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거룩한 순례자의 길, 같이 걷겠습니다 - 11.침묵의 순례자
BY 관리자2013.12.07 09: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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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 요일 1:1)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고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육신이 되어 지상에 오셨다(요 1:14).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 말씀을 들으므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롬 10:17). 예수님을 전파하는 수단도 미련하게 보이는 전도라는 말을 통하여 세계에 확산되어 전달된다(고전 1:21). 다른 종교가 행위종교라면 기독교는 말씀 종교다. 동물과 식물 세계에는 허락되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말로 서로 교제가 이루어지듯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도 그렇다. 성경이란 말씀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고 천국진리와 세상과 인류의 오묘한 이치를 훤히 밝혀준다. 기도라는 내 혀의 말로 하나님과 신성한 교제가 이루어지고 긴밀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화를 받아낸다. 가정생활도 교회와 신앙생활도 말로 모든 질서가 유지된다. 입술의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감사와 달콤한 마음을 전한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자기가 꾼 꿈을 알아내지 못한다는 죄목으로 그 나라의 지혜 자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살벌한 명령을 내렸다. 시위대장 아리옥이 지엄한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체포하러 출동하는 다급한 순간, 다니엘은 그 앞을 막아서서 명철하고 슬기로운 말로(단 2:14) 다가서서 기회를 만들어 그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나는 통쾌한 장면이 전개된다. 그 꿈의 내용과 해석까지 아뢰고 하나님의 지혜로 그 나라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천 냥이나 되는 엄청난 큰 빚도 세치 혀로 갚는다는 속담도 있다.

 

※ 말이 사악해졌다

 

그처럼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말이 포악하고 변질된 혀로 쏟아내는 언어로 인해 쓰레기 세상이 되었다. 말 하나 때문에 온갖 가슴 아픈 일이 생겨나고 전쟁까지도 일으켜 죽음까지 몰고 가는 험한 일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온 세상을 삽시간에 불 질러 버리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하면서 지옥불이라 했다. 자기 온 몸을 더럽히고 내 전체 인생수레바퀴를 불살라버리는 원수가 바로 내 속에 붙은 혀가 그 짓을 한다는 것이다(약 3:6). 혀는 쉬지 않는 악이라 이름 붙였다. 그것도 길들일 사람이 없어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하였다(약 3:8). 성도의 입에서조차도 한 입에서 찬송도 나오고 저주도 솟게 하는 마땅치 않은 말씨를 서슴지 않고 쏟아냄을(3:10) 안타까워했다. 르호보암 왕은 으뜸 거친 말로 위협하여 포악한 정치를 하겠다고 오만한 태도로 위엄을 부림으로 인해 나라가 얼음 쩍 갈라지듯 민족분단의 참혹한 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입속 말 한 마디가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았다(왕상 12:14). 노인의 현명하고 부드러운 말을 애석하게도 왜 버렸을까. 지혜로운 자는 자기 혀를 주장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혀의 지배를 받는다(부리지스)는 교훈을 왜 무시했을까. 혀를 창조한 이후 인류는 품격을 떨어뜨리는 살벌한 언어를 쉼 없이 빚어내어 발전시켰다. 무례한 말, 가시 돋친 말, 생각지 않고 뱉어 버린 말, 남을 깎아내리는 말, 무모한 말, 천박한 말, 상스런 말, 자기중심적인 말, 중상의 말, 수군수군 하는 것(롬 1:29), 역겨운 말, 험담의 말, 더러운 말, 패역한 말, 비웃음, 속이는 말, 저주의 말, 칼로 함부로 찌르는 것 같은 말(잠12:18), 피상적인 말, 겉도는 말, 그레데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딛 1:12)라는 소문대로 거짓이 각가지로 침투된 것을 바울은 디도서를 통해 지적했다.

