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복 해설(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다.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언성을 높이거나 투덜거리지 않고 조용한 자세를 취하여 “여호와이시니 선하신대로 하실 것이니라”(삼상 3:18) 해야 한다. 온유한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어떻게 하고자 하시든, 무슨 조건을 새기고자 하시든지 그가 기뻐하시면 나는 순종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비옥한 땅이든지 불모지든지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신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대로 그분의 일을 마음대로 하시게 하자. 하나님이 그것을 하셨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선지서에 하나님과 다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은 온유하지 못한 마음이다.(욘 4:9)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유순함이다.
말씀이 기꺼이 우리 영혼을 지배하도록 하고 모든 율법과 훈계에 유연하게 대하는 것,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고 말씀의 가르침과 다투지 않고 자기 마음의 부패와 다투는 사람은 온유한 사람이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온유한 마음으로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위엄 있는 말씀을 온유한 말씀으로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1. 사람을 향한 온유
온유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격정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은혜이다. 철학자들은 덕으로 부르지만 사도바울은 은혜로 불러서 성령의 하나의 열매로 취급한다.(갈 5:23) 본성적으로 우리의 마음은 거친 바다와 같아서 화와 노의 거품을 내뱉는다. 그때 온유함이 그 격정을 가라앉힌다. 그것은 영혼의 중재자로 앉아서 병적인 행동들을 조용하게 하고 견제를 한다. 달이 태양의 열을 완화하고 가라앉히듯이 그리스도인의 온유함은 격정의 열을 가라앉힌다. 마음의 온유함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어서도 적합할 뿐 아니라 사람과의 세속적인 교제에 있어서도 필요해서 모든 은혜 가운데서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온유 그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부드러우심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를 가져다주며 모든 것을 이긴다.
2. 해를 참는 온유
쉽게 성내지 아니하는 것이다. 젖은 불쏘시개와 같이 온유한 마음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는다. “내 생명을 찾는 자가 올무를 놓고 나를 해하려는 자가 괴악한 일을 말하여 종일토록 음모를 꾸미오나 나는 못 듣는 자 같이 듣지 아니하고 말 못하는 자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오니 나는 듣지 못하는 자 같아서 내 입에는 변박할 말이 없나이다.”(시 38:12-14) 온유는 화를 내는 것에 재갈을 먹이는 것이다. 격정은 성미가 거칠고 고집이 센 데서 나오는데 온유는 이것을 억제한다. 온유는 입에 재갈을 물리고 혀를 좋은 습관으로 돌아갈 때까지 묶어놓는다. 온유는 참고 견디라는 표어를 준수한다. 온유는 네 가지에 반대한다.
첫째, 온유는 성급한 마음과 반대한다.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마음에 격정이 끓어오르고 화가 눈으로 불꽃을 튀기면 이것은 온유와는 거리가 멀다. 노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있을 수 있으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항상 머문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폭약과 같아서 건드리기가 무섭게 불을 뿜는다. 성 바질은 성내는 것은 술 취한 것이라고 불렀고, 제롬은 포도주로 취하는 것보다 더 격정적이라 했고, 세네카는 성내는 것을 짧은 발광이라 불렀다. 그것은 때때로 이성의 사용을 보류케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충분히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경건할 때는 얼음같이 차지만, 말다툼을 할 때는 불같이 뜨겁다. 성급한 분노가 성도들에게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가? 얼마나 보기가 흉한가? “나는 격정을 누그러뜨렸을 때는 신을 닮았다. 그러나 격노할 때는 짐승 그대로였다.”(호머) 얼굴이 분노로 부풀어 오르면 핏줄의 피가 검어질 것이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 우리가 어떤 경우에나 화를 낼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거룩한 분노가 있다. 죄에 대한 분노는 죄가 없는 분노이다. 온유함과 열심이 함께 있을 수 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엘리야의 마음을 옷 입고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야 한다.(렙 6:11) 그리스도는 온유하셨으나(마 11:29), 또한 열성적이셨다.(요 2:15) 하나님의 집을 위한 열심이 그를 삼켰다.
둘째, 온유는 악의와는 반대가 된다.
