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 성경은 작업하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한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셨다는(건축) 창조선언으로 성경 첫 마디는 시작한다.(창 1:1) 대단한 작업이다. 신비함이 그냥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솜씨는 경탄 그 자체다. 창조하신 그분께서 완벽하고 아름다우심에 심히 좋아 하셨다(창 1:31)고 자평하신다. 그 안에서 인류는 포근함 속에 조금도 모자람 없이 대대로 누려 사는 복을 보장받았다. 그의 활동은 쉼 없으셔서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신다. 예수님의 증언대로 우리 성삼위 하나님은 대 우주 넓은 영토를 다스리고 영원 무궁히 섭리하시는 분으로 보살피심에 게으름이 없으시다. 깨어 계시는 주님(시 121:4)의 은혜로 우리는 극히 안전하게 산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셔서는 노동자로 일하셨다. 수백만 가지의 업종 가운데 목수직을 선택하시어 집 짓고 가구를 만들고 땀 흘려 수고하는 전문직에 종사하셨다. 하늘나라의 멋진 솜씨로 각 가정이 요구하는 집 만들기와 가구 짜기로 만족을 안겨주셨을 것이다. 30년간의 봉사의 임무를, 모세가 하나님의 집에서 신실한 일꾼이 된 것처럼,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히 3:2, 6) 충성을 하시다가 다 이루었다(요 19:30) 선포하시고 세상을 마무리하셨다. 그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도 제각기 맡은 몫뿐 아니라 온 인류구원과 평안을 위하여 예수님께로부터 배운 대로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자들이 되었다. 한 달란트를 땅속 깊이 파묻었다가 그대로 가져온 게으른 일군을 고약한 형용사를 붙여 악하고 게으른 자(마 25:26)라고 잘라 말씀하시고 한 달란트를 사정없이 빼앗아 다섯 배를 남긴 충성된 자에게 그냥 주신다. 받을 만한한 자에게 더 주셔서 하늘나라를 풍요롭게 하시려는 계획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게으른 자를 바깥 어두운 곳에 내쫓아 슬피 울며 이를 갈게 하신다. 게으름을 도덕적인 해이로 보시지 않고 죄로 보신다. 측량할 수 없는 십자가의 크신 사랑을 깨달았다면 어떻게 하나님나라 일을 감히 등한히 할 수 있을까. 분주한 일과에 쫓겨 식사할 겨를이(막 6:31) 없으셨던 예수님, 먼 거리 사마리아까지 죄인을 부르러 걸어가신 예수님의 피곤하심(요 4:6), 최후 십자가를 지시는 바로 전날 밤 생의 마지막 봉사도,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는 숭고한 봉사였다. 12명을 10분간만 씻어 주셨다 해도 두 시간의 고된 노동이었다. 내가 행한 것처럼 너희는 이렇게 하라고(요 13:15) 당부하시고 세상을 떠나신 스승의 교훈은 깊은 훈령이었다. 이 부탁에 따라 천국 백성들은 주저함 없이 봉사의 땅을 밟는다.
그럼, 천국에 가신 예수님의 지금 하시는 일은 대체 무엇일까. 역시 건설작업이시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3) 하셨다. 우리가 가면 있을 곳을 마련하러 가신다 하였다면 천국에서 우리 살 집을 짓는 일이다. 지상의 집 개념과는 다르겠지만 역시 세상에서 하셨던 목수의 일과와 너무나도 유사하다. 이리하여 성경 전체는 움직이시는 성실한 하나님을 연상케 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는 사도바울의 명령도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시면서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살후 3:10-11) 소위 게으른 한량 족속들에게 일침을 가하셨다. 바울사도는 당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전도자로 생의 끼니를 스스로 해결하여야만 되겠기에 천막 만드는 작업을 감수 하면서(행 18:3) 전도하였다. 내 손으로 친히 일(고전 4:12) 한다고 진술한다. 다른 어떤 종교보다 더 기독교가 자선사업과 고아와 양로사업에 앞장선 이유도 예수님의 정신에 의해서다.
