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 묵상의 길을 열어라(토마스 왓슨: 묵상)
1) 마귀에게 저항받는 묵상
은혜로운 경지로 진입하는 것이 명상이라는 것을 아는 마귀는, 묵상의 길목을 차단하는데 그의 지혜를 세밀하게 동원한다. 설교를 잘 들으며 기도를 잘하는 그리스도인이라지만, 묵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탄은 그런 모습을 흐뭇해 한다. 당신이 묵상의 탄알을 명중하여 박아놓지 않는다면 사탄은 당신의 웬만한 사격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스스로 문을 잠그고 세상을 단절하지 않으면 세상은 묵상을 망쳐 놓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러 ‘따로’(마 14:23) 산으로 들어가셨으니 그 뒤를 따라야 한다. 그가 스스로를 격리시킨 것은 묵상으로 하나님과 산책하시기 위해서다.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시력을 방해하는 것처럼 세상의 상념들이 티끌처럼 영혼의 눈인 마음속에 들어오면, 마음은 깊은 명상을 해도 그 경지에 이르기 힘들다. 아브라함이 번제를 드리러 갔을 때 그의 종과 나귀를 산기슭에 남겨 놓았는데,(창 22:5)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이 묵상의 언덕을 올라갈 때 모든 세속적인 걱정거리를 언덕 기슭에 남겨 놓아야 홀몸이 될 수 있고 천국 길에 바로 들어갈 수 있다. 자물쇠를 채우고 빗장을 질러 잠그고 세상과 단절하라.
2) 표류하는 상념
묵상하려면 마음을 대상에 고정시켜야 한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형체를 고정 시킬 수 없는 수은과도 같다. 생각이 정처 없이 배회하여 머물지 못한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새와도 같다. 다윗은 묵상하기엔 적격인 사람이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시 108:1)라고 하였다. 생각이 대상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아야 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 하니라”.(눅 2:19)
3) 회상(回想)과 묵상
기억은 진리를 간직해 두는 상자이거나 벽장인 반면, 묵상은 진리를 상식(常食)으로 삼는 입의 미각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대한 묵상을 시작하자 양식이나 다름없이 맛이 있었다. 영적 양식이다. 잔에 담겨있는 과일주스와 마셔서 삼키는 과일 주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듯이 진리의 회상과 진리의 묵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4) 묵상과 연구
연구는 두뇌의 작업이고, 묵상은 마음의 작업이다. 연구는 창작력을 동원하여 작업하고, 묵상은 감동력을 동원하여 작업한다. 연구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고, 묵상은 진리의 영적 향상과정이다. 하나는 금광맥을 찾아내는 탐색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금을 캐내는 발굴 작업이다. 연구는 비유컨대 온기와 작용이 시원찮은 겨울 태양과 같으나 묵상은 사람을 거룩한 경지에 이르게 한다. 묵상은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사랑의 눈물에 빠져들게 한다.
5) 묵상의 필요성
묵상이 없이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머물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완악하고 기억은 쉬 사라지니 묵상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잃어진다. 묵상은 마음속에 진리를 각인시키고 고정시킨다. 묵상이 없다면 우리가 안다는 진리도 우리 마음에 전혀 감동을 주지 못하리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신 6:6) 라고 하였다. 말씀이 묵상으로 제공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마음속에 남을 수 있는가. 망치로 못을 단단히 박듯이, 진리를 마음속에 박아 놓는다. 묵상이 없다면 설교한 말씀이 관념을 증가시키겠지만, 감동을 증가시키지는 못한다. 묵상은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다. 마음에는 많은 진리들이 이를테면 죽어서 누워있는 형편인데, 우리가 묵상할 때 진리들이 그 가운데서 빛과 열을 발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6) 묵상의 시간
하나님과 대화할 최적의 시간은 세속적 용건들이 들어오겠다고 문밖에서 노크하기 이전이다. 새벽 시간은 그 날의 백미(白眉)이다. 이른 아침 백미의 시간대를 따로 떼어 이것을 하나님께서 쓰시게 하라.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하늘나라를 향한 그대의 마음에 활력을 넣어라. 그러면 이후의 온종일이 내내 형통하리라. 세상에 살며 새벽에 활력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종일토록 활력을 되찾지 못하리라. 아아! 그리스도인들이여, 당신의 새벽 묵상을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하라. 하나님보다 세상을 먼저 섬긴다면, 하나님은 모욕을 당하신다. 왕과 시종이 같은 방에서 음식상을 받았는데 각상을 받았다고 상상해 보자. 만일 시종에게 음식물이 먼저 들어와 먼저 음식 시중을 들어 준다면, 왕은 이런 처지에 강한 모멸감을 느낄 것이다. 자기 인격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할 것이다. 먼저 세상을 섬기고, 모든 아침의 생각들이 세상을 시중들며, 그리하여 주님을 그날의 남은 찌꺼기와 함께 폐기처분 한다면, 이것이 바로 영광의 하나님께 가해진 모독행위가 아닌가. 하나님은 우리의 첫 생각을 마땅히 받으셔야 할 분이다.