악의(惡意)는 마귀의 모습이다. 악의는 정신적인 살인이다. 악의에 찬 사람에게 어떻게 주기도문을 할 수 있느냐 물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부분을 빼고 한다고 하였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을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내 기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너를 듣지 않겠다.” 사람이 먹는 것마다 독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슬픈 심판인가? 악의에 찬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모두 독으로 바뀐다. 주님의 식탁이 올무가 되고 그는 자신의 저주를 먹고 산다.
셋째, 온유는 보복과 반대가 된다.
보복은 악의에 가득 찬 사람이 마귀를 위하여 조리한 맛있는 고기이다. 성경은 보복을 금하고 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9) 하였다. 보복하는 자는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권리를 빼앗는 일이다. 마귀와 싸우는 일과 자신과 싸우는 일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의 결투는 불법이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다.”(잠 19:11) 자기 방어는 그리스도인의 온유와 모순되지 않는다. 자연의 법과 종교의 법이 정당하다고 본다. 판사가 유죄 판결을 내려 벌주는 것도 보복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땅에서의 하나님의 보조자이다. 비록 개개인이 악을 악으로 갚도록 두어서는 안 되지만(롬 12:17) 치안판사는 범죄의 악을 형벌의 악으로 다스릴 수 있다.
넷째, 온유는 악한 말과 반대가 된다.
우리의 말은 부드럽게 흐르는 실로암의 물과 같이 온화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혀가 불붙는데 그것은 마귀가 성냥불을 켜는 것이다. 사람들은 옛 뱀에서 은혜롭지 못한 욕설로 서로 독을 내뿜는 것을 배웠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리라.”(마 5:22)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다른 사람을 헐뜯어서는 안 되지만 바울이 베스도에게 함같이 변명할 수는 있다.(행 26:25)
3. 해 받음을 용서하는 온유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막 11:25)라 하신다. 그를 용서하기 전에는 기도에 별로 효과가 없다. 온유한 마음은 용서의 마음이다. 사람들은 친절은 잊어버리지만 해를 입은 것은 기억한다. 우리는 용서하되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해야 한다.
* 용서는 실제적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는 시늉만 하시고 우리의 죄를 그대로 잡고 계시지 않는다.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다.(사 43:25) 대 사면령을 내리신다.(렘 31:34) 그분은 용서하시고 잊어버리신다. 용서하는 모양을 보일 뿐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여야 한다.
* 용서는 완전히 하여야 한다.
우리의 죄를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사해 주셨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시 103:3) 얼마쯤의 허물은 덮어주지만 다른 것은 그대로 가슴에 품고 산다면 반 용서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원하는가?
* 하나님은 자주 용서하신다.
우리는 죄를 자주 짓는다.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기록의 죄를 남기지만 하나님은 자주 용서 하신다. 그래서 큰 긍휼이라고 말한다.(사 55:7) 온유한 사람은 한 용서를 한 후에도 다른 용서를 계속해 보낸다. 베드로가 질문을 하였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 18:21) 주님의 대답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하라 하셨다. 당신이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죄를 생각해 보라. 당신의 이웃이 당신에게 과오를 범할 때에는 사람에 대하여 짓는 것이지만 당신이 그를 용서하기를 거절한다면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오늘 밤에 죽는다면 당신은 용서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는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5)
4. 악을 선으로 갚는 용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높은 수준의 사랑으로 이끄신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롬 1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짐승 같은 것이고,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 적이고,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그리스도인이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는 은혜가 마음에 들어올 때 그것은 이상한 변화를 가져온다. 돌 감람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한 때 돌 감람나무의 성질을 가져 앙갚음이나 하던 사람도 하늘 감람나무의 수액에 한 번 참례하게 되면 그는 너그러운 열매를 맺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게 된다.
5. 온유는 참 성도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는 쉽게 성을 내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고 악을 부드러움으로 정복한다. 하나님께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 은혜로 번쩍거려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복을 입을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알려진다. 성품이 너무 온유하게 되어 편협한 생각을 질식시켜 버릴 수 있고 불친절을 묻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성도이다. 눈물을 잘 흘리는 사람이 노를 잘 내는 사람보다 더 빨리 그리스도인이 된다.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아 4:8) 온유하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길이다. 만일 신부에게 어떤 해가 가해지면 그녀는 자기 신랑에게 복수를 맡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주먹으로 치는 것은 보기에 흉하다.
