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리 칼럼
이경환 선교사(동북아권역장)
무엇이든 ‘때’a time가 있다. ‘때’는 정말 우리에게 중요하다. 그럼에도 정작 ‘때’를 알기가 어려워서, ‘제때를 따라 살기’란 말처럼 그리 쉽지만은 않다. 필자는 이 문제가 인생사 어려운 문제 중 하나라고 여기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에 때를 너무나 쉽게 설명한 전도서 3장 말씀은 답답한 사람 가슴속을 ‘뻥’하고 뚫어 주는 것만 같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There is a time for everything, and a season for every activity under the heavens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성경은 명확히 가르쳤으나 대개 사람은 흘려듣는다. 막상 죽을 때가 돼서야 많은 이들은 여태껏 제때를 놓치고 산 것을얼마든지 반전할 수 있었는데도 눈치를 보며 시류와 쓸데없는 상황에 휩쓸려 살아왔던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한다. 그러므로 ‘때’를 알고 이에 맞추어 분수껏 인생을 경영하면 그 얼마나 좋을 것인가. 성경은 사람의 수가 70이요, 강건해도 80이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요즘 ‘노인 청년’이라는 말이 많이 들려오지만, 당연히 나도 그리될 것이라고 부디 착각 하지를 말라. 자기관리를 아주 엄격히 하였고 또 하나님이 소수에게 허락한 사람들에게나 쓰는 말이지 보통 사람 모두에게 다 해당되는 말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자연 수명과 건강 수명은 엄연히 다른 법, 가까운 숲에라도 한번 들어가서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 외모는 멀쩡한데도 속이 다 썩어서 손에 쥐면 ‘와삭’ 소리를 내며 바스러지는 허망한 나무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사람도 이와 똑같아서 허우대는 제법 그럴듯해 보이나 오장육부는 이미 상했고 뼈와 관절이 부실한, 중늙은이는 물론이고 청장년들이 너무도 많다. 세월이 만지고 간 흔적을 피조물인 사람이 도무지 어찌하겠는가! 땜질하고 붙이고 고쳐 봐야 본질인 연식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생각을 바꿔야만 한다. 왜 늙지 않으려고만 아등바등 그리 애를 쓰는가? 그저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일반 사람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오롯이 뒤 따라 가야지, 인생의 강을 거스르며 바둥바둥 해봐야 제 볼품만 없어진다. 늙음은 철 따라 달라지는 나무나 풀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순리이다. 70살이 먹었는데도 청년의 얼굴을 가졌다면 그게 더 느끼하고 이상한 것이다. 노화를 무서워하고 서러워하지도 말라. 당신은 정상에서 올랐었고 그냥 이제는 아래로 한발, 한발 기분 좋게 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목적한 봉우리를 마침내 올랐으니, 이제 본향 집을 향해 내려가는 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자기 분수’를 안다는 것은 그러므로 참으로 귀한 것이다.
사람의 값어치를 계량한 성경 레위기 27장을 읽어 보라.
20에서 60살 남자의 값은 은 50 세겔로서 최곳값이다. 그런데 60을 넘기자마자 가격이 급락해서 겨우 15 세겔이 된다. 무려 70%가 하루 사이에 ‘싹둑’ 삭감이 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좋은 통찰력을 하나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이 환갑이 되면 이제는 가진 것 중에서 70을 내려놓고 남은 30으로만 자족하면서 여생을 ‘천천히’ ‘여유 있게’ 살면 가장 좋겠다.
필자는 다음을 강조하고 싶다.
60을 넘으면 순서와 방향을 바꾸자. 60 이전에는 이생에 70%, 저 생에는 30%를 안배하여 살았더라도 60 이후부터는 모든 것의 투입량을 저 생에 70%, 이생에다가 30%로 바꿔서 살자.
‘흰머리’는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라는 표지판이며, 환갑이 전환점인 것이다. 방향도 마찬가지다. 흰머리가 나면 땅으로부터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라. 하늘을 본다는 게 무엇 뜻인가? 먼저 인생의 논과 밭에 나가서 추수를 잘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이제부터는 땅의 일에는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하늘을 보면서 죽음을 묵상하고 좋은 죽음을 잘 준비함이 옳은 게다. 이렇게 해야 함에도 그저 오래만 살려고 애를 북북 쓰는 것은 참으로 딱하고 이상한 일이 된다. 그러므로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감사하고 만족하자. 더 많이 살려는 노력 대신에 더욱 ‘성결한 삶’을 이루려고 성실을 다하면 좋으리라.
황혼의 때에 맞춤한 찬송이 하나 있다.
“어둔 그늘 나를 에워 쌀 때에
주가 함께 계심 믿고 자려네.
죽은 후에 천국에서 깨어나
예수 함께 길이길이 살리라.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찬송 440장)
낮에는 사명 이룸에 최선을 다하고 저녁이 되면 죽음을 묵상하여, 항상 아름다운 죽음 졸저 ‘아름다운죽음’을 잘 준비함이 ‘때’를 아는 우리 인생사 ‘최적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