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거룩한 순례자의 길, 같이 걷겠습니다 - 23. 좁은 길의 순례자
BY 관리자2013.12.07 09: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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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1. 험한 길, 좁은 길의 여정(오스왈드 챔버스: 도움의 장소)

 

1) 우리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살수록 그렇다. 먼 훗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의 설명을 얻게 될 때에야 왜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목표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당하셨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가다.

 

2) 하나님께서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일이 없다. 환난 때에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셨다. 문제를 전혀 없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도가 되었다. ‘내가 택했노라’ 하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난과 앙심을 품은 원수들이었다.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고 개인적인 야망을 다 잃게 되었다. 확실한 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도록 붙드신 것이다. 바울의 연단은 사형선고를 받는 경지까지다(고후 1:9). 세상과 정욕과 마귀가 그를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화목제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과 하나가 되었다. 그는 죽은 자였고 하나님이 홀로 그를 통하여 일하셨다.

 

3) 하나님보다 사역의 넓은 길에서 성공에 집착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하늘에 너희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말씀하셨다. 오직 우리 믿음생활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시작이고 과정이고 끝이어야 한다. 신앙생활에서 무서운 속임은 많은 사람이 거룩해지기를 원하지만, 거룩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님 제가 성공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기도한다. 이러한 신앙 자체는 스스로 속는 것이다.

 

4) 요압장군은 압살롬의 큰 유혹을 물리치고 오히려 그를 무찔렀다. 그러나 겁쟁이 아도니아 편에 서서(왕상 1:7) 다윗을 버리는 큰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격렬한 영적전쟁을 치르며 큰 시험을 이겨내고 영적인 휴식을 취하고 있는 바로 이때를 조심하라. 방심이 반드시 찾아온다.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롬 10:12) 우리의 장점은 영적으로 깨어있는 가운데 보호를 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점은 언제나 두 배의 단점이 된다. 성경의 인물은 자신의 단점을 잘 알 때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때 넘어졌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할 때는 휴식하는 때다. 계속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마귀는 지칠 줄 모르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는데도 예수님께 저절로 계속 연결되어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5) 예수님은 온유하고 친절하셔서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하시려고 오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시러 오셨다(마 10:44).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돈 바꾸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며 분노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그분의 온유하심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성령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진리를 알게 하시면 우리의 마음에는 평화가 사라지고 대신 죄책감이라는 검이 우리를 찌르기 시작한다. 소요를 일으킨다. 그 이유는 예수님은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모든 평화를 향해 칼을 드시기 때문이다. 만일 죄책감으로 마음의 평화를 잃으면 평화를 찾는 길은 오직 거룩 외에는 없다. 바울은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더니”(롬 7:9)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마음의 평화는 산산조각이 난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요 15:22)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산상수훈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마 5:48) 명령을 내리신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우리 안에 주님의 성향을 넣어주기 위해 오셨다. 바로 성령이다.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생명으로 살 수 있게 된다. 죄에 대한 가책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정확하게 인식하게 되고 거듭나야 할 필요를 깨닫게 된다. 그 자리에 이르게 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는 복이 있나니!” 새 생명을 주심으로 인격적 관계를 맺고 그 평화가 교류된다.

 

6)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멸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다. 옛것과 결별했는가. 금전 관계에 있어서 이해타산이 생겼을 때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마음으로 처리하는가. 변화된 당신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는가. 그다음에 보자.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의 평안이 당신 안에 있어 성령으로 충만한가. 세월이 지나면서 당신은 더 고결해지고 있는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즐겁게 말할 수 있는가. 당신의 고집이 이제는 꺾였는가. 예수님의 거룩함을 이루어 가는가.