6. 그리스도인이 온유해야 할 이유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옷처럼 그것을 입고 결코 몸에서 벗어버리지 말라. 온유는 모든 것의 필수 요소다. 그것은 훈육에도 필요하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딤후 2:25) 온유는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을 정복한다. 온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도 필요하다.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격정 또는 편견을 가지고 말씀에 접근하는 사람은 좋은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마음만 다칠 뿐이다. 그는 음료수를 독약으로 바꾸고 성령의 검으로 스스로를 찌른다. 온유는 꾸중할 때도 필요하다.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갈 6:1) 헬라어의 뜻은 뼈를 제 위치에 도로 집어 넣는다는 뜻이다. 어떤 형제가 실수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 맹렬하게 덤벼들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그를 고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7. 온유를 완성하자.
1) 온유의 본보기가 있다.
* 예수님의 본보기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마 21:5)
그리스도는 온유의 견본이자 모형이시다. “욕을 받으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며.”(벧 2:23) 그의 원수들의 말은 쓸개보다 썼지만 그리스도의 말은 기름보다 더 부드러웠다. 그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우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 11:29) 하셨다. 기적을 배우라는 말씀을 안 하셨지만, 온유를 배우라 하셨다.
* 성도들의 본보기
모세는 비길 데 없이 온유한 사람이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 12:3)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을 털어놓을 때 그는 분노를 터트리는 대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들은 폭풍 속에 있었으나 모세는 고요 속에 있었다. 엘리야의 마음이 엘리사에게 있었던 것처럼, 땅 위의 천사라 할 모세의 마음이 우리에게 머물렀으면!
다윗의 온유함 역시 흠모해야 한다.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였을 때 아비새가 그의 목을 자르려 했다. 다윗은 오히려 그의 죽음을 막고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했다.(삼하 16:11) 사울왕의 진지에 밤에 돌입하여 원수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때에도 하나님께서 심판자 되어 주시기를 맡기고 물병만 가지고 돌아왔다.(삼상 26:12) 그의 손에 피를 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악인들에게 내려졌다.
2) 온유는 그리스도인의 장식품이다.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벧전 3:4) 성도가 이 보석으로 꾸밀 때 하나님의 눈에 얼마나 붙임성 있는 모습일까? 아무 의복도 온유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더 어울리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 의복을 입으라고 명령을 받는 것이다.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골 3:12) 온유는 신앙생활에 명예를 가져오고 악을 잠재운다.
3) 온유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성나게 하시는 자들에게도 온유하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찢어놓고 그의 성령을 괴롭게 하고 그의 아들을 다시 못 박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도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벧후 3:9) 하나님이 죄인들을 박살 내시고 지옥으로 던지시는 것이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분은 위엄으로 가득 차시지만 온유로도 가득 차시다. 온유가 결핍되면 사람답지 않지만 우리가 온유하면 하나님을 닮는다.
4) 온유는 고상하고 훌륭한 마음을 입증한다.
온유한 사람은 용맹스러운 사람이다. 그는 자신과 싸워 이긴다. 격정은 우둔하고 약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난다. 격노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강하고 승리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은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 16:32) 격정을 따라가는 일은 부패한 본성의 물결을 따라 헤엄치는 것이다. 그러나 본성에 대항해서 돌아서는 것, 격정의 마음을 억누르는 것, 이것이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다운 것이다. 영적인 기사도다.
5) 온유는 원수의 마음을 녹이고 정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윗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위치에 사울이 누웠는데도, 다윗이 다만 그의 옷자락만 베었을 때 사울이 다윗에 대해 얼마나 감동되었을까?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삼상 24:17) 한 방도 쏘지 않고 이기는 것은 가장 큰 승리가 된다. 온유한 그리스도인은 심지어 그들의 대적으로부터도 감사장을 받는다. 이스라엘 왕이 포로로 잡아 온 포로들에게 잔치를 베풀었을 때 그들은 그들의 칼보다 그의 온유에 정복되었다. 이로부터 아람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였다.(왕하 6:23)
6) 온유하지 못한 자의 재난을 생각하라.
분노와 성냄은 마귀가 마음속으로 들어올 여지를 주고 그것을 차지해 버리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마귀와 한 침대를 쓰는 자이다. 격정은 영혼을 어지럽게 만든다. 이성을 흐리게 할 뿐 아니라 양심을 흩트려 놓는다. 격정이 사로잡고 있는 사람은 자신을 사로잡지 못한다. 분노는 성령님을 슬프게 하고 성령님은 결국 떠나신다. 우리는 연기가 가득한 집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령님도 병적이고 격정의 수증기와 연기가 가득한 마음에 계시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7) 선으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라.
