과 산악에 의존한 게릴라전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는데, 게릴라전의 특성에서 비롯된 문제 때문에 베트남 민간인들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해 전쟁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다.
1) 베트남의 유교전통
유교가 정치 사회적으로는 공헌, 능률 및 상벌을 강조하는 정부의 통치 철학이 되었다. 이는 종전에 왕과 귀족층이 불교의 영향력을 통하여 무력으로 권위를 행사했던 통치유형을 대신한 것으로써 무력 대신에 교육이 모든 권력으로 이르는 통로가 되었다. 엄격한 윤리교육은 왕과 신하 사이는 물론 모든 사람의 사회적 관계가 위계적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유교가 베트남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15세기의 레(Le) 왕조가 성립되면서부터이다. Le 왕조의 국가정책은 안정된 사회를 만들고 특히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세력들을 진압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무엇보다도 지방 세력의 본산인 마을 단위에서의 사회적 관계가 위계적 서열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도록 노력했다. 이를 위하여 가족 내에서의 인간관계가 먼저 변화되도록 했으며 그것이 보다 큰 사회 단위에 확장되게 함으로써 통치에 효율성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실제 유교 체제가 본격적으로 강화되어지는 시기는 17세기 중반부터라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장기간 계속된 내란 때문에 혼란해진 사회질서를 바로 잡기 위한 이유에서였다. 그 후 18세기 초부터 유교식 체제는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나게 되고 마을은 조정으로부터 직접 간섭을 받게 되었다. 비록 마을 지도자들이 그들의 고유 전통을 끈질기게 고집함과 동시에 조정에 대해 비협조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원형 그대로의 중국식 유교 전통이 이식되어질 수는 없었지만, 조정으로부터 비교적 지리적 왕래가 용이한 중·북부 베트남의 평야에는 마을의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유교적 가치가 강하게 침투되었다. 평민들의 경우, 원칙적으로 마을의 전통관습을 고수했지만, 그들도 유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과거시험에 불합격한 유생계급들이 자기 고향 마을에서 민중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그들을 유교식으로 교육시켰고, 그에 따라 아무리 가난한 집에서라도 자식을 유교식 학교에 보내면서 관리에 등용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유교식 통치체제는 응웬 왕조가 집권하면서 더욱 강화되어 베트남 사회의 저변에까지 유교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베트남 가족의 혈통원리는 부계를 따르며 권위는 부권적이며 혼인 후 거주 규정은 부처제로 되어 있다. 또 부계 확대 가족 중에서도 전체적 확대인 중국 가족과는 다른 직계가족을 이루는 단계적 확대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베트남 가족의 목적은 중국식 확대가족처럼 가족 확산이 아니라, 장자를 통한 가계의 계승을 영속시키는 데 있다. 모든 아들 중 장자에게 특별히 가계 계승의 특권이 주어지고 형제들은 교대로 가장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
베트남 직계가족의 핵심 내용은 조상제사의 가치가 다른 것들보다 우선하는 경향을 가진다. 특히 제사권이 재산권보다 상위에 있으며 제사를 통하여 조상과 후손이 연결고리를 갖는다. 이로써 장자를 통해 가문의 계승은 이루어지고 祖孫이 일체가 된다.
상속에 있어서 베트남은 남녀 차이보다 적서의 차이가 심하고 중국의 경우는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짜게 먹으면 자식이 목마른다(doi cha an man, doi con khat nuoc)’라는 속담은 베트남인들의 사회적 관계의 단위가 개인보다는 가족에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17세기에 이르면서 베트남인들은 북쪽으로부터 남진하여 메콩델타지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는 현재의 북부 타일랜드와 남부 라오스의 지역으로부터 메콩델타 전역으로 흩어져 살았던 크메르인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베트남인들의 메콩델타로의 이주는 남 띠엔(Nam Tien) 이라는 북부 베트남의 정책에 의해 시도되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은 만주 정권을 피해서 또는 새로운 상업활동을 위해 베트남에 도착하여 메콩델타에까지 유입되었는데, 베트남인들보다 먼저 왔거나 거의 같은 무렵에 도착하였다. 중국인들은 이미 17~18세기에 비엔 호하(Bien Hoa) 나 미토 등지에서 대량의 인구를 가진 종족집단이 되었으며, 또참(Cham)인은 베트남인들이 남진을 함에 따라 중남부의 거주지를 버리고 메콩델타에까지 밀려 정착하게 되었다.
