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00, 조00 선교사 몽골 주재 바울선교회 선교사
몽골은 동북아시아 내륙에 있는 국가로 러시아,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세계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나라 가운데 하나이며 평균 고도가 해발 1,585m에 이르는 고지대 국가이다. 13세기에 아시아 대륙을 통일했던 칭기스칸 이후, 원 제국을 수립한 민족의 후예로 이루어졌으며, 20세기 초 사회주의 국가가 수립되어 소련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지만 1992년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고 이원집정부제 헌법을 채택한 이후 정치, 경제적 개혁을 단행했다.
위치: 중앙아시아 고원지대 북부
인구: 3,225,167명 (2020년 추계)
수도: 울란바토르
면적: 1,564,116.0㎢
공식 명칭: 몽골 (Mongolia)
기후: 대륙성기후
민족 구성: 몽골족(95%), 투르크계(5%)
언어: 몽골어
정부/의회 형태: 중앙집권 공화제 / 다당제, 단원제
종교: 라마교(50%), 그리스도교, 샤머니즘
화폐: 투그릭 (MNT)
국화: 연꽃
대륙: 아시아
GDP: USD 13,637,000,000
인구밀도: 2명/㎢
국기의 의미
몽골 국기는 ‘소욤보’기로 불리며 직사각형으로 3등분 되어있다. 중앙은 청색, 양측은 적색으로 되어 있고 국기 중앙에 위치한 청색은 "영원히 푸른 하늘"을 뜻하며 양측의 적색은 진보와 번영을 의미한다. 표의 문자인 ‘소욤보’는 옛날부터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민족적 표징이다.
지도
신석기시대에 몽골에서는 사냥꾼과 순록 사육자 및 유목민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BC 3세기에 몽골은 흉노족이 세운 제국의 중심지가 되었다. 4~10세기까지는 오르혼 돌궐족이 몽골에서 가장 중요한 민족이었다.
745~840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족이 몽골 북부지역에 제국을 세웠지만, 이 제국은 키르기스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13세기에 칭기즈 칸(테무친)이 몽골 부족을 통일하고 타타르족을 무찌른 뒤,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만연안 지역 및 카프카스 남부를 차례로 정복했다. 이 지역들은 모두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1234년 칭기즈 칸의 후계자인 오고타이(1229~41 재위)는 중국의 금나라를 정복했다.
중국의 원제국(1279~1368)을 수립한 사람은 칭기즈 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1259~94 재위)이었다. 원이 멸망한 1368년부터 수백 년 동안 몽골족은 원래의 고향인 초원지대를 떠나지 않았고, 내부의 권력 다툼에 대부분의 힘을 쏟았다. 몽골족 최후의 위대한 지도자는 리그단 칸(1604~34 재위)이었다. 리그단 칸은 세력이 점점 강해지는 만주족에 대항하여 그들의 본거지를 지키기 위해 많은 몽골 부족을 통일했다. 그가 죽은 뒤, 몽골족은 만주족에 정복되어 중국 청(淸)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19세기 중엽 몽골의 민족의식이 나타났다. 1912년에 청나라가 몰락한 뒤, 몽골의 군주들은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중국에 대한 몽골의 독립을 선언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제정이 무너지자 몽골은 다시 중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지만, 러시아 내전 때인 1920년에 벨라루스군 5,000명이 몽골을 침략했다. 그러자 담디니 쑤흐바타르가 모스크바의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으로 군대를 조직하고 러시아 적군의 도움을 얻어 벨라루스군을 격퇴시켰으며, 1921년에는 중국인들마저 몰아냈다.
1924년 11월 26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선포되었다. 이때부터 소련과 몽골은 정치·경제·문화·이념적으로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중·소 관계가 악화되자 몽골과 중국의 관계도 더욱 나빠졌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두 나라 사이의 긴장이 완화돼, 1986년에는 몽골과 중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몽골은 1990~91년 동유럽과 소련을 휩쓴 민주화 혁명에 동참해 주요 정치·경제 개혁을 단행했다.
