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휘 목사
호세아 같은 이세종의 거룩한 삶(엄두섭: 호세아를 닮은 성자)
1) 등광리의 천사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던 이세종은 성실히 일하고 절약하여 100마지기의 전답을 가진 부자가 되었다. 40세에 예수님을 믿고 난 후로는 성경 그대로 믿고 그대로 살았다. 흉년이 들었을 때 가난한 사람들의 논을 값싸게 오십 마지기나 산 것을 회개하면서 그때 그들이 얼마나 원통했을까 하는 마음으로 땀 흘려 번 전답만 남겨두고 다 나눠 주었다. “예수를 믿으려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고 밥도 아니게 믿어서는 안 된다. 성경에 가르친 대로 실행해야 한다.” 하면서 장롱 속에 있는 집문서를 꺼내어 들고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모조리 탕감해 드리는 것이니 도로 받으시오 했다.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집문서를 불 지르고 물건이든 돈이든 무엇이든지 다 탕감해주었다. 예수님 믿고 난 후에 그에게 빚진 사람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전라남도 화순군 등광리 깊은 산골에서 태어났다.(1877.7.1~1942.6.4) 중생 이전과 이후가 또렷이 구분됐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고 면사무소에 논 두 마지기도 헌납했다. 가난한 자들과 친척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주기도 했다. 외출할 때는 구제할 돈을 따로 준비해 가지고 갔다. 길을 가다가도 헐벗은 사람을 보면 옷을 벗어 바꿔 입었다. 특히 노인과 어린아이들이 많은 집들에 구제했다. 거지나 나그네가 찾아오면 한 상에 차려 대접했다. 자기 먹는 그대로 콩잎이나 시래깃국을 주면 내가 이런 것이나 먹으러 왔나 하면서 거지가 오히려 그냥 가는 경우도 있었다. 광주에서 사경회가 있을 때이다. 며칠간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여 가는 길이었다. 광주 강가 다리 밑에 수많은 거지들이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천막으로 돌아다니면서 준비해 사가지고 온 음식을 다 나누어 주었다. 사경회 기간 꼬박 굶고 올 때는 자기 집까지 80리 길을 걸어왔다. 그는 자기 재산을 남겨 줄 혈육이 없기 때문에 남은 재산은 노회 재단에 바치기로 결단하고 실천했다. 세상 떠난 후에 그의 재산으로 남은 것은 바가지 세 개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선행을 기념하기 위해 마을 길에 송덕비를 세웠다. 그는 큰일이 난 듯 면사무실에 찾아가 송덕비는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세우는 것이니 무슨 비를 세우느냐고 비를 없애 달라고 강청하여 땅에 묻어버렸다. 예수 믿은 후 10년간 기도하다가 얻은 것은 다 주는 생활의 결실이었다.
2) 모든 일에 열중한 사람
어릴 때 이름은 영찬이었다. 가난하여 머슴살이하면서도 부지런하고 정직해서 혼자 한글을 배웠고 남이 쉬고 낮잠 잘 때도 짚신을 삼으며 일했다. 머슴 생활에서 받은 곡식을 형의 집에 식량으로도 보냈다. 부모는 일찍 세상 떠났기에 형에게 효도했다. 일자무식한 가난한 청년이지만 기골이 장대하고 똑똑했다. 동네의 모범 청년이고 돈을 모으는데도 지혜로웠다. 30세에 문순희라는 14세 처녀와 결혼하였고 동네에서 제일 가는 부자가 되어 좋은 옷에다 유족하게 살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은 후로는 전혀 새롭게 살았다. 전도에도 열정이었다. 자기가 살던 등광리뿐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집집이 돌아다니며 전도했다. 하루도 쉬지 아니했다.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권했다. 때로는 식사를 잊고 다녔다. 한번 전도하러 갔던 집에 가고 또 가고 하여 한 집을 다니는데 짚신 세 켤레가 닳아 떨어질 만큼 계속 찾아갔다. 영혼 구원에 열정을 다한 것이다.
