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임재 안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주님과 우리는 결속 관계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도무지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다. 한 몸이요, 하나라는 결합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요 15:5)하신다. 나무 몸체와 가지라는 구분일 뿐, 마치 나의 몸과 몸에 붙은 팔이나
다리처럼 너와 내가 구분 짓지 못하고 떨어질 수 없는 엉킴이다. 가지가 몸통에서 잘리는 순간 생명의
공급이 끊겨 바로 죽게 된다. 가지는 열매를 맺으므로 그 사명을 완수하는 의무도 있다. 나무인 예수님께 믿음으로 연결된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풍성한 열매를
맺는 은총을 톡톡히 받게 되었다. 우리 편에서 파기만 하지 않는다면 이 관계가 영원히, 천국까지 지속된다는 사실은 떨림이요 놀람의 은총이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도 연결 짓는다. 목자를 따르는 양으로(요 10:4) 푸른 들판의 비옥한 목장을 훤히 떠올리게 한다. 양은 시력이
마이너스 10이어서 목자가 없으면 즉시 길을 잃는 어리석은 짐승이다.
개나 소는 집을 찾아올 수 있어도 양은 본질상 길을 모른다. 나는 선한 목자라 하신다.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알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요 10:14, 15) 잠시도 목자 없으면 죽은 목숨인데 주님께서
책임지시겠다는 미쁜 약속이다. 주님의 굳센 손이 나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으시는 친절한 인도이시다. 주님의 품에 안긴 어린 양이다. 그 다음은 부자 관계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 우리는 자녀라는 은총이다(요 1:12). 장성하면 분가해서 백리 천리 밖에서 살기도 한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부성과 모성은 죽음보다 더 강하고 굳센 법이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기는 백번 죽어도
좋을 가슴으로 안타까워하는 분이 바로 부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이렇게 쏟으신다는 표현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는 인간 아버지와는 달리 능력과 풍요로움이 대단하셔서 그 어떤 문제도 모두 시원스럽게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만능자시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이 세상 순례자 길을 다 마친 후에는 내 아버지 집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희열도 아울러 같이 가진다. 달콤한 영광에 참례하는 그 순간이 곧 올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친구관계다. 높으시고 초월자이신 그분과 죄와 더러움에
찌든 죄인이 감히 친구 된다는 것은 건방진 망상이다. 그런데 거룩하신 주님께서 먼저 “이제부터는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요 15:15) 제안을 하셨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목숨을 기꺼이
버리는, 목을 내놓은 친구 예수님이시다(요 15:13). 어떤 비밀도 거침없이 나누는 친구다. 비천한 종처럼
대우하지 않으신다는 특별 대접이다. 감격스런 일이다. 그리고
또 있다. 부부관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알을 버리고
돌아와 하나님을 일컬어 내 남편이라 부르기를 소망하고 계셨다(호2:16). 사도 바울은 전도하여 한 생명을 구원하는 것을 한 남편이 그리스도에게 중매하는 일로(고후 11:2) 표현했다. 마지막 날은 주님 앞에서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가
깊어지는 밤, 기름까지 듬뿍 준비한 채 등불 켜고 기다리는 따사로운 장면으로 묘사했다(마 25:4). 둘이 한 몸을 이루는(마 19:6) 신비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창 2:23)인 동숙관계다. 주님과 우리가 그렇게 격의가 없는 하나 관계란다. 바울 사도는 부부사이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말한바 있다(엡 5:32). 한
마디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 되는 거룩함이다. 주님의 임재 속에 나는 녹아버려야 정상이다. 주님과 내가 톱니바퀴처럼 엉켜진 삶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살전 5:10)
※ 예수님의 삶속의 하나님의 임재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개성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돋보인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시나(요 1:1) 아버지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으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1:18).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행한다 말씀하신다(요 5:19).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여주셔서 그대로 행하신다고 말씀하셨다(요 5:20).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심 같이 아들 또 역시 죽은 자를 살리신다(요5:21).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말하는 줄을 알라(요 8:28).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로(6:27) 보내셨기 때문에, 가시고 오시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대로임을
말씀하셨다(8:42).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오셨단다(6:38). 예수님의 독립성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하나님 안에서의
감춰진 예수님이시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8:16).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33년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10:30). 선포하시면서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신비를(10:38) 알려 주셨다. 그러므로 나를 본 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본 것이라 말씀하셨다(12:45).