1992년 1월 사회주의에서 탈피한 이원집정부제의 신헌법을 제정하고, 1996년 총선을 거쳐 1997년 5월 바가반디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2000년에는 총리의 권한을 강화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4년 9월 엘벡도르치 연립내각이 출범했다. 2005년까지 임기를 마친 바가반디 대통령 이후 엥흐바야르(2005~2009), 엘벡도르지(2009~2017) 대통령에 이어 2017년 바르툴가 대통령이 임기를 시작했다. 한편 후렐수흐 총리가 2017년 10월 취임하여 내각을 이끌기 시작했다.
1992년 채택된 헌법은 몽골이 독립 주권 공화국임을 명시하고 있다. 입법권은 단원제인 국가대후랄(의회)에 있으며, 보통선거로 선출된 4년 임기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국가원수인 대통령 역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다. 국가원수이며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는 대통령과 내각 수반으로 내정을 담당하는 총리로 권한을 나눈 이원집정부제를 택하고 있다.
정부 수반인 총리는 의회 다수당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최고 사법기관은 대법원이다. 1990년까지는 몽골인민혁명당(Mongolian People's Revolutionary Party/MPRP)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었으며 1992년 조직을 개편했다. 이밖에 몽골국민민주당, 몽골사회민주당 등이 있다. 재판은 최고법원과 아이막(지역) 법원과 시법원에서 담당한다.
복지제도로 질병·임신·신체장애에 대해 보상금을 제공하고, 노인과 신체장애자에게 연금을 준다. 의료비는 무료이며 국가가 요양소조직을 운영한다. 보건시설과 의료종사자의 수는 차츰 늘어나고 있다. 천연두·티푸스·콜레라·디프테리아 등과 같은 질병은 퇴치되었고, 전염병 발생률도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교육은 무료이며, 대부분의 아동은 8~10년 동안 학교 교육을 받는다. 유목민의 자녀를 위한 기숙학교도 있다. 고등교육의 주요중심지는 몽골국립대학교(1942설립)이다. 몽골은 국토가 넓고 도시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매우 중요한데,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위성중계를 활용한다.
1990년까지 소비에트 모델에 의한 사회주의 중앙계획경제를 채택했던 몽골은 이후 1992년 새 헌법을 제정하는 등 민주화 개혁 과정에서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 속에 진행된 시장경제로의 전환은 인플레이션, 실업증가, 생필품 부족, 식량 배급 등의 결과를 낳았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희토류를 비롯한 지하자원 수출을 통해 두드러지는 경제 성장률을 보이다가 2014년부터 원자재 가격 급락, 대중국 수출 둔화, 과도한 국채발행 등으로 인해 경제 위기를 맞았으며, 2017년 결국 IMF에 총 55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2019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약 136억 3,700만 달러이며 1인당 GDP는 약 4,133달러이다. 전체 노동력의 거의 절반이 농업에 종사해 왔으나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4 정도에 불과하다. 축산물이 전체 농산물 수익의 약 70%를 차지하고 가축의 약 2/3는 양이며, 염소·소·말·낙타도 기른다. 농경지는 국토의 1% 미만으로 밀이 주요 작물이며 국토의 약 1/10은 숲으로 덮여 있어 이 삼림에서 나오는 통나무는 공업용과 연료로 쓰인다.
주요 지하자원은 석탄, 동, 몰리브덴, 텅스텐, 형석, 아연, 금, 석유 등이며, 세계 10대 자원 부국에 속한다. 석탄은 몽골 전역에서 채굴되고 광물이 전체 수출액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전체 노동력의 1/5이 공업과 광업에 종사하며 GDP의 1/4 이상을 차지한다. 제조업이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재와 소비재는 대부분 수입해야 한다. 공업은 대부분 울란바토르에 몰려 있다.
주요공산품은 가공 식료품·의류·신발·판재·목제품 등이며 주요 교역 상대국은 러시아이다. 지방도로는 대부분 비포장 흙길이고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모스크바 및 베이징(北京)과 철도로 이어져 있으며 국제공항이 있다.
■ 샤머니즘
몽골은 샤머니즘이 번성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앙아시아의 혹독한 생활환경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 샤머니즘에 젖게 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심성도 샤머니즘에 녹아들었다.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 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샤머니즘은 징기스 칸 시절 즉 초기 몽골 제국 시절에는 국가 무당이 전쟁에 관하여 충고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였고 국가 종교로 인정되었다.
