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사람을 찾습니다 여자를 찾습니다
이동휘 목사
“여자를 찾습니다. 우리 동네에 시집 올 여자를!” 농촌 총각과 그 부모들이 애절하게 찾고 또 찾았다. 그러나 편한 것에 익숙해진 도시 아가씨나 시골 처녀까지도, 교회의 신앙 좋다는 얌전백이까지도, 약속하고 짜맞춘 듯이 날카롭게 외면했다. 시골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실력 있는 믿음의 청년들이 업신여김 받았다. 바보 온달에게 시집간 평강 공주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는데도 말이다. 결국 베트남 여자, 필리핀 자매, 조선족 아가씨들 심지어 일본의 통일교 처녀들이 용감하게 구석진 시골로 찾아 왔다. 한국의 어느 시골학교에는 학생의 80%가 다문화가정 자녀들이란다. 주일이면 통일교당에서 이들 가족을 당당한 권리로 차에 싣고 가서 교육시킨다. 중매 때도 거금을 챙긴, 밑지지 않는 장사였는데 평생 귀 뚫은 셈이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후사하겠습니다.” 교통사고로 억울하게 죽은 아들을 둔 아버지의 절규를 도로가에 현수막에서 흔치않게 볼 수 있다. 목격자가 있을 터인데도 불이익을 당하거나 복잡한 사건에 말려들까봐 증인될 것을 냉정하게도 묵살한다. 소금되기를 포기하다 보니 모두 멀쑥이 서 있는 소금기둥이 된 것 같다. 사람다운 사람을 찾기 위함이라 하고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어느 철학자의 안타까움이 어쩜 하나님의 심정일 것 같다(렘 5:1). “나만은 절대 안 돼!” 주저하는 사이 사탄의 영역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확장되었다. 악인은 지칠 줄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악바리 정신일까? 오히려 전능자의 아들들은 힘들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빈번히 하는데. 왜? 왜?
하나님은 찾으시는데 꼼꼼하신 분이시다(눅 15장). 아흔아홉 마리 양이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가 발견되기까지는 끝장내어 찾으시는 극성파이시다. 열 드라크마 중 잃어버린 것 한 닢을 찾는대도, 찾는데 들인 비용이 그 동전의 몇 천배가 들어도 찾기까지 기어코 포기치 않으신다. 드라크마는 자신이 실종된 자체도 의식하지 못하지만 잃어버린 주인의 슬픔은 이다지도 처절했다. 아버지의 명예와 재물까지 몽땅 탕진할 뿐 아니라 아버지의 가슴을 새까맣게 속 뒤집어 놓은 개망나니 탕자인데도, 아버지의 집으로 두 손 들고 찾아 들어왔다는 하나만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울리시는, 사랑에 눈이 먼 철부지 같은 분이시다. 찾지 않으면 불과 유황불이 활활 타는 지옥에 푹 떨어져 끝없는 고통을 당할 것을 아신, 아려오는 안타까운 가슴 때문이다. 길 잃고 방황하는 자들을 목말라 찾으실 뿐 아니라, 또 하나, 그 잃은 자를 구출할 자를 예수님 역시 황급히 찾고 계신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군이 적다! 고 지금도 흐느끼신다.
왕의 충성스런 신하가 있었다. 왕이 다른 나라에 순방할 때마다 먼저 들어가서 준비하는 손발 같은 부하다. 왕이 어느 날 그를 불러, 내가 죽을 때가 되었구나. 저 나라에 가서 왕이 곧 간다고 전하라 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 머뭇거리다가 의미를 깨닫자, 곧 품속의 칼을 꺼내 심장을 찔렀다. 어명이라면 그 어떤 것도 망설임 없이 실천하는 왕의 “꼼짝마 신하”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부탁이라면 도저히 토달줄 모르는 "묻지마" 일꾼이었다. 당신은 무엇에 꼼짝달싹 못하는가. 겁쟁이는 여러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한 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하나 더 “죽고져 하는 자가 산다.”는 신선한 진리를 따라야 하리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