 

죄가 아닌 것처럼 다가와 하나님의 사람들까지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분명한 죄가 하나 있다. 거짓말이다. 십계명의 아홉 번째에 적힌,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되고 벌을 받는 엄숙한 법이다. 6계명의 살인은 죄인 줄 명확히 알면서도, 같은 7계명의 간음도 죄로 스스럼없이 인정하면서도 아홉 번째 계명 거짓말은 그냥 훌쩍 넘어가는 이 위험한 행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심각한데도 웃으며 가볍게 짓는 간악한 죄다. 지어도 회개치 않고 지나간다.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나왔다. 우리 시조를 꾈 때 마귀는 거짓말로 인류를 불행에 빠뜨렸다.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 말씀하셨다. 외식하는 저들 종교지도자들에게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하셨다(요 8:44). 따라서 거짓말하는 자는 마귀의 자식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명단에 올랐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성 밖에 쫓겨난다(계 21:27, 계 22:15). 아나니아와 그 아내 삽비라가 무슨 죄로 죽었나. 소유를 팔아 얼마를 감추고 바치면서 전부인 것처럼 거짓말 한 죄다. 그 거짓말이 베드로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한 것이라 지적하였고(행 5:4) 그 댓가로 부부는 현장에서 죽은 것이다.

 

이 사슬에서 벗어나는 대책이 무엇일까. 두 가지다. 성령 충만하여 거짓말을 비롯한 더러운 말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말로 대치시키는 꾸준한 노력이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줄기 찬 도전을 한다.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골 3: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둘째는 침묵이다. 침묵의 훈련 속에 무가치한 말을 걸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골자를 골라내기 위해 고독한 침묵싸움을 평생을 걸고 한다. 거룩한 자들의 발걸음은 알찬 말을 말하기 위해서 말을 침묵시키는 경건훈련이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 독방 수도자들의 침묵의 거룩함(뤼시엥 레뇨: 사막교부 이렇게 살았다)

 

★ 독방 수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더 잘 발견하기 위해 사막의 암자에 숨는다. 이 벽속에 머무는 것은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겨움과 역겨움의 시간과, 열정과 환희의 순간이 반복되면서 인내하였고 그리스도와만 말하였다. 독방 수도자들은 여기서 머물고 잠자고 일하고 읽고 쓰고 하였다. 수도자들은 때로 양피지 조각으로 만든 등받이 없는 낮고 긴 의자에 앉아 외론 싸움을 싸웠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서는 독방에서 서 있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지루한 훈련을 한다. 고독과 권태의 버거움을 아케디아-정오의 악령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회피하려는 끈질긴 유혹이 바로 외출이었다. 견디기 힘든 싸움이다. 교부들은 독방을 지키라고 강력히 당부한다. 한 형제는 9년 동안 독방을 떠나고 싶은 유혹을 받았다. 그는 매일 떠나기 위해 외투를 준비했고 저녁이면 내일 떠나야지 하고 말했다. 이튿날에 “주님을 위해 오늘도 여기 머무를 거야!” 했다. 9년간의 인내 끝에 그에게서 모든 유혹을 거두어 주셨고 평온을 되찾았다. 다른 형제는 병자를 위문해야 한다는 외출의 유혹을 받기도 했다. 종려나무를 쪼개고 이튿날 그것을 얽어 짜고 일을 마친 후 잔가지들은 요리해서 먹어야지 하면서, 요리를 끝내고는 독서를 조금하고 먹어야지 했다. 독서를 마친 후 시편을 외우고 조용히 먹어야지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힙 입어 조금씩 규칙적인 삶으로 나아갔다. 사념에 맞서 싸우면서 드디어 사념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언어까지도 조절할 수 있었다.

 

★ 더욱 미묘한 것은 단지 독방에서 나가려는 생각을 원로에게 고백하기 위해서라면 나가서 원로를 방문하라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자기를 사로잡았던 모든 생각을 원로에게 들어 내놓는 것은 매우 칭찬할만한 일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이것은 수도자를 독방 밖으로 유인하기 위한 악령의 유혹이었다. 노련한 수도자들은 넘어가지 아니했다. 어떤 수도자는 그런 유혹을 물리치기 위하여 외투를 입고 독방 주위를 맴돌다가 마치 자기가 방문객인양 독방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또 어떤 형제는 독방 안에서 상상만으로 원로 역할과 방문객 역할을 번갈아 맡으면서 마치 원로를 방문한 것처럼 행동하며 유혹을 이겼다. 그러나 함정을 식별하지 못하고 일이 벌어진 후에야 깨닫는 사람도 있었다. 혹자는 유혹을 못 이겨 밖으로 나갔을 때 마침 예지의 은사를 받은 원로가 한 사람 있었는데 원로는 소리쳤다. “종아! 종아 어딜 달려가느냐? 이리 오너라.” 그는 자기의 투쟁을 원로에게 이야기했다. 원로는 독방으로 되돌아가도록 일렀다. 다시 암자로 돌아오자마자 하나님께 부복했다. 이러자 악령들이 소리쳤다. “수도자야 우리들이 졌다. 네가 이겼구나.” 악령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면서 거기 깔려있던 돗자리가 불에 탄 것처럼 변해 버렸다. 그는 악령의 술책을 터득했다.

