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 예수님의 고난과 인내가 인류를 구원하셨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사 53장)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은 처절한 모습이셨다. 전능한 하나님께서 극심한 치욕을 받으셨다. 죽임 당하려 오신 것이지만 그의 인내와 은혜를 몸속 깊이 새기고 그 감격 속에 살아야만 하리라.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그는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억울한 재판을 받고 처형당하는데 그 신세를 걱정해주는 자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다, 그는 인간 사회에서 끊기었다. 우리의 반역죄를 쓰고 사형을 당하였다. 폭행을 저지른 일도 없었고 입에 거짓을 담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죄인들과 함께 처형당하고, 불의한 자들과 함께 묻혔다."(사 53:5-9공동)
고난 당하심의 의미를 카릴지브란은 다음과 같이 감명있게 표현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하늘나라의 나무를 심기 위해서는 나무의 수액이 그 뿌리로부터 솟아 올라야 함을 아셨고 그 뿌리에 자신의 피를 부어야 함을 아셨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하나의 계시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죽음으로 영생을 얻는 법을 몸소 가르쳐 준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힘없는 사람들을 멀리하고 야심가들을 모아 자신의 적들을 쳤다면 그분은 그분의 능력으로 일시적으로는 이 지상의 일부를 지배하는 정복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것을 원치 않으셨고 그래서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대로 오직 모든 것을 주는 자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제 여러분들께 묻고 싶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를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로마인들입니까, 아니면 유대의 제사장들입니까? 로마인들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죄악이 그분을 언덕 위 십자가 고통위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그분의 보혈의 은혜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칼리지브란: 사람의 아들)
※ 바울과 신앙선배들의 고난으로 복음은 이어져 왔다
바울의 주님을 위한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없는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뻔 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는, 강물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 사람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자매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수고와 고역에 시달리고, 여러 번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추위에 떨고, 헐벗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를 염려하는 염려가 날마다 내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누가 약해지면, 나도 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누가 넘어지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3-29 표준)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믿음의 선배들의 발자취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승리한 자들의 명단이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으로 켜이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고난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히 11:36-38 표준). 주님 안에서 가꾸어진 숙성된 인내로, 고요함과 온화한 평정심으로 고난을 꿀컥꿀컥 삼키고 산 자들이다. 천국을 넉넉하게 확보하고 가신 거룩한 선배들이다. 오히려 안전하니, 이 길을 따라오라고 우리들을 재촉하는 것 같다.
"나의 사랑하는 주인이시여, 인내가 명예를 훌륭하게 지켜줍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지독하게 조롱받는 녹슨 못과 같이 보기 흉한 것입니다." 윌리엄 세익스피어의 글귀다. 인내를 버릴 때, 더욱 신앙을 버릴 때 부끄러움을 겪게 되고 추태를 보일 것이라는 교훈이다.
※ 박해자를 사랑하기까지(조이 도우슨: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불)
♣ 데이비드(가명)목사
그는 신앙 때문에 끌려가 심한 구타를 당하고 열네 명의 다양한 범죄자가 섞여진 감방에 투옥 되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저들에게 살아계신 예수님을 간곡히 증거하였고 그들 모두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감독관은 뚜렷한 변화를 죄수들에게 안겨 준 그를 독방에 고립시켰다. 하나님의 사람은 복도를 향해 감방 위쪽에 나 있는 작고 낡은 창을 통하여 매일같이 큰 소리로 기도하고 주님을 찬양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간수에게 성경을 빼앗겼기 때문에 기억나는 대로 성경을 암송하여 들려주었다. 더 많은 죄수가 주님께로 돌아왔다. 어느 날 용감한 죄수에게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젊은 여성이다. 방 모서리 맨 아래에 있는 작은 구멍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감옥 안에는 변기가 없었고 또 데이비드 방은 복도 끝에 있었기 때문에 온갖 배설물이 독방에 있는 그 작은 구멍을 통해 그의 방으로 흘러들었다. 여성의 많은 질문에 대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배설물이 흘러드는 배출구에 얼굴을 대고 말하는 것이었다. 썩은 냄새가 풍기는 배설물을 통한 구원의 소식 전달은 그 여성을 구원하고야 말았다. 20대 후반에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 받은 용감한 하나님의 사람은 30대 초반에 이런 고난 중에서도 굴하지 않고 구원의 복음을 전한 것이다. 석방 후에도 조국에 돌아가 당찬 전도자로 쓰임 받고 있다.
