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홀로서기
이동휘 목사
고고히 소리 지르며 지구에 홀로 착륙한 갓난이 어린 인생은 웬만큼 살다가 돌아갈 때도 그 많은 소유물을 소복이 남겨 놓은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난다. 그리고 단 둘이 하나님 면전에서 심판을 받는다. 그의 몸에 예수님의 힘이 들어가 자란 소수는 용사처럼 살다가 환희의 얼굴로 본향으로 돌아가지만, 생명의 영을 받지 못한 영혼들은 안타깝게도 처절한 흑암 속에 사라진다. 예수님을 영접함도 일대일의 사건이요 거절함도 자신의 결정이다.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전쟁에 승리를 수확한 일도 있었지만 사십 일의 험악한 시내산 금식투쟁은 모세 홀로였다. 길고 긴 외로운 혈투를 통과한 모세의 얼굴은 영광의 광채로 세상을 밝힐 수 있었고 애굽을 누르는 힘을 제공 받았다. 엘리야 역시 단신으로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왕상 18:22) 세기적인 대 접전을 벌였고 간악한 삯군들을 목 베어 기손강에 수장시켰다. "나 혼자 남았나이다." 외로움이 뼈 속까지 파고들어 차라리 죽음을 갈망하는 밑바닥에 추락한 듯 했지만(왕상 19:4) 용사는 그리 쉽게 소멸되는 법이 아니다. 후계자 엘리사를 통하여 영적 전투를 찬란하게 이어 나갔다. 선지자 미가야는 거짓 예언자 사백 명을 상대하여 진실된 예언만을 외롭게 고집했고(왕상 22:28) 감옥을 마다하지 않은 존경받는 예언자의 영예를 얻었다.
수도사들은 환경을 사막화함으로 홀로서기를 키워 나간다. 주님과의 독대를 즐겨했다. 독방 굴에 앉아 주님만을 그리워한다. 물통 하나, 식기 몇 개, 밤이면 딱딱한 바닥(岩床)에 마른풀을 깔고 눕는다. 고행과 절제를 즐겨하는 이유는 자기 속에 잠복된 간사한 맹수를 정복하기 위해서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육체라는 고기덩이는 편안해지면 건방져지고 사고를 치려고 대들고 나온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혈육을 쳐 복종시키는 일을 습관처럼 했다(고전 9:27). 연모하는 애인에게 소년이 “우리가 함께 살게 되면 행복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소녀는 “제롬! 사람이 태어난 것은 행복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깨끗하려고 태어난 것이어요.”(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했다 한다.
열두 제자 외에는 한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났다(요 6:66). 바울도 말년에 그의 동지들이 그를 버리고 떠났고 처량하고 애처로운 노병사(老兵士)의 모습을 보게 된다(딤후 4:16). 욥은 아내까지 돌변하여 동반자의 위치에서 학대자로 바뀌게 되는 기막힌 처지를 당했다. 그래도 진리의 최후 선에서 후퇴하지 않았고 순결을 버리지 아니했다. 복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는 늠름한 태도다(욥 2:10). 어깨를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많으면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십자가는 내가 져야 한다. 현모의 훈훈한 영향, 양처의 세심한 배려, 제자와 친구의 응원이 풍성할지라도 제 몫의 고난은 홀로 져야 하는 법이다. 베드로도 홀로 바다 위를 걸었다. 믿음은 수상(水上)이고 의심은 수침(水沈)이었다. 자신의 믿음을 단단히 할 필수만 있을 뿐이다. "내가(홀로)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 넘나이다."(시 18:29) 백마(白馬)를 타고 적진을 향해 고함지르며 쏜살같이 달리는 백전용사의 자태다. 그리스도인의 기상이다. 하늘나라에는 약골이 없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