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순례자
1.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 저도 따릅니다(그리스도를 본받아: 토마스 아 캠피스)
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자를 찾으신다.
“자기를 부정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6:24)는 말씀을 대부분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말같이 취급한다. 그러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를 위해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는 말은 얼마나 더 견디기 어려운 말인가. 십자가를 따르는 모든 종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분 앞에 마땅히 설 것이다. 그런데 왜 당신은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첩경인 십자가 지는 것을 무서워하는가. 십자가 안에는 하늘나라의 행복 된 맛이 숨어 있는 줄 모르는가. 주님의 죽으심은 당신도 십자가를 지게 함이었고 죽을 수 있게 함이었다. 그와 함께 죽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사는 벅찬 축복이(롬 6:8)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과 내적인 평화를 얻는 것은 십자가의 길과 날마다 나를 부정하는 극기생활 이외는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당신 원하는 대로 가고, 구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 그러나 거룩한 십자가의 길보다 더 높고 안전한 길은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당신이 즐거이 십자가를 지면 그 십자가가 당신을 져줄 것이고 그 십자가가 마침내 당신이 그렇게도 원하는 목적지에 안전히 인도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십자가를 없애는 길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면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어 당신을 더욱 무겁게 할 것이다. 십자가를 버리면 또 다른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지셨다면 당신은 왜 십자가의 공도(公道)를 외면할 생각인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고(눅 24:26) 가르치셨다. 십자가 지는 것을 즐겨할 때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 될 것이다. 표현할 수 없는 영광까지도 같이 나눌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께 대해서는 사는 것이다.
2) 십자가를 지는 자가 적다.
예수님과 그 하늘의 왕국을 사모하는 자는 많으나 그의 십자가를 지는 자는 극히 적다(눅 14:27). 그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와 함께 고난을 받고자 하는 사람 찾기가 힘들다. 그와 함께 잔치에 참례하고자 하는 자는 많으나 금식에 참례하는 자는 희소하다. 떡을 나누는 일에는 큰 군중이 따랐으나 그의 고난의 잔을 마심에 같이 한 자는 적었다. 그의 기적을 경탄하는 자는 많았으나 그의 십자가의 겸손을 따르려는 사람은 적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사랑하나 어려움을 닥치지 않을 때만 한다. 그러나 주님이 한 번 위로를 저들에게 거두어 가시면 불평을 말하며 낙망을 말한다. 주님에게서 항상 위로만 구하고 있는 사람은 돈에 팔려 일하는 노동자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이외는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은가. 아무런 보상 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겸손히 섬기는 자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자기 사랑을 완전히 끊어버리고 나설 영적인 사람이 적구나. 이런 사람의 가치는 모든 땅을 소유한 것보다 더 귀하다. 자기를 거부하고 세상의 흔적을 남기지 아니하는 일이 더 귀하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과감히 버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 두는 것은 가장 힘센 사람이 되는 것이다.
3) 그대 자신을 바치라
그리스도: 벌거벗은 몸으로 두 팔을 벌리고 그대들의 죄를 위하여 나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값없이 바쳤노라. 나의 전 인격을 거룩한 사죄의 제물로 바쳤으니 그대들도 거룩한 제물로 내게 드려라. 나의 원함은 그대 자신을 모두 바치는 것 외에는 없다. 나 자신 외에 세상 어떤 것을 소유한대도 그대를 만족시킬 수 없음같이, 그대 자신을 내게 드리는 것 외에 나도 만족이 없다. 그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라. 그래야 그대가 드리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된다. 내 살과 피를 그대에게 양식으로 주어 그대의 전부가 되고 영원한 것이 되게 하였노라. 그대와 내가 완전한 연합함이 되는 길은 나처럼 그대도 내게 바쳐야 한다. 하나님의 손에 그대를 온전히 맡겨라. 많은 사람이 내적인 빛과 자유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내 제자가 되고자 하거든 전심으로 자신을 바쳐라.
2. 십자가의 길(돌로로사)
라틴어로 비아 돌로로사라 부르는 우리 주님께서 고난당하신 14개의 지점을 교회는 명상하면서 깊이 은혜를 새긴다. “고난, 슬픔의 길”, “십자가의 길”을 순례하면서 나를 위해 치욕을 당하신 갚을 길 없는 사랑을 흠모한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무덤까지를 의미한다.
제1지점: 의롭기만 하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불의한 재판으로 정죄 당하신 빌라도 법정이다.
제2지점: 가시관 씌우시고 홍포를 입혀 치욕으로 희롱 당하신 곳이다.