시므이가 왕을 저주할 때 다윗이 다 받아들인 이유가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10, 12) 사람들은 흔히 돌을 던진 손은 보지 않고 돌멩이에 으르렁거리는 어리석은 잡종 개와 같다. 욥은 그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눈여겨 바라보았고 그것이 그의 마음을 온유하게 하였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이도 여호와이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심이 빌라도나 유다 때문이라 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보통 주님께서 우리에게 현저한 은혜를 베푸시고자 할 때에는 어떤 두드러진 시험을 하신다. 모세의 손이 구원의 사역을 하기 전에 먼저 나병이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출 4:6)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고요히 기다려야 한다.
8) 온유함이 모자라는 것은 은혜가 모자람을 입증한다.
참된 은혜는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고 분노를 가라앉힌다. 은혜는 거친 쇠를 부드럽게 갈아주는 줄과 같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의 거칠게 튀어나온 것을 줄로 갈아 없앤다. 은혜는 그리스도께서 성난 파도를 향하여 “잠잠하라 고요하라.”(막 4:39)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에다 말한다. 그러므로 마음에 은혜가 있으면 그것은 격정의 분노를 가라앉힌다. 계속해서 미쳐서 날뛰면서 분노와 사악의 고삐를 풀어놓는 사람은 결코 달콤한 은혜의 효과를 느끼지 못한 사람이다. ‘무자비’는 이방인의 죄 중에 하나였다.(롬 1:31) 마귀의 마음이다. 옛 뱀은 악독과 복수의 독을 뿜어낸다.
9) 노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고침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잠 22:24) 분노에 가득한 마귀를 잠재우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과도 친분을 가져서도 안 된다. 뱀을 가슴속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일단 거리를 두어야 할 사람을 분별하자. 이런 변명도 내밀고 싶어 한다. “그것은 내 본성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성깔 사나운 본성이다”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잘못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그런 본성을 주시지 아니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라.”(전 7:29) 하나님은 당신을 곧게 만드셨으나 당신 스스로가 당신을 굽게 한 것이다. 원래 좋은 본성을 주셨음에 감사하라. 본성의 샘은 죄가 독약을 풀어 넣기 전에는 순수하였다. 본성이 나빴으니 내 행동도 나빠도 된다는 변명이 성립될 수 있을까?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천사의 모습으로 바꿔질 수 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전 15:50)
8.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악인은 그가 잡은 행운 때문에 오히려 병들었다. 오염된 공기 속에 사는 사람처럼 기름진 땅을 가짐이 죄를 확대시켜 나간다. 땅의 축복을 누릴만한 심령을 가지지 못할 때 땅의 평안은 이미 손실된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 37:11) 온유한 자는 땅을 잠시 동안 머무는 집으로 소유할 뿐만 아니라 천국은 그들의 영원히 머물 집으로 소유하게 된다. 온유는 신앙생활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고 하나님은 구원으로, 그들을 아름답게 꾸며 줄 것이다. 온유한 자는 구원을 수놓은 왕의 옷을 입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그에 해당하는 축복된 삶을 살기 때문에 땅의 소유주가 되고 구원의 상속자가 된다. 구약의 성도들이 약속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 같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됨을 약속하신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들이 질서를 떠나 땅을 많이 소유하지만 더 좋은 하늘나라의 소유권은 다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들의 것이다. 하늘의 상속권자들이다.
모세의 온유함의(민 12:3) 인도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였고 예수님의 온유함과 겸손으로(마 11:29)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다. 바울은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온유의 투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땅을(롬 15:19) 복음으로 점령하여 그 땅을 하나님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세상에서는 땅 한 평 없는 바울이지만 복음의 땅을 넓히므로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한 상급을 받게 된 것이다. 땅 중에 가장 광활한 땅은 마음일 것이다. 땅의 가치는 많이 가지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작하여 생산을 내는 가에 부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마음에서 모든 창조적인 생각도 생산 하고 사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또 구원 받는 작업도 한다. 사도바울은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고후 10:5) 일에 성공한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