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복 해설(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를 것이요(마5:6)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
주림은 사모하는 것이다. 영적 주림은 영혼에 가장 적합하고 어울리는 것을 이해하고 갈구하는 이성적 욕구이다. 이 주림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부족을 느끼는 데서 나온다. 영적으로 주린 사람은 그 자신의 빈곤을 참으로 느낀다. 그는 의롭게 되기를 원한다.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6)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주시기 위한 것이므로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 이 의 덕분에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신다.(민 23:21) 이것은 완전한 의이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골 2:10) 이것은 덮어줄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꾸며준다. 이 의를 가진 사람은 가장 저명한 성도들과 동등하다. 가장 약한 신자도 가장 강한 자만큼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이다. 그가 자신을 더럽힐 때 그의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깨끗하게 하여 주신다. 이 복된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천사들보다 더 밝게 빛나게 된다. 이 의야말로 얻기 위하여 갈급해 할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의가 주님에게서 전가된 의라면, 심겨진 의는 선천적 의로서 즉 성령의 은혜들이요 마음과 생활의 거룩함을 말한다. 보편적 의다. 복된 주림이다. 육신적 주림이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지만 영적인 주림은 그를 훨씬 복되게 만든다. 이것은 생명이 있음을 입증한다. 죽은 사람은 배고플 수 없다. 배고픔은 살아있기 때문에 진행된다. 아기가 태어난 후 바로 엄마 가슴을 더듬으며 배고파하는 것이다.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한다.(벧전 2:2) 그의 마음 가운데 강렬하게 하나님을 바라는 욕구를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해 높은 값을 매기실 수도 있었으나 그 값을 형편없이 깎아내리셨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돈 뭉치를 가져오거나 선행을 싸 가지고 오라고 하시지 않는다. 할 일이 있다면 간절히 바라기만 하면 된다. 친구의 식사초대를 받았다면 식사 대가 필요 없다. 왕성한 식욕을 가지고 가면 된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의를 다 이루어 놓았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하나님의 식탁에서 준비된 그릇이다. 이 식사는 거르면 죽는다. 우습게 여기고 거절하면 심판을 면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초대한 친절을 가볍게 여기면 영원한 식탁에 참예할 자격을 잃는다. 성도는 갈망의 날개를 타고 다녀야 한다. 하나님을 찾아 목말라하는 것은 은혜받은 영혼의 체질이다. 주님, 당신의 사랑의 빛 한줄기라도 주옵소서! 당신의 피 한 방울이라도 주옵소서!
① 그들 자신의 의로 가득 차 있다. 어떤 공허도 스스로 느끼지 않는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병이다. 황금도, 안약도 받아들일 공간이 없었다.(계 3:17) 사람이 교만으로 가득 차면 헛배 부른 병이 거룩한 갈망을 방해한다. 위장이 바람으로 가득 차면 입맛을 망쳐 놓는다. 자기는 가득 찼다고 생각하는 사람만큼 은혜가 텅 빈 사람은 없다. 의가 가장 필요한 사람이 가장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헛된 것으로 가득 찼으니 꿀벌집도 싫은 것이다.
② 대용품을 가지고 있는 자다. 항아리에 기름, 즉 즐길 수 있는 것으로 이미 만족해한다. 건강을 잃었다고, 장사가 안된다고 불평을 하는 말을 많이 들었으나 의가 없다고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한 끼 혹은 두 끼 굶으면 자신은 망했다고 탄식하면서 은혜의 통로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데도 끄떡하지 않는다. 그는 복음의 잔치에 빠질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할 것이다.(눅14:18) 먹는 것에서 빠지려고 변명을 늘어놓는 사람은 병들거나 식욕이 없는 것이 틀림없다.
③ 잠에 취한 자다. “네가 한 시 동안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막 14:37) 식사하면서도 조는 경우의 사람이 있다. 음식보다는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완전하게 잠들고 있어 영혼을 깨우는 목회를 미워한다. 잠잔 후에 말씀 준비하겠다고 한다. 영적주림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따르는 무리들을 같이 졸게 한다.
