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거룩한 순례자의 길, 같이 걷겠습니다 - 20. 나그네 순례자
BY 관리자2013.12.07 09:4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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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순례자


 

이동휘 목사


 

 

 

1. 믿음의 조상들은 나그네였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떠남으로 그의 부르심의 근원을 잡는다(창 12:1). “나는 당신들 중의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 자처하면서 헷 족속에게 아내의 매장지를 요구했다.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이후 뚜렷한 방향을 향하고 달리는 삶이었기에 분명 순례자의 길을 걸은 것이다. 야곱도 애굽 왕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라 부르면서 백 삼십 세임을 밝혔다(창 47:9).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받지 않은 채(행 7:5) 이삭과 야곱 모두 나그네로의 여정을 이어갔다.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백성에게로 유랑하였도다.”(대상 16:20). 애굽에서는 무려 400년의 긴 기간을 종살이하며 나그네로(행 13:17) 혹독한 고난을 겪었다. 드디어 멍에를 끊고 감격적인 출애굽을 시키신 하나님은 무려 40년간, 마흔두 번 장막을 옮겨 진 치면서(민 33장) 약속된 땅을 밟게 하셨다. 가나안 땅 분배를 지파에 따라 정확히 배정하면서도 땅은 영원히 팔지 못하도록 하셨다.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요 인간은 모두 잠깐 왔다 가는 거류민이요 나그네이기 때문이라 하셨다(레 25:23). 나라를 얻어 정착된 민족으로 살만하자 역겨운 죄악의 대가로 바벨론의 포로생활, 페르시아의 지배에 이어 헬라, 로마의 학정 속에서 나라 없는 서러운 방랑민족이 되었다. “우리는 우리 조상들과 같이 주님 앞에서 이방 나그네와 거류민들이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희망이 없나이다.”(대상 29:15). 도대체 선민으로 뽑힌 복 받은 민족에 대한 예우가 고작 이것이어야 할까.
신약에 들어와서는 성령강림으로 오랜 세월 만에 활기를 찾았다. 무엇인가 될 듯싶었다. 그러나 은혜의 감격에 빠지자 집과 밭을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홀랑 바쳤다. 핍박이 세차게 일어나자 집착하게 하는 집과 재산이 없는 저들은 홀가분하게 전도자로 흩어져 세계 끝까지 달려갔다. 히브리 1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글자 그대로 정처없는 유랑인의 외로움이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흩어진 나그네(벧전 1:1)에게 보내는 형태였고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라 하면서(1:17) 권면 내용도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2:11)고 당부했다. 남의 영토에 잠시 머물러 있는 거류민이든, 일시적으로 옮겨 다니는 나그네이든, 시민으로서의 법적인 권리를 갖지 못한 채 보호영역에서 제외된 부류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나그네로 사셨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마 25:43) 영접하지 아니했다고 책망하셨다. 하늘나라에서 지구에 오신 나그네다. 나그네 아닌 자가 누구인가.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생각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였느니라”(히 11:15, 16). 정처없는 나그네가 아니라 천국 본향을 향해 진군하는 나그네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시 119:54). 예수님의 말씀대로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하는 성민들의 순례길이다.
결국 따지면, 지구에 사는 인간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불안정한 땅덩이에 살짝 붙어살고 있는 시한부 인생들이다. “이곳은 떠돌이 인간을 싣고 날마다 여행하는 나그네다” 외치며 여객선은 달린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벧전 1:24). 우리 국적은 분명 하늘나라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따라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2)는 당부를 지켜야 할 자들이다.

