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거룩한 순례자의 길, 같이 걷겠습니다 - 9.부흥을 일으키는 순례자
BY 관리자2013.12.07 09:3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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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을 일으키는 순례자

 

이동휘 목사

 

 

 

※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이 부흥이다

 

 

 

부흥은 시곗바늘이 한 바퀴 돌아 12시 제 자리, 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성령님의 인도 속에 세워진 원형적인 교회다. 예루살렘교회의 참신한 모습을 찾을 때 모든 것이 정상화 될 것이다. 한국교회 성도가 1200만이라 하던 그 호칭이 어느 덧 800만으로 처음 전해 들었을 때 그 울분, 그 수치스러움, 그 참담함! 경련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실종된 400만 탈환작전에 한국성도는 총 가담해야 하지 않을까. 삼손처럼 나귀 턱뼈라도 쥐고 나가야 한다. 초대교회로 회복되는 것이 곧 부흥이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3-47)

 

 

 

★ 천국시민의 정체성

 

사람마다 두려워했다. 경외했고 숭배의 모습으로 보았다. 어제의 고양이가 늠름한 사자로 변한 모습을 저들이 본 것이다. 마리아도 천사를 보았을 때 놀랐다. 그래서 무서워하지 말라(눅 1:30) 했다. 세 제자도 변화산에서 광채 나는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보는 순간 엎드려 두려워했다(마 17:6). 거듭난 초대교회 성도들의 광채와 말과 모습이 마치 천국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서, 죄 된 가슴속 비밀이 탄로 날까 떨었을 것이다.

 

아! 그런데 오늘의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경멸하고 있다. 멸시받아도 대응할 말이 없다. 오히려 세상은 교회를 염려해 주고 있다. 기독교의 브랜드가 없어져 천국상표가 없는 주제에 가짜로 볼 수밖에 없는가 보다. 기미년 삼일 만세 당시 33인 중에 1%의 기독인들이 거의 반을 차지했다. 교회는 애국자라는 브랜드가 있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는 엄숙한 명령이 하나님의 입술을 통해 주어졌는데도 아무리 보아도 거룩한 모습이 아니다. 제 성질 못 죽이고 고집만 앞세운다. 성형수술로 원판 얼굴이 실종되듯이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이 제조한 제2의 꾸밈작품이 되어 초대성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비극이다. 엄마얼굴을 아기가 닮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아예 지운 것 같다. 어느 교회 거듭난 청년들이 아침 일찍 일어나 골목을 청소하고 공공 일에 열심히 했더니 이상한 사람으로 보면서 이단들이 아닌가 하며 경계를 하더란다. 그럼 어떻게 할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는 무서운 말씀 앞에 떨림을 가져야 한다. 요령 낀, 때 묻은 마음가짐이면 천국은 어림도 없다는 지엄한 명령이다. 천국백성의 정체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 사도의 권위

 

사도들을 통해 기이한 일과 표적이 있었다.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다(행 9:40). 사기꾼이 손 털고 이웃사랑에 몰두한다. 50일 전의 겁쟁이 베드로의 설교에 3천명이 땅에 구르며 통곡한다. 그가 지나가는 길목에 병자들을 눕혀 놓고 그림자라도 덮여지기를 바랐다(행 5:15). 그 나라 제일의 지성인들과 권력의 최고를 달리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앞에 베드로와 사도들을 불러놓고 청문회를 열었을 때 폭포수 같이 쏟아내는 베드로의 증언 앞에 그들은 놀랐다. 학문이 없는 평범한 인간으로만 알았던 무식한 사도들이 그들을 압도하는 신적 권위를 가진 것이다. 병 나은 증인까지 옆에 있는 현실에 저들은 비난할 말을 찾지 못하고(행 4:13, 14) 처벌할 방법도 찾지 못한 채(행 4:21) 풀어 주었다. 갈릴리 사람들의 증거는 굳세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진리 앞에 무릎을 꿇었다(행 6:7).