봉사의 기초는 예수님께 둔다.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고후 9: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따라서 봉사자의 태도도 우리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한다. 지침도 말씀하신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느니라.”(고후 9:7)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전 3:12) 행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네가 네 떡을 인색한 마음으로 남에게 주면 네 떡도 잃고 네 상급도 잃느니라.” 어거스틴의 말을 명심해야 하리라. 더 나아가 선한 일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많은 것을 부어주신다는 약속까지 하신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 하게 하시리니”(고후 9:10) 마지막 장엄한 수확을 바라시며 수확의 법칙도 말씀하셨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고후 9:6) 하신다. 자기 자녀들이 하늘의 상급을 흡족하게 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마음이시다.
※ 거룩한 봉사의 발자취(마리아 레지나 고베르나: 사부 성 베네딕트)
6세기에 몬떼가시노에 베네딕트 수도원을 설립한 성 베네딕트(480년 출생)는 그의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규칙서를 만들었고 수도생활의 양식이 되어 많은 수도회에서도 표준으로 지키고 있다. 그의 성스러운 봉사 정신과 삶을 살피고자 한다. 그는 수도복을 입고 험준한 절벽 아래로 내려지는 동굴에서 빵 한 조각을 받아먹으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 오직 자기 자신과 함께 있을 뿐, 인류 가운데 홀로, 하나님 앞에 홀로” 침묵 중에 깨달음의 광야로 일생을 시작했다. 텅 빈 공간,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오직 나쁜 것만이 자신의 것임을 깨달으면서 깊은 죄인으로 겸손을 배우기 시작한다. 온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사랑하기를 배워나간다. 주의 음성을 들었다.
나의 아들아
나는 근원이요
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작품이다
너는 무한으로 던져진 자요
나는 무한이다.
너는 작은 아이요
나는 아버지다.
너는 흔들리는 자이지만
나는 네가 의지하는 바위다
너는 생각이지만
나는 지혜이다. 나는 완전하고도 유일한 진리이다
너는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소유당한 자이지만
나는 온전하고 넘치는 소유자다.
너는 내 안에 잠기어 있다.
네가 나를 부둥켜안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나는 너를 앞서가는 자이다
네가 완성되지 않고 채워지지 않는 채 너의 비천함 속에서 죽지 않는다면
너는 네가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봉사 규칙서에는 출애굽기의(출 22:21-27) 약자보호법, 그대로의 정신으로 묻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라. 병자를 방문하라. 죽은 이를 장사지내라. 시련 중인 사람을 도와주라.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하라. 연로한 이를 공경하라. 연소한 이를 사랑하라. 모든 것에 앞서 모든 것 위에 병든 형제들을 돌보아야 한다. 참으로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그들을 섬길 것이다. 병든 이들에게 병실을 만들어 주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부지런하여 주의 깊은 봉사자들에게 맡길 것이라 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을 그리스도처럼 맞아들일 것이다. 예수님께서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맞아주었다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손님에게 온갖 겸손을 들어내라. 머리를 숙이거나 온몸을 땅에 엎드림으로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영접받으시게 할 것이다. 가난한 이들과 순례자들을 맞아들임에 각별한 주의를 세심히 들일 것이다.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더욱 영접 되시기 때문이다. 손님들의 방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형제가 맡아보게 하고 그곳에는 침대를 충분히 마련해 둘 것이다.
1) 폐쇄된 정원, 그러면서도 세상을 포괄하는 사회로의 수도원
인류는 서로 손에 손을 잡고 큰 원안에 함께 어울린 수많은 작은 구성원들로 얽혀 있다. 온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으려면 신뢰로 가득 찬 공동체 안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한다. 수도공동체는 같은 걸음걸이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앞장서 걸어가신다. 그리고 수도승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차례대로 위엄 있게 일정한 질서 안에서 뒤따라간다. 누구도 하나님의 집에서 혼돈을 느끼거나 침울해서는 안 된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질서 있는 생활은 평화를 가져온다. “주여 당신의 말씀대로 나를 받으소서. 그러면 나는 살겠나이다. 주는 나의 희망을 어긋나게 하지 마소서” 서원하는 자는 똑똑히 이 구절을 세 번 되풀이한다. 이날부터는 자신의 모든 것, 몸까지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가 없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당신 외에 아무것도 차지하기를 용납하지 않는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어느 마음에 거처를 삼으시면 더 이상 ‘나’의 자리는 없다. “오! 놀라운 교환!”