 

 

 

2. 나그네는 많은 함정을 피해야 한다(허성준: 행복에 이르는 길)


 

1) 탐욕의 함정
한 부자가 인생이라는 해변에 서 있었다. 그 건너편은 천국이었다. 그때 한 천사가 나타나 천국에 가려면 뗏목을 지어 바다를 건너가야 한다고 알려주면서 부자에게 허름한 뗏목 하나를 가리켰다. 부자는 천국에 가기 위하여 자기 재산들을 뗏목에 싣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천사는 “이 뗏목은 매우 낡았습니다. 짐을 너무 많이 실으면 가라앉고 말 거요.” 경고를 주었다. 그러나 천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금궤, 돈 자루, 보석, 골동품, 옷과 맛있는 것을 계속 실었다. 그는 흐뭇해 하며 항해를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후 큰 파도가 덮쳐 그 배는 가라앉고 그도 익사하고 말았다. 인간의 탐욕은 한이 없으며 영혼에 많은 짐을 지운다. 바울 사도는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10) 경고했다. 탐욕의 결과는 죽음이다. 나아만 장군에 붙어 돈과 의복을 탐내고 나병 걸린 엘리사의 종 게하시(왕하 5:27), 여리고 성의 값진 보물을 숨김으로 온 가족이 몰사한 아간 가족(수 7:25), 영생을 사모하며 모범적이었으나 재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 어리석은 부자(마 19:22),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로 재산을 감추려다가 같은 날에 시체가 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행 5:9), 모두 탐욕의 풍랑에 빠진 자들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딤전 6:10) 됨을 여실히 증거하고 있다.
돈의 매력은 얼마나 강한지 하나님과 경쟁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마 6:24), 하나를 택하면 하나는 버려야 한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바라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한 자다(눅 9:62).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결정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의 접근에 대해 설명했다. 사탄은 수도자에게 접근하여 긴 노년과 미래의 굶주림, 앞으로 닥칠 질병과 궁핍에 대해 걱정하게 만든다. 다른 사람에게 생필품을 받는 데 따르는 수치심을 떠오르게 함으로써 탐욕의 덫에 걸리게 한다. 돈을 가져야 할 합당한 이유를 떠올려 늙고 병든 자신이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초라한가를 상상하여 걱정한다. 수도원의 엄격함 때문에 수도원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가진다. 탐욕은 강력한 전염성을 가져 온몸에 퍼지는 독과 같다. 탐욕에 떨어진 유다는 처음에는 가끔 푼돈을 꺼내 쓰곤 했지만 언젠가부터는 공공연하게 그렇게 했다. 탐욕의 광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급기야 그분을 팔아넘겼다. 나봇의 포도원을 탐낸 아합 왕은 쉽게 얻지 못하니까 나봇을 죽이고 빼앗게 되고(왕상 21:13) 아합 집도 비참한 최후를 예언 받게 된다. 인간의 욕심은 죄 없는 사람을 죽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탐욕도 결코 마음 안에 허락해서는 안 될 이유다. 탐욕을 허락한다면 그동안 맺은 영적열매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성경은 말한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는다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인간의 마음은 텅 빈 공간과 같다. 탐욕이 그 마음을 차지하면 인간은 추하게 변질되고 급기야 죽음에 내몰린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마음을 차지하면 아름답게 변모되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 될 것이다. 하나님만이 우리 마음을 차지하시도록 마음을 잘 지키고 다스려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신에게 자주 질문을 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원을 잃는다면 모든 더러운 것에 점령당할 것이다.

2) 슬픔의 함정
사막교부들은 두 종류의 슬픔으로 구분했다. 자연적인 슬픔과 거룩한 슬픔이다. 자연적인 슬픔은 일차적 차원으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할 때 생기는 인간적인 슬픔이다. 이는 절망을 동반한다. 부정적 측면의 슬픔이다. 사탄의 비웃음으로 가득 찬 근심이다. 거룩한 슬픔은 채워지지 않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갈망을 뜻한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으려는 갈망, 악에서 해방되려는 갈망, 완전함에 대한 갈망,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 하나님을 뵙고 싶은 갈망이다. 이것은 매우 희망적이고 거룩한 슬픔을 말한다. 궁극적 측면의 슬픔이다. 즐거운 슬픔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거룩한 슬픔은 성령의 열매를 선물로 받게 된다. 그러나 인간적인 슬픔은 분노와 절망을 얻게 된다.
거룩한 슬픔은 눈물을 동반하는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에 대한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눈물을 흘린다. 거룩한 눈물은 인간의 몸을 정화하고 죄를 몰아낸다. 그리고 기도생활에 힘을 주어 악마와의 전투에 강력한 무기가 되고 기쁨을 누리게 된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는 약속의 성취다(마 5:4).