 

7) 세상적 관점에서는 사람은 위대한 존재로 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을 다 망쳐놓는 존재로 본다. 그래서 성경은 인류의 진화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은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혁명을 가르친다. 사람의 거듭남은 명령이 아니라 근본적 사실이다. 사람이 영적인 영역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그 사람 안에 부서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분과 하나 되도록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 그 관계를 단절시켰다. 이에 예수님이 오셨고, 그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다시 하나 될 수 있게 하셨다. 예수님은 역사 속에 진화되어 나오신 분이 아니라 역사의 외부 영역에서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다. 그분은 사람 중 최고의 사람이 아니다. 인간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과 나중이시다. 바울은 인류가 추구할 마지막 목표라고 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8)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

모든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과 싸워야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쓴다는 것은 싸움을 한다는 의미이고 무엇이든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전부 멸망할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 자기 유익을 구함, 자기도취 등은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없게 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갈등한다는 것은 자신을 영적으로 바로 세우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올바르게 되도록 돕기 전에 먼저 자신을 영적으로 바로 세워야 한다. 영적인 갈등을 통해 영적 승리를 얻었다면 당신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갈등마저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영적인 전염병을 퍼뜨리며 사람들에게 활력을 잃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장애를 줄 것이다.

 

9) 우리를 영적으로 진지하게 했던 때가 언제이었던가. 아무 염려도 없이 모든 것이 평탄한 가운데 날마다 태양 빛으로 가득 찬 푸른 초장의 때였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러한 때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과 인격을 가장 많이 성장시킨 때는 힘들어 지치고 날마다 구름이 끼던 시절이다. 그 기간은 앞길이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참고 기다리며 인내해야만 했던 때다. 그때 하나님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아오셔서 힘을 주시고 회복해주셨다.

 

1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기준에 하나님을 가둔 후에 하나님께 아무 선택의 자유를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실 것인가를 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갑자기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계산을 뒤엎으신다. 우리의 기대와 반대되게 하시는 경우가 많다. 인생을 살다 보면 얼마나 반대로 되는 일이 많은지 알 수 없다. 슬픔을 기대했으나 예상 밖으로 기쁨이 찾아온 때가 있었고 그 반대가 된 경우도 많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배운다. “나의 기대는 오직 주님뿐이다.” 하나님은 실망의 과정을 통해 우리를 훈련하신다. 삶은 마치 폭풍 같아서 실망이라는 난관에 부딪히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보화들을 어둠 속에 숨겨두신다. 그래서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별들이 어둠이 오면 밝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11)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호기심이나 조바심을 만족시켜주지 않으신다. 사람이 도덕적, 지적 또는 영적으로 비정상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두신 장애물을 그들 힘으로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장애물을 통과해 영적 진보를 이루기까지는 절대 그 장애물을 치우지 아니하신다. 하나님 아들들의 걸음은 느리지만 안정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걸음걸이를 싫어한다. 기다리지 못해 이 문 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 어떤 문도 장애물을 해결할 수 없다. 다윗의 뿌리만이 일곱 인을 뗄 수 있다.(계 5:5)

 

12)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에게 가차 없는 고난을 허락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의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보게 하셨다. 주님은 모든 제자를 이끄셔서 그들의 마음을 찢어지게 하신다. 인간의 관점으로 볼 때 모든 것이 완전한 실패임을 보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완전한 성공임을 보게 하신다. 곧 사람의 관점에서의 실패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최고의 완전한 성공임을 보게 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목적과 인간의 목적이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13)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고 그들은 순종했다. 그런데 배에 오르자마자 광풍이 일어나고 물이 가득 차 생명마저 위태하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외적으로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하지 않다. 우리의 부르심은 주님의 목표를 위해, 하나님의 동료로 부르심을 받았을 뿐이다.

 

14) 지금의 모든 문제가 풀릴 날이 오고 있다. 그때가 오기까지 사람들이 당신을 조롱하도록 내버려 두라. 그들로 잠깐 승리하도록 두어라.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지경을 넓혀 더 널리 더 높게 보라. 오직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붙들라. 바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이다. 주님을 바라보면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해지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부끄럽게 하는 죄를 짓게 된다. 믿음의 시련을 받으면 그 시련이 마칠 때까지 인내하라. 만일 믿음의 시련을 통과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생길에 미성숙한 영혼들을 당신 앞에 두실 것이다. 그들을 무시하지 말고 도우라. 그들이 영적 양분을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들을 붙들고 영양분을 공급하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능력이 나간 줄 아셨다.(눅 8:46)

 

15)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서의 필수 사항에서 면제해 주시는 적이 없다. 우리가 구속을 바탕으로 예수님과 연결되면 주님은 주께서 우리에게 행하심과 같이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행하기를 원하신다. 이 뜻이 바로 육체 가운데 고난을 당한다는 뜻인데 이는 자기실현의 목표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실현 위에 모든 것을 세우는 것이다. 일을 실천하는 즉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게 된다. 물론 그 누구도 본질상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기려 하지 않는다.

