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하나님! 저 몇 점인가요?
이동휘 목사
기준 이하를 탈락시키는 입학시험이나 취직시험은 냉엄하기만 하다. 하나님께서도 바벨론 벨사살 왕을 저울로 달아 형편없는 점수를 보시고는 경영능력 상실자라고 그날 밤 찬란한 바벨론 역사에 끝을 내리신 사건도 경고임에 틀림없다(단 5:26). 심은 대로 거두는 수확의 법칙(고후 9:6), 행한 대로 상벌 내리는 판결법칙(계 20:13)은 역시 최후 심판규정이다. “별들도 밤새도록 졸음 참으며 내 행실 엿보다가, 그분께 보고 하려나" 가볍게 넘길 시구는 아닌 것 같다. 그럼 내 점수는 몇 점일까. 천국에 쌓아 둔 내 보물은 얼마나 될까.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풍성히 받았음에도, 쭉정이 세월에서 냉큼 떠나 궤도수정하기보다는 변명만 하려는 간교한 본능이 인간 모두에게 있는 것 같다. 장티푸스를 앓다가 일곱 살에 청신경이 마비된 운보 김기창은 소리를 들을 수 없어 학교까지 중도 포기하는 수렁에 빠지지만, 기죽지 말라는 어머니의 격려를 깊이 새긴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드디어 산수화의 대가로 "불굴의 화가"란 칭호를 듣는 화백이 되었다. 만점의 걸작과 예수님의 생애 연작 30점도, 만 원권 지폐 속 세종대왕도 그의 솜씨다. 손쉬운 예로, 이런 분들 앞에서 사지 멀쩡한대도, 낙제점 맞은 핑계를 수다스럽게 늘어놓을 수 있을까 하는 말이다. 성령의 압박을 계속 받으면서도 양심을 속이며 거룩한 게임(?)을 합법적으로 벌이는 위선자의 탈선이 얼마나 비참할지, 나는 너를 모른다는 혹독한 선언으로 끝장날 것이다. 빈틈없는 논리도, 똑똑한 처신도 그날에는 모래성이 되리라.
사도바울은 갈 길이 뚜렷했기에 승리자가 받는 면류관을 확신하며 살았다(딤후 4:8). 노년의 은퇴도 잊은 채 죽을 때까지 달렸다(빌 3:12). 과녁 겨냥하고 활 쏘지 못하고, 화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우는 초점 잃은 부류와는 달랐다. 영양가 없으면서도 어부렁하게 많게만 보이는 수확에 허풍떠는 깐죽거림도 찾을 수 없었다. 푯대는 예수님이요, 천국이요 그리고 온 세상이 복음으로 점령될 때까지였기에, 가짜 사도란 비난(고전 9:1)과 만물의 찌꺼기 되는(고전 4:13) 수치도 보약으로 삼았다. 매 맞음 속에서도 소녀 같은 탱탱한 웃음을 웃었고 감옥에서도 두 다리 쭉 뻗고 꽃잠 자는 여유를 누렸다. 희망의 줄이 싹뚝 잘리는 칼날 생애였지만 만점 인생을 살았다. 이용도 목사는 천적광인(진리에 미치는 자)이 되라고 했다. “주님! 마음대로 주무르십시오. 저는 주물림 받는 진흙과 같습니다. 나는 연입니다. 오르게 하면 오르고, 내리게 하면 내리고, 좌로 하면 좌로, 우로하면 우로, 줄을 풀면 나가고, 감으면 오는 연입니다. 연은 항상 그 얼굴을 주인에게만 향함이 그 특색입니다. 만일 등을 주인에게서 돌리면 땅에 곤두박질 떨어집니다.” 서른세 살 젊은 나이로 세상 떠났지만 예수님 사랑에 침몰되어 보석 같은 삶을 산 자들이다.
전북 오수는 산불 나서 죽게 된 주인을 살리고 개는 죽었다는 충견 동네다. 부산에는 주인이 적어준 물품 이름과 바구니를 목에 걸고 물건을 사오는 영특한 개가 있었다. 서울로 이사 온 가족은 습관적으로 애견을 시장에 보냈다. 식품과 잔돈까지 바구니에 담아 7일 만에야 돌아온 개는 주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는 이윽고 쓰러져 죽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려갔다 온 것이다. 개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을 들을까 두렵다. 우리의 흐릿한 모습에 속앓이 하시느라 애간장(창자와 간)이 녹으시는 예수님이 아닐까 하는 목메임을 가진다.
이래서는 안 된다. 결코 이렇게 살면 안 된다.
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