제3지점: 무거운 십자가를 친히 지시고 가시다가 처음 쓰러진 곳이다.
제4지점: 통곡하며 슬퍼하는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곳이다.
제5지점: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신 곳이다.
제6지점: 성 베로니카 여인이 물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는 곳이다.
제7지점: 주님께서 두 번째 쓰러진 곳이다.
제8지점: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고 말씀하신 장소다.
제9지점: 예수님께서 세 번째 쓰러지신 장소다.
제10지점: 예수님의 옷을 벗긴 장소다.
제11지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곳이다.
제12지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곳이다.
제13지점: 예수님의 시신을 내려놓으신 곳이다
제14지점: 예수님께서 묻히신 요셉의 무덤이다.
3. 십자가로 살았던 성자 분도 요셉 라보르(수도생활의 향기: 엄두섭)
거지성자로 불리는 분도 라보르(Labre, 1748)는 불란서에서 태어났다. 고행과 엄청난 극기로 향락에 빠진 유럽을 교훈시키며 짙은 감동을 끼얹었다. 신학을 중단하고 수도원을 갈망하여 지원한 그는 일곱 번이나 거절당하자 세속에 머물러 청빈생활을 시작하였다. 수도복을 입고 허리에는 노끈을 매고 13년간 여러 나라를 걸식하면서 성당과 성지를 찾아 다녔다. 보따리에는 간단한 생활용품과 일부러 무겁게 하려고 돌을 넣고 다녔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단 한 벌 옷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순간을 기쁨으로 순례자의 길을 옮겼다.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고 조롱받을 때면 도리어 기뻐하고 박해자에게 깊은 사랑을 베풀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남에게 나쁜 대우를 받기를 원했고 존경하는 이를 피했고 후대하거나 성인으로 존대하는 집이나 마을에서는 도망을 쳐 다시 오지 않았다. 자기를 존경하는 여자들이 가까이 가서 배우기 원했지만 몸에 악취가 나도록 몸을 가꾸지 않고 멀리 했다. 성자로 추앙하는 여자들을 한 번도 정면에서 바라보는 법이 없었다. 어느 신부가 이 거지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을 듣고 오히려 기가 막혀 도망갔다. 은근히 대접받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우쭐해진 인간들에게 십자가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언제나 갈보리 오르는 정신으로 살았고 산중으로 다닐 때는 큰 십자가를 만들어 어깨에 메고 다녔다. 큰 길을 피하고 좁은 길로 다니고 비가와도 그저 맞고 다녔다. 길을 갈 때는 성가를 부르거나 기도하면서 걸었고 주님과 늘 대화를 나누었다. 입을 열면 신앙이나 수도원에 관한 것 외에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가슴은 예수님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불타서 추운 겨울에도 앞가슴을 열고 다녔다.
“오소서 내 주여 오소서! 나 당신을 갈망합니다. 나 당신을 고대합니다. 나 당신만을 탐합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잠시 동안이 천년과도 같습니다. 오소서! 주 예수여! 지체하지 마소서!” 분도가 길 가면서 언제나 드리는 기도다. 음식은 하루 한 끼였고 구걸한 음식 중에도(탁발. 托鉢) 빵이 너무 좋으면 거지에겐 과분하다 하여 받을 수 없다고 사양하거나 남에게 주었다. 가다가 해가지면 성벽 밑이나 나무 그늘, 혹은 굴에서 돌베개를 하고 창고나 교회 안 맨땅에서 잠잤다. 여관에는 절대 드나들지 아니했다. 어느 신부가 자기 집에 가서 잠자기를 원했을 때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의 잠자는 것은 오히려 밤새 기도하는 것이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미제레레) 밤새껏 부르짖는 소원이다. 기도는 그에게는 휴식이고 기쁨이고 생활이었다. 그의 기도는 불타는 마음으로 분수에서 올려 솟는 듯 듣는 자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스랍 천사 같은 모습이었다.
성경 몇 구절을 읽고 눈을 감고 가슴위에 손을 합장하고 묵상을 시작하는데 벌써 성령에 이끌리어 조금 공중으로 뜨며 탈혼(脫魂)이 된다. 남들이 이 모습을 볼까 해서 15분정도의 기도로 끝냈다. 어떤 때는 성당에 들어가 기도할 때 그의 머리에선 불꽃이 솟고 전신에서는 광채가 났다. 비록 거지였지만 그 얼굴이 얼마나 아름답고 성스러운지 성직자들도 그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거룩한 성인이면서도 죄를 자복할 때에는 숨을 헐떡이며 눈물을 흘리며 통회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감동을 받아 저절로 통회하는 마음을 일으켰다.