병이 나도 약을 쓰지 않았다. 어느 해 그는 중병을 얻었다. 열이 많았고 음식을 먹지 못했다. 거의 두 달간을 죽는 줄 알았다. 노나복 선교사가 자동차를 가지고 와서 광주병원으로 데려가려 했지만, 예수보다 더 좋은 의사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사양했다. 산당 빈집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한 곳을 주시했다. 아주 놀란 표정이었다. 그 순간 신비스러운 빛 속에서 예수님의 얼굴 반면(反面)을 보았다. 예수님의 형상을 보자 초자연적인 힘이 쏟아져 나옴을 경험했다. 열병은 흔적도 없이 완쾌되었다. 두 달이나 굶은 사람이 동네에 뛰어 내려갔다. “믿음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자기 정신 속에 병이 없으면 누구나 죽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병은 꼭 약만 써야 낫는 것이 아니요. 참고 기다리면 낫는 것인데 그동안을 못 참아서 야단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먹는 것, 입는 것, 병 문제, 여름의 더위, 겨울의 추위 등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이 되었다. 미래를 예언하는 은혜를 받아서 그의 제자들은 스승을 도통한 예언자처럼 존경했다. 불신자까지도 이공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했다. 말세에는 칼 같은 성령과(참과 분간) 불같은 성령을(불순한 것 태우고 사랑의 은혜를 받는 것) 구하라 했다. 성경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읽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으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 나무뿌리도 생명의 물줄기 찾아서 깊이 파고들어야 사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깊이 파라고 강조했다.
3) 탁발생활
그는 영찬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천국에 기록되어 있으니 세상 족보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 하여 스스로 자기의 호를 이공(李空)이라 하였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는 공처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공 혹은 이처사라 불렀다. 호적상의 이세종으로 부르기를 좋아하지 아니했다.
여 제자 오복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니 얻어먹어라 했다. “빌어먹어라. 거지가 되어라.” 했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에게 당황스러운 부담이다. 망설이다가 어느 날 맨발로 거지처럼 얻어먹으러 나갔다. 냉정히 거절하는 집을 거듭 세 번씩이나 드나들면서 인내심을 길렀다. 이공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에게 몽땅 빠지려 했다.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없었다. 기도 중에 “도인(道人)은 화려하면 안 된다”란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 자기는 콩잎도 아껴 먹으면서도 선물 받은 것이 좋은 것이면 아껴두었다가 남에게 나눠주었다. 어느 날 누가 명주옷을 지어 드리며 제발 입으라고 권했다. 그러나 이 옷을 입으면 마음이 불안해서 도저히 못 입는다 하면서 자기가 입던 옷을 흔들며 내게는 이 옷이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
4) 자비로운 사람
석양에 천태산 기슭을 걸으면서 울었다. “하나님!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다. 프랜시스 성인이 길 가면서 울었던 것처럼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연거푸 하나님께 호소했다. 남의 영혼을 생각할 때마다 괴롭다고 말했다. 그는 늘 수심에 있었으며 관속에 눕는 일이 있어도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라 말했다. 죄인들을 볼 때는 인간이 이렇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심판이 있지 않은가? 하면서 측은해서 못 견디었다. 잘못한 사람을 보면 꾸지람했다가 돌아서서는 눈물지었다. 타락한 사람을 보면 “하나님! 이 사람을 잊지 말아 주시옵소서.” 그를 위해 밤새도록 기도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사람을 보면 답답해하며 “그것을 가져가면 유익하지 못할 터인데 왜 헛수고하는고?” 안타까워했다. 한 영혼을 깨우치고 건지기 위해 성경을 들고 말씀을 전하는 데는 밤이고 새벽이고 구별을 몰랐다. 말씀을 전하는데 식사가 들어와도 식사는 나중에 하고 공사부터 먼저 하자면서 그냥 계속했다. 길을 걸어가면서도 계속 말씀을 꾸준히 생각하였고 너무 피곤해서 자리에 누워서도 마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았다. “위에서 힘을 주시지 않는다면 나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했다. 크고 작은 무슨 일을 당해도 그는 기도했다. 식사 때 앉아서 물끄러미 위만 쳐다보고 있는 때가 종종 있었다. 먹는 것이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거지가 찾아오면 자기가 먹는 대로 손수 밥그릇을 들고 나가 그에게 주면서 다 먹기까지 지켜보며 “빨리 먹고 한 집이라도 더 가서 구걸해야지” 했다. 그는 산상보훈을 그대로 실천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빼앗기는 것이 곧 얻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온전히 변하니까 사람들은 존경하기보다는 멸시하였다. 아이들도 놀려댔다.