 

한국목사들이 써낸 추천서는 미국사회에서 믿지 않는단다. 국제적으로 신용불량이다. 한국 국민도 신부보다도, 스님보다도 목사의 존경도를 낮췄다. 기독교인까지도 자기의 목사, 전도사를 비난한다. 누구의 잘못일까.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유는 도무지 따지지 말자. 따지다가 이렇게 되었다. 어느 신학교 입구 돌에 새긴 커다란 글을 보았다. 사람이 되어라. 학자가 되어라. 성자가 되어라. 또 있는데 그 나머지는 잊었다. 정치꾼이 되라는 글은 없었다. 총회장이나 감독이 되고 지도자 되라는 부탁도, 가짜박사도 괜찮다는 말도, 물질에 욕심을 내라는 표현도, 거만하고 으스대면서 대접 잘 받으라는 부추김도, 정당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는 문구도, 십계명 중 몇 가지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암시도,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요령도 거기엔 없었다. 하나님께로부터 배우지 않았다면 마귀에게서 배운 것이다.

 

지도자들이여! 경건으로 명예를 얻자. 겸손히 엎드림으로만 권위는 회복될 것이다.

 

 

 

★ 사랑의 공동체

 

믿는 사람들이 함께 지내며 살았다. 물론 집단생활은 아니다. 대단한 핍박이 장기간 일어나서 그리스도인들은 유랑하는 나그네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가정을 떠난다는 자체가 외로움이요 고통이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7). 믿음 지키기 위해 유랑객이 되었다. 나그네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을 만나면 발을 내밀어 살짝 물고기를 그린다. 물고기는 로마시대 기독교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지하묘지, 카타콤에서 활동할 때 서로 확인하는 암호였다. 물고기 신호를 통해 기독교인임을 알렸다.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란 말의 희랍어 머리글자만 따면 물고기를 의미하는 “익투스”가 된다. 카타콤 이후 10명의 혹독한 황제들이 장장 300년간 기독교인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박해한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기독교의 상징은 물고기에서 십자가로 바뀌었다. 그때 신자들은 일단 그리스도인으로 확인되면 자기 집에 동행하여 숙식을 같이 했다. 당시 손님대접이 기독교복음에 필수였고 관습이 되었다. 성경에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잊지 말라(히 13:2)는 당부를 한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들은 형제처럼 다정하게 살았다.

 

한국국민의 최고의 단점도, 그리고 교회의 가장 큰 취약점도 분열이다. 유일의 세계분단 국가는 이 조선 민족뿐이다. 지금도 금을 긋고 서로 비방하고 동족을 겨냥해서 눈에 독을 품고 대치한다. 교회도 분열로 인한 상처가 가장 큰 독이다. 분열로 교회가 생기는 기이한 발전이 있는가 하면 그 분열로 교회는 조각이 나고 얻은 교인들을 모두 팔아버렸다. 예수님 마지막 기도에서(요 17장) 하나 되기를 애절하게 기도하셨는데, 마지막 주신 계명도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인데 예수님께 유감이 있어서 그 말씀에 반란을 일으켰는가. 무슨 원한이 커서 우리 주님께서 위해서 죽으신 그 형제를 감히 저주하는가. 아직도 예수님은 그를 품고 사랑하시는 천국의 보석 같은 자녀인데 왜 그를 감히 헐뜯고 외면하는가. 교회는 천국의 지점이란다. 목사파, 장로파란 거친 말도 내 고집이 파를 만들고 내 자존심이 나를 이렇게 피곤케 한다. 최대 악질인간 원수는 바로 나 자신임을 부인하면 어리석은 자다. 나 죽이면 마귀도 죽고 내가 살면 마귀만 득을 본다.