북부 홍하 델타가 수리 관개 시설에 의해 벼를 재배했다면 남부의 메콩델타 지역의 벼농사는 자연 조절되는 물의 양에 의존했다. 정착유형에도 차이를 보여 북부에서는 농토로부터 분리된 약간 높은 지역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었는데 이는 제방 사업 및 물의 관리에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규모의 노동력이 없이도 소규모의 가족 단위의 노동력에 의해서 벼농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남부의 자연환경 때문이었다.
남부에서의 이러한 정착유형은 친족체계와 마을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친족간의 관계의 연망은 북부 홍하 델타에서처럼 넓지 못하고 18세기까지 하나의 행정단위로서 마을이 발달되지 못하여 북부처럼 마을 소유의 공전과정도 없었다. 주로 핵가족 형태의 개별가족이 하나의 독립된 사회적 단위로서 많은 토지이용의 자유를 누렸다.
이러한 남부의 상황이 형성되어지는 데 기여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북부에서 남진한 이주자들이 주로 떠돌이 농민, 탈영병, 탈옥수 및 가난한 선비들로서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그들로 하여금 좁은 친족의 연맹 속에서 대부분 핵가족 단위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가족 재산에 대해 부·자 공동 소유 원칙을 따랐던 중국과는 달리 15세기 베트남의 가족전통은 남편, 부인, 자녀들이 개별적으로 재산 소유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서 자녀의 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이 요구될 필요도 없었고 오히려 가부장권의 성향보다는 부부 중심의 가족에 가까웠으므로 부부 및 모든 자녀가 평등 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남부로 이주한 사람들이 중·북부의 고향 마을에 있을 당시는 여전히 유교의 영향이 강하지 못했던 시기로 보여지고, 더욱이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주로 하층 계급에 속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보다 평등 관계에 기초한 전통가족 제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평등한 자녀 간의 관계와 개별화된 행위 성향이 약화되어지고 동시에 부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을 19세기 응웬 왕조의 통치의 산물로 보여진다.
베트남의 왕조 정부는 마을을 하나의 국가 모델로 삼아 마을을 통치의 단위로 잘 활용했다. 국가는 마을을 직접 상대하였으며 개인과 가족들의 행위는 마을에 의해 유도, 조정 및 통제되었다. 개별가족을 그 구성원 전체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집단적으로 지게 되며, 마을은 전체로서의 마을의 생존과 위신을 높이도록 해주는 공공의 의견에 의하여 또 조절되었다. 가족과 마을은 모두 폐쇄적 공동체로서 그 내부에서는 개인의 관심이 집단의 관심 속에 묻혀버려 개인의 사생활은 공적인 의견에 의하여 철저하게 통제되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집단적 가치의 특성이 마을 사람들의 복지와 재분배의 제도적 메카니즘을 형성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체계는 강제성에 의한 것이 아니고 유년기로부터 사회화를 통하여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전통 베트남 사람들은 개인이 독립성을 가지도록 사회화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상호 간 의존과 의무에 기초한 사회적 관계를 학습하며 성장했다.
전통체계가 기능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집단지향적 가치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위신을 얻기 위한 경쟁과 체면에 대한 관심과 비판에 대한 민감함에 관련되어 있는 공동체적 가치지향의 우주관은 전통 베트남 사람들의 생활에 강력한 도덕적 기반을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개인의 탐욕적 행위와 이기주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자체수정과 자체통합체계를 가질 수 있어 안정된 상태에 놓여 왔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 남부 베트남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영향이 미치게 되면서, 베트남의 사회·문화 전반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베트남인들의 우주론적인 질서의 파괴는 프랑스인들의 진화론적인 가치체계에 의해 이루어졌다. 프랑스인들은 그들 자신의 역사적 경험에 근거하여 발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베트남을 근대화시켰다. 그중에서도 마을 행정의 합리화를 제일 먼저 시도했다. 토지는 시장경제에 의해 통제되는 합리적인 자본주의 제도 내부에서 상품으로 이용되게 하였으며 국가가 인정하는 개별 소유권 제도에 의해 통용되도록 했다.