5) 낮아지기만을 원한 사람
그는 이 세상의 명예와 칭찬 따위는 털끝만치도 바라지 않았다. 칭찬받는 일에 대해서도 “쓸데없이 칭찬하는 자도 마귀요, 칭찬받는 자도 마귀다.” 말했다.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하나님께 절대복종하는 것만이 생활의 전부였다. 거지 행세로 어느 마을을 통과할 때다. 심술궂은 한 사람이 나무에다 그를 꽁꽁 묶어 놓았다. 꼼짝 말고 여기 있으라 하고 자기 갈 길을 갔다. 일을 다 보고 온 후에 그곳에 지나다가 그대로 묶여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왜 여태까지 있었느냐 물었다. “매는 것도 법이니 푸는 법도 또 있어야 가지요.” 한다. 아이들이 놀려 대면서 내 아들, 비렁뱅이, 나병환자라고 하면 이리저리 피하여 갔다. 사자의 입도 막으시는 하나님이 어린아이의 입 하나 못 막아서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듣게 하실까. 나병환자라 하는 것은 내 속에 나병 같은 무서운 죄가 있기에, 비렁뱅이라는 것은 날마다 하나님께 얻어먹으니까, 내 아들이라는 것은 사람의 배 안에 할아버지도 있으니(祖父)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했다.
6) 만물 모두를 사랑했다
그는 우거진 숲과 아름다운 산천을 바라볼 때 한없이 기뻤다. 프랜시스 성인처럼 해와 달과 벌레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뻐했다. 생명 가진 것들을 경외했고 넘치는 자비심으로 대했다. 풀잎을 잡고 춤추듯이 흔들면서 대화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 감사하라 대화했다. 칡넝쿨이 가는 길을 막아도 밟지 않고 일일이 치우며 다녔다. 자기 발밑에 개미 한 마리만 밟혀도 걸음을 멈추고 울었다.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아니했다.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뽑지 않았고 겨울에 땔 나무도 여름에 베지 못하고 겨울에 다 마른 것을 베었다. 금수 곤충에게도 자비심을 베풀었다. 생선도 먹지 않았고 고기도 물론 먹지 않았다. 파리를 잡지 않고 내쫓았고 파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미리 예방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다.
7) 호세아의 가정 슬픔
그의 부인은 성격이 남편과 대조적이어서 생각이 좁고 답답한 여자였다. 게다가 남편이 신앙을 가진 후로 해혼(解婚)상태로 살았다. 강퍅한 성격에다 신앙심은 전혀 없으니 편할 수 없었다. 마귀는 기회를 포착했다. 동네 청년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갔다. 이공은 짐꾼을 얻어 부인이 쓰던 물건을 아내가 사는 집에 갖다 주었다. 마음 편치 않은 그는 가끔 그 집에 찾아가서 다시 돌아오라고 권면했다. 그 집에 전처의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갈 때는 과자를 사 들고 갔다. 새 남편 된 그 남자를 만나 “이렇게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내 죄 때문이니 제발 이 여자를 돌려보내 주시오.” 사정했다. 얼마 후 부인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돌아왔다. 이공은 반가이 맞아들였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아이가 여럿이나 있는 홀아비에게 갔다. 가져가고 싶은 것은 다 가져가라 하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다 가져갔다. 이공은 초목을 사랑하고 벌레도 사랑하고 독사까지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창녀같이 다른 남자를 따라가는 음탕한 아내까지 마음으로 사랑했다. 호세아가 고멜을 찾아가 타이르듯이 이세종도 능주로 시집간 아내의 집을 또 찾아다녔다. 갈 때는 점심 도시락을 옆구리에 끼고 갔다.