④ 고집 센 아이가 젖가슴을 뿌리치듯이 구원의 말씀을 마다한다. 음식을 강권해도 거절함으로 건강을 잃는 노약자가 있다. 복된 말씀은 멀리하면서도 계시를 달라하고 광신적 믿음을 추구한다. 음식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이론을 편다. 이들은 만나보다도 옥수수 껍질을 더 좋아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먹여 주는 대로 허황된 생각에 따라 살고 있다.
⑤ 음식을 즐거워하는 것보다 접시를 장식하는 것을 더 기뻐하는 것 같은 자다. 실속 있는 알맹이 설교보다는 우아함과 좋은 느낌 더 주는 것을 추구한다. 건강에 좋은 음식은 소홀히 하고 겉만 번지르르한 음식만 잔뜩 먹어 방종한 구미를 맞춘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딤전 6:3-4)
⑥ 의에 앞서 다른 것들, 즉 그들의 이익이나 오락을 더 좋아한다면 의에 주림을 사모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저녁 식사에 와야 할 소년이 거리에서 놀고 있다면 음식 먹을 식욕이 없다는 표가 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의 은혜보다 아무 유익도 없는 헛된 것을 더 좋아한다면 그들은 천국의 일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입맛도 없고 위도 없다는 표이다.
⑦ 신앙생활에 실천보다는 논쟁을 좋아한다면 영적으로 주린 자라는 표이다. 신앙생활에 미미한 문제나 비평적인 것들이 사람들의 머리를 사로잡아서 믿음과 거룩함에 대해서 게을리하면 이것은 뼈를 물어뜯는 것이요 살은 먹지 못하는 것이다. 논쟁을 위한 논쟁에 시간을 얽어매는 사람은 그들은 목마른 사람이다.
부에 대한 목마름...탐욕스러운 사람의 목마름이다.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 받고 파는 탐내는 목마름이다.(암 2:6) 인생이 시달림을 당하는 병이다. 신자들이 그들의 마음의 성전에다 황금의 우상을 세워 놓고 있다. 이 탐심의 죄는 가장 뿌리를 뽑기가 힘들다. 통상 다른 죄들이 사람을 떠나도 이 죄는 머물러 있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의 포악함이 우리에게도 있다.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의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마침내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렘 17:11)
원수에 대한 보복으로 목말라 함이다. 해 받은 것을 덮어주는 것이 더 그리스도인다운 것이고 신중한 것이지만 우리의 본성은 보복의 병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우리는 꿀벌의 꿀이 아니라 꿀벌의 침을 가지고 있다. 이성의 막대기를 부러뜨린 악은 야만스럽게 자라나서 피를 보고자 한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진리를 퇴출한 자들이다.
깨끗지 못한 정욕을 만족시키려는 자들의 목마름이다. 죄를 짓기에 목말라하는 사람은 부자가 지옥에서 그의 혀를 서늘하게 할 물 한 방울을 얻지 못한 것처럼 목마를 것이다.
① 주림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에서는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거의 배고파 죽을 지경이었다.(창 25:32)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영혼이 그들 안에서 피곤하였도다.”(시 107:5) 목마른 사람은 영혼의 고민 속에 있고 의를 위해 피곤하기 쉽다.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함을 발견한다. 그는 그의 영적 주림이 누그러지고 가라앉을 때까지 고민하고 고통 중에 있다.
② 주림은 음식 말고는 아무것도 만족하게 할 수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꽃이나 음악을 가져다 주어보라. 재미나는 이야기를 해주어 보라. 아무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의에 주린 자는 “내게 그리스도를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겠나이다. 그리스도가 내게 옷 입히시고 그리스도가 나를 먹이시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말할 것이다. 영혼은 그리스도가 없으면 만족이 없다. 그리스도의 피의 샘만이 영혼의 갈증을 풀 수 있다.