 

★ 독방 안에는 돗자리 하나, 작은 마른 빵 몇 개가 담긴 광주리 하나 외에는 세상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안토니우스는 취침용 돗자리 하나에 만족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은 맨땅에 누워 지냈다. 디오스쿠로 역시 안토니우스처럼 베개 없이 잤고 돗자리는 방문객을 위한 깔판이었다. 침대는 병자를 위한 것이었다. 소금바구니 하나, 주전자, 손잡이 달린 항아리, 단지 등은 생활에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어떤 것은 물을 긷는데, 어떤 것은 물을 나르는데, 어떤 것은 물을 담아 두는데 쓰였을 것이다. 식사 대접을 위해 접시나 사발이 필요했고 밤에는 등불도 필요했다. 단 최소한의 것을 갖추고 오로지 주님만을 사모하면서 인간의 말도 잠복시켰다.

 

 

 

 

 

 

 

※ 침묵을 즐기라(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장 위대한 성도는 사람의 교제에서 종종 떠나 고독한 가운데서 하나님 섬기는 일을 더 즐겼다. 영적인 일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무리에게서 그 몸을 빼낼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이 몰라주는 인물이 되기로 결심하고 영혼의 위기를 만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옛날 성도들의 안전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있었다. 지나치게 평안하여 교만에 높이 뛰지 않기 위해서는 이따금 고난을 당함도 유익하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시 4:4)” 이 말씀대로 기도의 생활을 한다면 골방 밖에서 잃었던 것을 여기서 찾을 것이고 기쁨의 장소가 될 것이다. 골방생활을 즐기면 골방이 친한 벗이 되어 위로를 베푸는 장소가 될 것이다. 침묵과 정적에서 경건한 영혼은 자라고 말씀의 숨은 비밀을 배울 수 있다. 밤마다 자신을 정결케 하는 눈물의 홍수를 가질 수 있다. 세상의 요란에서 떠날수록 창조주를 더 가깝게 모실 수 있다.

 

왜 당신은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는가. 세상도 지나가고 소욕도 지나간다. 일상 쾌락으로 돌아다니는 사람은 슬픔을 집으로 가져올 것이다.

 

 

 

 

 

 

 

※ 침묵의 일반적 교훈

 

* 때때로 침묵이 필요하다. 침묵하는 법만 알아도 깨달음의 절반은 이룬 셈이다. 침묵해야 고요해지고, 고요해야 타인의 소리, 하늘의 소리도 들린다.(로이드 존스) * 싸움이 심한 부부가 있었다. 부인이 지혜로운 수도사를 찾아가 싸우지 않을 비법을 물었다. 남편이 시비의 말을 시작하면 얼른 입에 물을 넣고 삼키지 말고 뱉지도 말고 다물고 있으라 한다. 과연 그렇게 하였다. 남편은 혼자 심하게 거칠게 말하고 고함도 지르고 하다가 그냥 지쳐서 조용해졌다. 신기하여 수도사를 찾아서 신비한 생수의 기능을 감탄했다. 수도사는 “성수가 아니라 보통물입니다. 침묵이야말로 평화를 이루는 능력입니다.” 했다. * 가장 깊은 감정은 항상 침묵 속에 있다.(토머스 무어) *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함보다 침묵하는 쪽이 그 관계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몽테뉴) * 말을 제대로 못했던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면 침묵을 지키지 못했던 것에는 백 번이라도 후회를 해야 한다.(톨스토이) * 말하는 자는 씨를 뿌리고, 침묵하는 자는 거두어들인다.(J.레이) * 말해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은 침묵해야 할 때도 안다.(아르키메데스) * 사람이 잘 말할 수 있는 재능을 갖지 못하면 침묵을 지킬 줄 아는 지각이라도 있어야 한다. 만약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라 브뤼에르) * 순수하고 진지한 침묵이 사람을 설득시킨다.(셰익스피어) * 시간을 잘 맞춘 침묵은 말보다도 좋은 웅변이다.(터퍼) *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일수록 말하기를 좋아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침묵을 지킨다. 적게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요,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나 질문을 받을 때 이외는 말을 아끼는 것이다.(루소) * 어리석은 사람은 침묵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런 진리를 알고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사아디) * 우리는 침묵을 지켜야만 신들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에머슨) * 위대한 영혼은 묵묵히 고민한다.(F. 쉴러) * 인간은 그가 말하는 것에 의해서보다는 침묵하는 것에 의해서 더욱 인간답다.(카뮈) * 인간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에게서 침묵을 배웠다.(플루타크 영웅전) * 재치 있는 말이나 비꼬는 말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즐거움을 줄 수 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 쓰라림을 안겨준다. 단지 침묵만이 벌도 적도 만들지 않는다.(세르반테스) * 침묵은 어리석은 사람의 지혜이며, 현명한 사람의 미덕이다.(보나르) * 항상 자신을 조심하라. 침묵을 생활화하라. 남에 대한 말을 꺼낼 때에는 침묵 속에서 거듭 생각한 후에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라. 그러나 역시 그 말도 침묵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리라.(존 드라이든) * 항상 침묵 속에 있는 사람은 신에 가까이 가기가 쉽다. 그러니 행동이 가벼운 사람은 쓸 데 없이 입을 놀리고, 곧바로 고독과 초조함을 느낀다. 후회할 일을 삼가려는 결심을 하면 진실에 다가선다. 말할 것은 하되, 불필요한 말은 삼가자.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해나가자. 반성과 함께 전진하자.(탈무드) * 현명한 사람이 되려거든 사리에 맞게 묻고 조심스럽게 듣고, 침착하게 대답하라. 그리고 더 할 말이 없으면 침묵하기를 배워라.(라파엘로) * 가장 훌륭한 답변술이란 질문이 부질없음을 증명해 보이는 것이다. 완벽한 침묵 앞에서는 질문이 기진맥진해진다.(유동범) *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고독 없이는 그 무엇도 탄생할 수 없다.”