축복의 이슬은 아침 일찍이 내린다. 그때는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간이다. 만일 당신이 친구를 만나고 싶다면 당신은 아침 일찍 친구가 외출하기 전에 때맞춰 찾아간다. 그렇다고 저녁의 묵상을 완전히 배제시키자는 뜻은 아니다. 이삭은 묵상하러 저녁 시간에 외출했었다.(창 24:63) 일과가 끝나고 고요한 저녁 시간에 하나님과 만나는 것도 좋은 일이다. 하나님은 아침 제사는 물론이지만 저녁 제사도 받으셨다.(출 29:39) 꼭대기에 크림을 얹는 것도 맛있듯이.
7) 묵상 시간의 길이
그대의 마음이 점점 뜨거워질 때까지 묵상하라. 어떤 사람이 춥다는데 당신은 그가 얼마나 불을 쬐고 있어야 할까 물어보는가? 그야 물론 몸이 완전히 훈훈해지고 일 할 만하게 될 때까지이리라.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여 그대의 마음은 차갑다. 날씨가 차갑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뜨거운 여름 날씨라도, 거기 마음속은 차가워 얼어붙는다. 그런즉 묵상의 불을 지피고 서 있으라. 그대가 뜨거운 감정이 느껴지고, 그리하여 영적 섬김에 적합해질 때까지 묵상의 불을 쬐라. 다윗은 자기의 속마음이 점점 뜨거워질 때까지 명상에 잠겼었다.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시 39:3)라고 하였다.
8) 묵상의 유익
묵상은 말씀에서 유익을 얻어내는 탁월한 방법이다. 읽음은 진리를 머릿속에 넣어주고, 묵상은 진리를 마음속에 넣어준다. 따라서 한 가지 설교를 묵상하는 것이 다섯 가지 설교를 듣는 것보다 낫다. 어린이들에게 구루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머리통은 크지만 하체는 작으면서 발육이 부진한 병이다. 많은 신앙 고백자들이 영적 구루병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 머리는 기형적으로 크고 지식은 많지만 경건 면에서 성장을 못한다. 마음이 나약하고 발은 연약하여 하나님의 길로 힘차게 걸어가지 못한다. 묵상 부족증이다. 묵상이 없는 교회는 우리를 마귀보다 도무지 나을 게 없도록 만든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라지만 사실은 새까맣다.
묵상은 마음을 진지하게 만든다. “그 선지자들은 경솔하고”.(습 3:4) 경박한 그리스도인들은 별의별 속설이나 부도덕에도 잘도 나부낀다. 당신을 어느 방향으로든지 깃털처럼 날려 버릴 수 있다. 깃털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다 보니 마귀가 시험을 가지고 오기 무섭게 이들은 당장 들러붙는다. 그러나 묵상은 마음을 진지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을 공고히 다져준다. 알찬 황금이(solid gold) 최상품이듯, 알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유일한 합격품이다. 조명은 우리를 빛나는 등불이 되게 하고 묵상은 우리를 타오르는 등불이 되게 한다.
9) 묵상은 기도하는 데 적합하다.