3) 허영심의 함정
어떤 수도사가 마을 변두리에 살면서 여러 해 동안 마을을 가지 않았음을 자랑했다. “여러분은 종종 마을로 가지만 나는 여러 해 동안 가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포이멘 압바는 “나는 오히려 마을로 되돌아가서 마을 주위를 걷곤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 오래 돌아가지 않았다는 허영심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을을 방문하지 않은 것으로 다른 형제보다 진실하고 엄격한 삶을 산다고 말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훈계했다. 허영심에 정복당하면 획득한 모든 것을 잃게 된다고 교훈을 주었다. 니스테루스 압바가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사나운 짐승이 나타나서 도망쳤다. 그때 무서웠느냐고 물었다. “무섭지는 않았지만 괜한 허영심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도망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떤 수도자는 독방에서 허영심의 악덕에 떨어져 자기가 성직자가 된 것을 상상하며 신자들을 나무라는 말을 했다. 이것을 들은 원로가 그 수도사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는 무척 당황하며 즉시 엎드려 허영심의 망상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빌 2:3). 헛된 영광은 덕행을 쌓은 사람에게도 숨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투쟁을 공적으로 드러내기를 바라며 사람들에게서 오는 영광을 추구하는 위험이 있다. 자기로 인해 치유된 여성들이나 자신의 겉옷을 만지는 군중과 울부짖으며 물러가는 악령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가 이 같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힐 때 또 다른 악덕으로 인도됨을 알아야 한다. 파렴치한 허영심을 억제하려면 자기는 영원한 죄인임을 언제나 인식해야 한다. 스스로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카시아누스는 허영심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첫째 육체적이고 가시적인 일들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이다. 둘째는 영적이고 신비스러운 일들에 대해 칭찬받고자 하는 욕망이다. 영적 탐욕과 같은 것으로 교묘하고 영악하다. 허영심의 악덕이 화려한 옷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데 실패하면 곧 초라한 옷으로 다시 유혹한다. 훌륭한 말로 자랑하는 데 실패하면 침묵을 지킴으로 고요와 평정을 얻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좋은 음식으로 유혹하는 데 실패하면 사람들에게 칭찬받도록 금식을 하도록 유혹한다. 우리는 약한 존재다. 시시때때로 예수님으로 마음을 채우고 그 한 분으로만 감격해야 한다.

 

 

 

3. 예수님을 목표로 순례하기(오스왈드 챔버스: 도움의 장소)


 

1) 우리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을 멀리하고 대신 주님을 위한 일에 자신을 헌신한다. 그래서 이 시대의 성도들은 사탄에 의해 패하기보다는 주님을 위한다는 의무 때문에 너무 바쁘므로 패배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패배한다. 더 나아가 자기들끼리 친교 하는 일에 너무 바빠서 주님과의 교제를 가질 시간이 없다. 결국 자기들끼리 은둔처를 만들고 그곳에 거한다. 어느새 그들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회 속에서 흠이 없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생명이라는 것을 잊어간다.
2) “내가 당신들 앞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었을 때 당신들은 당장 주님께 사로잡혔었는데 지금 다른 사람들이 와서 의식과 율법을 보여주니 당신들은 그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군요.”(갈 4:9-11의 역) 성화의 유일의 힘과 뿌리는 의식에 있지 않고 주님임을 잊지 않음에 있다. 체험은 단지 우리를 하나님의 계시의 그 놀라움과 경이로움 앞으로 인도하는 입구일 뿐이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체험을 오가게 하라. 그러나 당신의 마음과 믿음은 주님께만 있게 하라. 갈라디아 교인들은 죄로 물든 것이 아니고 고정된 종교의식에 빠져든 것이다. 생명력 없는 겉치레와 경건해 보이는 율법의 모양에 물들어 갔던 것이다.