인사도 않는 아내지만 “하나님 앞에 죄짓는 일은 두려운 일이니 마음을 돌이키라” 끈기 있게 계속했다. 부인이 구정물을 끼얹고 욕설을 퍼부어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오.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나를 찾아오시오.” 간곡히 권면했다. 아내의 영혼을 걱정한 나머지 주위의 사람들로 찾아가 보도록 권했다. 몇 년 후 드디어 아내는 돌아왔다. 동네 사람들이 그런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소란을 피웠으나 사람들을 설득시켜 돌려보냈다. 이세종은 부인을 더욱 사랑했다. 한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음으로 벗을 삼으라 했다. 그 후 부인은 큰 변화를 받고 남편처럼 경건하게 살았다. 죽을 때까지 거지처럼 살면서 남편 사후에도 거룩한 여성으로 고독한 길을 유유히 따랐다. 40대에 예수님을 만난 후 20년간 빈틈없이 믿었던 이공은 63세 되던 1942년에 화학산 중턱 아주 외딴 기도처에서 거지 옷 그대로 부인을 비롯한 다섯 제자의 임종을 받으며 예수님 품에 안겼다. 관도 없이 엮은 막대기 위에 놓인 채 지금도 그 무덤은 험산 수풀 속에 파묻혀 있다. 운명하신 기도처에서 100m 정도 밑이다.
이현필 성자의 주님 따르는 길(엄두섭: 맨발의 성자)
1) 이공의 제자 이현필
이현필은 이공(이세종) 선생이 살았던 동네에서 가까운 화순군 도암면 권동(용하리)에서 태어났다. 일본 목사에게서 전도 받아 예수님을 알았으나 이웃 마을 이공 선생의 수제자가 되어 깊은 영성을 닮아 성자의 경지에 이르렀다. 엘리야의 영성이 엘리사에게 임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이공 선생이 오직 성경만을 보라 했으나 초등학교 4년의 학벌임에도 그는 논어를 비롯한 많은 독서를 하였고 대학교수나 유명한 철학자도 그의 실력을 당하지 못 했다. 이공의 표현대로 천재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을 저주로 여겼고 자기를 존경하고 칭찬해주는 일을 마음속으로 싫어했다. 기차를 타더라도 제일 늦게 올라탐으로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계단에 앉아서 갔다. 허술한 그 모습을 보고 불량배들이 말을 걸었다. 이름이나 알고 지내자 한다. 성(性)이 무어냐 묻는다. 헌가라고 말한다. 이름은? 신짝이라고 말했다. 그럼 헌신짝? 허허 웃었다. 세상에선 버림받은 존재란 생각에서 자신을 헌신짝으로 불렀다.