 

 

 

 

 

 

 

※ 성자들의 침묵생활(토마스 머튼 엮음: 사막의 지혜)

 

★ 성 안토니오는 이렇게 말했다. “수도자의 기도는 자신을 의식하거나 기도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비로소 완전한 기도가 될 것이다.” 그를 모든 사막교부의 아버지라 부른다. 한번은 안토니오 원로가 암모나스 교부에게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에 더욱 진보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 돌을 모욕하면서 계속 걷어차라고 말했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돌이 어떤 반응을 했느냐고 물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고 말하자 이런 교훈을 주었다. “당신도 어떤 일에도 언짢아하지 않을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 교부들은 겸손하고 말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그 수는 많지 않았다. 그들은 물음에 대해 핵심적인 몇 마디로 답했다. 추상적인 원리를 제시하기보다는 구체적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들은 짧고 참신하며 내용이 풍부하다. 영적생활의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 간결하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계신 곳 가까이에 이르면 수많은 말보다 침묵이 더 중요함을 알기 때문이다. 논쟁의 모든 소음 속에서 사막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신중하고 초연한 침묵뿐이었다.

 

★ 사랑은 상대방을 선행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자신을 형제와 동일시함을 의미한다. 사랑은 이웃을 자신으로 여기며 한없는 겸손과 신중함, 존경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전적으로 내적변화를 요구한다. 내적변화가 없이는 자신을 형제와 동일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웃에게도 침묵의 눈으로만 응시하는 까닭일 것이다.

 

★ 그들의 안식은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하면서 몰입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사용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의 세리의 기도다(눅 18:13). 이것을 줄인 형태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이다.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몸에 베이도록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한다.

 

★ 이 세상을 버리는 것은 자신을 구함으로서 세상 구원을 돕는 것이다. 파선한 배에서 도망치듯 이 세상을 버린 수도자들은 자신만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파선한 배의 잔해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땅에 발을 굳게 디디면 달라진다. 그렇게 되면 온 세상을 안전한 곳으로 끌어낼 힘을 지니게 될 뿐 아니라 그러한 임무를 띠게 된다.

 

★ 팜보 원로는 임종 때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이 사막에 와서 독방을 짓고 머물기 시작한 때부터 나는 내 손으로 일해서 번 빵만을 먹었으며 지금까지 한 번도 유감스럽게 여겨지는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제 나는 아직 하나님을 섬기지도 못한 사람처럼 주님께 매일 갑니다.”