 

16) 우리는 오해를 받으면 견딜 수 없지만, 예수님은 오해받는 것에 익숙하시다. 우리의 약점은 언제나 자신을 변호하고 신원하려는데 있다. 예수님은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수고하지 않으셨다. 그 후에 그들이 모든 것을 이해할 것으로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생애를 통해 계속적으로 언급되는 말은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자”는 것이었다(눅 9:51, 마 20:17).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얼굴을 굳게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행하셨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결정적인 장소다. 그러나 제자들은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오해했고 결정적인 순간이 가까이 옴을 느꼈을 때 예수님을 멀리 느꼈고 두려워했다. 가깝게 잘 아는 사람을 잘 몰랐을 때 부끄러운 일이다. 예수님의 최측근들이 예수님을 모를 때 예수님의 섭섭함이 얼마나 컸을까. 성령으로 깨달음을 받기까지는 말이다.

 

2. 사탄교회가 시작되었다(바실레아 슐링크 :천국의 향취)

 

1) 미국 내 사탄교회 창시자인 검은 교황(Black Pope)이 말했듯이 사탄의 시대가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마치 댐이 터지는 것같이 마귀 숭배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다. 반항적인 생활과 육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무절제한 행동들이 오히려 이상적인 생활인 양 받아들였다. 도덕의 기준은 땅에 떨어졌고 폭력, 살인, 왜곡된 성행위를 거침없이 가르쳤고, 태아 생명을 경시하기 시작했다. 양심의 가책 따위는 욕구 억제로 돌려 비웃음을 당했다. 악행이 오히려 찬양받았고 선악에 대한 모든 기준이 뒤바뀌었다. 법과 정의는 달라진 사회의 도덕관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의 급격한 붕괴를 더 이상 저지할 수 없게 되었다.

 

2) 한 세대 전부가 범죄자 되는 세대가 오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죽음의 인장이 찍힌 채 인격의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다. 죄! 그 치명적인 병은 사람들과 나라들을 감염시켰다. 죄! 그것은 기쁨을 앗아가고 평안을 없앤다. 죄! 그것은 창의적인 젊은이들에게 무관심과 망상에 빠지게 하여 급기야는 범죄의 소굴에 빨려 들어가 파멸케 하는 계책 속에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다. 죄! 그 뒤에는 사탄이 있다. 사탄의 유일의 목적은 인간의 생명을 말살시키고 나라들과 세계를 황폐케 만드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아니한다. 죄가 이 땅에 지옥을 불러들이는 그다음은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는”(막 9:48) 어두움의 나라로 떨어지는 제2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옥과 그 무서움에 대해서 언급하고 죄에 대하여 얼버무리지 말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3) 젊은이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알코올과 마약의 희생자로 중독되어 죽어가고 있다. 정신 이상자가 되게 하고 정신적 질병을 일으켜 범죄자로 만들고, 그리하여 전쟁터에서보다 더 많은 수백만 명씩 죽게 한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된 일인가.”(렘 8:22) 선지자의 통곡이 애절하게 들려온다. 명의(名醫)도 대기하고 있는데, 만병치료약도 수북이 쌓여 있는데.

 

4) 지금 우리는 확실히 종말의 때에 살고 있다. 온 세상은 죄악의 바벨론이 되었고 수억의 사람들 안에는 반항의 영이 있어서 하나님께 대적하여 부르짖고 있다. 이제는 사랑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도 분노하실 수밖에 없다. 생명을 유지시키길 원하시지만, 멸망시킬 수밖에 없으며 자녀들에게 늘 선한 것을 보이길 기뻐하시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실 수 없다. 자녀들을 고난과 고뇌와 사망으로 내치실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셨던 것과는 달리 밭은 더 이상 수확할 곡식들을 내지 않을 것이다. 모든 풀은 완전히 오염될 것이므로 더 이상 짐승의 먹이가 되지 못하며 모두 파괴될 것이다.