 

 

 

★ 사랑의 실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자기 집 농사짓는 연장을 이웃과 같이 쓰는 경우다. 옛날 가난 했을 당시 결혼하는 신랑이 이웃집에서 양복을 빌려 입고 식장에 가고 구두도, 모자도 빌려 썼다. 아버지 문패가 붙은 집은 분명히 아버지 재산이고 소유권이 그에게 있다. 그러나 아들 딸 열 명의 식구는 다 그 집에서 같이 산다. 사용권은 그 식구 전체에게 있다. 자기재산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고 사용권만이 인간 모두에게 같이 있다는 성경적 물질관으로 초대성도들은 깊이 박힌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했다.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 앞에 두매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5). 집이 없어진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의 속박에서 벗어진지라 주를 위한 순교각오를 쉽게 가지게 되었고 쫓아내면 거침없이 떠나서 복음을 모든 곳에 뿌려 복음은 급히 확산되었다. 예루살렘의 빈곤문제를 교회가 해결한 셈이다. 교회헌금의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기에 사용권을 가진 교회는 하나님의 뜻에 정한대로 써야할 것이다. 하나님 재산을 낭비하면 천국감사에서(지상에서는 국정감사) 호되게 야단맞을 것이다. “주께 드리네!” 찬송 부른 대로 드린 것은 하나님 재산이다. 이웃사랑하기를 내 몸처럼 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르면 50%를 드려야 한다. 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균형 잡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재정을 선교와 구제로 반절을 쓰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시에 개인의 지갑까지도 그런 정신으로 물질관을 바꿔야 한다.

 

 

 

★ 예배생활

 

날마다 모였고, 한 마음으로, 성전에 모였다. 주일에만 모인 것이 아니다. 사양화되는 서구교회처럼 일주일에 한 번만 모인 것이 아니고, 한 시간 내에 마치는 간략히 드린 예배도 아니었다. 날마다 모이는 불덩이다. 브라질교회가 강자로 떠오르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가톨릭의 압박으로 예배를 오랫동안 드릴 수 없었던 개신교는 겨우 타협안으로 주일 낮에 성경공부만 하는 것으로 허락되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박해가 줄어들고 자유를 얻게 되자 주일 밤에 정식예배를 드렸다. 그래서 브라질 교회는 낮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밤에 모여 보통 말하는 주일 정식예배를 드린다. 낮에는 여전히 성경공부를 한다. 한국교회에 주일 밤 예배가 실종된 것은 애처로운 일이다. 오후 석양예배로 대치하는가 하면 가정예배로 각 가정 단위로 드리는 형태도 있게 된다. 예배를 회복해야 교회도 개인도 산다. 초대교회는 살아있는 예배, 강한 그 힘으로 주님의 말씀을 힘있게 전했다.

 

 

 

★ 건전한 가정생활

 

인간은 한쪽에 기울다 보면 다른 쪽은 약하게 되는 편협성과, 식사에는 편식이 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교회생활도, 가정도 건전했다. 집마다 빵을 떼면서 기쁨으로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 교회천국에서 가정천국으로 이어졌다. 이혼도, 뇌물수수도, 정직성도 비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모두 그 건수가 거의 같다는 통계는 한국 그리스도인의 수치를 보여준다. 세상은 조건이 서로 맞고 너도나도 손해 보지 않는 상태에서 이뤄지는 계약결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언약결혼이다.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셨기 때문이다. 부부간, 부모 자녀간, 형제간 모두 화합하여 마귀의 공격을 몰아내는 아름다운 가정으로 격상시켜야 한다. 부모와 친척 모두를 구원시키는 가족선교사가 되어야 한다. 자녀를 성적으로 보지 말고 생명으로 보는 시선도 가져야 한다.

 

 

 

★ 감사생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찬송은 예배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구원의 은총으로)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 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감사와 찬양이 그칠 때 우리 입술에서는 바로 원망과 섭섭함, 내 영혼을 괴롭히는 잡다한 생각들이 나를 억누른다. “내게는 하나의 불평이라도 과하다”는 성인의 감사를 배워야 한다.