이러한 프랑스에 의하여 유입된 자본주의 제도는 전통사회의 제도와 갈등을 빚게 되었고 두 체계 모두 본래대로 기능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두 문화 체계는 상호 작용을 통하여 베트남 사회를 하나의 근대적 사회로 변화시켜 갔다.
모든 지역에서 계층에 관계없이 베트남 사람들은 서구의 교육제도를 수용하게 되었고, 서구의 상품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식민지 정부의 관리가 되거나 상업활동에 관계된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인들은 여전히 가족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으며, 모든 사회적 관계에서도 지위 경쟁의 성향을 계속 유지시켜 나갔다.
도시에는 중산층이 생겨나고, 그들은 식민지 행정부와 경제적으로 면밀한 관계를 형성했으며, 새로운 지위, 이상 및 열망들을 갖게 되었다. 많은 식자층은 19세기 서구의 진화론적 사고체계의 원리를 받아들였다. 특히 그들은 근대 세계에서 유지해야 하는 국가적 자존과 위엄을 가지기 위해 베트남의 문화를 재형성시키기를 열망했다.
그들은 근대 세계에서 사회적 지위 향상은 서구식 교육에 의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프랑스어, 철학, 지리 및 수학을 공부함으로써 유교적 가치에 근거를 둔 위신에 따른 전통사회의 성공 기준을 대체시켜 나갔다. 그들은 물건이든 문화적 산물인 문학작품 또는 철학이든 프랑스에서부터 온 것이면 모두 베트남 토착의 것들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전통 마을에서의 지위, 부 권력은 더 이상 큰 효력을 가지지 못했다. 가치의 혼란이 야기되었으며 미덕과 학식과 위신을 판별하는 기준이 모호하게 되었다. 변화가 가장 민감하게 나타났던 영역은 가족주의 이념에서였다. 프랑스식 학교 교육으로부터 나타나는 개인주의적 가치의 영향이 이러한 전통적 가족주의의 가치를 변화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개인적인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베트남에서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프랑스 식민지 세력에 저항하는 공산당에 의한 혁명운동의 시작이었다. 1940년대에 이르면서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어떤 민족주의 단체들보다 큰 호응을 받았으며, 특히 전통문화와 서구문화와의 갈등이 매우 첨예화되었던 중부 및 북부지역에서 대대적인 설득력을 얻었다. 전통문화의 가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가치가 상호 일치하는 부분이 이러한 호응을 얻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적이며 서구적인 이념이지만 유교적 가치가 침륜되어 있는 전통 베트남의 사회·문화 체계의 많은 요소에 부합되었다. 베트남인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옛것과 새것 간의 갈등, 아시아적 삶의 방식과 서구적 가치 간의 갈등 및 가족의 내부에서 배웠던 것과 프랑스식 교육제도 속에서 배웠던 것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전통유교 사이에 공유되어지는 도덕적 가치 중 하나는, 개인의 권리를 집단과 사회 자체의 가치에 종속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그 둘은 모두 자본주의에 반하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상업활동보다는 오히려 생산과 자기 수양에 강조를 두는 가치를 공유한다. 상거래에서 값을 깎거나 타인에게 빚 독촉을 한다거나 하는 행위들은 체면과 위신을 하락시키는 일로 간주되며, 마을의 식자층들이 그렇게 할 경우 사회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게 되어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상업행위에 반하는 이러한 전통사회의 유교적 가치에 대하여 새롭게 이론적인 공정성을 부과, 합리화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이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서구주의자들에 못지않게 주장해 온 서구적 모델 중의 하나는 과학과 기술이었다. 