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머리글]눈을 뜨게 하소서 | 이동휘 대표이사
BY 관리자2017.04.26 17: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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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게 하소서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바로 이 길목을, 예수님께서 통과하신다는 수군거림을 맹인 바디메오가 엿들었다.(막 10:46)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격렬하게 소리를 질러댄다. 군중은 잠잠하라고 꾸짖었다. 조용히 있지 못해? 윽박지른다. 사람들은 눈뜨지 말라 한다. 진리를 따르지 말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잠식한 터다. 천지를 진동하는 고함으로 뜻을 각 세운다.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걸음을 멈추게 하는 엄숙을 몰고 온다. "너를 부르신다!"는 초대장을 받아낸 것이다. 그의 겉옷을 내 던지고 뛰어갔다. 무엇은 원하는가? 란 예수님의 물음에 서슴없이 '보기를 원합니다.' 말한다. 주님도 즉각적이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사건은 벼락치듯 처리되었다. 천지만물을 밝히 보는 기쁨을 선물 받은 것이다. 그리고 바로 주님을 따랐다. 골목의 거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구걸하는 자가, 줄 수 있는 자로 바뀌었다.  평생 앉아만 있었던 신세가, 세상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자로 서게 된다. 한 치 앞을 못 보던 자가, 예수님께서 주신 또 다른 청결한 눈까지 열려 천국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눈 밝은 자가 되었다. 딴판 인생이다.

 몸의 등불이 되는(마 6:22) 보배로운 당신의 눈을 양호한가? 혹시 눈 뜬 장님은 아닐까? 선과 악의 분별을 모른 채 아무렇게다 산다면 난시(亂視)가 아닐까? 세상의 부귀만 쫓고 저 멀리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면 근시(近視) 아닐까? 노후에만 치중한 나머지 하나님이 맡기신 귀중한 사명을 저버린다면 눈앞을 못 보는 원시(遠視) 아닐까? 진리가 명하는 가치 있는 삶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색맹(色盲)이 아닐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지 못한다면 사시(斜視)가 아닐까?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묻는다면 어떤 답을 내밀까? 이 질문에 어거스틴은 겸손을 청했다.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다섯 상처의 쓰라림을 자기 몸에 주시라고 애원했다. 야곱은 장자권을 구했고,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사모했다. 에스더는 민족을 살려달라고 울었고,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올리면서 지혜를 간구했다. 당신 안의 영혼의 처절한 비명을 들어라. 소리 없는 흐느낌이라고 묵살하지 말라. 주님께 그 조급함을 아뢰어라.

 

 이날의 맹인은 두 가지가 명확했다. 부르짖음의 내용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심을 알았음에도 영접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맹인은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 예수님으로 신앙고백을 한 것이다. 걸인이 랍비보다 현명했다. 그래서 확신에 찬 청원을 할 수 있었고, 예수님과 통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말씀하셨다. 당신의 믿음, 예수님의 인정받는 수준일까?

 그 다음은, 겉옷을 내 던지고 달려간 맹인의 행동이 특별히 주목된다. 밤낮의 기후차가 극심한 유대 나라에서 낮에는 겉옷이 되고 밤에는 침구가 되는 다용도 재산이다. 깔고 앉는 방석도 되고 비바람도 가리는 방패다. 그에게 있어서는 재산 1호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미련 없이 움켜쥔 것을 놓았다. 낡은 것을 내던지는 단호함 역시 철저했다. 새 것을 붙잡으려는 묵직한 용기다.

 

눈을 뜨라. 예수님께서 주목(注目)하라는 말이다. 세상과 마귀를 무시(無視)하라. 보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의 갑옷을 벗기셨다. 멸시(蔑視)해도 좋다. 무장 해제 된 마귀를 하찮게 여겨라. 우리의 두목은 세상을 이기고(요 16:33) 세상 권세를 두 발로 밟고 서 계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이동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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