 

 

 

★ 존경의 대상자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고 호감을 샀다. 칭찬받으려고 은근히 자신을 부추기고, 자기도취에 빠지는 어리석음에서 탈출해야 신앙이 성숙한다. 자기자랑은 교만이고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 된다(잠 16:18). 존경받는 인격을 갖출 때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임 받는다. 인격자라는 브랜드가, 정직하다는 평판이, 모범적인 국민이라는 소문이 퍼져야 한다.

 

 

 

★ 부흥하는 교회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떼 지어 달려왔다. 400만을 어떻게 잃었나? 목사와 다투다 나간 사람이라면 목사는 가서 무릎 꿇고 빌어야 한다. 목사 때문에 상처 입은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찾아가야 한다. 장로 때문에 실망하고 나갔는가. 체면 따위는 다 벗어 던지고 주님의 자녀로 회복될 때까지 애타는 심령으로 구출해야 한다. 당신 때문에 타락했다면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 피 값을 물으실 것이다. 권사의 오만한 태도로, 집사의 조심스럽지 못한 거친 말 때문에 교회를 떠나 그가 지옥을 향하고 있다면 밥 먹지 말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울어야 한다. 교회분열로 갈라졌다면 과거에 감정 쌓고 원수같이 지낸 사악함을 십 수 년이 지났을지라도 용서해 달라고 온 교인이 그 교회 찾아가서 그 교인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당신들이 훨씬 잘했고 그 사람들이 나빴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싸움은 이겨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져도 졌다 하지 않으므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란다. 무조건 져야한다. 그래야 한국교회는 숨통이 트인다.

 

 

 

 

 

※ 세계부흥의 역사

 

 

 

★ 초대교회 시대의 부흥

 

오순절 다락방에서 터진 성령의 강한 불길은 지체 없이 복음전파로 세계에 번져 나갔다. 12사도는 거의 온 세계에 선교사로 뛰쳐나가 순교하고 복음의 기초를 놓았다. 방언 소리를 듣고 수군대던 열여섯 지역의 사람들도(행 2:9, 10) 그날의 감격과 은혜를 체험하고 흩어져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세계에 퍼져나간 진리는 핍박 중에서도 순수복음을 계승시켰고, 모진 박해의 그 300년간을 오히려 기독교 영웅시대라 부르게 되었다. 3세기 초에 테르툴리아누스는 행정당국에 보낸 상소문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우리는 당신이 다스리는 모든 곳들 -도시들, 섬들, 단체들, 의회들, 군대들, 원로원, 궁전, 법정-을 복음으로 채웠습니다.” 그렇게도 강하게 진리는 성장하고 뻗어나갔다.

 

 

 

★ 마틴 루터의 복음 발견

 

기독교가 자유를 찾아 권력과 함께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복음은 그 빛을 잃기 시작하여 중세암흑시대를 만들었다. 드디어 14세기의 위크리프에서 시작하여 15세기에는 후스, 16세기에 루터와 칼빈 등에 의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으로 성령의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교황의 오류들이 발견되고 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복음신앙 가운데서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로 인해 수만 명의 개종자들이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났고 개신교가 탄생된 것이다.

 

 

 

★ 미국에서의 부흥운동

 

청교도들이 상륙한 미주대륙은 부흥의 물결이 끊이지 아니했다. 1734년 노오댐프턴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행한 일련의 설교들로 부흥은 시작되었다. 이어 1740년의 대각성운동도 거세게 번져 나갔고 5명의 대학생들의 건초더미 기도운동이(1805) 미국 대학생 운동을 일으켰고 해외선교를 자극시켜 젊은이들이 세계를 품고 나갔다. 법률가인 피니의 거센 회심운동, 무디를 통한 부흥운동은 미국사회를 정화시켰다. 무디는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주께 인도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부흥운동의 여파로 세계 최다선교사를 보내는 열매를 맺었다.