♣ 산도시
인도 하층민으로 글도 모르는 농부였다. 선교사의 은덕으로 글도 배우고 쓰는 법도 배워 성경을 공부할 수 있었다. 가난한 그는 당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작물을 밭에서 키우고 있었다. 한 주만 되면 추수할 수 있는 그때에 작물이 모두 불태워졌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친척과 이웃이 밭을 태우고 지붕을 뜯어내고 매질하고 그의 아내는 동네 아낙네들에게 경멸을 당하고 다른 남자와 간통했다는 누명을 씌워 수모를 주었다. 자녀는 오물과 진흙으로 뒤덮였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나 눈앞에서 일 년 치의 식량이 사라지는 것을 본 그는 무서운 공포와 원망이 파고들었다. 주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갑자기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공력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성령의 불이 그 마음속에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자신에게 물었다. 정말 모든 것을 다 드렸는가? 정말 하나님 한분만을 사랑하고 그 분에게 다 맡겼는가? 정말 그분이 전부인가? 산도시는 대답했다. "예, 주님! 주님이 무엇이든지 가져갈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전부 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성령의 불이 그를 핍박한 사람들에 대한 모든 쓴 뿌리를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사랑의 불이 인도 신자의 내면을 가득 채운 것이다. 기쁨이 넘쳤다. 전에 알지 못하던 언어로 샘물 솟듯 하나님을 찬양했다. 성령세례를 받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그 동네로 돌아가 증인으로 살았으며 하나님은 그의 필요도 충만히 채워 주셨다.
♣ 저들이 우리를 보낸다
1995년, 북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의 일이다. 끔찍한 내전으로 수백만 명이 죽거나 부상으로 팔다리를 잃고 장애인이 되었다. 가축처럼 트럭에 실려 대규모 난민촌으로 끌려 다녔다. "여기서 무슬림이 되든지, 죽으라."는 말이 사막에서 들려온 모진 소리다. 난민들은 수용소 캠프 이름을 "저들이 우리를 버렸다"로 지었다. 몇몇 단체에서 구호품을 전달할 때 예수영화팀도 움직였다. 계속 줄지어온 인파들은 그들의 언어로 상영되는 영화를 6천여 명이 보았고 그날 밤 3천 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면서 고난당하는 장면에 저들은 소리내어 통곡했고 부활하시는 장면에는 환호를 질렀고 저들의 영혼도 그날 밤 살아났다. 그리고 수용소 이름을 바꾸어 걸었다. "그들이 우리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배운 성구를 암송했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배웠다. 다시 수용소의 이름을 바꾸었다. "저들이 우리를 보낸다." 이에 다른 수용소로 다니면서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 영화 상영을 가서 도왔다. 이 나라에서만 1천만 명이 예수영화를 보았고 매년 3천 명의 새로운 신자가 100시간의 긴 훈련과 제자화 과정에 참례했다. 매월 10개의 교회가 개척되어 나갔다.
♣ 오토미족
멕시코의 오토미족이 그들의 전통종교를 과감히 버리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마귀나라가 총 출동했다. 심한 핍박을 받았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그들이 살고 싶지 않은 반대편의 민둥산에 정착했다. 어느 날 그들을 모두 죽여 없애려는 음모를 듣게 되었다. 공포에 떠는 순간 한 여성이 일어나 간곡히 격려했다. "두려워 마세요.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모여 기도하기로 했다. 일부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산꼭대기에서 하는 위험도 말했으나 하나 둘씩 모여 들었다. 주께서 영광을 나타내시도록 기도하면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기도했다. 그리고 믿음으로 움막에 돌아가 잠자리에 들었다. 놀랍게도 이튿날 아침은 평온했다. 간밤에 일어난 기이한 일들로 흥분했다. 전날 밤 오토미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려는 남자 수백 명이 다이너마이트와 무기로 무장한 채 산기슭에 모였다. 정해진 신호를 따라 정착촌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 순간 하나님께서 권능의 불을 밝히셨다. 산 정상 전체가 눈부시게 밝은 빛으로 덮인 것을 보고 놀란 저들의 눈에 교회건물이 뚜렷이 나타났다. 산에는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는데 모두 총을 들고 발사준비를 하고 있었고 돌연 트럼펫 소리가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겁에 떨었고 그리스도인들은 한사람의 목숨도 해함 받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 너무나 많은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지금도 극심한 고난 중에 시달림을 겪으면서도 용감하게 신앙을 고수하고 있음에 온 세계 성도들은 기도로 강하게 응원해야 한다.