2) 결혼생활의 파기
스승의 뜻을 저버리고 23세에 결혼한 그는 금실이 좋아 제법 문화적인 가정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스승의 뜻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깊은 고민에 빠진 그는 동거 2년도 못 되는 사이 부인에게 남매로 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아내를 매씨(妹氏)라 불렀다. 아내는 눈물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남편을 놓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저녁에 아내가 침실에 들어오면 그는 뒷문으로 도망쳐 버렸다. 어느 때 울화가 터진 아내는 칼을 들고 “너 죽고 나 죽자” 쫓아다니기도 하였다. 생활까지도 까다로웠다. 스승을 본받아 개미 한 마리도 밟으면 안 된다 하여 피해 다녔고 겨울에도 여름에도 맨발로 다녔다. 육식과 해물도 금했고 아내가 닭에 마늘을 넣어 주어도 먹지 않았다. 아내로 하여금 독신으로 사는 순결 생활과 독립생활의 기틀을 잡아주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생이별의 괴로움은 더했다. 5, 6년이 지내자 불쌍한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기에 지쳐 남편의 이상을 따라 살 수 없음을 깨닫고 집을 떠나 한동안 여 순경을 하다가 다른데 개가하였다. 그러나 이 선생을 늘 존경하며 살았다. 이 선생도 집을 나간 아내의 영혼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였다. 말년에 부인은 이선생의 무덤 옆에서 살다 죽기를 바랐다. 그 후 선생의 가는 길에 동조하면서 경건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3) 수도생활의 시작
이현필 선생은 30세를 전후해서 산에 은거하면서 금식 명상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던 중 남원에서 몇십 리 들어간 서리내 골이라는 산중에서 십여 명의 소년소녀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일종의 수도생활이었다. 이곳이 바로 이현필 선생 운동의 발상지이고 산실이었다. 이 선생을 따른다 하여 집에서나 교회에서 쫓겨나온 자들이다. 훈련 기간은 15일간, 좀 쉬었다가 다시 보름을 한다. 움막집에서 우거하면서 영성을 길렀다. 음식은 생식을 했으나 어느 때는 며칠씩 굶기도 하였다. 풀뿌리와 쑥이 주식이었다. 신발은 짚신(짚 세기)을 만들어 신게 했고 훈련과 노동은 엄격했고 성냥도 없이 살았다. 화로의 불씨가 꺼져서 밤중에 20리가 넘는 마을에 가서 불씨를 얻어 가슴에 품고 온 일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남자들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기도 했으나 처녀들은 거의 동정을 지키며 수도자로 평생을 살아갔다.
4)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그는 주님 가신 길을 따르려는 것과 자기완성에 정성을 다했다. 제자들은 스승을 완전히 자기를 부정해버린 사람이라 생각했다. 옳다 하는 일에는 곧 실천해버리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불타는 사람이다. 말이 적었으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성경을 가르칠 때는 앉은 채로 낮은 목소리로 말하지만 한 마디 한 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신비스러운 힘이 있었다. 그 감화력 때문에 그를 대한 사람들은 주저 없이 남편도, 아내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그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말씀은 성경 중심의 설교요 영혼의 힘을 끄는 말씀이었다. 선생의 눈에는 광채가 났고 온종일 사담하는 일이 없었다. 성경을 강의할 때는 남의 속을 빤히 꿰뚫어 들여다보는 듯 날카로운 말씀을 전했다. 새벽에 시작하여 온종일 계속하지만 지루하지 않았다. 전도할 때는 끝까지 철저하게 했다. 산을 넘고 넘어 수십 리를 걸어 찾아다녔다. 또 심방하기 위해 산골짝을 헤매었다. 산중 길을 걸을 때는 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다녔고 거리에서는 신을 신었다.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다. 서리내에서 그들이 먹은 주식은 쑥과 풀뿌리였다. 지금도 동광원에서는 보리나 고구마가 주식이다. 쌀밥은 구경 못 한다. 식사도 죄인이라 하여 상에서 먹지 않고 땅바닥에 놓고 먹었다. 이 선생은 일생 일식 주의였다. 저녁 한때만 식사했다. 생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몸은 살이 전혀 붙지 않은 영양결핍이었다. 그럼에도 한 숟갈 덜먹기 운동, 밥 한 끼에 1원씩 모아서 불쌍한 사람을 돕자는 운동을 펼쳤다. 세상을 떠날 때는 장례비로는 1원도 들이지 말고 속내복 한 벌만 입혀서 묻어 달라 유언했다. 생전 자기 손으로 돈을 만지지 않았다. 기성교회에서는 금욕주의자, 산중파라고 부르면서 이단이라고 악평했으나 한 번이라도 이현필 선생을 찾아와 들은 이들은 “이것이다! 이 길이다!” 소리쳤다.