③ 먹기 위해 모험을 시도한다. 기근에 굶주려 애굽으로 양식 사러 가자 한다.(창 42:2) 배고프면 돌로 된 벽도 깨뜨린다고 말한다. 거의 미친 듯이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찾고 찾는다. 영적으로 주린 영혼은 단호하다. 그리스도를 가져야 하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
④ 맹렬한 식욕으로 음식에 몰두한다. 음식 먹으라고 설득할 필요도 없다.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며.”(렘 15:16)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의 떡을 굶주리듯이 먹는 것을 보기를 좋아하신다. 성찬식에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
⑤ 음식의 맛을 즐긴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가장 기름진 음식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달게 느낀다. 꾸중도 달게 받는다.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7)
참된 욕망과 거짓 욕망, 영적 주림과 육적인 주림의 차이는 무엇일까?
① 위선자: 은혜 자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단지 천국으로 인도하는 다리 역할로써 바란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것을 바란다.
하나님의 자녀: 그 은혜 자체를 간구하고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바란다. 믿는 자에게는 천국만 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귀하다.
②위선자: 조건적이다. 천국과 그의 죄들을, 천국과 교만을, 천국과 그의 탐욕을 한꺼번에 가지려 한다. 그리스도를 원하면서도 괄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즐기는 어떤 죄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를 모시기를 원하면서도 그 분을 위하여 정욕을 떠나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그리스도인: 무조건적이다. “어떤 조건으로라도 그리스도를 나에게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조항을 제시하시더라도 나는 거기에 따르겠습니다. 죄를 억제하시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가질 수 있다면 무엇을 해도 만족하겠습니다.” 말한다.
③위선자: 욕망은 욕망에 그칠 뿐이다. 사람들은 구원 받기를 원하면서도 고통은 받지 않으려 한다. 물마시기를 원하면서 두레박을 우물에 넣지 않으려 한다.
그리스도인: 참된 욕망이라면 노력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사 26:9)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독수리는 먹이를 찾는데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고 그것으로 날아가는 빠른 날개가 있다. 의에 주린 영혼은 모든 거룩한 말씀들에 따라서 그것에 신속하게 날아간다.”
④위선자: 값싼 욕망을 가진다. 영적인 것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공짜로 얻으려 한다. 그의 정욕을 위해서는 얼마의 돈이 들던지 상관하지 않는다. 술 취한 친구들에게 쓸 돈은 있어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쓸 돈이 없다. 자기의 신앙생활은 치켜 올리면서도 목회자들의 생활비는 깎아내린다.
그리스도인: 참된 욕망은 값이 많이 든다. 다윗은 값없이 번제를 드리려 하지 않았다.(대상 21:24) 값진 진주를 발견한 사람은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얻었다.(마 13:46) 기도, 말씀연구, 주를 향한 열정 모두를 최대량 투자한다.
⑤위선자: 일시적인 욕망이다. 선한 행위는 맹렬히 타는 유성과 같이 곧 소멸되어 사라진다. 위선자들의 의는 손목시계를 힐끗 보는 동작일 뿐이다.
그리스도인: 참된 욕망은 꾸준하다. 주리고 있는 상태가 가지고 있어도 더 좋은 것으로 채우기 위해 계속 주리고 있는 계속적 주림이다.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 119:20) 거룩한 애정과 욕망을 항상 불태워야 한다는 신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경건한 사람의 욕망은 일생동안 계속 뛰는 맥박과 같은 것이다.
⑥위선자: 때를 잘 맞추지 못하는 자다. 너무 늦을 때까지 의에 주리는 것을 미룬다. 문이 닫힌 후에 와서 문을 두드리는 어리석은 처녀들이다.(마 25:11) 위선자들이 갈망하는 것은 죄이지 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 그들의 믿음은 그들의 유아기인 아침에 싹트기 시작한다. 그들은 그들이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때부터 믿어왔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욕망은 늙어 저녁이 되어도 지속된다. 지혜로운 처녀들은 신랑이 도착하기 전에 때맞추어 그들의 기름을 준비한다.