묵상은 먼저 기도할 자료를 제공하고 그다음에 기도할 마음을 공급한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 143:5-6) 자기 머릿속의 명상이 손을 뻗어 기도하게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기도는 묵상의 아들이다. 묵상은 선봉을 인솔하고 기도는 후미를 전진시킨다.
10) 묵상을 위한 지침
묵상하기 전에 말씀을 읽으라,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딤전 4:13) 읽음은 묵상할 자료를 공급해 준다. 읽는 일은 묵상의 등불에 흘러드는 기름이다. 반드시 당신의 묵상이 성경말씀에 기초를 두도록 하여라. 묵상 없는 읽음은 효과가 없고 읽음 없는 묵상은 위험하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문제를 놓고 묵상하지 말라. 묵상에 의해 철저히 깨달은 한 가지 진리가 가장 따사롭게 마음을 감동시킨다. 한 번에 단 하나의 묵상의 쐐기를 박도록 하되 반드시 이것으로 마음에 철저한 깨달음이 있게 하라. 새 떼 전부를 겨냥하는 사냥꾼은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당신은 묵상을 위해서 기도하라. 기도는 영혼에다 묵상을 동여 매준다. 기도는 묵상의 끝머리에 매듭을 지어줌으로써 미끄러져 떨어지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묵상한 것을 실천에 옮겨라. 묵상과 실천은 두 자매처럼 손에 손을 잡고 가야 한다. 묵상의 끝은 행동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고 준행하지 않는 이들은 도무지 마귀보다 나을 것이 없다. 마귀는 많이 알고 있지만 여전히 마귀이다.
※ 명상의 중심은 예수님이어야 한다(바실레아 슐링크: 천국의 향취)
1) 하나님은 내게 놀라운 경외심을 일으키시어 내 생각을 감미롭게 채워주셨다. 나는 구세주의 위대하심과 사랑에 가슴 벅차 있었다. 주님께서는 풍요로움으로 더 깊은 통찰력을 매일 매일 내려 주셨다. 주님은 내 마음에 불을 붙이신 것이다. 나는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볼 수 있었다. 주님께서 나의 주이시며 나의 하나님임을 생각할 때 기쁨이 터질 것만 같았고 내 일생을 주님께 헌신하기를 갈망하였다. “오! 하나님, 당신은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지요. 저는 오직 당신 앞에서 예배드리며 당신 것이 되어 옛사람은 당신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장사 지낸 바 되었습니다. 이제 제 자아는 더 이상 살아서 당신의 계실 자리를 침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당신 계심을 기뻐할 뿐입니다. 언제나 당신을 생각하며 기꺼이 드리나이다.”
2) 나는 한때 나의 가슴은 고통을 당하는 영혼들에만 집중되었을 뿐, 그들로 인해 고통당하시는 예수님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나는 예수님 보다는 이 영혼들에 더 마음을 쓴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또는 주님께 반항적인 행동으로, 또는 불신으로 인하여 예수님께 입혔던 상처에 슬퍼하기보다는, 고통받는 자매들을 위해서만 더 많이 슬퍼했던 것이다. 나는 순전한 사랑인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분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나의 영적인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간 영혼의 고통스러움에 대한 연민의 정에만 빠져 나는 더 이상 그리스도와 그분의 승리의 기쁨과 안식에 머물지 못한 것이다. 베를린에 있을 때 내 생활은 우정이 중심이었기에 어둠 속에 빠져 버리고 만 것이다.
3) 내 어린 시절이나 젊은 시기와 마찬가지로 나를 해방시켜준 것은 십자가의 시련이었다. 내 생애에서 십자가와 채찍질이 없었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 땅에서 가장 못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이다. 독선적이고 자기만족에 사로잡혀 있으며 생명력은 없는 데다 교만하기까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율법주의자가 아니면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통해 나는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가. 그러한 역경이 나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십자가는 언제나 내게 양면을 보여 주었다. 한편으로는 내 마음과 죄악의 심연을 보여 주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보여 줌으로써 내가 못 박은 주님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십자가의 시련이 올 때마다 나의 신앙은 더욱 강렬해졌고 훗날 나에게 밝혀질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를 향해 나갈 길을 열어 주었다.
