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간증
믿음의 모험, 기쁨의 여정
이0진, 신0수 선교사(하0, 예0)/중동
어느덧 T국에 온 지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처음 선교와 선교사의 삶을 소망하며 준비하던 때가 생각난다. 목표는 분명한 것 같은데, 눈앞은 새하얀 안개로 덮인 듯 내딛는 한 걸음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 그렇기에 눈앞에 놓인 한 걸음들만 걸을 수밖에 없던 것이 지금 돌아보면 내가 흉내 낼 수 없는 그분의 이끄심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바우리 지원서를 작성할 때 지원 분야 어디에도 해당 사항이 없어 ‘기타’로 지원하며, 과연 나도 걸을 수 있는 길인가 의문이 들었다. 훈련의 첫 면담에서 원장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잘하는 게 없다고. 하지만 어디든지 보내주신다면 뭐든 배워서 살아내 보겠다고. 출국 전 고국에서 열린 권역별 수련회에서 많은 선임 선생님들을 만나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곳에서 선임 선생님과 인사하던 중, 어느 한 선생님으로부터 마치 선교는 보물찾기 같아서 이곳저곳에 숨겨놓으신 보물을 찾는 삶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보물찾기 이야기는 처음 내딛는 두려운 걸음을 설레게 했다.
T국에서 만난 환경은 내 예상과 많이 달랐다. 낯선 마을 속에서 현지인들과 부딪히며 사는 삶과는 사뭇 다른, 시골 외진 곳의 조용한 수양관에서 믿는 사람들을 만나는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러나는 어려움은 없었다. 이미 있던 집과 가구들, 무엇이든 도와주시는 어머니 같은 선임 선교사님. 아주 가끔은 외국인이 많은 한국에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울감이 찾아왔다. 집에 혼자 있는 것을 못 견디던 나에겐 걸어서 어디도 갈 수 없는 외딴 수양관의 울타리가 창살처럼 느껴졌다. 한국에서 시간만 나면 책을 들고 찾아가던 카페가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가장 힘들던 것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무엇이든 필요한 곳에서 열심히 하겠다”라는 나의 외침이었다.
첫째 아이가 어린이집에 어느새 적응했다고 생각한 어느 날,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얼굴에서 멍 자국을 발견했다. 바로 어린이집으로 되돌아갔다. 선생님은 모른다고 할 뿐이고, 하음이는 왜 그런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이야기를 해주면 차라리 나을 것을, 모른다고만 하니 이만저만 속상한 것이 아니었다. 언어도 잘 통하지 않아 더 묻기도 어려웠다. 집에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눈물이 나왔다.
잠시 동안 수양관에서 함께 지냈던 아제르바이잔 자매와의 관계 속에서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딱히 관계의 문제보다도 내 안에서 자라나는 그를 향한 불편한 마음과 미움들을 보며 파송예배 때 들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하노라’ 말씀이 종 되기 싫어하는 내 마음을 찔렀다.
아이들을 돌보느라 남편만 어학당을 가야 하는 현실에도 소외감을 느꼈다. 남편이 학교에서 배워온 것을 나눌 때면 겉을 맴도는 주변인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울감과 무기력함 속에서 말씀은 새 힘으로 다가왔다. 때맞춰 묵상한 전도서 말씀 속에서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을 보게 하시며 문득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보물찾기 이야기를 생각나게 해 주셨다. 이곳에서 내가 찾은 보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얼마 전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하음이의 생일 파티에 부부가 함께 갔을 때, 하음이를 두고 다투는 남자아이와 그 사이에서 도도한 우리 하음이를 보았다. 어느덧 아이들과 현지어로 이야기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는 딸을 보며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쓸쓸하던 수양관에는 우리 외에 두 가정이 더 들어와서 살고 있고, 사역을 위한 팀도 구성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지금까지 그랬듯 여전히 우리의 앞은 안개와 같다. 당장 몇 개월 뒤의 내 모습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도 보물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안개 속 어딘가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기 위해 오늘도 한 발을 내디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