나의 의에 대한 주림이 이렇게 약한데 가짜가 아닐까 하는 염려를 가지는가? 맥박이 약하다 해도 그것은 생명이 있음을 보여준다. 약한 욕망이라도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런 자에 대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마 12:20) 갈대는 원래 약한 것이다. 거기에다 상한 갈대다. 마른 지팡이도 싹이 나고 꽃이 피도록 하시는 자비하신 주를 바라보라. 그는 자비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연약함을 참으시고 그는 강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도우실 수 있다. 그때는 뜨거운 열정으로 주를 섬겼는데 이제는 꺼진 불처럼 미지근한 상태에 놓였다고 탄식하는가? 분명 좋지 못한 징조이다. 그러나 그런 애통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주림을 채울 수 있는 시작이 된다. 처음 사랑을 잃은 것에 대한 아픔으로부터 시작하면 된다. 식욕은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열심히 마구 먹어라. 위장이 치료되고 힘이 소생된다.
죄인들이여! 자비의 문이 완전히 닫혀버릴 때가 머지않아 올 것이다. “의를 단순히 바라기만 하는 것은 너무 작은 일이다. 간절하게 바랄 때 결과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뜨겁게 의를 갈망해야 한다.”(노바시안. 3세기) 가장 영속성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거룩한 옷의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시 110:3) 낡아지지 않는다. 재산은 영원한 것이 못되지만(잠 27:24) 의는 영원하다. 하나님은 그의 축복을 바라지도 않는 자에게 내던져 주시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늦으면 나중에 목마르게 될 것이다. “내 영혼이 곧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시 42:2) 의에 목마르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를 것이다. 지옥에서 불타고 하나님의 진노의 불꽃에 그슬릴 때 이 열은 그들의 자비를 바라는 갈증을 더해주지만 아무것도 이 갈증을 달래 줄 것이 없을 것이다. 이 자비를 얻을 수 있는 동안 의에 목말라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위장이 바람으로 가득 차면 식욕이 없어진다. 자기 의와 같은 헛바람으로 가득 차 있으면 그리스도의 의는 갈망하지 않는다. 교만이 가득 차서 벌써 넉넉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림을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달콤한 것도 식욕을 없앤다. 세상의 쾌락을 지나치게 먹어두면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식욕을 잃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이 마늘과 파를 먹었기 때문에 만나를 먹고 싶어 하지 않았다. 눈이 하늘과 땅을 동시에 볼 수 없는 것같이 세상 욕구와 하나님의 나라 의를 동시에 채울 수 없다. 흙은 불을 끈다. 땅의 것들에 대한 사랑이 영적인 욕망의 불을 끈다.
운동과 양념으로 식욕을 돋우는 현실적 방법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람이 걷고 운동하면 위장이 음식을 먹고 싶어 한다. 거룩한 직분의 연습을 통해서 영적인 식욕이 커진다. 많은 사람이 다락방 기도를 그만두고 있다. 말씀을 드물게 듣는다. 또한 양념은 식욕을 자극한다. 회개함과 고난이다. 사람들은 건강할 때 보다는 약할 때 의를 더 갈망한다.
주린 입에 꿀을 떨어뜨리는 꿀집이 있다. 저희가 배부를 것이라 약속한다. 마음에다 이 세상 세 개를 채워 넣어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는 채워진다. 그리고 만족을 준다. 죄인은 죄로 채워주나 그것은 슬픈 채움이 되고 만다. 결국 지옥으로 인도될 뿐이다. “내 복으로 내 백성에게 만족하게 하리라.”(렘 31:14)
① 넘치도록 채워주신다.
