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아주 좋았으나 점점 나빠진 사람이 있고, 나빴으나 성자의 경지에 이른, ‘사울’이란 이름을 가진 대조적인 두 사람이 굵직한 교훈을 놓고 간다. 왕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 장대한 신장에 짝할 이가 없는 걸출한 위인이었다.(삼상 10:24) 하나님의 추천하심과(9:17) 사무엘 선지자의 기름부음으로(10:1)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등극하므로 탱탱한 이름을 날렸다. 은사에 능하여 예언을 하였고 새 사람이 되어 사명전선에 나섰다.(10:6) 반면, 다소사람 사울의 첫 등장은 천사 같은 스데반집사를 죽이는 악명 높은 저격수로 무대에 오른다.(행 8:1)
결정적인 사건들이 두 사람을 뒤집었다. 불렛과의 격전을 앞두고 “부득이하여”(13:12)란 변명으로 감히 왕이란 권위로 제사를 드림으로 신권을 도전한 망령된 행동과,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함”이란 명목으로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오는, 탐욕을 부린(15:21)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시야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드디어 거룩한 영은 떠나고 악령이 지배하므로(16:14) 하나님의 버림까지 받았다.(16:1) 빗나간 구체적 행동이 곧 이어졌다. 40일간 이스라엘의 군대를 조롱하던 골리앗 적장을 기분 좋게 눕힌 소년장수를 경축하는 마당에, 여인들이 지어 부른 하찮은 노래가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18:7)이란 가사가 왕의 심기를 거슬렸다. 나에겐 천을, 다윗에겐 만을? 질투의 마음이 악마에게 틈을 주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18:8) 울컥댐으로 수천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 죽이는 일에 일생을 소진했다. 사무엘 선지자의 애달픈 기도후원과 다윗의 성자다운 사랑에 감복되어, 잘못을 통곡하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음에도 불구하고, 덩어리 감정을 필경 녹이지 못한 채 자기 멸망에 스스로 도장을 찍었다. 죄로 치닫는 파렴치한 행동을 겹겹이 저지르는 중에도, 나욧에 숨어있는 다윗을 추적해 갔을 때는, 선지자들의 분위기에 감동되어 벌거벗고 예언하는 은사(?)를 발휘하기도 하였다.(19:24) “예배를 꼭꼭 챙기는 열성이면서도, 십일조 까지 꼬박 드리는 지성이면서도, 인간을 미워한다는 것은 살인죄인 줄 몰라서 그럴까.(요일 3:15) 결국 블레셋과의 전투에 세 왕자와 군사들과 함께, 길보아 산에서 몰살을 당하므로 생을 마무리하였다.(31:6) 천국에서는 그날 실망과 통곡이 얼마나 컸을까.
다소의 사울은 망측한 첫길을 걸었다. 학자이면서도 동물적인 포학성을 띠고 하나님을 위해(공의를 위해) 살인자 되는 길을 주저치 안 했다. 저 멀리 다메섹까지 입성했으나 드디어 하나님의 일격을 받았다. 빛을 잃고 장님이 되어 암흑이 삼일을 지배했을 때(행 9:9) 하나님과 경쟁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무릎을 꿇었다. 버려진 자신을 수습하려고, 주님 스스로 버림받은 그 사랑에 그냥 울고 울었다. 사도가 되고, 전도자가 되어 최후엔 돌 맞아 죽었으나 그가 전한 진리로 세계는 광명을 얻었다. 마음을 덜어내지 않고 통째로 주님께 바쳤고, 예수님의 상한 흔적을(갈 6:17) 온 몸에 지닌 채 숱한 생명을 살려놓고, 주의 품에 안길 때 신선함을 드렸다.
어디서 떨어졌는가, 생각하라! 그리고 회개하라! 촉구하신다.(계 2:5) 인생의 궤도수정을 하라신다. 주를 앙모함으로 독수리처럼 올라가는 길목인가? 아니면 주님을 회피하므로 허우적거리는 심난한 삶에 눕혀져 있는가. 오만한 사울 왕 편인가? 만물의 찌기라 하면서(고전 4:13) 겸비를 움켜잡은 변화 받은 바울인가. 자신은 노련하여 사정거리밖에 있다고 스스로 포만감을 가지는가? 아니면 예수님 사랑으로 중심이 불붙는 일꾼인가. 너무 늦어져 돌이킬 수 없는 그 지점까지 치닫게 될까 두렵다. 처음 된 자로 나중 될까 봐 사뭇 조급해진다.(마 19:30) 성숙함을 나타내라! 당부하신다.(딤전 4:15)
-이동휘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