2) 기도하며 일하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되심으로 당신 자신을 선사하신다. 역시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인간은 하나님과 같이 된다. “형제들이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성을 가지십시오. 아무것도 하나님의 일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십시오. 순간마다 다 귀합니다.” 주를 겸손히 따르는 자들은 우선하여 철저히 준비함으로 자신 안에서 성령이 활동하시도록 기도하였고 그래서 시편이 마치 호흡처럼 온전히 자기 것이 되게 하였다. 기도 석에 서면 사랑의 영으로 가득 차서 마음 깊은 데서부터 시편을 노래하고 그 안에서 새롭게 자신의 성소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성령의 바람에 순종하며 기도의 힘찬 파도에 넘쳐흐르고 굽이치도록 자신을 내맡겼다. 어느 날 근심에 빠진 자에게 “슬퍼하지 말고 일하라”고 말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다. 일을 통하여,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이 창조사업에 동참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백성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데에 속하기를 원하신다. 어떤 일을 가리켜 천하고 낮은 일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들과 정원에서의 단순한 일은 큰 성당을 짓는 업적과 같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행해야만 한다.
3) 두 발로 서 있듯이 봉사의 정신과 기도의 정신 두 기초를 가진다.
한쪽으로만 치우치면 안 된다. 계속 봉사만 해도 안 되고 계속 기도만 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받아도 안 되고 언제나 주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집에서 조화롭게 그리고 지혜로운 자들로부터 관리되어야 한다. 순간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세상,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삶을 지속할 수 있을까. 일생에 첫 번째로 맞이하는 날처럼 단호히 시작한다면 우리의 삶과 온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깨어있는 보초처럼 형제들을 기쁘게 해 주고 형제에게 마음을 쓰고 자기훈련을 쌓는 사람이 조화를 풍요롭게 해야 한다. 수도원 안에서는 삶 전체가 성찬이며 성찬은 또한 삶 전체다. 식사시간은 또 다른 감사축제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감사를 해야 한다. 보상을 생각지 않는 사심 없는, 드러나는 봉사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 유명한 형제에게도 사소한 형제에게도, 기분이 좋아도 기분 나쁜 날에도, 일생 한 방향으로, “무익한 종입니다. 할 일을 했습니다.”(눅 17:10)의 태도로 봉사의 도수를 높여야 한다. 기도 속에 홀로 갇혀 있는가. 아니다. 그 시간이 세계를 포용하고 있는 봉사순간이다. 심방(心房) 안에 예수님을 모신 자는 모든 일이 가능한 자이다.
※ 욥의 봉사를 배운다(욥기서에 나오는 이웃 사랑)
헤아릴 수 없는 재앙에 묻힌 의로운 욥은 고난의 중심에 선 채 바울사도처럼 주님을 섬긴 추억을 새긴다. 욥기 서에 나오는 그의 이웃사랑과 인생관을 살펴본다.(표준번역)
“젊은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 엄격하게 다짐하였다.(31:1)” 정욕을 도살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하였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라는 인격자가 된 것이고(1:1) 하나님께서는 두 번이나 사탄 앞에서 자기 사랑하는 아들 욥을 이런 문구로 자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승리였다.(1:8. 2:3)
“나는 맹세할 수 있다. 여태까지 나는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정직을 공평한 저울로 달아 보신다면 내게 흠이 없음을 아실 것이다. 내가 그릇된 길로 갔거나 나 스스로 악에 이끌리어 따라갔거나 내 손에 죄를 지은 흔적이라도 있다면, 내가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거두어 먹어도, 내가 지은 농사가 망하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31:5-8) 정직하고 거룩한 욥을 본다.