유럽지방을 유랑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각을 끊고 소식도 알리지 않았다. 친한 이웃이 “편지나 종종 하십시오.”하면 “편지 쓸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다시 만나지요.” 한다. 기도를 부탁하면 “착한 사람에게 하듯이 제게 기도를 부탁하십니까. 저를 조롱하십니까? 저는 큰 죄인입니다.” 언제나 낮은 자세였다.
자기도 거지생활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남은 것이 있거나 새 옷이나 성한 빵은 다른 거지들에게 주었다. 걱정스런 일을 부탁하면 예! 예만 하고 잠깐 물끄러미 보고 미소만 지었는데 며칠 후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기회만 있으면 만난 사람들에게 위로해 주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영생의 길을 열심히 가르쳤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루 밤이라도 신세 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을 빌었다. 한 마디 설교도 한 일이 없어도 입을 봉하고 고행하는 이 거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회심했다.
길 가다가 병자의 집에 초청되어 들어가 병의 비밀한 원인을 알고는 이렇게 격려했다. “기뻐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이 고통을 주셨습니다. 지금 원한과 탄식으로 지낼 처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탐낼 처지입니다. 많은 성인과 성녀가 당신의 고통과 같은 것을 원했지만 받은 이가 적습니다. 병도 건강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행복도 불행도 다 하나님께로 옵니다. 잘 사용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더 고통을 당한 후에 침상에서 바로 천국으로 가게 되겠습니다. 위대한 일을 하시려고 당신을 이 길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걱정 있는 이에게는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위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눈물 골짜기입니다. 무덤을 지난 다음에나 완전한 위로가 올 것입니다.”라 말했다.
병중의 비르지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하느냐의 질문에는 삼합일심(三合一心)이 있어야 함을 알렸다. 하나님께 대한 불같은 마음이 있어야하고 그를 사랑하고 말하고 그를 위해 활동하는 마음이라 했다. 둘째는 육심(肉心)으로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 사랑하고 도와주는 마음이고, 셋째는 자신에 대한 철심(鐵心), 철저히 자신을 다스리고 자아를 끊어버림이다.
어떤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다. 차려놓은 음식 그릇을 들고 감사하고는 입에까지 대었다가 다시 내려놓고는 먹지 않았다. 주인이 권면을 해달라는 요구에 “시계종소리가 날 때마다 당신은 그 다음시간의 주인이 아닌 줄 아십시오. 또 시계소리를 들을 때 마다 당신의 천국 길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당하신 혹독한 고난을 잘 생각하십시오.” 그 후 병이 없었던 주인이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있었다. 그는 언제나 고독하게 있기를 원했다. 로마를 향해 떠날 때는 어느 신부가 동행할 사람을 하나 구해 주었으나 굳이 사양했다. 기도하는데 분심(分心)이 되기 때문이다.
임종: 그의 나이 35세.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그의 마지막 날이 왔다. 마지막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말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입속말로 “없습니다. 없습니다.” 할 뿐이다. 양심에 꺼리는 일이 없느냐 하니 “하나님의 은혜로 없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평화스럽게 대답한 말이다. 라브르가 운명하던 8시(1783. 4. 16) 정각에 로마의 모든 교회의 종들이 모두 울렸다. 그날 밤 로마의 거리에는 아이들이 ”성인이 죽었다! 성인이 죽었다!” 소리를 치며 두루 다녔다. 전 시민이 삽시간에 성인의 죽음을 알고 죽은 얼굴을 구경하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어 경찰까지 동원됐다. 군중들은 외쳤다. “아! 아름답도다. 분도 라브르여. 거룩한 거지! 그대는 복되도다!” 시신을 엄습하려고 옷을 벗겼을 때 스스로 때린 채찍 자국과 물것에 물린 자국과 상처, 피부의 땀구멍마다 이가 붙어있었다. 거지의 장례행렬이 지나갈 때 천지가 진동하듯 환호를 울렸다. 장례가 승리의 경사였다. 주교는 이 광경을 보고 “그렇게 더럽고 헤어진 옷을 입은 거지가 이렇게 로마 시를 감동시킬 줄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그의 사후에도 병자가 낫는 기적이 일어났다.