■ 라마불교
라마불교는 1570년대 몽골로 진입한 이후 샤먼 신앙을 밀어내고 몽골의 국교로 자리 잡았다. 라마 불교는 몽골이 제국으로서의 세력을 거의 상실하고, 중국(명, 청 등)의 지배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부터 몽골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고 사회에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실질적인 정치 세력화하였다. 그러나 라마 불교는 여러 가지 폐해를 가져왔다. 라마승에 대한 지나친 존경으로 인해 한때 남자 인구의 40%가 라마승이었고 이로 인해 인구 감소가 초래되었다. 정권과 밀착되어 정권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였고 종교적 타락으로 인해 공산 혁명 당시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사회주의 문화 혁명이 지속되던 1930년대 이후 거의 모든 사찰이 폐쇄되었고 승려들이 구속되거나, 사찰에서 나와 일반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몽골의 라마 불교는 티벳형 불교와 샤머니즘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전이 몽골어로 번역되지 못했고, 간단한 입문서 정도만이 소개될 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라마법회는 티벳어로 진행되며, 참석한 대중들은 거의 그 의미들을 모른 채 예식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서와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마 승려에 대한 존경은 깊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이름을 라마 승려에게 물어보게 되고, 심한 경우는 이사하는 날, 결혼하는 날 등을 라마 승려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다. 울란바타르 시에도 7,000명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인들이 살고 있으며 생활 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이슬람교인이 대부분이고, 영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최근 터기 이슬람 협회에서 몽골 이슬람교 선교를 위해 몽골에 모두 4개의 학교를 세우거나 합작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울란바타르에 1993년 몽골-터키 합작 중학교를 설립하였고, 1995년 가을에 기존의 몽골 건축 기술학교(제4호 건축기술학교)를 합작하였으며, 몽골 북쪽의 다르항 시와 서쪽 바양울기 아이막에서 학교를 인수하여 모슬렘 선교의 기반을 닦아가고 있다. 울란바타르에는 몽골 모슬렘 협회(Mongolian Moslem Society)가 결성되어 있으며, 이슬람교도들과 카자흐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 기독교
• 근대 이전의 기독교 선교 역사
확실한 근거는 없으나 이미 7세기경에 몽골에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경교(Nestorian)에 의한 선교일 것이다. 송나라가 기독교를 자신들이 싫어하는 몽골의 종교라고 간주해서 박해했던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초기 네스토리우스파의 선교가 끊어진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는 상인들에 의해 전파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다 확실한 것은 12세기경 고비 사막 북쪽(오늘의 어워르항가이 아이막 근처)에 살던 몽골족 케라이트 부족에 대한 선교이다. 칭기스칸이 세력 확대 과정에서 이 부족과 결탁했다가 나중에 그 부족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을 자신의 수도로 빼앗았는데 당시 그곳에 기독교인이 있었다고 하는 역사 기록이 있다. 실제로 당시 수도였던 하라호름에는 교회의 터로 보이는 돌로 된 십자가가 남아 있다. 또 원나라 왕실의 와비 상당수가 기독교인들이었다고 한다. 루이 9세와 교황의 친서를 휴대하고 1253년 하라호름을 방문한 루브룩은 당시 몽골의 수도였던 하라호름에는 여러 채의 궁전 이외에도 열두 개의 사원이 들어서 있었고, 이 가운데 두 채는 모스크였고 한 채는 교회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칭기스 칸 자신은 기독교에 무관심했으나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었다. 몽골족은 자신들의 세계 제패의 첫 번째 장애로 회교(이슬람교) 세력을 꼽았고, 서방 카톨릭 세력과 연합하고자 노력하였다. 1246년 교황 이노센트 4세의 서한을 가지고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조반니가 첫 번째 사절로 몽골에 도착하였다. 이후 두 번 더 교황의 사절이 몽골에 도착하였고, 몽골 황실과 기독교 교류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였으나, 실제적인 성과는 없었다.