 

 

 

★ 유럽과 웨일즈운동

 

기독교의 성장묘판이 되는 유럽은 기독교 확장에 언제나 중심에 섰었고 요한 웨슬레와 휫필드 등을 위시한 18세기의 대 부흥은 영국뿐 아니라 미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월리맘 케리를 위시한 현대 세계운동의 주체는 단연 영국이었고 줄 이어 선교를 주도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 웨일즈의 대 부흥이 일어났다(1904-1906) 이 운동의 결과로 절제의 큰 물결이 전국을 휩쓸면서 주류 판매는 큰 손실을 경험하였다. 범죄 사건도 격감했다. 수백 건의 시효가 넘은 채무들이 해결되었다. 15년 전 혹은 20년 전에 도둑맞은 물건들이 주인에게 다시 돌아왔다. 불화 관계들도 치료되었고 저주거리였던 분파주의도 누그러졌다. 웨일즈의 부흥운동은 자발적이고, 어떠한 종류의 조직도 없었다. 지도자들은 30세를 넘지 않았고 위대한 설교가도 아니었다. 이 부흥운동자들은 광산지역인 비천한 직업 출신이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다. 몇몇은 20세 이하의 여성들이었다. 젊은 에반 로벗즈에게 설교의 큰 은혜를 부어주셔서 폭풍이 몰아치는 설교로 많은 사람을 회심시켰다.

 

 

 

 

 

※ 참된 부흥의 청사진(조이 도우슨: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불)

 

 

 

★ 부흥의 신비

 

① 부흥은 하나님의 백성을 무기력하게 만들려는 사탄의 의도와 계획을 쳐부수는 무기다.

 

② 믿지 않는 자의 눈을 가려 복음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의도와 계획을 깨뜨리기 위한 것으로 영적각성만큼 좋은 것이 없다.

 

③ 성령께서 물밀 듯 오셔서 온전히 다스려 주시기를 우리 스스로 절실히 바라지 않는 한 사탄의 세력은 우리가 제아무리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④ 교회 전체에 필연적으로 다가올 박해에 부흥만한 대비책이 없다. 초대교회는 부흥의 때에 시작되어 심한 핍박을 견뎠고 번성하고 배가하였다. 저들이 세상을 뒤엎었다(행 17:6).

 

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하기에 가장 좋은 것이 부흥이다. 부흥의 주된 특징이 죄에 대한 자각이기 때문에 불같은 부흥이 정화하고 깨끗케 하기는 최적이다.

 

⑥ 부흥은 예수님의 재림을 앞당긴다.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준비가 된다(벧후 3;10-14).

 

⑦ 부흥 중에 미리 직고한 사람은 심판대에서 부끄러운 직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롬 14:10-12).

 

⑧ 의로운 사회와 국가로 전환시키는 힘이다. 부흥운동이 사회를 정화시킨 실례가 아주 많다.

 

⑨ 세계구원의 첩경이다. 각성운동이 일어난 후 세계선교로 젊은이들이 몰려갔다.

 

⑩ 영원과 잇대는 시작이다. 나그네임을 깨닫고 영원한 삶을 소망하며 천국기쁨을 품고 산다.

 

⑪ 지속적인 부흥과 영적각성은 내 생애의 역사의 흐름을 바꾼다.

 

 

 

★ 부흥을 위한 기도에 생명을 걸라

 