※ 성자들의 인내(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서)
♣ 마카리오 은수자
품행이 좋지 못한 처녀가 마귀의 꼬임에 빠져 아이를 임신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이의 아비를 묻자 마카리오 은수자가 자기와 동침한 관계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산에 있는 이 은수자를 마을로 끌고 와서 솥을 묶어 끈으로 목에 걸고 동네의 사방팔방으로 끌고 다니면서 이 수도자가 "우리의 처녀를 더럽혔습니다. 이놈을 몰아내시오" 외치면서 마구 두들겼다. 맞아죽을 지경까지 때렸다. 친척들은 "우리 딸을 먹여 살리겠다고 약속하기 전까지는 놓을 수 없다" 하면서 수모를 주었다. 그리하겠다고 약속하고 겨우 풀려나온 수도자는 아무 변명도 없이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일을 하여 그 여자의 생활비 명목으로 돈을 전달해 보냈다. 그 여자가 아이를 해산하게 될 날에 며칠이나 진통하면서도 아이를 낳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고통당하는 산모에게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산모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제가 저 은수자를 중상 모략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범인은 아무개 청년입니다." 자기의 죄를 자복하자 아이를 낳게 되었다. 사람들이 사죄하기 위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그 수도사는 그 곳을 떠나 다른 도시에 가서 주님의 뜻을 따랐다.
♣ 니스테로스 교부
어떤 교부가 니스테로스 교부에게 물었다. 수도원에서 시끄러운 일이 생길 때에도 어떻게 우울하지도 않고 침묵할 수 있는 덕행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부님, 죄송하지만 저는 수도원에 들어 왔을 때 이렇게 중얼거렸답니다. 당나귀와 네가 같은 족속이 아니냐. 당나귀는 두들겨 맞아도 잠자코 있고 욕설을 퍼 부어도 대답이 없다. 그렇게 행하여라. 시편에 있듯이 나는 당신 곁에서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래도 항상 당신을 떠나지 않습니다."(시 73:22, 23)
♣ 올림포 주교
그는 노예출신이었다. 수도하면서 노동하여 스스로 번 돈을 해마다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자기의 옛 주인들에게 내놓곤 했다. 옛 주인들은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마중을 나왔지만 그러나 교부는 대야에 물을 담아 그들의 발을 씻어 주려했다. "안됩니다. 사부님! 우리를 거북하게 하지 말아요." 이렇게 말해도 "제가 여러분의 노예임을 확인하고 여러분이 저를 놓아주어 하나님을 섬기게 하셨음을 감사드립니다. 그 대신 저는 여러분의 발을 씻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벌어온 것도 받아 주십시오." 옛 주인들이 듣지 않자 "제 말을 믿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제 돈을 받지 않는다면 제가 여기 남아서 여러분을 섬기겠습니다." 주인들은 그가 원하는 대로 허락했고 떠날 때는 예우 있게 배웅했고, 가면서 자선을 베풀도록 충분한 돈을 드렸다. 이로 인해 스케테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수모를 당하고도 앙갚음하지 않고 태연히 수모를 참아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승리를 거둔 사람이다"(제네비오 란)
♣ 순교의 영광
모세교부와 함께 있던 어는 날, 그는 "오늘 오랑케들이 스케테에 올 것이니 그대들은 일어나 도망가라!" 말했다. "사부님, 당신도 피하실 것입니까?" "오, 나야 이날을 기다린 지 오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니, 칼을 쓰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할 것이네"(마 26:52) "우리도 달아나지 않겠습니다. 사부님과 같이 죽겠습니다." 그건 내 일이 아닐세. 각자 마음대로 처신하게" 일곱 명의 수사가 함께 있었는데 오랑케들이 난입했고 학살을 자행했다. 겁에 질린 수사 한 사람이 빨리 밧줄더미에 몸을 숨겼다. 그때 그는 일곱 개의 관이 내려와 모세교부 및 함께 있는 학살당한 여섯 명의 수사들 머리 위에 씌워졌음을 보았다.