한 번은 나병 환자 넷이서 이불 하나를 놓고 서로 가지려고 싸우는 것을 보고 자기 집에 와서 결혼 때 마련한 이불을 그들에게 갖다 주었다. 어디서든지 나병 환자만 보면 악수하고 자기 집에 데려다 대접했다. 순교자와 같은 처절하고 엄숙한 모습을 바라볼 때는 사람 같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뒷산에 올라가 온밤을 새우고 새벽에야 하산해서 초막에 돌아왔다. 잔등에는 서리가 하얗게 엉켜 덮이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매양 산에 머물기를 좋아하였다. 험한 산중 여러 곳에 기도의 흔적을 많이 남겼다.
5) 동광원 운동
남원은 이현필 선생의 운동의 발생지라 볼 수 있다. 이 선생의 영향을 받은 남원 삼일 목공소 오북환 집사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고 성경공부를 했다. 동광원에 수도모임이 시작되면서 남원 일대는 광풍이 일어난 셈이다. 30대의 청년 이현필이 지나가는 곳이나 교회마다 사람들은 몰려가는 것이다. 교회의 골수분자 5%가 이 선생을 따랐다. 사유재산제도와 가족제도를 파괴한다고 해서 공산주의로 몰아가기도 했다.
동광원은 정인세 선생과 더불어 광주에도 세워졌고 귀일원이라고 부른다. 전국에 이들은 고아원 사업과 수도원으로 그 사업을 지탱해가고 있다. 한때 광주에서는 600명을 수용하는 고아 및 걸인 수용소로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전라남북도의 여러 곳과 경기도 능곡과 벽제 계명산, 갈월에도 분원이 있다. 혹은 십여 명, 혹은 수명씩 모여 노동 수도를 주력하며 농사에 힘쓰고 있다. 동광원 사상에 영향받은 밀알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희생을 치르고 있다.
6) 걸식탁발(乞食托鉢) 전도
무일푼으로 얻어먹으면서 전도하는 탁발 걸식을 추운 겨울에 나섰다. 쓰레기 줍고 남의 집 문전걸식하는 것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겸손을 배운다. 의식주에 대한 문제도 해결된다. 또 자기를 죽이는 훈련이 된다. 모든 걱정이 해결된다. 숙소에서 떠나 20여 명이 모여 어느 나무 밑에서 갈 동네를 정하고 둘씩 흩어진다. 그리고 문전에서 얻은 밥을 안고 다시 처음 모였던 곳에 모인다. 20여 명이 먹기에 충분한 밥이 된다. 죽을 끓여 먹는다. 순수하게 주는 집이 있는가 하면 성한 색시가 얻어먹으러 다닌다면서 거절하는 사람도, 몽둥이를 들고 쫓는 자도 있었다. 이현필 선생도 실천하면서 제자들에게 그 연습을 시켰다. 그는 성 프란시스코 탁발 교단과 같이 그렇게 만들고 싶은 생각이었다.
7) 세계를 품은 가슴
여순반란 사건이 터지자 환난이 오면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하룻밤씩 재워 보내는 운동”을 일으켰다. 죽기 전에는 ‘일작 운동’을 일으켰다. 매일 밥 지을 때 자기 먹을 몫에서 한 숟가락씩 떠서 삼십 명이 밥 한 상 만들고 온 겨레를 먹여 살리자는 운동이다. 나라를 살리고 세계를 살리자고 호소했다.
한때 광주 YMCA 총무로 있었다가 이 선생의 사상을 펼친 정인세 선생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만난 인물 중에 이현필 선생같이 크고 깊은 인물은 없었다. 그의 속 깊이를 측량 못 하겠다. 한국에 많은 인물이 있지만 모두 한계점에 이르렀고 이 선생에 비길 수 없다.”