3) 성경은 오직 단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만 강조한다. 획기적인 부흥운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엄청난 생명이 다시 임하는 것이다. 오직 계속적으로 십자가만을 바라볼 때만이 사소한 것에 빠져 들어가는 위험과 내적인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오늘날 가장 시끄러운 단어는 ‘하라’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 바울의 고백과 같아야 한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중심이 되는 십자가로부터 마음을 빼앗아가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매력적인 것일지라도 조심하라. 사람들은 진리를 원하기보다 사람들 간의 평화를 더 원한다. 그래서 근본을 잃고 덧없는 것에 빠지게 된다.

4)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하나님 앞에서 주절거리는 기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신 열매가 풍성한 집중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며 기도하는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견디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분별력 있는 비전을 원한다면 방황하는 생각들을 모아 집중하라. 산만한 정신이 집중되기만 하면 당신은 당신의 의지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의지의 노력이며 기도에서 가장 큰 싸움은 정신적으로 산만해지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만일 집중하지 못한다면 당신이 사탄의 밥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시 62:5).

5) 쓸데없이 바쁜 척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라. 하나님을 바랄 때 당신의 성향이 바뀌는 축복을 생각하라. 하나님을 바라는 것은 팔짱을 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추수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농부는 게으를 수 없다. 추수하는 날까지 언제나 힘든 수고를 하며 기다린다.

6)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요새이며 안전한 산성이다. 당신이 더 높이 올라갈수록 공기는 더 맑아진다. 마침내 어떠한 병균의 미생물마저 살 수 없는 지극히 맑은 곳에 다다른다. 그 어떤 죄악의 세균도 이를 수 없는 안전한 산성(山城)이 존재한다. 지극히 높은 곳에 당신의 요새를 세우라. 하나님께서 하늘에 별을 붙여 두신 것처럼 자신의 품 안에 우리를 두실 것이다. 요동치 않는 곳에 두실 것이다. 폭풍우가 치는 배에서도 주무신 주님처럼 높고 안전한 품 안에서 매일 승리할 것이다.

7) 끊임없이 모든 상황을 주님과 연관시키는 습관을 개발하라.
대부분은 자신의 상식에 따라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내린 결정에 축복하실 것을 소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러한 결정이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 대신에 무언가를 당신 마음보좌에 두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자녀들은 의무감에 따라 행동하거나 양심의 빛을 따르라고 부탁받은 일이 없다. 오직 주님의 빛 가운데 걸어야 한다고 들었다. 의무감으로 무엇을 한다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성도들이 쉽게 조롱을 당한다. 인자가 죽음에서 일어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는 이유를 알 것이다. 사람들의 필요를 채운다는 명목 하에 주님과 상관없이 의무감으로 봉사하고 있다. 은사에 맞는 일을 찾아 봉사한다. 물론 죄도 아니고 벌도 없다. 그러나 먼 훗날 좌절과 슬픔 가운데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에 어린아이 상태로 돌아가 다시 주님 앞에 배워야 한다.

8) 주님은 사람을 개발시키기보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만드시는 데 힘쓰셨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무엇인가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소중한 것들이 흐르게 하는 것이다. 잘 익은 포도 알이 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포도 알이 으깨어져서 향기로운 포도즙을 만드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성도의 삶은 성공에 의해 평가되지 않는다. 얼마나 하나님께 부어져서 그분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가로 평가된다.