 

★ 한 원로가 말했다. “수도자가 평생 해야 할 일은 순종과 묵상과 다른 이들을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이는 악을 미워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평생 해야 할 일은 불의한 삶에 동조하지 않고 눈을 들어 악을 바라보지 않고 호기심에 돌아다니지 아니하며 손에 무엇인가를 쥐고 있지 말아야 하며 다른 이에게 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교만하지 말고 생각으로 남을 헐뜯지 않아야 합니다.”

 

★ 한 원로는 이런 교훈을 주었다. “어떤 문제로 말을 걸어오면 그와 논쟁하지 마십시오. 그가 옳게 말한다면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릇되게 말한다면 당신 생각대로 하시오라고 말하되 그의 말에 논쟁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하면 당신 마음이 평온해 질 것입니다.”

 

★ 아타나시오 원로는 얇은 양피지로 된 18펜스짜리 책을 가지고 있었다. 구약과 신약성경도 담겨 있었다. 언젠가 한 형제가 그를 찾아왔다가 그 책을 가져가 버렸다. 교부가 그 책을 읽으려고 하나 보이지 않으므로 그 형제가 가져간 것임을 알았다. 그는 그 형제가 도둑질했을 뿐 아니라 거짓증언을 할까 두려워 일부러 알아보지 않았다. 훔쳐간 사람이 그 책을 팔기 위해 가까운 마을로 내려갔다. 16펜스의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상인은 그 책값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아보려 하니 잠시 달라고 하였다. 그 책을 들고 아타나시오 원로에게 가서 그 책의 비중을 물었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은 아주 좋은 책입니다.” 했다. 가서 팔려는 사람에게 가서 “돈을 받으시오. 내가 아타나시오 원로에게 가서 물어 봤더니 좋은 책이라 합니다.” 말하자 그는 놀라 “뭐라고요? 그분께서 다른 말은 안 하셨나요.” “다른 말은 없으셨습니다.” “저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팔고 싶지 않습니다.” 서둘러 아타나시오 교부에게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며 사죄하면서 이 책을 받아주시라고 간청했다. “형제여 평안히 물러가시오. 이 책을 당신에게 선물합니다. 당신께서 이 책을 받아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영원히 평화를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 후 그는 평생 아타나시오 교부와 함께 살았다.

 

★ 마카리오 원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 할 때 당신이 분노한다면 당신은 격정을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 휘페리키오 원로: “비방으로 형제의 몸을 집어 삼키는 것보다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 낫습니다.”

 

★ 영혼이 감화를 받을 수 있도록 한 말씀해달라는 요구에 팜보 원로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의 침묵에 감화 받지 못한다면 나의 말에 감화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한 원로는 “수도자는,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살피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의문들은 우리에게 기도를 멀리하게 하고 잡담에 빠지게 합니다. 침묵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 부활주일을 앞두고 수도원에서 그 주간 내내 단식하기로 규정되어 있었다. 그 주간에 이집트에서 찾아온 형제들에게 모세원로가 야채국을 만들어 주었다. 그의 수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모세교부가 법칙을 어기고 음식을 만들고 있다고 수근대면서 한 마디 해야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소 모세교부의 높은 성덕을 보아온 저들은 안식일에 그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인간의 규칙을 위반했지만 하나님의 계명에는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 휘페리기오 원로: “분노를 느낄 때 자기 혀를 다스리지 못하는 수도자는 육욕의 격정도 다스릴 수 없습니다.”

 

★ 한 원로가 바구니를 만들어 손잡이까지 달았을 때 그의 이웃이 하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장이 설 때가 되었는데 바구니 손잡이를 만들 재료가 없으니 어떻게 하지?” 그 원로는 곧 들어가서 손잡이를 풀어 그 형제에게 주며 말했다. “나는 이것이 필요 없으니 당신 바구니에 다시오.” 이런 뛰어난 애덕으로 이웃 형제는 일을 완성하였고 자신의 것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 같은 수도 방에서 함께 살면서 겸손과 인내로 많은 사부들의 칭찬을 받던 형제 수도자가 있었다. 그들을 시험해 보려고 어떤 거룩한 사람이 찾아갔다. 기쁘게 환영했다. 그 사람이 곧 밖으로 나가 채소밭의 채소를 지팡이로 뒤흔들어 채소를 망가뜨렸다. 그런데도 두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슬픔이나 좋지 않은 표정을 짓지 않았다. 저녁기도를 마친 후 식사시간이 되었는데 “원하신다면 남아있는 양배추를 요리하여 먹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러자 원로가 그들 앞에 엎드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현존하심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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