“내가 재판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고아를 속이기라도 하였더라면 내 팔이 부러져도 할 말이 없다. 내 팔이 어깻죽지에서 빠져나와도 할 말이 없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는 차마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었다.”(31:21-23)
“내 남종이나 여종이 내게 탄원을 하여 올 때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내가 무슨 낯으로 하나님을 뵈며 하나님이 나를 심판하시러 오실 때에 내가 무슨 말로 변명하겠는가.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내 종들도 창조하셨다. 가난한 사람들이 도와 달라고 할 때 나는 거절한 일이 없다. 앞길이 막막한 과부를 못 본 체한 일도 없다. 나는 배부르게 먹으면서 고아를 굶긴 일도 없다. 일찍부터 나는 고아를 내 아이처럼 길렀으며 철이 나서는 줄곧 과부들을 돌보았다. 너무나도 가난하여 옷도 걸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나 덮고 잘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볼 때마다 내가 기른 양털을 깎아서 그것으로 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혔다. 시린 허리를 따뜻하게 해 주었더니 그들이 진심으로 축복하곤 하였다.”(31:13-20) "나는 나그네가 길거리에서 잠자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으며 길손에게 내 집 문을 기꺼이 열어 주지 않은 적이 없다."(31:32)
“나는 앞을 못 보는 이에게는 눈이 되어주고 발을 저는 자에게는 발이 되어 주었다. 궁핍한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되어 주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하소연도 살펴보고서 처리해 주었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의 턱뼈를 으스러뜨리고 그들에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빼내어 주었다.”(29:15-17)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더라도 물에 빠지는 일이 없듯이 욥은 동양에서 제일 큰 재벌이면서도 물질을 초연한 자세로 볼뿐 재물의 풍요로 우쭐해진 일은 전혀 없었다. 하나님보다 항상 저 밑에 두었다. 그래서 부당하게 벌 줄도 몰랐다.
“나는 황금을 믿지도 않고 정금을 의지하지도 않았다. 재산이 많다고 하여 사랑하지도 않고 벌어드린 것이 많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않았다.(31:24-25)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 내 밭에서 밀 대신에 찔레가 나거나, 보리 대신 잡초가 돋아나더라도 나는 기꺼이 받겠다.”(31:38-40)
원수까지도 너그러이 품은 넓은 마음을 가진 자다.
“내 원수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나는 기뻐한 적이 없다. 원수가 재난을 당할 때에도 기뻐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원수들이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여 죄를 범한 적이 없다.”(31:29-30) 모든 재산과 십 남매 자식을 잃고 몸까지 죽을병이 들어 거지 신세가 되자, 그의 혜택을 받은 사람까지 다 멀리 떠났다. 그리고 독한 말로 조롱했다. 얼마나 심각한가를 보자.
“이제는 나보다 어린 것들까지 나를 조롱하는구나. 내 양 떼를 지키는 개들 축에도 끼지 못하는 쓸모가 없는 자들의 자식들까지 나를 조롱한다. 젊어서 손에 힘이 있는듯 하지만, 기력이 쇠하여서 쓸모가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여서 몰골이 흉하며 메마른 땅과 황무지에서 풀뿌리나 씹으며 덤불 속에서 자란 쓴 나물을 캐어 먹으며 대 싸리 뿌리로 끼니를 삼는 자들이다. 그들은 사람 축에 끼지 못하여 동네에서 쫓겨나고 사람들이 마치 도둑을 쫓듯이 그들에게 ‘도둑이야!’ 하고 소리를 질러 쫓아 버리곤 하였다.”(30:1-5) “그런데 그런 자들이 이제는 돌아와서 나를 비웃는다. 내가 그들의 말거리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나를 꺼려 멀리하며 마주치기라도 하면 서슴거리지 않고 침을 뱉는다.”(30:9-10)
“종을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하니 내가 그에게 애걸하는 신세가 되었고 아내조차 내가 살아 숨 쉬는 것을 싫어하고 친형제들도 나를 역겨워한다. 어린 것들까지도 나를 무시하며 내가 일어나기만 하면 나를 구박한다. 친한 친구도 모두 나를 꺼려 내 사랑하는 이들도 내게서 등을 돌린다. 나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앙상하게 드러나고 잇몸으로 겨우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19:16-20)
인간들에게 굴욕과 치욕으로 매질 당면서도, 몇천 겹의 고통에 무겁게 눌리면서도, 하나님께 한 가닥의 원망도 던지지 않고 대전투에서 보기 좋게 마귀나라의 총 대장 사탄을 굴복시킨 우리의 선배 욥의 용기에 찬사를 올리면서 그 생활신앙의 오묘함에 머리 숙인다.