9) 세 용사가 다윗왕의 목마름을 축이기 위해 생명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베들레헴 물을 떠 왔을 때에 먹지 아니하고 세 용사의 피라 하고 여호와께 부었다(삼하 23:16). 내가 만일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면 그 복은 자신을 부패케 하는 것이다. 그 축복을 하나님께 부어드려야 한다. 주를 위해 소비해야 한다. 당신이 최근에 베들레헴의 우물에서 떠온 물처럼 너무나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움켜쥘 생각인가? 부자 청년이 재물을 붙잡으며 동시에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면 좋을 뻔했겠는가? 하나님과 재물은 같이 섬길 수 없도록 되었다. 마치 주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신 것처럼 이제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들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10) 처음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뭐든지 심각하고 진지하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수록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된다. 진실하고 단순하다. 기쁨이 넘치고 밝게 된다. 영적인 삶의 기쁨과 생동과 놀라움을 앗아가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무미건조한 삶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라. 기대와 놀라움을 잊는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린아이의 기대와 놀라움을 허락하셔서 기쁜 마음을 가지게 하신다. 기독교의 기적은 사람의 마음과 영혼과 가슴을 항상 새롭고 젊게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린아이가 자발적인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 10:10) 하셨다.

11)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요 하늘의 기쁨이다. 바울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설명될 수 없는 마음의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 이외에는 결코 심각한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감옥에 가두어도 그의 기쁜 마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예수님도 사람들과 밝게 사귀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방했다(마 11:19). 어떤 이유보다는 주님의 생명은 결코 지치거나 시들 수 없는 차고 넘치는 충만한 생명이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 강같이 우리 마음에 흐르고 있다.

12) 지름길의 유혹을 이겨야 한다. 마귀는 지름길을 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먼 길을 택하셨다. 우리는 부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신속히 성장하기를 원한다. 계속되는 사탄의 조언을 받아들이면서 사람이 많을수록 구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님께서 겪으신 시험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지름길을 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걸리실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추구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의 분별 훈련과 이해, 그리고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함이다. 지름길은 한 사람을 기계로 만들 수는 있지만, 아들로는 만들지 못한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하나님의 원수는 나쁜 것이 아니라 최선이 되지 못한 차선이다. 우리는 죄를 하나님의 원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죄는 우리의 원수다. 하나님의 원수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차선을 믿고, 최상의 선이신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영적 거듭남에 근거하지 않은 ‘올바름’은 언제나 하나님의 원수다.

 

 

 

4. 떠나는 세상(토마스 왓슨: 묵상)


 

1) 여인숙에서 투숙 중
세상은 우리가 하루 이틀 숙박하고 있는, 그리고 떠나버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거대한 여인숙일 뿐이다. 고향을 저버릴 정도로 우리 마음을 여인숙에 집착시키고 있음은 무슨 미친 짓인가. 여행자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는 여인숙 이야기로 모든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거기 숙박하는 시간은 수 시간에 불과하다. 그리고 떠난다. 그들의 가야 할 목적지 그리고 고향에 대해서 신중하게 말한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니”(빌 1:23) 했다. 떠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죄인들은 떠나기를 싫어하며 울부짖는다. 흙을 먹으려고 뱀의 저주를 선택하고 싶을지언정(창 3:14) 흙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끌려나간다.

2) 떠남은 새 출발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낙원의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눈물 병을 틀어막을 것이며 영광의 나라로 상승할 것이다. 우리는 떠나 주께로 가지만, 죄인들은 주님께로부터 영원히 떠나고 만다. 죽음이라는 것은 단지 사해(死海)를 건너가는 정도이다. 엘리야처럼 겉옷을 날려 버리는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왕하 2:13). 육체의 죽음을 마지막 원수라 부르지만(고전 15:26) 믿음은 이것을 절친한 친구라 부른다. 죽음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데려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거기서 뵐 뿐 아니라 “주인의 즐거움에 참례할지어다.”의 영광이다(마 25:21).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거기 있으리라(살전 4:17). 이곳에서는 즐거움이 성도들 속에 들어온다. 지옥에 즐거움이 있을 수 없듯이 하늘나라에 슬픔이 있을 수 없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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