♣ 가가와 도요히꼬
젊은 시절에 빈민굴에서 전도하는 것을 본 친구의 눈에는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박꾼, 싸움하고 살인한 사람, 전과자, 창녀들을 전도하여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는데 대부분 찬송을 부를 줄 모르므로 자기 혼자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불렀다. 한 사람은 도박꾼이자 깡패인데 도끼눈을 치켜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또 뒤에서는 남자들이 와서 예배드리는 중에 창녀를 끌어내면 창녀는 애처로이 끌려 나갔다. 돈을 내라고 사람들이 가가와의 따귀를 때린다. 그러면 돈을 있는 대로 주어 보낸다. 옆에서 보던 친구는 화가 나서 따졌다. "저 사람들에게 돈을 주면 가서 도박을 할 텐데 너는 위선이다. 네가 알고 주느냐"고 그를 질책했다. 그때 가가와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것 같이 한다."고 대답할 뿐이다.
"우리가 어린이를 키울 때 넘어지면 일으켜 주듯이, 의사가 병자에게 주사를 놓고 또 놓듯이, 넘어지면 일으켜 줘야 한다. 다 알고 마지막까지 믿어 주고 참아 주는 것이 사랑이 아니냐?"고 그는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이렇게 마지막까지 참는 것이고 속아주는 것이다. 우리가 인내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주님 말씀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다.
♣ 주기철 목사(주광조: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기철 목사)
1936년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한 주기철 목사는 부임 후 첫 설교에서 “신사참배는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범죄요, 하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고 강경하게 외쳤다. 이후 주 목사는 신사참배 문제로 다섯 차례나 투옥 됐으며 일제는 1939년 평양노회를 조종해 주기철 목사를 파직하고 평양 산정현 교회를 폐쇄했다. 잡혀 가둔 날 "우리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초 당하시고 피 흘리어 죽으셨는데 내 어찌 무섭다고 내 주님을 모른 체할까. 오직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이오." 라고 말씀하며 떠났다. 일제는 가족들을 다 감옥에 불러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을 가해 주 목사의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공중에 매달린 채 죽도록 매질을 당하는 모습은 공포 그 이상이었다. 스무 번을 세기 전 주 목사는 공중에 매달린 채 기절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주 목사님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부인 오정모 사모는 ‘오, 주님’을 외쳤다. 일본경찰은 고춧가루를 푼물을 코와 입에 붓는 잔혹한 고문을 자행했고 주 목사가 보는 앞에서 부인을 똑같이 고문했다. 이런 공포 속에 대부분 신앙을 저버렸지만 주기철 목사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엎드려 기도했다. 신사참배는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고 있는 막내 13세인 광조에게는 그 모습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소년은 실어증에 걸려 3~4년 동안 심하게 말을 더듬었고 광복 후에야 정상으로 돌아왔다. 결국 주기철 목사는 광복되기 1년 4개월 전 6년의 옥고 끝에 순교했다. 당시 마흔 여섯이다. 막내아들은 주검으로 돌아온 아버지의 발목을 붙잡고 울다가 발톱이 전부 뭉그러져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미어지는 추억도 있다. 면회 때 아버지는 “왜 옷에 솜을 이렇게 두툼하게 넣어서 날 괴롭히느냐.”고 부인께 야단쳤다. 고문실에서 한참 매를 맞아 피를 흘리면 그 피가 두터운 솜에 전부 스며들어 옷이 빨리 마르지 않았고 반복되는 상처가 곪아 터져 옷은 항상 피와 고름으로 뒤범벅됐다. 영하의 극추위 속에 옷은 칼날처럼 날카로워져 상처를 다시 덧나게 했다. 주 목사가 감옥에 있던 6년 동안 오정모 사모는 단 하루도 따뜻한 방에서 잠들지 않았다. 수차례 경찰에 끌려가 수모를 당했던 사모는 교인들이 주 목사의 시신을 붙들고 통곡할 때 “여러분 지금은 울 때가 아니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주 목사님은 나약해서, 힘이 모자라서, 무식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말해야 할 때 벙어리가 될 수 없어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도망치거나 피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당연히 죽어야 할 이 시간에 살아남을 수 없어서 죽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자만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나눌 수 있습니다”고 울며 전했다.