4) 내가 기도할 때면 방에는 완전한 고요함이 감돌았다. 하나님의 임재와 그 거룩함, 사랑이 거의 손에 잡힐 듯했다. 하나님이 죄인에게 다가오셔서 몸을 기울이실 때 그 입김을 느끼는듯했다. 하나님의 평안은 마치 흐르는 시냇물과 같고 그 사랑은 마치 베일처럼 부드럽게 나를 감쌌다. 그분의 사랑은 나를 그에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타오르게 하는 불꽃과도 같았다.
5) 하나님께서는 모순적인 분으로 비친 적이 있는가. 그분의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그분께서 잘못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그리고 모든 희망이 산산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 믿음으로 하는 일이 완전한 실망으로 끝났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었는가. 누구든지 천국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기 원하면, 어두운 단계를 지나며 고통스러운 실망을 견디어 내야 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누구든지 영원토록 천국의 향취를 맛보고자 하는 자들은 죄로 인해서 찾아오는 암흑 같은 고통을 일생동안 몇 차례 견디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를 위해 이 고통을 견디셨다. 십자가에서 그분은 소리치셨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비록 그분은 죄가 없었지만 그런 질고를 당하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죄인으로서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리가 예수님께 있다면 우리는 절대 버림을 받지 않지만,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영적인 밤들을 조금씩은 보내어야 한다. 우리의 절망 중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어느 때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다.
6) 그분의 기적이 점점 줄어들고 멀리 사라질 때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주신 이 일을 이루실 마음이 없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반대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 후 여러 해를 지나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지만 그럴수록 모든 어려움을 통해 아버지의 품에 깊이 파묻히고 매달려서 결국에는 그분의 선하심을 경험했다. 힘없고 눈물 많은 아이일수록 아버지 팔에 더 매달리는 법이다.
※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 고집스러운 방법을 주장하지는 않았는가? 고집과 자기주장은 언제나 그리스도를 밀쳐내는 법이다.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자기의 의도를 관철시키려 할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고 주님의 성령을 체계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은 오직 한 가지만 의식한다. 곧 아버지 하나님과의 완전한 하나 됨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마 11:29)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거룩해 지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께 순복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핍박받으시는 것을 막는 것이다. 열성을 피워 주님의 요청을 이루어야 한다면서 반대자들에 대한 미운 감정의 악한 영으로 주님께 상처 입히지는 않았는가. 우리가 자신의 신념을 고집스럽게 확신할 때 하나님을 그 고집을 부수시는 법이다.
경건의 시간(Q.T)
(바울선교회 묵상의 예: 필기체는 묵상 자의 묵상 문 실례)
2016. 1. 1.
1. 성경 본문: 베드로전서 2:18-26
2. 하나님 음성 듣기(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
1) 사환들아
2) 범사에
3) 두려워함으로
4) 주인들에게
5) 순종하되
6)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7) 또한
8)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10)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11) 슬픔을 참으면
12) 이는
13) 아름다우나
14) 죄가 있어
15) 매를 맞고 참으면
16)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17) 그러나
18) 선을 행하므로
19) 고난을 받고 참으면
20) 이는
21)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이니라.
22) 이를 위하여
23)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24) 그리스도도
25) 너희를 위하여
26) 고난을 받으사
27) 너희에게 본을 끼쳐
28) 그 자취를
29)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30) 그는
31)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32)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33) 욕을 당하시되
34)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35) 고난을 당하시되
36)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37) 오직
38)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39) 친히
40) 나무에 달려
41) 그 몸으로
42)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43) 이는
44) 우리로
45) 죄에 대하여 죽고
46)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47)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48)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49) 너희가 전에는
50)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51) 이제는
52) 너희 영혼의 목자와
53) 감독 되신 이에게
54) 돌아왔느니라.
