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떤 작용의 전달
김지웅 선교사(국제본부 미디어 실장)
들어가며
급속도로 발전하는 시대를 지나가며 미디어란 단어가 흔하게 보이는 세상이 되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는 풍경이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2007년 아이폰의 출현은 스마트폰의 대중화와 함께,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를 앞당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미디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세상에 보여준다. 그렇게 미디어는 우리의 손 안에 들어왔다.
필자는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10여 년 동안 방송 촬영 업무를 감당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바울선교회 본부 미디어실에서 섬기며, 온 열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전하고 퍼져가는 미디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 질문과 함께 본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의 손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보여주는가?'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애굽기 3장과 4장에는 나이 80세가 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직접, 그리고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 그러나 모세는 순종의 메시지를 선뜻 내놓지 않고,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출 4:1) 그러자 하나님은 갑자기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며 질문을 던지신다.(출 4:2) 여기서 모세의 대답이 어떠한가? 지팡이이다. 여기서 잠깐, 애굽과 미디안 땅에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80세가 된 모세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 노인의 손에 지팡이가 들려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지팡이는 어떤 의미였을까?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꼭 필요하기에 늘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땅에 던지라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나타내 보이신다.
이어서 하나님은 형 아론을 붙여주시고, 결국 모세는 순종함으로 애굽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여기서 이 지팡이의 주체가 바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 4:20) 이 때를 기점으로 지팡이는 모세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이 지팡이를 우상화시켜 바라보자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혹시 우리의 손에 하찮다고 여겨질만한, 당연하다고 여겨질만한, 그래서 어쩌면 내 손에 있는지조차 깜빡 잊어버릴 만큼 자연스럽게 여겨질만한 것이 있지 않았던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달란트라 인지조차 못했던 그것,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은사라 깨닫지 못했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리고 모세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애굽으로 돌아가 바로의 앞에 서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나오게 된다.
서두에서 제기한 이 질문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손에 무엇이 있는가?' 유형의 것이던지, 무형의 것이던지 이를 하나님 앞에 내어드릴 때 더이상 나의 소유물로 국한되지 않는다. 만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귀한 도구가 될 것이다.
무엇을 바라보는가?
이번에는 마가복음 11장을 바라보자. 예수님께서 구원 사역의 클라이막스를 향해 거침없이 달려가시는 현장 속에서, 제자들이 바라보는 것과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절부터 10절까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베다니로 나가 밤을 보내신다.(막 11:11) 그리고 이튿날, 동일한 기사를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이른 아침이라 기록하고 있다.(마 21:18) 즉, 이튿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베다니에서 나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 말씀이 참 묘하다.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막 11:12) 왜? 그들이 이른 아침에 나왔는데, 도대체 왜 예수님만 시장하셨을까? 제자들이 꼭두 새벽에 먼저 일어나 예수님 몰래 빵을 먹었을까?
직전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답을 찾아볼 수 있는 듯하다. 예수님은 전날 성전의 모든 것을 둘러보셨는데, 11장 15절 이하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성전의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던 그곳은 이미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로 가득한 상황이었다. 그 흔적이 보였을 것이다. 속히 성전을 향해 달려가 깨끗케 하시려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는가? 그래서 시장하셨다.
이에 반해 제자들은 어떤가? 전날 호산나 찬송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하던 현장을 뇌리에서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뭔가 될 것 같다. 이제 로마는 끝났다. 흥분이 된다. 예수님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왕이 되시면 난 영의정, 넌 좌의정, 그리고 누구는 우의정 하며 신이 났을 것이다. 지금 제자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배고프지 않았다. 예수님만 시장하셨다.
이 시점에서 다시 이 질문을 생각해보자.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혹시,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것과 전혀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자.
무엇을 보여주는가?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 한 나무가 등장한다(막 11:13). 예수님께서 멀리서 보셨는데, 이 나무를 수식하는 말이 거창하다.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나무의 이름은 무화과나무이다. 무화과 잎사귀 나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 나무의 본질은 무화과 열매를 맺는 나무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멀리서 보일만큼의 잎사귀가 있는 나무라 기록되어 있다.
'있다'는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 하나를 충족하여야 한다. 먼저 누군가로부터 소유권을 받았을 때에 ‘있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즉, 가치에 합당한 재화를 지불하거나 물물 교환 또는 대여를 통해 영구적으로나 임시적으로 소유권을 인정 받으면 나에게 그 물건이 ‘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스스로 만들어냈을 때 ‘있다’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필자가 바울선교회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였다. 직접 만들었기에 그 자료가 나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살펴보는 이 나무에게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일까? 후자이다. 어떤 타 존재가 잎사귀를 준 것이 아닌, 스스로 뿌리에서 영양분을 끌어올려 직접 잎사귀를 낸 것이다. 그 나무의 본질이 아닌 것을 애써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에게 열매가 없음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막 11:14) 이를 다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나무를 지칭할 때 '네게서'라 하며, 마치 인격체를 대하듯 말씀하심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아닌 피조물에게 직접 말씀하신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상황임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 나무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뿌리째 마르게 된다.(막 11:20)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 나무의 상태를 바라보며 질문한 베드로의 말에(막 11:21) 예수님은 조금 뜬금없어 보이는 말씀으로 복수의 존재에게 답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막 11:22) 그들이 누구인가? 물론 함께 있던 제자들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치기 쉬운 점이 있다. 바로 그 나무 역시 같은 현장에 있음을, 그래서 무화과나무도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나무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나무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하나님을 믿으라!’ 이 말씀의 원어를 살펴보면 '하나님 믿는 믿음을 가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가지라는 표현이 능동형임을 알 수 있다. 무슨 말씀인가? 자신을 세상 앞에 보여줄 때 잎사귀가 있다 하지 말고 하나님 믿는 믿음이 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믿음을 소유하면서, 이를 보이라는 말씀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다시 한 번, 이 질문을 곱씹어보자. '우리의 손에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으로 무엇을 보여주는가?' 혹시 본질이 아닌, 다른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여주지 않았던가 돌이켜 생각해보자.
글을 마치며
사전에서 미디어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어떤 작용을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전달하는 물체 또는 그런 수단' 여기에서 중점은 '어떤 작용'과 '전달'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손에 어떤 작용이 있는가? 그리고 이를 어떻게 전달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본 글을 시작하며 쓴 바와 같이 아이폰의 등장은 세상을 바꾸었고, 스마트폰을 손에 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콘텐츠를 끊임없이 양산하여 노출시키고 있다. 그러나 급격하게 바뀌는 오늘을 보내며, 그저 미디어를 타락한 세상의 전유물로 취급하여선 안될 것이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악하게 만들어가는 도구가 되도록 내버려두어선 안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바우리의 모든 가족에게 감히 이 도전을 전하고 싶다. 우리 각자가 곧 미디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 복음을 전달하는 미디어라 도전하고 싶다. 마귀가 신나게 갖고 놀 도구가 되지 않도록 미디어 세계의 주도권을 다시 휘어잡아야 할 것이다. 결국 모든 만물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기에, 오직 그분의 영광만 드러나는 순간이 모든 시간 가운데 기록되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