심지어 내 것은 하나님 것, 하나님 것은 다 내 것이라는(17:10)
등식으로 표현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자기와의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우리까지를
포함시키셔서 우주적인 하나의 친교를 도모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4:20)” 이 관계가 천국까지 연결되어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17:24)
천국에서 같이 산다는 감미로운 언약을 거침없이 주셨다.
※ 로렌스의 주의 임재(로렌스: 하나님의 임재 연습)
★ 로렌스는(Brother
Lawrence, 1611-1691) 수도원에서 평수사로서 부엌일과 샌들 수선하는 일 등 아무리 힘들고 비천한 일을 하면서도 푸념치
않고 주님의 일을 감사하게 감당했다. 말년에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성품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임재하신 사람이 되었다. 그의 자아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는 한 번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죽었고 매일 그리스도를 살리는 일을 하였다. 그의 안에는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있을 뿐이었다. 40년간 거룩함을
이룬 로렌스에게 수도원은 “부활의 로렌스 형제”라는 수도명을 주었다.
★ 자기 경건한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내게는 일상의 임무를 수행하는 시간과 기도시간이 다르지 않다. 나는
부엌의 온갖 번잡함과 달그락거리는 소음 한가운데에서도, 심지어 몇 사람이 동시에 여러 가지 다른 일을
시킬 때에도 마치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조용하고 평온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소유한다. 때로는
내 믿음이 너무 찬란하게 빛나 내가 본래 가졌던 믿음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게는
이 모든 것이 마치 어두움의 커튼이 오르고 그저 청명하기만한 끝없는 날들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프라이팬에서
계란 프라이를 뒤집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한다. 그 일을 끝마쳤을 때 다른 할 일이 없으면
부엌 바닥에 꿇어 엎드려 그 일을 잘 할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경배한다. 그렇게 기도드리고
일어나면 세상 어떤 제왕도 부럽지 않다.
★ 세 차례나 중병에 걸린 적이 있었다. 오른쪽 옆구리의 염증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얼굴에 희색이 돌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기쁨이 넘쳐 혹시 아프지 아니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했다. “사실 무척 고통스럽습니다. 통증은
심하지만 영혼은 평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지극한 통증을 10년만 더 견디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지금처럼
이렇게 만족하여 평온할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에 “물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고통 받기를 원하신다면 10년이 아니라 심판 날까지도 기꺼이 받겠습니다. 그 기간 계속 은혜 주시도록 소망할 것입니다”
★ 그는 평온함으로 일평생을 살았고 담대해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다. 오직 철저히 하나님만을 응시하였기 때문에 슬퍼하지도, 화를
내지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다른 모든
것들을 망각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만 붙어 있었기 때문에 언제나 흔들림이 없었고 변덕스러움과 불안함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는 인간들을 사랑하되 우정을 돈독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피조물을 사랑함으로서 창조주를 사랑하기 위해서였다.
★ 로렌스는 하나님만 구했을 뿐, 다른 것들은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일지라도 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하나님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더 크신 하나님만을 구한 것이다. 은혜의 선물을
넘어서서 그것을 주시는 분께 가지 못하고 선물 자체에 빠져 황홀경에 빠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했다.