 

5) 죄가 미화되는 가운데 악의 세력은 의의 댐을 무너뜨렸고 홍수가 세상을 뒤덮었다. 하나님께 대한 조롱과 신성모독, 예수님께 대한 조소가 온 나라를 휩쓸었다. 사탄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탄숭배자들, 사탄의 성경, 음침한 흑색 미사, 인간 희생물을 요구하는 사탄의 비밀 의식들이 생겨났다.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을 드러내는 악의 현상들이 산불처럼 번져 나갔음에도 사탄은 만족하지 않았다. 인류의 모든 계층 심지어 교회까지도 파고들려 하며 또 성공을 겨두었다. 기독교를 모독하는 사악한 작품들이 교회와 극장에서 흥행을 이루고 예수님을 광대나 얼간이로 묘사되는 것에 환호를 보내고 있다. 영화로우시고 존귀하신 분이 사람들 앞에서 경멸과 조롱의 대상이 되신 것이다. 옛날에는 예수님이 한 나라 유대 땅에서만 가시관 쓰시고 업신여기심을 당하셨는데 이제는 세상의 모든 나라들, 특히 기독교 국가들이 예수님을 조롱하는 불경스러운 일들에 앞장서서 참례하고 있다. 빌라도가 웅성거리는 군중 앞에 예수님을 누더기 입혀 세워놓고 비웃고 치욕을 주는 모습이 연상된다. 더욱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런 모욕을 참으시며 무서운 진노를 내리시는 그 날까지 기다리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진리는 승리하지 못했다. 오히려 적들이 이겼다. 예수님께서 뿌린 씨앗은 바리새인들 때문에 파손되었다. 그분의 제자들까지 버렸다. 당시 종교계에서는 그를 이단자요 사기꾼이요 범죄자로 여겼다. 귀신들린 자요, 백성을 혼미케 하는 자로 여겼다. 성경은 고요히 답을 준다. 예수님의 치욕의 길에 동참하고 동행을 원하신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그분을 위로하게 된다. 이 슬픔의 길을 걸을 때 열매를 맺을 것이다.

 

6) 파멸을 방지하는 둑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결과 모든 윤리 도덕이 무시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위기를 느끼는 모든 사람이 단합할 때가 되었다. 이 악의 물결을 저지해야 한다. 커다란 둑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사람들은 이 댐을 건설할 수 있다. 우리 국민을 덮치려고 달려드는 파멸의 세력이 더 강해지기 전에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 영원토록 변치 않는 선악의 잣대 곧 하나님의 계명을 담은 성경이 있다. 이것은 두터운 안개와 혼돈 속에도 밝게 빛나고 있다.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를 받는다면 거기에 빛과 갱생이 있을 것이다.

 

3. 경고를 들어라(토마스 왓슨: 묵상)

 

1) 미루는 행위 - 사람들은 부자 되기에 너무 이르다 말하지 않으며 재산 모으는 일을 노년에 하겠다고 미루지 않는다. 만사 제쳐 놓고 기회를 잡으려 달려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애통하라고 요구하실 때 귀머거리가 되면 당신이 긍휼을 원할 때 하나님은 벙어리가 되실 것이다. 당신이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았기에 당신을 심판하실 시간을 가지실 것이다. 죄에 대한 애통은 아무리 늦어도 늦다 할 수 없지만 뒤늦은 애통은 도저히 참될 수 없다. 노년은 회개하기에 좋은 나이가 아니다. 어린 묘목은 뽑아 버리기 쉽지만 뿌리박힌 늙은 나무는 뽑기 어렵다. 노년이 되고 연장이 망가진 후에 항해하는 사람은 자기의 기력과 골수를 마귀에게 주어버리고 늙은 뼈다귀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치사한 행위가 된다. 건강한 시기에 하나님을 저버리는 사람은 병든 시기에 하나님이 저버리실 것이다.