대적이 상상도 못 할 만큼 오물의 홍수를 밀고 들어 왔을 때 그를 쳐서 익사시키려면 높은 수위(水位)의 성령의 물결이 필요하다. 교회가 무기력과 안주의 옷을 벗어 던지고 청결한 마음바탕위에 성령의 통치를 받아야 그 힘이 나온다. 할 일은 산고(産苦)를 치루는 일이다.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더 높은 차원의 중보기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미숙아가 나오지 않을 것을 보장 하신다. “바로 내가 아이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낳게 할 수 없겠느냐? 주께서 말씀하신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이가 나이거늘, 어찌 내가 아이를 나오지 못하도록 막겠느냐? 너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사 66:9표준). 하박국 선지자의 애절한 간구도 전제되어야 한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합 3:2). 한국교회 부흥을 들은 중국에 와 있는 마리 몬슨 독신 선교사는 한국에서 붉게 타오르는 연료를 이곳에 가져올 수 있다면! 하는 소원을 품었다. 비용이 드는 여행이라 돈을 댈 수 없었다. 경비를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말씀이 들렸다. “그 여행을 통하여 받고자 하는 것을 여기서 기도함으로 받을 수 있다”는 도전이었다. 엄숙한 약속을 드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방을 가로질러 기도하는 곳까지 가려고 일어섰다. 그러나 두 걸음도 가지 못해서 멈추었다. 마치 구렁이가 몸을 칭칭 감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조이는 것 같았다. 너무 무서웠다. “예수님! 예수님! 예수님!” 그 이름을 토해 낼 때마다 숨 쉬기가 쉬워졌다. 멍하니 서 있다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 기도가 그 정도로 중요하다면 이 서원을 지키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겠구나.” 20년간 기도하는 동안 이 경험이 자극이 되었고 “대각성”(1927-1937)이란 시대를 만들었다. 하찮아질 것을 각오하고 무식하게 매달려야만 불붙는 부흥은 온다. 썩은 역사를 고쳐놓기로 결심하고 젊은 군대들이 세계 구석구석에서 꿈틀거릴 때 생명이 살아난다. 어떤 명성도 얻지 않기로 결단해야만 이 싸움에 승리를 쥐게 된다.

 

 

 

★ 어린이의 부흥도 대망해야 한다.

 

헤브리디스 부흥에 있었던 일이다. 던컨 캠벨은 설교가 중간까지 이르렀음에도 영적인 묶임이 떠나지 않는 안타까움에 놓였다. 결국 설교를 중단했다. 그때 영혼에 대한 깊은 부담감을 가진 소년을 발견했다. 주님과 친밀한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도널드! 기도를 인도해 줄 수 있겠니?” 소년은 일어나 아침에 읽은 계시록 4장을 언급하며 기도했다. “오! 하나님 그곳에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을 풀어 주소서” 뜨겁게 기도하는 순간 성령께서 허리케인처럼 강하게 건물을 휩쓸며 하늘 문이 열렸다. 교회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의자 앞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고 팔을 벌리고 주님을 영접했다. 어린아이의 영성이 더 높을 수도 있는 일이다. 노소를 불문하고 영적인 고수에게 머리 숙일 줄 아는 겸손이 부흥을 몰고 올 것이다.

 

두 명의 평신도가 세운 주일학교가 있었다. 어린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성령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시어 눈물과 격한 감정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어지는 영적각성으로 2만 명 이상의 사람이 모인 가운데 어린아이도 수백 명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아이도 어른과 똑같이 집중력을 발휘하여 설교에 귀 기울였다.

 

1859년 아일랜드콜로레인 마을학교에서는 수업도중에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한 남자아이가 자신의 죄를 깊게 깨닫게 되어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교사는 크리스천 아이와 함께 집으로 보냈다. 귀가 도중 동행하던 친구가 그리스도께 인도됐다. 다시 학교로 가서 고통이 사라진 얼굴로 “정말 행복해요. 주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셨어요.” 순진한 간증은 놀라운 파급을 일으켰다. 아이들이 한명 한명씩 교실을 떠났다. 선생님이 나가보니 모두 마당에 나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는 소리가 여학생 교실까지 들렸고 학교의 모든 사람이 그 자리에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은 부모와 친구들이 달려왔다. 교사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성령의 폭포수 같은 영향력에 빨려가게 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갈망했다. 연락을 받은 목사들의 도움으로 밤 11시까지 계속되었고 그 지역 전체를 흔들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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