※ 이 세상 자녀들도 인내로 아름다운 탑을 쌓는다
♪ 플라톤이 유명한 첫 작품 '국가'에 만족하기까지는 다른 방법으로 9번을 써 본 다음이다.
♪ 시세로는 완벽한 웅변술을 갖기 위해 30년 간 매일 친구들 앞에서 말하는 연습을 했다.
♪ 웹스터는 사전을 만들기 위해 36년간 자료 수집을 위해 대서양을 두 번씩 횡단했다.
♪ 밀턴은 실락원을 쓰는 시간을 충분히 갖기 위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났다.
♪ 기본은 '로마 제국의 멸망'을 쓰기 위해 26년간을 일했다.
♪ 브라이언트는 그의 시(詩)가 발간되기 전에 99번이나 다시 써보았다.
♪ 꿀 한 숟가락은 꿀벌이 4,200번이나 꽃을 왕복하여 얻은 것이다.
♪ 미칼렌젤로의 시스턴 채플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8년간 2천 번이나 스케치 한 결과다.
♪ 류에이는 10살 때 고압선에 감전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두 팔을 잃어버린 후 손대신 발가락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해 중국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된 의지의 청년이다.
인내가 없는 조급성이 현대인들 그리고 한국인의 특징처럼 되었다. 그 조급성 때문에 경제발전과 산업화가 쉽게 성취되는 소득도 만만치 않다. 우리의 언어가 이 부분에서 아주 발달된 것 같다. ‘빨리 빨리’는 이미 알려진 한국인을 대표하는 상표가 되었다. ‘얼른. 속히. 퍼뜩. 잽싸게. 불티나게. 재깍. 급히. 냅다. 총알같이. 번개처럼. 번갯불에 콩 튀어 먹듯. 번갯불에 사진 찍기’등의 기발한 단어들이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가치는 기다림과 땀 흘림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미국 침례교 회보에 실린 짧은 글이다. "한 걸음으로 너무 멀리 가려고 하지 말라. 너는 걸음을 계속해야 한다. 한마디 말로 네가 누구인가를 말하려 하지 말라. 너는 말을 계속해야 한다. 1인치의 성장으로 너무 크려고 하지 말라. 너는 계속 성장을 해야 한다. 하나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 너는 계속 행동해야 한다."
※ 인내의 보화
성령 받은 자가 필수적으로 맺히는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가 인내다(갈 5:22). 사랑이 대체 무엇인가. 사랑 정의에 인내가 성큼 첫 번째 등장한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란다(고전 13:4). 피곤하지도 않고, 낙심도 하지 않기 위해서는 죄인들이 자기에게 거칠게도 거역한 일을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라고 하신다(히 12:3). 누가 구원의 완성에 이를까. 두말 할 것도 없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했다(마 24:13). 좋은 수확물을 어떻게 맺을까? 인내로 결실한다는 비결을 알려 준다(눅 8:15). 인내로 영혼을 보존하고 얻는다는 진리다(눅 21:19). 선을 행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때에만 알곡을 거두게 된다(갈 6:9). 약속 어음을 어떻게 보상으로 받을 수 있을까. 역시 인내다(히 10:36).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인간 완성품을 만드는 비결도 인내다(약 1:3-4).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 주님께서도 참으시는데 왜 우리는 참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