 

2) 거짓 평안 - 마귀는 사람들을 평안의 요람 위에 태워놓고 흔들어 준다. 사람들이 지옥의 낭떠러지에 처해있을 때에도 마귀는 평화, 평화라고 외친다. 죄인이 누리는 허울 좋은 평화는 무지에서 온다. 참다운 평화는 괴로움 뒤에 온다. 하나님은 죄를 깨우치게 하시어 영혼을 낮추시고 그 후에 평화를 말씀하신다. 이 평안이 폭풍 전인가 후인가? 제일 먼저 지진이 있었고 그다음에 불이 있었으며 그다음에 조용하고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왕상 19:12). 하나님은 상한 마음에 최상품 평화를 기름 부어 주신다.

 

3) 거짓 회개 - 어떤 이들은 눈물 몇 방울 흘리고는 회개한 줄 여기는데 사울이 다윗을 학대하고서 그랬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고..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이렇게 하고서 다시 뒤쫓는다. 그는 애통하는 일에도 위선을 부렸다. 죄를 버린다지만 꺼풀을 벗어도 독 이빨은 그대로 남는 뱀처럼 여전히 그들 마음속에 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 5:4)의 말씀대로 우리는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서 낙원에 간다. 죽은 아이를 두고 슬피 울 줄 알면서도 지옥문턱에 와 있는 급한 상황인데도 애통하지 않는다. 가룟 유다의 슬픔도 그 누구보다도 몸부림친 통곡이었는데도 생명 얻는 회개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인간의 슬픔이었다.

억지 애통도 있다. 가인의 애통이다.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 범죄행위에 대한 회개의 애통이 아니라 벌이 무서워 우는 행위다.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에(눅 15:21) 우는 참회가 아니라 도둑이 벌 받을 것이 무서워 우는 행위다. 하나님의 자녀는 죄를 조목조목 자백한다. 부실한 그리스도인은 도매금으로 자백하며 자기는 대체적으로 죄인이라고 자백한다. 다윗은 쓰리고 아픈 부분을 가려내어(시 51:4) “내가 ‘이런 악’을 범하였나이다”라고 말한다. 무덤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지금이 바로 적기다.

 

4) 하나님이 그대에게 두 눈을 주셨으니 만일 한쪽 눈을 잃는다 해도 그대에게 다른 눈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대의 영혼은 단 하나뿐이므로 만일 영혼이 강탈당하면 그대는 영원히 파멸이다. 죄인들이여 긍휼의 가동교(可動橋. 밑으로 배가 지나가도록 들어 올리는 다리)가 아주 멈추어 버릴 시각이 금방 닥친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도다.”(전 8:11) 하나님께서 형 집행을 보류하시니, 따라서 사람들도 회개를 덩달아 보류한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실 뿐 아니라 은혜를 베푸시려고 기다리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죄에 한계를 두지 않으려 해도 하나님은 그의 인내심에 한계를 두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라”(창 6:2) 하셨다.

벨릭스는 심판에 대한 바울의 설교를 듣기만 하여도 떨었거든(행 24:25) 하물며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러 오시는 광경을 죄인들이 보고서 얼마나 떨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잠깐 성공하도록 놔두실지라도 그의 진노의 대접은 줄곧 채워지고 있다. 그동안 하나님은 칼을 갈고 계신다. 하나님은 그의 원수들과 결산하실 시간을 기다리고 계신다.

 

5) 감동 없는 지식 - 위선자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아는 지식은 달빛과 같다. 빛은 있지만 열은 없다. 그들에게 구원의 효력을 발생하지 못하며 거룩하게도 못한다. 그들의 지식은 죽은 지식, 열매 없는 지식이다. 사랑으로 뜨겁지 못하다. 그 지식은 정보를 제공할지언정 변화시키지 못한다. “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니라.”(사 47:10) 압살롬은 그의 머리카락이 자랑스러웠을지 몰라도 그것이 그의 머리를 매달아 죽였다. 자랑하는 그 지식이 그들을 파멸시키고 있다. 고대 세대의 많은 사람이 방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방주 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물에 빠져 죽었다. 적용되지 못하는 지식은 지옥에 가는 불을 밝혀 줄 뿐이다.