과학과 기술은 베트남이 발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로 간주되었으나, 모든 민중 신앙들은 미신으로 취급되면서 베트남의 발전에 큰 장애 요소로서 부각되어졌다. 공산당의 목표는 경제체계나 사회체계의 부분들을 변화시키는 데에만 목적을 가지지 않고 사회 전체를 변화시켜 새로운 인민을 창조해낸다는 데 있었다.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으로서 대체로 농업에 바탕을 둔 중앙계획 경제체제를 실시하고 있다. 1975년 베트남 전쟁 종결 이후 베트남은 비효율적이고 더러는 부패한 관료들에 의해 추진된 경직된 농업 집산화·국영화 정책으로 인해 경제재건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1986년 시장원리와 성과급제 등을 경제에 도입하기 시작했으며 민간기업의 활동을 허용했다. 그러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세계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베트남 총노동력의 약 3/4이 농업 부문에 종사하며, 국내총생산(GDP)의 1/4 이상을 농업 부문이 차지한다. 1980년대 후반 잉여 곡물을 자유시장에 내다 팔도록 허용한 정부 정책에 크게 힘입어 베트남은 식량부족 상태에서 벗어나 다시 식량 수출국이 되었다. 경작지의 대부분이 벼농사에 이용되며 많은 지역에서 2모작이 이루어진다. 쌀 이외에 카사바·고구마·땅콩·수수·옥수수 등이 주요 농작물이다. 국영농장에서는 사탕수수·콩·코코넛뿐만 아니라 약간의 수출용 고무·커피·차 등을 생산한다. 돼지와 소 사육도 많이 하고 있다.
내륙의 수역과 남중국해에서 잡히는 어패류는 주요 수출품이자 쌀 다음가는 식량자원이다. 그러나 어업은 난민들의 탈주로 인한 소형선박들의 소실과 연료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임업부가 주관하는 목재 산업은 현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생산량은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석탄·인회석·주석·크롬철광 같은 광물도 상당량 채굴된다. 광업과 제조업은 GDP의 1/5 이상을 차지하나 고용노동력은 총노동력의 1/10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북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원료와 숙련노동자의 부족 현상이 공업 부문에 계속되고 있다. 정부는 생산증대를 위해 성과급제를 장려하고 비능률적인 국영기업체에 대한 보조금을 줄였으며 제한적으로 시장원리를 도입했다.
1976년 이후 재건을 위한 투자가 시멘트·철강·섬유·전력 생산시설 등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나 베트남의 주요 산업활동은 여전히 식품가공 분야이며, 기간시설의 미비로 상품의 수송·유통 부문이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에서 주로 전력을 공급하나 발전량은 전국의 수요를 충당하기에 부족한 편이다. 베트남은 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1991년까지는 소련이 주요 원조국이었다.
교역에서는 수입이 수출을 초과한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옛 소련이 주요 교역상대국이었으나, 1990년대 초부터 일본·타이완·타이·싱가포르 등이 주요 교역국이 되었으며 이미 아시아와 서구의 많은 나라로부터 무역과 투자를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주요 수입 품목은 연료·원자재·기계류·식품 등이며, 주요 수출 품목으로는 원자재와 수공예품 등이 손꼽힌다.
베트남 경제는 지난 2018년/2019년, 각각 7.08%, 7.02%로서 2년간 연속 7%대의 높은 성장률을 달성한 것으로 나타났고 수출증가에 따른 무역흑자액은 2018년 72억 달러(USD), 2019년도 약100억 달러(USD)를 기록했다. 또한 외국인 직접투자(FDI) 금액은 2018년 191억 달러(USD)에 이어 2019년에는 사상 처음으로 200억 달러(USD)를 넘어섰다.
이러한 베트남 경제성장 추세는 2020년 새해에도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 베트남통계청은 2020년도에 약 6.8% 수준의 성장률을 예측했고 세계은행과 IMF는 약 6.5% 성장률을 분석 전망했다.