칭기스 칸의 며느리 중 하나가 기독교인이었고 그녀에게서 쿠빌라이 칸이 태어났다. 쿠빌라이 칸이 기독교인이라는 증거는 없으나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그의 두 형제는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원나라를 통치함에 있어서 정신적인 통일 세력을 필요로 했고 기존의 샤머니즘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자, 세계 고등종교 가운데 새로운 국가 종교를 선택하려고 하였다. 그는 학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불교, 회교, 유교, 도교 등 5대 종교를 면밀히 연구하도록 지시하였고 그 중 기독교를 선호하였다. 그래서 당시 로마 교황에게 잘 준비된 유능한 선교사 100명을 보내주면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삼겠다는 편지를 1276년부터 1291년까지 원나라에 체류한 마르코폴로를 통하여 보냈으나 교황은 당시 100년 전쟁 등 유럽의 복잡한 사정을 핑계로 이 제안을 거절하였고, 20년이 경과한 1289년에야 교황 니콜라스 4세가 사절을 겨우 2명 보냈는데, 한 명은 도중에 죽고 말았다. 결국 원제국은 불교가 그 자리를 차지하여, 중국과 아시아 선교의 결정적인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1305년까지 로마 카톨릭(도미니크 및 프란시스코 수도사)은 한 때 6,000명의 개종자를 얻었다고 몬테코르의 존은 보고하였다. 1335년에 32명의 선교사가 북경에 도착하여 활동을 벌였고, 이 무렵 프란체스코회의 소규모 선교회에서는 유목민들을 따라 함께 이동하면서 “움직이는 수도회”를 결성하여 활동했다는 보고가 있다.
1362년 마지막 감독이었던 플로렌스의 제임스가 몽골족이 북경에서 축출당할 때 순교하였으며, 1369년 라틴교회는 북경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원나라 몰락 후 약 500년간 기독교 전파의 기회가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몽골에 대해 적대적인 중국은 기독교를 몽골의 종교로 간주하여 기독교 선교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로써 몽골 자체의 선교는 물론 아시아 전체의 기독교 선교가 사실상 차단되었다.
1600년대에 와서 우랄산맥의 동남쪽 고원지대에 사는 몽골족의 일파인 칼묵크(Kalmucks)족에게 러시아 정교회 선교사들이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근대 이후의 몽골 기독교 선교 역사
근대선교는 1817년 스웨덴 선교사 코르넬리우스 람과 영국선교사 부부 스타리브라스가 효시를 이루었다. 초기의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인 제임스 길모어로 그는 1870년 몽골에 도착하여 12년간 몽골 유목민을 대상으로 선교하였다. 그는 자신의 활동 결과를 평가하면서, 서구 선교사보다 중국인 선교사가 실제적인 선교사역을 감당하면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래서 수명의 중국인 선교사를 훈련시켰고, 이들은 효과적인 선교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1900년경 위화단 사건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참혹한 박해가 일어나 선교활동은 일시 중단되었다.
1815년 슈미트 박사가 칼무크 방언으로 성경의 일부를 번역한 것을 시작으로 성경 번역이 시작되었다. 그 후 브리야트 방언으로 성경 전체가 번역되었다. 그 후 여러 차례 성경 번역 사업이 진행되었다.
• 몽골의 현대의 선교 역사
1919년경 다시 선교 활동이 시작되었으나 곧이어 1924년 사회주의국가 설립으로 인해 모든 선교 활동이 중단되었다. 사회주의정책 아래에서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가 박해를 받았는데, 기독교의 경우에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명목으로 더욱 극심한 탄압이 이루어졌다.
1989년까지 단 한 명의 기독교인도 없었고, 선교 활동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그러나 몽골 정부가 1989년 개방정책을 실시하면서 자본주의국가의 외국인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게 되었고, 선교 활동이 재개되었다.
오랜 선교의 공백기를 지나 1980년대 말 몽골 정부의 개방화 정책 이후, 가장 현저한 선교 활동을 펼친 사람은 존 기븐스이다. 그는 1972년에 몽골국립종합대학에 유학생의 신분으로 입국하여 몽골어를 배웠고, 일시 귀국했다가 1978년에 복학하여 몽골인 아내 알타를 만났다. 1980년에 불법 종교활동 혐의로 체포되었고, 1987년에 영국에서 알타와 결혼하였다. 그 후 개방조치가 이뤄지자 몽골에 다시 들어와 1990년 약 50명의 도움을 받아 신약성경(선게레)을 그의 아내 알타와 함께 번역, 출판하였다. 이후 몽골성서공회(MBS)를 설립 운영하고 있으며, 최초의 교회인 그리스도교회를 개척하였고, 지방 전도에도 열심을 가지고 일하였다.