★ 이 글은 로렌스가 수녀원장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진정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오직 하나님만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되시도록 다른 모든 것들은 비워내야
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비워내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방해를 받습니다.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대화하는 것보다 더 달콤하고 더
맛있는 삶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하는 것으로만 영적 위안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일상의
임무나 다른 활동을 수행하는 동안, 심지어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동안이라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자주 잠깐 멈추고 내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예배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내적으로 하나님께 집중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애(自己愛)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 한번은 어떤 형제가 로렌스를 찾아와 수도원 측에서 내 보내려
한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전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담담히 말했다. “저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대로 처리하실 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만일 사람이 지옥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제가
그곳에 가기를 바라신다면, 저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고 기쁘게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곳에서도 저와 함께 계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신다는 사실 자체가 그곳을 낙원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자신을 그대로 알려줄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훌륭한 원본을 제처 놓고 조잡한 사본인 이성의 추론과 과학을 탐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가장 깊은 곳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홀로 버려둔 채 어리석은 논쟁에 몰두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왕과 대화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줄 모릅니다.”
★ 자신의 유일한 슬픔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분한 고난을
받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상관들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혹독한 노동과 천한 일을 시켜도 웃음으로 일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병상의 고통을 일부러 피하지 않았고 병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 잔느 귀용의 주님께 바친 순수 사랑(잔느 귀용: 순전한 사랑)
★ 귀용은(Jeanne
Guyon. 1648-1717) 미모의 처녀로 16세에 강제로 결혼하여 28세에 병든 남편과 사별한 후부터 70세까지 주님 한분에게 사랑을
바치며 거룩하게 살았다. 주님 사모하며 길 걷는 그에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수준 높은 영성을 유지하며
살았다. 그러나 박해와 오해 그리고 순결한 신앙을 그 시대가 감당할 수 없어서 8년 동안 신앙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였다. “감옥의 돌들은 제 눈에
보석처럼 보였고 헛된 세상에서 빛나는 것들보다 더 귀히 보였다. 욥과 같은 격랑 속에서도 주님을 더욱
갈망했다. 내게는 거처가 없었다. 사람들은 나를 거절하였고
피할 곳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멸시하며 분개할 때 친척들마저 나를 핍박했다. 모든 피조물과는 떨어져 살 수 있는 조그만 바위틈이라도 달라고 간구했다. 다윗처럼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십자가로 많은 자녀를 낳았고 출옥한 후에도 계속 인생의 길을 잃은 자들에게
길을 찾는 법을 알려 주며 하나님을 향한 순결한 사랑을 간직해 나갔다. 마치 슬픔을 완성시키려는 듯, 하나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을 하나씩 모두 거둬 가시었고 깊은 슬픔에 빠져 하나님마저 떠나가 버린 듯 하는 과정을
통과하기도 하였다.
★ 영적 전쟁을 하는 동안 사소한 욕구를 허용하는 것은, 굶어 죽어야하는 형을 선고 받은 사람에게 육체적인 에너지를 공급하려고 시간에 맞춰 약간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에게 음식은 죽음을 늦추는 고문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를 전적으로 죽이는 것뿐이다. 욕망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채
단지 지속적으로 억제하면서 육체의 욕망을 정복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여전히 육체의 활동에 매달린다. 이런 사람은 깊은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
안에 잠잠히 머무는 것이야 말로 육체적 욕구를 정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그것은 우리를
육체적 욕구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이다.
★ 주께서는 사랑하는 자녀일수록 얼마나 더 엄격히 징계하시는지요! 그 징계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정결케 하려는
영혼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결점까지도 그냥 놓아두시지 않는다. 이러한 징계는 영혼에게 기쁨과 신선함을
준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자들의 잘못을 엄격하게 고쳐주시는 것을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느낌은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불을 보내신다. 그 불은 엄청난 고통을 주며 죄가 깨끗해질 때까지 안에서 타오르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긋난 뼈가 제자리에 맞춰질 때까지 겪는 고통과 같다. 이럴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로 가서
위로를 얻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망치는 일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그 고통을 사용하시려 하시기 때문이다. 조급하게 성장하려고
애쓰거나 위로의 수단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실패할 것이 분명하다.