한편 일부 전문가들은 미·중 무역 전쟁에 따른 반사이익이 커진다면 작년처럼 성장률이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베트남 1인당 국민소득이 현재 약 3,000달러(USD)인데, 이것은 한국의 1985년 전후 구간과 비슷한 소득수준으로 분석된다. 베트남의 경우 향후, 1인당 GDP가 4,000달러대(USD) 구간에 도달하는 시점에서 사회적 대변혁(빅뱅)기가 도래할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하루에 약 15달러(USD)를 소비할 수 있는 중산층의 급속팽창으로 인한 사회적 자아실현 욕구의 빅뱅이 예상되는데, 예를 들면 마이홈(내 집 마련)/ 마이카(자동차 소유)/ 해외여행/ 고급소비재 소비 / 건강, 휴양, 관광 등의 소비 욕구 트랜드가 급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1) 부동산, 건설개발시장 측면에서 올해 베트남 시장 전망과 위협
한국의 각종 언론매체와 SNS 정보 사이트를 살펴보면 베트남 시장에 대한 장밋빛 전망과 베트남의 강점만으로 도배되고 있는데, 이것은 베트남에 진출 투자를 준비하는 초보 기업인들에게 매우 위험한 신호가 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베트남의 위협과 리스크를 장밋빛 전망과 함께 동일한 가치로 균형있게 많이 다루어야 한다.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부동산 건설 개발 시장은(스마트) 신도시 건설과 SOC 사업 정부 인프라 구축사업 등으로 수천조 원의 프로젝트가 대기하고 있어서 향후 10년간 한국의 주요먹거리 시장이 될 것으로 판단되는데, 베트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친근한 한류의 나라) 한국의 참여를 선호한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베트남의 위협과 리스크, 단점은 (공공사업 분야에서) 베트남 남북고속도로 공사에서 외국인시공사 배제 정책 결정이라든지 각종 공공 및 민간 프로젝트에 대한 사업 인허가 중단, 이행지체, 취소, 변경, 불투명하고 오리무중 같은 사업환경 등이 있다.
자영업자의 경우도 예를 들면 몇 년간 고생해서 매출을 올려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베트남 집(상가) 주인이 월 100만 원하던 상가임대료를 갑자기 월 500만 원으로 올린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사전검토는 물론 완벽한 계약체결, 사업 진행 계획에 있어서 여유 완충 시간을 가지고 진출해야 하며 항상 PLAN B를 가지고 사업예비비를 준비하여야 한다.
베트남의 종교는 수많은 토착 정령들에 대한 숭배의 신앙 위에 유교, 도교 및 불교의 세 종교가 혼합되어 이루어졌다. 베트남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혼합형태의 종교를 믿는다. 그러나 계층에 따라 강조하는 부분은 다르다. 학자와 관리 계층은 유교에 더 큰 비중을 두며 일반 민중들은 불교, 도교 및 정령숭배의 신앙에 보다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도교는 베트남에 유입된 후 그것이 갖는 본래의 철학사상은 약화되었으며 조직적인 종교체계의 형태도 갖지 못했다. 마술이나 주문 같은 신비주의적 요소들만이 토착 정령신앙과 결합되었다. 터이팝(Thay Phap)으로 불리는 점술가, 점성가, 역술가 및 신유은사자들은 이러한 혼합형태의 신앙으로부터 유래되는 경우가 많았다.