하나님은 샘이시다.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시 36:9) 사람들은 종종 터진 웅덩이다.(렘2:13) 그러나 하늘 샘은 늘 가득하다. 그분은 우리를 채우시고 훨씬 더 채워야 할 용적을 가지셨다. 다 채우시고도 결코 자신이 가지신 것이 줄어드는 법이 없다. 마치 태양이 계속 빛을 비추지만 그 빛이 결코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이 나와도 하나님의 능력은 결코 줄지 않는다. 끝도 없고 바닥도 모른다. 또한 변치 않는 충만함이다. 사람들의 충만은 줄기도 하고 바뀌기도 한다. 사람들의 주는 것은 줄어들기도 한다. “주는 한결 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7) 그의 충만함은 넘쳐흐르고 항상 흐른다.
② 주린 영혼을 채워주신다.
그의 다정한 동정심으로 채워주신다. 그가 지으신 영과 혼이 곤비하실까 염려하신다. 주린 사람이 음식물을 만족하게 취하지 아니하면 죽는다. 먹을 것이 없는 무리를 보시고 예수님은 측은히 여기셔서 기적을 행하셨다. 그보다 훨씬 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곤비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살찐 송아지까지 잡아 잔치를 베푸신다.
그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채워주신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 약속은 꼭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우리들 속에 거룩한 욕망을 심어 주시는 데 만족시켜 주시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주신 영혼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늘 채워 주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주릴 때 모른 척하지 않는다. 굶주릴 때 아버지가 그 청을 거절하시겠는가? 까마귀가 울 때에 들으시는 그 아버지가 우리의 청을 듣지 않으시겠는가? 그리고 감사로 받는 자들에게 기쁨으로 더 채워 주신다.
첫째로, 은혜로 채워주신다. 은혜가 영혼에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은혜로 채워주신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였다. 각각 그들에게 있어야 할 은혜로 충만히 채워주신다.
둘째, 평안으로 채워주신다. “소상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롬 15:13)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요 16:33) 이 평안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에 영혼이 천국을 갈망하게 된다.
셋째, 최고의 복으로 채운다. 그리스도인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때 하나님의 형상의 영광스러운 빛이 그의 위에 비취므로 만족하게 될 것이다. “오! 그리스도여, 당신을 마신 후는 시원한 샘물로 소생하기 때문에 더 이상 목말라 하지 않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갈망하나이다.”
왜 그리스도는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는가?(요 3:34) 그것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무한히 채워지신 분이다. 그러나 그는 주린 영혼에게 그의 은혜를 떨어뜨릴 목적으로 거룩한 기름으로 가득 채우셨다. 당신이 무지한가? 그리스도는 당신을 가르치실만한 지혜로 가득 차 계신다. 당신이 오염되었는가? 그리스도는 당신을 깨끗하게 하실 만큼 은혜가 충만하시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 와야 한다. 우리는 부한 자의 문을 두드리기를 좋아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하다.
의를 갈망했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았는가? 당신은 입은 크게 열었으나 귀는 꽉 막고 있었을 것이다. 귀먹은 독사같이 하나님을 거슬려 귀를 막았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밥을 굶기는 벌을 받는다. 혹시 당신은 의를 사모하기는 하였으나 사탄이 손짓만 해도 유혹에 더 빨리 끌려 사탄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의보다 세상에 더 굶주렸을 것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젊은이같이 영생을 얻으려는 사모함은 있었으나 세상의 물질에 무게를 더 두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위선자들은 생명의 물보다 땅의 티끌에 더 헐떡인다.
진심으로 사모했는데도 만족이 없는가? 아니다. 당신이 원하는 그 은혜가 보이지 않으나 당신에게 꼭 있어야 할 은혜로 부어주셨다. 그래서 당신의 신앙이 여기에 굳건히 선 것이다. 꿀이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은혜의 이슬이 잔잔히 내리고 있다. 흡족히 채움을 바라는가? 여전히 주님을 앙모하면서 온유한 자세를 고정시켜라. 주님의 약속은 변치 않는다. 항아리 어귀까지 채워진 모습을 하늘나라에 가서는 확실히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