★ 나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너무나도 위대하신
주님의 임재로 그 자체만으로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내 얼굴 표정에도 명확하게 드러날 정도였다. 나의 온 마음은 주님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식사를 해도 무엇을 먹었는지 몰랐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맛있는
고기를 먹은 것처럼 느꼈다. 기도와 십자가는 내 마음과 생활 속에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선물이었다. 하나님을 내 삶에 초대한 순간부터 영혼이 십자가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 받았던 그 오랜 고통스러운 시간에도 나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다.
★ 소중하게 여겨 높게만 평가했던 흥밋거리나 즐거움은 이제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게 보였다. 과거에 어떻게 그런 것을 즐겼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그 이후에는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만족이나 기쁨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내놓은 순교자들이 주님을 위해 고통 받을 특권을 누린 것이 부러웠다.
★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원망도 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성도들은 자기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허락을 받지 않고는 그렇게 핍박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요 19:11). 하나님의 매를
사랑한다면 하나님께서 매로 사용하는 손을 미워할 수는 없는 일이다.
★ “사랑의 주님이시여! 주님의
뜻에 저를 종속시키십시오.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잎사귀처럼 나를 거룩한 주님의 숨결에 따라 흔들리게
하십시오.”
※ 사무엘 리더포드의 주님과의 사랑
(사무엘 리더포드: 참으로 가까이 하고 싶은 내 주님. 앨렌
리스트가 리더포드의 “서한지”에서 발췌한 글 중)
사무엘 리더포드는 1600년생으로(스코트랜드) 목사와 교수로, 특별히
사랑의 실천가로 그 땅에 감동을 부어준 신령한 주의 종이다. 감금상태에 머물기도 하고 대역죄로 사형의
위기에 있었으나 그의 서한문으로 영원히 그의 풍성한 영성을 흘러내리고 있다. 서한집에 기록된 달콤한
영음을 들으려 한다.
★ 주님께서 우리가 고난당하도록 부르시더라도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왕이신 주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마련해놓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이들이 때로는 벗은 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리스도는 더 없이 부드러운
베개로 그들의 머리를 받혀 주십니다.
★ 죄 없으신 예수님은 수없이 많이 매 맞고 고침을 받지도
못하시고 모든 것을 심판 날에 맡기셨습니다. 그날에 주님은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입니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던지 그 바람은 우리를 주님께로 몰아갑니다. 우리의
돛을 넘어뜨릴 수 있는 바람은 없습니다.
★ 하나님은 아름다운 꽃을 많이 만드셨지만 그 중 아름다운
것은 천국이며 꽃 중의 꽃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본향에서 첫 밤을 보내고 나면 이 땅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정말 너무나도 짧았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여기에 있으면 우리는 이 땅의 낮은
집의 냄새를 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솟아오르면 천국과 하늘나라의 향기를 냅니다. 우리가 천국적인 마음을 품으면 우리의 십자가가 우리를 갉아 먹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 곁에 있으면서 고침을 받지 못하거나 더 나빠진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입니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배의 돛이나 새의 날개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매를 가지고 오시든 면류관을 가지고 오시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주께서 무엇을 가지고 오시든, 주님의 모습이 보이면 주님을 환영하십시오. 그리스도가 병상 앞에 오셔서 휘장을 걷으시고 “힘을 내라. 내가
너의 구원이다”라고 말씀하신다면, 번듯하고 강건하여 하나님의 방문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주님의 품에는 우리가 기댈 자리가 여전히 많습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내 십자가의 절반을 주님의 것이라 하시며
나와 고통을 나누어지십니다. 고통의 가장 큰 부분을 주님이 지신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아니, 나와 나의 모든 십자가는 모두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 악을 선으로 만들고 고통 속에서도 위로와 평안과 기쁨과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이끌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주님께 이끄는 그리스도의 중매쟁이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휘장 아래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은 우리
방식대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방법이 즐겁지 못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얻었다면 그것으로 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 바다는 요동할지라도 우리가 의지하는 바위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바다의 지친 여행자가 육지에 닿으면 그리스도께서 제일 먼저 물가로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실
것입니다.