• 1991년~1995년
1991년부터 1995년까지는 선교사들이 몽골에 입국하였지만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전환기의 사회적인 어려움과 민주화 체제가 정착하지 못하고, 공산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된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몽골의 선교사들은 전환기의 사회·경제적 어려움들을 함께 나누며 올란바타르와 다르항, 에르트네트를 중심으로 도시 지역에 교회가 세웠으며, 동서양 선교사들이 연합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음으로 몽골 선교의 연합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러한 결과로 1995년까지 51개의 교회가 세워졌으며, 3,600여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나게 되었다.
1991년에는 몽골 성서공회가 세워졌고, 1995년에는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현지인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연합신학교를 세웠다.
1993년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를 규정한 법(종교법)이 발표가 되어 1994년부터 교회가 시·도 의회의 결정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등록이 되기 시작하였다.
• 1996년~2000년
1996년은 몽골 선교의 자유가 확대되는 출발점다. 1996년 의회 선거에서 민주연합이 인민혁명당을 물리치고 승리함(현재 몽골은 의원내각제 형태에 대통령제를 가미한 프랑스식 정치 형태를 가지고 있다)으로 이전보다 더 많은 선교의 자유가 주어지게 되었다.
1996년 미국의 선교사들이 세운 이글 텔레비전이 개국을 하였으며, 몽골성서공회에서 신약성경을 몽골어로 출판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선교 초기보다는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많이 발전되었으며, 몽골 선교가 점차 알려지면서 많은 숫자의 선교사들이 이 기간에 입국하였으며, 특별히 한국 선교사들이 많이 입국하여 몽골 선교를 주도하는 시대로 발전하였다.
몽골의 교회는 초창기 5년보다 4배 이상 성장을 하여 2000년 5월 한인선교사협의회에서 발행한 ‘몽골 선교 현황 자료집’에는 당시 132개 교회, 12,373명의 기독교인이 있는 것으로 조사 발표되었다.
2000년 여름에 신·구약 성경이 몽골어로 완전히 번역되어 출판되어 몽골 선교의 발전에 기폭제가 되었다.
• 2001~ 현재
1995년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연합신학교에서 졸업생들이 배출되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지도자들이 몽골 교회의 주축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99년에는 몽골의 현지인 지도자들이 연합하여서 몽골복음주의협회(MEE)를 세웠다.
몽골복음주의협회는 150여 개의 교회와 선교단체가 등록된 몽골교회의 최고의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몽골복음주의협회는 현지인들이 직접 세운 교회 지도자들이 대부분 소속이 되어있으며, 몽골교회를 실제적으로 대표하는 단체이다. 2002년 5월에 선교사와 현지인 지도자들이 연합을 하여 최초의 ‘연합 목사 안수식’을 열어서 22명의 목사를 인정하고, 5명의 목회자를 새롭게 안수하였다. 그리고 매 3년마다 ‘연합 목사 안수식’을 열어 20명가량의 지도자가 세워지고 매년 몽골 장로교 신학대학원과 침례교 신학대학원을 통하여 목회자가 세워지고 있다.
현재 몽골에 있는 교회는 650여 개, 이 중 550여 교회가 몽골복음주의협의회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수도 울란바토르에만 250여 교회가 몰려 있기 때문에 외곽지역에는 여전히 교회가 부족하고, 교회 간 거리가 멀어 왕래조차 힘든 상황이다.
1990년 민주화 혁명 이후 기독교 전파가 활발해졌지만, 아직까지 몽골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2% 정도(약 6만 명)이다. 최근에는 한국교회 주요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하나님의 교회, 몰몬교 등 사이비 이단 단체들이 증가하고 있어, 이들을 제외하면 몽골의 실제 복음화율은 1.5%가 채 안 되는 상황이다.
출처: 데일리굿뉴스, 다음백과, http://cafe.daum.net/cgsbong, 위키피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