 

6) 가식적인 거룩함 - 진실성 없는 과시적인 거룩함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경건한 방법으로 지옥에 가는 것뿐이다. 올곧은 사람은 핑계가 없고 그의 말과 마음이 일치하며 그는 철두철미 고결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성을 갈망하며 신망을 얻고 싶어 하며 그 결과 사람들이 자기를 성자로 알아주기를 바람으로 외모를 단장하려 든다. 그러나 어쩌랴. 다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는데 내 양심이 나를 정죄한다면, 그리고 지옥에 간다면, 다른 사람이 천국에 간 줄로 생각해준들 무슨 유익이 되랴. 거짓경건은 이중의 죄악이다. 위선자는 생전에 다른 사람을 속이고, 죽을 때 자신을 속인다. 악인들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허식을 부리기 때문이요 하나님이 그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가 허식만 부리기 때문이다. 경건의 허식밖에 더 이상 부릴 것이 없는 자이다.

 

7) 속 빈 신앙고백 - 하나님의 계시와 진리를 받았다면서 하나님의 성령이 없다면 그런 사람에게 유리한 점이 무엇일까. 속 빈 신앙고백이 구원하리라고 생각지 말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정복(正服)을 입은 채 지옥에 갈 것이다(마 7:22).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왕하 10:16)고 예후는 말한다. 아니다. 예후여! 그대의 열심 목적은 왕국을 차지하는 데 있었다. 그것은 열심이 아니라 국가 정략이다. 예후는 왕관을 손아귀에 넣을 때까지 종교를 발판으로 삼았다. 미량의 녹슨 금이 다량의 반짝이는 놋쇠보다 훨씬 낫다. 소량의 참된 은혜가 설혹 많은 약점 때문에 무디어졌더라도 위선자들의 그 모든 번쩍거리는 겉치레보다 훨씬 낫다. 위선자들은 폭풍우 속에서는 항해하려 하지 않는다. 참다운 은혜는 혹한의 계절을 버텨낸다. 별처럼 가장 깜깜한 밤에 밝게 빛나는, 그런 믿음이야말로 귀중한 믿음이다.

 

8) 피할 길 없는 심판 - 일단 심판이 선고되면 그대는 어디로 갈 터인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겠는가? 세상은 온통 불바다가 되리라. 하나님의 긍휼을 악용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긍휼이 풍성하시기 때문에 죄짓는다는 것이 마귀의 논리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죄짓는 자는 무자비하게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은 긍휼의 보고(寶庫)를 가지셨다. 기도는 이 보고를 여는 열쇠이다. 지금 바로 이때다. 유효기간이 만료되기 전이어야 한다.

 

9) 예수님은 치료하시는 의사이시다 - 하늘나라에서 이 땅에 왕진하러 오신 예수님은 자기 환자들에게는 그냥 사랑을 베푸시는 명의로 영업 중이시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시어 문을 두드리신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사 65:1). 치료비도 받지 아니하신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면서 많은 의사에게 오히려 재산을 다 탕진했지만(눅 8:43 표준)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신 그분의 풍성은 오직 믿음으로 받으라 하신다. 말씀 한마디로 마귀를 거뜬히 쫓아내신 그분의 권능으로, 지체 말고 치료받아 천국으로 들어오라 하신다. 또한, 깊은 연민을 품고 치료하신다. 그의 수난은 끝내셨지만 죄인에 대한 연민은 끝나지 않으셨다. 환자의 상처를 싸매시며(시 147:3) 신음소리가 그의 마음에 가닿는다. 예수님은 병든 자도 치료하시지만 죽은 자도 살리신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이제까지 의사를 무시했던 당신, 인생의 태양이 막 저물어가는 마당에 병든 당신의 영혼을 고침 받아라. 죽을병이 들었는데도 의사에게 오지 않는 것은 길이길이 죽겠다는 자살행위다. “일어나라 주가 너를 부르신다.”(막 10:49) 서둘러 치료받아라. 죽음은 신속한 행진을 계속하는 중이고 죽음은 불시에 엄습한다. 그리고 눈에 눈물을 머금고 형을 언도하는 재판장의 모습을 보리라. “오오! 모든 것을 안다면서 그리스도만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여! 그대의 지식은 그대의 지옥 길을 비추는 데나 도움이 되겠구나.”(오스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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