4. 원수를 사랑하라 했으니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아들 삼아야 한다.(손양원 목사의 딸 손동희 권사의 간증)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불굴의 신앙과 참 사랑을 보여준 한국의 대표적인 목자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종신형을 선고 받고 5년여 옥살이를 했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자로 삼아 전도사로 키웠으며, 나환자를 사랑하다 공산당원들에게 순교 당했다. 기독신앙의 진수를 보여준 손 목사의 신앙과 그의 가족사를 딸 손동희 권사의 간증에서 십자가를 보게 된다.
애양원은 1,000여 명의 나환자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아버지는 전도사로 이곳에 부임해서(1937. 7) 그들을 위해 사셨다. 애양원은 찬송소리가 끊이지 않는 천국이었다. 1940년 9월 25일, 아버지가 수요예배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자 일본형사 두 명이 수갑을 채워 끌고 갔다.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였다. 얼마 후 애양원에는 일본사람 안또가 원장으로 들어와서 신사참배 안하면 나가라고 했다. 몇몇 나환자는 뛰쳐나와 하동군 산속에 움막을 쳐놓고 구걸하며 살았고, 우리 가족도 쫓겨나 부산 범냇골 산꼭대기 판잣집으로 이사 갔다. 큰 오빠와 작은 오빠는(17세, 13세) 나무통 공장에 취직했고, 어머니는 바다에서 미역과 해초를 뜯거나 산에서 나물을 뜯어 팔아 일곱 식구 생계를 이어갔다.
아버지가 옥에서 할아버지께 보낸 편지다. “불효자 양원을 위해 조금도 염려하지 마옵소서. 한 덩어리의 주먹밥, 한 잔의 소금국 그 진미는 그야말로 천사의 떡맛이올시다. 고난은 참으로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아버지는 신사참배 문제로 우리 형제들을 학교에 안 보냈다. 편지 올 때마다 독학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오빠들은 공장 갔다 오면 밤늦게까지 책을 읽었고 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큰 오빠는 소년가장이었다. 아버지가 큰 오빠에게 보낸 편지다. “위로 할아버지와 어머니, 아래로 동생을 거느리는 가정의 짐이 얼마나 무거우냐. 먹고 입는 것이 중요해졌다하여 마음까지 잃지 말고 선행을 옷 입듯 하라. 고난 중에 기뻐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항상 근신하고 학식과 덕행에 힘쓰도록 하라. 무엇보다 너희들이 죄를 범할까 늘 가슴에 염려된다. 힘쓰는 자는 주께서 승리하게 하신다.”
아버지가 3년형을 마치고 만기출소 하는 날이다(1943. 5. 17). 우리 가족은 이날 아침 광주형무소 앞에서 아버지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캄캄해져도 소식이 없었다. 어머니가 형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시더니 아버지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셨다. 어렸을 때 일이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우리 아빠는 바보라고 했다. 고개 한번 숙이면 우리도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텐데 우리 아빠 바보라고….
일본 간수들이 출소 전 “고생하며 많은 반성을 했을 터인데 아직도 신사참배 못하겠소.” 묻자 아버지는 “고생은 당신들이 했소. 내 신앙은 지금도 변함없소. 우상 숭배하는 일본은 망할 것이요.”했다. 이것이 종신형 선고 이유였다. 아버지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상관없다. 이것은 나의 유익이요 하나님의 축복”이라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39세에 끌려가 다섯 번 옥을 옮겨 다녔다. 청주구금소에서는 밤 12시만 되면 독립투사들을 끌어냈고,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손톱과 발톱을 대꼬챙이로 찔러대고, 거꾸로 매달아 고춧가루물을 입에 부었다. 전기고문을 하면 혀를 깨물어 땅에 피가 뚝뚝 떨어졌다. 아버지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저들은 나라를 위해서도 저렇거늘 내 이까짓 한목숨 우리 주님 위해 못 바치겠는가.’ 결심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옥에서 쉴 새 없이 전도하다가 독방에 갇혀 곶감만한 밥과 소금국으로 연명했다. 편지에는 글자가 비틀비틀 했다. ‘눈이 멀어간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부들부들 떨며 우셨다. 동상에 걸려 손톱과 발톱이 짓물러 빠졌고, 귀에서는 진물이 흘렀다. 아버지가 쓰러지자 시체실 같은 곳에 던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아버지는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구나 하며 엎어진 채 ‘내 주를 가까이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 찬송을 부르자, 살아났고 다시 독방에 넣었다.
아버지는 독방에서 어머니께 이런 편지를 보냈다. “빈방을 홀로 지켜 고적을 느끼나 성삼위(聖三位)께서 함께 하니 내 식구 되었구나. 갖가지 고난이여 올 테면 다 오너라. 괴로움 중에 내 주를 체험하리라. 여보, 나는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고난이 귀하고, 솔로몬의 부귀보다 욥의 인내가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지상에서 두 번 돌아오지 못할 세상 고난의 맛은 하늘의 천사도 부러워합니다.”