8) 생명을 소진하기까지
평생 자기 몸을 조금도 돌보지 않은 몸이라 언제나 병약한 몸으로 살았다. 앓고 있는 폐결핵에 대해 “오! 축복하신 폐결핵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가지 마옵소서.” 하였다.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그 제자들도 더 아프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주님의 고난을 더 체험하고 싶어서이고 고통받는 자들과 같이 고난에 동참하고 싶었다. 각혈할 때도 많았다. 생애 마지막 총회 집회를 인도할 때다. 거처하는 곳에서 집회 장소까지도 부축해야만 했다. 극도로 쇠약한 몸인데도 설교할 때는 전혀 딴 사람이다. 힘차게 말씀하시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생전 어디서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씀으로 은혜가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건강은 점점 나빠져서 후두결핵병으로 말을 못하고 글자로 소통할 때에도, 각혈이 심할 때도 언제나 감사했다. 앉아 고통당하는 선생에게 누워있으라 하면 “아니오, 지금은 신랑을 맞이할 때입니다. 이 기쁜 시간에 내가 어찌 누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앉은 자세로 주님을 만나려는 태세였다.
9) 파계
병으로 심한 고통 중에 있는 선생이 뜻밖에 고기를 사 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시장에서 굴비 한 마리를 사오자 먹을 수 있게 끓이라 하신다. 국물을 내 입에 넣어 주시오 하여 입술을 적셨다. 평생 멸치 꼬리 하나 입에 넣지 않은 그가 모두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한 것이다.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채식주의자이고 금욕주의자인 그가 파계하는 대단한 사건이다. 자랑스럽게 쌓아 올린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율법주의자로, 절대선행으로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받음을 알리고 싶어서였다. 평생 아파도 약을 쓰지 않던 선생은 또 병원에 입원까지 하시는 것이다. 폐결핵으로 심한 고통을 앓는 아들 같은 병약한 제자 김준호를 챙겨 같이 입원하였다. 그 이후 다시 선생은 고기도, 약도 쓰지 않았다. 성자로 추앙하는 많은 사람에게 추한 성자로 추락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높이기 위한 추락이었다. “제가 오늘 이대로 죽으면 저는 천국에서 예수님께는 역적 같은 놈이 되리라는 느낌입니다. 그동안 제가 절대선행을 강조했으므로 저를 따르는 이들을 온통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10) 임종
광주 동광원에서 한 달간의 수양회를 마치고 경기도 백제 동광원 분원으로 가셨다. 좀 떨어진 산장에 모셨다. 제자들이 다 모인 가운데 수녀들이 수의로 깨끗이 빨아둔 누더기 바지저고리를 입혀 드렸다. 금방 숨이 넘어갈 듯 시각을 다투는 데도 입었던 옷을 다시 벗었다. 이 옷을 헐벗은 사람에게 주라 하신다. 입은 헌 옷 그대로 입고 가도록 명하셨다. 마침 수녀원에 누구를 위해 준비된 관이 있어서 그곳에 모시려 했는데 자기는 죄인이니까 거적때기에 싸서 파묻으라 하신다. 무덤은 평토장하여 아무도 모르게 하고 아무나 밟고 다니도록 하라 하신다. 땅 없는 사람들이 많은데 송장에게 땅을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몸은 불덩이같이 뜨거워지고 금방 숨이 막힐 것 같은 처지인데 선생은 갑자기 기쁨이 충만해지면서 외치신다.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 참겠네, 아이고 기뻐!” 숨이 가라앉았다가 다시 이 말을 반복하신다. 주위를 둘러보시더니 “제가 먼저 갑니다. 다음에 오시오!” 하고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무릎을 꿇고 앉으신 채로 얼굴을 하늘을 향해 쳐다보면서 임종하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 성화의 모습과 흡사했다. 1964년 3월 17일 새벽 3시였다. 전날 임종을 예고한 바로 그 시각이다. 이리하여 한국의 프랜시스는 53세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