★ 사랑하는 자를 먼저 보낸 슬픔: 그 아이는 내보낸 것이 아니라 앞서 보낸 것입니다. 별이 보이지
않아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지구의 반대편에서 빛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아드님은 그 곳에서 구리와 동을 금으로 대신하고 시간을 영원으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드님 편에서 본다면 이것은 나쁜 거래가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혼자입니다. 하지만 찾고 찾으면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죽은 아들은 당신의 사랑이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는 이제 경주를
끝낸 것입니다. 이제 아들을 향한 사랑은 그리스도께 드리십시오. 아들을
위해 슬퍼하는 것은 부인에게 허락된 일이지만 정한 분량이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에 주님의 방을 두고
주님을 거기에 모십시오. 주님께서는 주님의 방을 차지할 자격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자녀 사랑: 주님의
허락하심 이상으로 자녀를 끌어안지 마십시오. 자녀에게 마음을 주시되 중심자리는 주지 마십시오. 마음의 중심자리는 그리스도께서 계셔야 합니다. 자녀가 마음의 중심에
있으면 그 자녀는 자식이 아니라 우상입니다
★ 자녀의 죽음: 주께서
그 아이를 유한한 시간에 빌려 주셨다가 이제 영원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 영원은 우리도 취하여 갈
것입니다. 그 아이와 당신이 천국과 주님의 강가에 도착하는 시간 차이는 겨우 몇 년에 불과합니다. 그 차이가 매일 줄어들고 있으니 여름을 몇 번 지나다 보면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우리를 훈련시키셔서
높은 터에 합당하게 되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떠나간 사람들을 떨쳐 버리고 마음에서 내려놓으십시오. 주님은 지체하지 않고 곧 오십니다.
★ 고난: 모든
성도는 영원한 여름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기 분량만큼의 겨울을 겪습니다. 저 하늘 위에는 낮이 길고 태양이
높으며 정원이 아름다운 주님의 거룩한 도성이 있음을 생각합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얹혀주신 십자가를
묵묵히 담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하나 가진 사람도 있고 일곱을 가진 사람도 있고 열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십자가가 일곱이면 기쁨도 일곱입니다. 고난 중에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당신이 타고 가는 그리스도의 마차를 보면 사람들은 용기와 힘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에 아멘이라고 적으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그 십자가의 무거운 쪽은 강하신 우리 구주께서 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어깨에는
조그마한 십자가 조각만 얹혀 있을 뿐입니다. 동쪽을 보십시오. 하늘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여정이 끝날 때 그리스도가 우리의 거처가 되십니다. 우리는 친구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께서는 연중 달콤함을 비처럼 내려주십니다. 아이가 바닷물을 손으로 떠 올린들 얼마나 담겠습니까. 주님을 추구할수록
주님은 매일매일 더욱 새로우시며 더욱 놀라우십니다.
★ 천국 가는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이 지불한 것과 같은 대가를 지불하십시오. 그들은
항상 역풍을 맞으며 갔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느라 많은 소나기를 만나고 더운 땀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바람의 길을 바꾸지 않습니다. 진정한
안내자 주님을 따르십시오. 빈 지갑으로 천국에 들어가지 마십시오.
★ 슬프게도 우리는 사랑을 할 때도 무게를 달고 줄로 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좁고 변덕스러운 그릇을 끌어내시고
그리스도의 바다 같은 사랑을 담을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크게 만드신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족하게 여기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들에서 자라는 주님의 밀알들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주님의 타작기계를 거치고, 체에 걸러지고, 우리 구원의 주께서 당하신 것처럼 맷돌에 갈아집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주님의 집에 좋은 양식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