큰 오빠에게 군대 영장이 나왔다. 신사참배와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식구들이 금식기도에 들어갔고, 마지막 날 똑같은 응답을 받았다. 일곱 식구가 뿔뿔이 흩어지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만주 작은 아버지 집으로, 어머니와 3살 남동생과 큰오빠는 남해 깊은 산속에 숨기로 했고, 작은 오빠는 나환자들의 움막으로 들어가고, 나와 여동생은 고아원으로 가기로 했다. 내 나이 12살이었고, 동생은 9살이었다. 나와 동생은 큰오빠의 자전거 뒤에 타고 부산 구포 에덴고아원으로 가서 이름을 바꿔야 했다. 밤이면 혼자 울었다.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이 원망과 미움으로 바꿨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인데 아버지는 옥살이를 하고, 엄마와 형제자매들과 헤어져야 하나. 어째서 내 부모님은 별난 예수를 믿어서 우리를 고아가 되게 하나’ 날마다 원망하며 살았다.
1년이 지난 1945년 8월 15일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어른들이 부둥켜안고 울고 불며 열광적인 예배를 드렸다. 한정현 목사님이 우리에게 해방이 되어 아버지가 옥에서 나온다고 알려 주었다. 아버지가 옥에서 나오신다니, 어이가 없었다. 어머니는 이 땅에서 아버지를 잊으라고 하여 아버지라는 말도 잊고 살았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말로 들렸다.
5년 만에 애양원 사택으로 돌아와 내 소원인 학교에 다녔다. 내 생애 최고 행복한 해였다. 그러나 행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순천 매산 여중 1학년, 16살 때였다. 1948년 10월 공산당들이 여수 . 순천에서 폭동을 일으켜 지옥을 만들어 놓고 7일 만에 끝났다. 3천 500명이 살해당했고, 우리 두 오빠도 같은 학교 친구에게 학살당했다. 두 오빠의 시체가 애양원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기절을 반복하셨고, 아버지는 두 오빠 시체를 끌어안고 땅을 치며 어찌하여, 어찌하여, 어찌하여 하며 통곡하셨다. 나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며 하늘을 향해 삿대질까지 했다. 예수 안 믿겠다고 발광하고 다녔다.
두 오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일주일쯤 두 오빠 죽인 자를 잡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아버지는 아들 삼겠다고 하였다. 나는 펄쩍펄쩍 뛰었다. 아버지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옥에서 고생했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이 얼마나 모순이냐”며 나를 설득했다. 내가 “용서하면 용서했지, 아들 삼는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라고 항변하자, 아버지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용서만 가지고는 안 된다. 아들 삼아야 한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두 오빠를 죽인 학생을 사형 직전에 구출하여 아들로 삼고 부산의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입학시켜 독실한 신자로 만들었다.
내가 16살 때 두 오빠가 순교했고, 18살 때 아버지가 순교하였다. 밤마다 오빠들의 발자국소리와 총알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순천에 살다가는 미칠 것 같았다. 서울 이화여중으로 전학 갔는데 3학년 말 6. 25가 터졌다. 목사님들은 아버지에게 피난가라고 했으나 아버지는 “이 난국에 양 먹이는 목자가 몸도 성치 않은 양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느냐.”며 거부했다. 또한 나환자들이 강제로 배에 태웠으나 뛰쳐나오셨다고 한다. 9월 13일 공산당원들이 애양원에 들이닥쳐 강당 뒤에서 기도 드리는 아버지를 여수감옥에 끌고 가서 공산당을 악선전하고, 미국 스파이 노릇을 했다고 고문했다. 9월 28일 공산당원들은 후퇴하면서 아버지를 여수 미평의 큰 과수원 속으로 끌고 들어갔고, 아버지는 48세에 한 많은 생을 순교의 제물로 마감했다. 아버지의 시신은 두 오빠의 무덤 뒤에 묻혔다.
나는 한 때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황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오빠와 아버지가 순교하여 풍지박살 난 우리 가정을 믿음의 표본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밭에 뿌린 씨는 하나이지만 백 배 혹은 천 배의 결실을 맺는다. 두 오빠와 아버지, 그리고 순교자들이 죽은 것 같지만 죽은 게 아니다. 그 씨는 지금도 싹이 나고 움이 터서 많은 열매를 거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