※ 거룩의 봉사(토머스 머튼:칠층산)
수도자들은 포악한 살덩이의 번거로움을 뿌리치고 세속의 혼란한 자극에 오염되지 않은 맑은 눈을 하늘에 둔 채 하늘 속 깊은 곳의 광선을 투시하며 산다. 이 수도자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을 소유하며, 그들이 손을 대는 것이면 성스러운 불꽃을 튀긴다. 그들은 몸소 묵묵히 땅을 갈고 써레질하며 씨를 뿌리고 보잘것없는 곡식을 거두어 가난한 이들을 먹여 살린다. 그들은 인류에게 배척당한 가련한 그리스도를 세상 울타리 밖에서 찾으면서 세상에서 추방당한 가장 보잘것없는 인류의 말째로 자처하여 자기들의 살집을 손수 짓고 가재도구와 거친 옷을 스스로 만들어 쓴다. 그들 주변의 모든 것이 가난하고 단순하여 극도로 소박하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리스도를 발견하여 자기들 안에서 살고 일하시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힘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숨어서 하나님의 가난한 형제들이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하나님 비밀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 마음에서 피조물에 대한 욕망을 비우는 만큼,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와 하나님을 위해 마련된 자리를 채우는 까닭에 그들은 아무것도 갖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는 최고의 부자들이다.
‘하나님의 가난한 형제들’은 독방에 숨겨진 만나,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무한한 양식과 힘, 은밀한 영광을 마음속으로 맛본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엄청난 평온 속에서 하나님의 맑은 목소리는 마치 샘물 솟듯 솟아나와 단순하게 그들 마음속에 진리를 낳는다. 그리고 은총이 그들 안으로 더욱 풍성하게 흘러 들어가 그들을 채우고 사랑과 자유를 가득 채워준다. 그리하여 그들의 행위와 동작에서 넘쳐흐르는 은총 덕분에 그들의 모든 행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몸짓이나 연극으로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완벽한 행위로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랑의 행위가 된다.
은둔생활을 하는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받고 하나님은 주신다는 대립감이 전혀 없다. 하나님과 그들 간에 간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가 되어 그 순수하고 철저한 겸손에 의해 하나님으로 변모해 버렸다. 한 마디로 그들은 하나님 속에 있는 자들이다. 깨끗한 마음에 넘쳐흐르는 그리스도의 사랑 덕분에 그들은 어린이가 되고 영원한 사람이 된다. 팔과 다리가 나무뿌리처럼 쭈글쭈글한 늙은이들이 어린이 눈을 가지고 회색양털 두건 속에 파묻혀 영원을 살고 있다. 젊거나 늙거나 그들 모두 나이가 없는 하나님의 작은 형제들, 하늘나라를 차지할 어린이들이다. 성무일도(聖務日禱, 가톨릭교회의 매일매일의 공적 기도) 시간이 되면 날마다 한자리에 모이는데 그들 서로에 대한 사랑이 화강암처럼 준엄하고 포도주처럼 달콤한 노래가 된다. 긴 시간 동안 서서 장엄하게 시편을 송영하며 허리를 굽혀 절을 한다. 그들의 노래 기도는 씩씩하고 힘차게 나아가다 침묵으로 숨을 죽이고 또 다시 다채로운 불꽃을 활짝 피우다가는 다시 침묵으로 잦아든다. 또한, 그들은 한 밤중에도 일어나서 암흑을 헤치며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린다. 탐욕과 허욕과 살인과 색욕과 온갖 죄로 가득한 더러운 세상을 내려치시려는 하나님의 팔을 놀랍게도 꽉 붙들고 있는 것이다.
※동광원 사람들의 봉사(엄두섭: 맨발의 성자)
광주제중원에 카링톤씨가 원장으로 있을 때다. 동광원의 원장으로 있는 이현필 선생이 입원한 경우가 있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나 변혁이 따라온다. 그에게 와서 수도자로 훈련받은 식구들이 와서 그곳을 도왔다. 꽃밭은 말끔히 가꾸어지고 병원 안은 떠들썩했다. 그 후 병원은 동광원 사람이라면 무조건 신임하여 매점은 동광원 사람들로 채워지고 식당이나 세탁부의 보조원이나 보조 간호사는 이들이 차지했다. 병원 측에서는 동광원식구밖에 신용할 사람이 없게 미더워 보였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있고 희생적이기 때문이다. 모범간호사로 표창받는 것도 동광원 식구들이었다. 정식간호사는 아니고 수녀들이기 때문에 간호보조원으로 자원해서이다. 동광원 수녀들의 환자봉사는 일반 다른 간호사들과는 비할 수 없이 희생적이었다. 각혈하는 폐 환자가 생길 때에도 다른 간호사들은 회피했지만, 이 수녀들은 토한 피를 걷어주고 희생적으로 시중했다. 병원 안의 화장실 청소도 이들 자매의 손만가면 눈가림 없이 깨끗이 청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