베트남의 불교는 동남아의 다른 국가들이 갖는 상좌불교의 구원교리인 개별구원과는 다른 집단적 구원의 경지를 허용하는 대승불교의 계통이다. 경전에 관한 지식의 습득보다는 개인이 스스로 마음과 육체를 단련시키며 덕을 행하고, 점차적이 아닌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베트남의 불교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닌 도교의 요소들과 쉽게 혼합될 수 있었다. 따라서 10세기까지 베트남 사람들은 정령숭배의 신앙적 요소 중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될 수 있었다.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유교, 로마가톨릭, 개신교. 신흥종교로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가 있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로마가톨릭교, 개신교와 토속종교가 혼합된 유일 신앙이다. 호아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이다. 1939년 후인푸소가 창시했다. 발원지인 메콩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 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나 유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제한적인 종교 활동은 허용하고 있다.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는 공산주의 국가의 종교 정책이 탄압 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 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2018 베트남 이전엔 베트남 전쟁과 라이따이한, 한베 국제결혼, 한류 정도로 기억되던 베트남이 많이 바뀌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92 수립된 외교 관계 포괄적 동반자 관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지나면서 정치, 경제, 문화, 인적교류 모든 면에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으로 한국인을 적대적으로 대하던 시기를 지나 한류와 함께 불어닥친 한국 드라마를 통해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기 시작했고, 특히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파병군인 드라마인 ‘태양의 후예’를 보면서 한국 군인에 대해서도 좋은 이미지를 갖기 시작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인품과 실력을 갖춘 박항서 매직은 축구를 사랑하는 베트남 민족에게 한국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경제적으로도 교역액 1위를 차지하며, 삼성전자가 주 생산 루트를 베트남으로 옮겨오면서 베트남은 한국에게, 한국은 베트남에게 한층 중요한 나라가 되었다.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은 베트남을 방문하면서 신남방 정책을 내놓으며 그 거점 국가를 베트남으로 지목한 바 있다.
한편 국내 베트남 가정은 중국을 이어 두 번째로 명실공히 사돈국가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1975년부터 한국과의 관계가 시작된 1992년 그리고 2018년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각 영역의 변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을 일으킨 미국과의 관계회복이 간절했던 베트남은 이제 중·미 관계에서 중국을 견제한 중요한 카드로 작용하고, 온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 가운데서 선교의 변화는 어떠한가?
공산화된 1975년 이후 극심한 핍박을 받았던 베트남은 미국과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했고, 문을 닫았던 신학교는 다시 문을 열어 한동안 중지되었던 목회자 교육이 다시 시작되어 배출되기 시작했다. 가난한 나라 베트남에서,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로 자리매김을 하던 기독교 초반의 사역은 주로 빵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엔지오 사역이 주를 이뤘다.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열면서 목회자가 배출되기 시작했고, 이미 핍박을 지켜낸 신앙의 뿌리는 다음 세대로 이어져 많은 젊은 이어져 주님을 헌신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빈부격차가 심하여, 깊은 곳에는 복음이 들어가지 못한 곳이 많이 있다. 특히 소수민족들에는 신앙 교육이 매우 절실하다. 복음을 접한 후에 말씀을 배우고 싶어하지만 체계적인 말씀 교육 프로그램이 부족하여 그 필요를 말하는 소수민족들이 있다.
복음을 접한 후에 말씀대로 살 수 있는 단단한 믿음을 갖고, 말씀을 기반으로 한 하나님의 원칙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 베트남 전체에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림을 가지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리더를 세우는 일들이 기도 제목으로 남아있다.
1.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훈련하기
빵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제 받기만 하는 자가 아닌 주는 자가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하나님의 경제 원칙이 나눠지고, 경제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방법이 들어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베트남은 주님의 큰 영적 흐름 안에서 축복받은 나라로 서고 있다. 비즈니스의 영역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깨어나 주의 원칙이 세워지도록 도전해야 한다. 돈을 위하여 주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돈을 노예로 부릴 줄 아는 그리스도인들을 세워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내 지경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신 15:11) 한 주님의 말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베트남이 선교하는 국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베트남은 축복받을 것이며, 베트남에서부터 캄보디아, 태국, 인도에 이르기까지 복음의 행진을 지원하는 일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2. 제자 되고 제자 삼는 제자 사역하기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제자 된 것을 바로 제자 삼도록 하는 사역으로 믿음을 가르침으로 더욱 믿음이 강해지며, 그 뿌리가 확산되어지는 일들이 필요하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3. 예수님 전문가 키워내기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안에만 속해있지 않다. 복음과 함께 빵으로 다가갔다면, 복음을 가진 전문가를 키워내야 한다.
4.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베트남은 더 이상 수혜자가 아니다. 더 이상 선교의 대상이기보다는 먼저 된 믿음의 선배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그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한다. 가진 것이 무엇이든 물고기와 떡을 가지고 소수민족에게로, 인근 국가로 그 은혜를 나누고 예수의 영향력으로 본인이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내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