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몇 살 나이로 사는가?
이동휘 목사
우리 조상 야곱에게 이집트 왕 바로는 상면하자마자 나이를 물었다. 야곱도 꺼림이 없이 “백삼십 입니다. 그러나 험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덧붙인다(창 47:9). 고달픈 여정이었으나 이스라엘을 탄생시킨 묵직한 생애였다.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의 나이가 있다고 한다. 시간과 함께 먹는 달력의 나이, 건강수준을 재는 생물학적 나이(세포나이), 지위와 서열의 나이, 대화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신적 나이, 마지막으로 지력을 재는 지성의 나이란다. 그러나 제 육의 나이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솔로몬은 겨우 열여섯 소년인데도 천하의 왕과 모사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선물을 싸들고 몰려온 것을 보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흔한 명언이 틀리지 않은 것 같다. 반면 누구보다 꽤 많은 경험을 쌓고 인생의 슬기를 배웠어야 할 노인에 대한 진노를 냉혹한 질책으로 선포한 것을 보면 나이 헛먹었다는 탄식도 실감나는 현실이다. “너희는 이제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여라. 그러자 그들은 성전 앞에 서있던 장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였다”(겔 9:6 표준새성경) 이마에 표 없는 가짜 종교인에 대한 무서운 심판장면이다. 길게만 살았을 뿐 값진 보배인 제 생명 하나도 간수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성공 자들이었다. 명예를 빼앗기 위해, 재물을 훔치기 위해 초심을 잃고 성령의 경고를 당돌하게 저버린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들일 수도 있다”(왕상 13;26) 오히려 젊었을 때는 영성과 마음 밭이 정갈했던 존귀한 자들이, 사울 왕을 비롯해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같은 쟁쟁한 성군들이 나이 들어 늙을수록 점점 나빠진 것을 보면 신선함을 아예 팔아먹은 것 같다. 남의 가슴에 어혈 짓게 한 지능적인 교활함과 욕망을 부추기면서 어둔 함정 속에 빠져 들어가는데도, 연륜이 더할수록 분별력은 무디어지는 것 같다. 명함과 이력서 속에 박힌 거짓 것들이 나풀거리며 고발하는데도 비죽거리며 자기도취에 푹 빠진 처량한 모습이다.
앞길 가로 막는 살벌한 절벽, 성한 죽지를 마구 부러뜨려 되찾을 수 없는 엄청난 손실 위기, 무자비한 일방적 침략 앞에, 어쩔 수 없었노라 감히 최후의 큰 날에 변명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 빌려서 살았던 우리 생애가 이 땅에서 끝이 나고 재판장 앞에 서게 되는 날이 필연코 오고야 말 것이다. “매 순간을 예배로 살았습니다. 일 분 일 초 마다 하나님 나라가 들어가 있었으며 하찮은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코사드)라고 고백하는 자의 뿌듯함은 얼마나 황홀할까. 창창한 젊은 나이로, 단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미움 받고 돌에 맞아 절명한 순교자 스데반의 후손들이 “ 죽음이여 자만하지 말거라! 한줌 자고 나면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 바로 어제 밤 속삭인 밀담 같은데 그렇게도 빨리 승리의 부활 새벽을 주셨습니까! 외치며 춤추는 그 영광에 참예한다면 얼마나 벅찬 감동일까.
우리는 제6의 나이로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에게 시집가 예수님 가문에서 눌러 사는 신접살이다. 옛사람은 옹골지게 죽고 거듭난 날을 진짜 생일로 셈하는 천국시민으로 사는 별난 생활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창 6:2) 대혼란이 왔던 그 어설픈 꿈을 과감하게 밀쳐내고 조용히 천국 계단을 밟는 순례길이다. 파장의 끝물을 축제의 잔치로 바꿔놓은 가나 혼인파티를 다시 여는 기쁨이다. 오늘은, 내 남은 인생의 처음 시작하는 날이라 선언하며 춤추며 새벽을 여는 ?라(사 62:4) 인생이다. 사도행전에서 갓 튀어나온 영성 넘치는 신랑이요, 연인 품에서 금방 빠져나와 예수님 사랑에 침몰된 앳된 소녀의 얼굴이다.
성전에 올라 가셨던 열두 살의 예수님의 때 묻지 않은 청순한 자태, 서른세 살만 기억하도록 사셨던 영원한 청년 예수님처럼! 그 나이로 깔끔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