3. 하나님과의 대화(깨달음, 회개, 결단)
하나님 나의 신분을 분명히 알게 하시어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섬기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종이 되었음을 더욱 감사합니다. 종은 원래 천한 자이어서 종놈이라는 철저히 낮아지는 자세를 갖추어야 할 것도 깨닫습니다. 종은 어떤 경우에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주인을 섬기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뿐 아니라 고통을 주고 괴롭히는 까다로운 주인들에게도 같은 자세로 섬겨야 할 것을 명령하여 주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여기 주인들이라 말씀하셨으니 내가 섬겨야 주인이 하나가 아니라 많음을 알았습니다. 선한 주인들도 많지만 까다로운 주인들도 역시 많음을 알고 태연하게 대하겠습니다. 부당한 대접을 받고 애매한 소리를 듣는 순간에도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는다면 이것 자체가 어여쁜 미가 된다 하시오니 화내거나 따지지 않고 기쁘게 섬기는 종으로 살겠습니다. 죄를 지은 대가로 매 맞고 비방 받는 자들에 비하면 큰 영광임을 알았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오히려 비난받고 그 고난을 역시 참는 것은 참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아름다운 일이며 우리 선배 성현들이 가졌던 태도임을 믿고 저도 이 길을 걷겠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보여 주심으로 우리의 밟아야 할 자취를 깨닫게 하심 역시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아예 죄를 짓지 않으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지만 고난받으심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죄인으로 살고 있음에 죄송할 뿐입니다. 그 입에는 거짓이 전혀 없으시고, 욕먹었다고 앙갚음으로 욕을 속물처럼 퍼 붙는 인간과는 달리 주님은 그대로 욕을 받으셨습니다. 고난을 주는 사람에게 위협하면서 두고 보자 하신다든지 벌 받으라고 저주하신 분이 아님을 보았습니다. 공정하게 판단하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기고 평온을 유지하신 주님의 늠름하심을 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서는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억지로라도 십자가 지리라는 우리들의 소극적인 태도에 비해 내 주님께서는 자발적으로 나를 구원하시려고 자원하심으로 고난 겪으신 거룩한 사랑에 또다시 감사를 드립니다. 죽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 죄에서 구원하시려 하심이요 의인으로 가담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의 치료를 위해서는 주님 스스로 채찍에 맞으셔서 온몸을 찢기셨습니다. 그 은총으로 길 잃은 양처럼 방황하던 우리로 목자이신 주님의 품 안으로 들어와 주님의 보호를 받고 주가 우리의 감독이 되시어 책임져 주시는 주님으로 다가오심을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받았는데도 아직도 주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먼 거리에 서성이는 나의 초라한 모습에 죄송할 뿐입니다. 애매한 소리를 들었다 하면 성난 사자처럼 포악해지고 내 변명에 이성을 잃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발적으로 고통의 십자가를 지셨으나 나는 편한 것에 익숙해 져서 안일하게만 살고 싶어서 종의 신분을 잃은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대접받는 데 익숙해졌고 주님을 닮은 것 보다는 원수마귀의 박수를 받은 때가 더 많았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감독자가 되어 보호하신다는 말씀을 그렇게 많이 들었는데도 마치 부모 없는 고아처럼 근심의 늪에 빠져 원망하는 때도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주님을 신용하지 못한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의 시편 23편 말씀을 그렇게 많이 암송하면서도 조그마한 시험만 있어도 남에게 탓을 돌리는 변덕스러웠던 죄인을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이 시간부터 말씀 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소서. 주님 닮도록 주님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의 특권을 감사하면서도 사명에 있어서는 종이라는 신분을 결코 잊지 않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도 세상에 오셔서는 종으로 섬기려 오셨다 하셨는데, 높아지려고 하는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주님의 강한 손으로 겸손한 자리에 서게 하소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주님의 모습을 따르겠습니다. 가장 낮은 자가 되어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예수님의 그 겸비의 모습을 따르게 하옵소서. 저는 부족합니다. 의지와 믿음도 늘 흔들립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밟아가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
4. 말씀 암송: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19절)
5. 주제: 나는 종놈이다.
6. 생활에의 적용 한 가지: 화장실 실내화를 들어갈 때 신고가기 편리한 방향으로 놓겠다.
7. 평가: 최선을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