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팔복 해설(2)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BY 관리자2018.08.30 10: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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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8복 해설(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 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참된 축복으로 여덟 가지 단계가 있다. 야곱의 사다리로 비유될 수 있다. 낙원으로 갈 때는 슬프고 다루기가 즐겁지 않은 일이지만 이 황금 같은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야만 그곳에 도달해진다. 애통과 위로가 모두 귀한 과정이다.


애통하는 자가 복 받은 자다

1. 복 받도록 만들어주지 않는 애통
외적인 손실을 슬퍼할 때 그것은 육적인 애통이 된다. 세상적인 슬픔은 사망을 이룬다.(고후 7:10) 불순한 정욕을 만족시키지 못해서 애통한다든가 아합 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지 못해 애통한 것은 마귀적인 애통이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 보낸 것을 몹시 가슴 아파했다.(출 14:5) 설교를 너무 많이 들었다고 후회한다면 하나님도 장차 올 재앙에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2. 자신을 위한 거룩한 애통
영적인 애통에는 두 가지가 있다. 죄와 그리고 비참함이다. 죄는 자신의 죄와 다른 사람의 죄가 그 대상이다. 죄의 불덩어리를 지고 갈 때 그것을 끄기 위해서는 눈물이 필요하다. 크리스톰은 죽음을 슬퍼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며, 죄를 슬퍼하는 자라야 복이 있다고 하였다. 진노로 묶일 죄과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은 선한 도리가 된다. 심판대 앞에 끌려갈 죄인이 울지 않겠는가? 죄인은 누구나 사형선고를 받도록 되어 있고 자비로 변호해 줄 사람이 없다면 지옥 불에 던져질 것이 확실하다.
죄는 사람을 두꺼비나 뱀보다 더 흉악하게 만든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 5:3) 죄가 얼마나 큰 변질을 가져 왔는가? 영혼이 한때는 환한 하늘색이었으나 죄가 새까만 색깔로 바꾸어 놓았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죄들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 일에 애통해야 하지 않겠는가?


3. 바른 복음적 애통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죄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나무를 베거나 쥐어짜지 않고도 저절로 흘러 떨어지는 몰약과 같아야 한다. 막달라 마리아가 주께 올 때 손에는 향유를, 마음에는 사랑을, 눈에는 눈물을 가지고 왔다. 그분은 억지로 받아내는 것을 사랑하시지 않는다.
복음적 애통은 영적이어야 한다. 죄가 그를 괴롭혔고 그래서 다윗은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말했다.(시 51:3)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눅 15:18)의 고백이다. 죄는 하나님을 싫어하도록 만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든다. 죄는 하나님께 심술부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죄는 하늘에 대해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죄는 자비의 가슴을 발길로 찬다. 배은망덕 하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의 보석을 받아서 죄를 짓는 데 사용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보석과 귀걸이 등을 받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다.(출 32:4) 죄는 결핍을 가져온다. 좋은 것들을 다 빼앗아 간다. 주님까지 빼앗아 간다. 주님의 인자한 모습도 가져간다. 의의 태양이 우리의 지평선에서 사라짐과 우리의 평화가 사라졌음을 슬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을 애통해하는 것이, 그의 은혜를 다시 찾는 최선의 방법이다.


4. 복음적인 애통을 가져야 한다
⦁복음적 애통은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것이다.
속이는 자들은 일반적인 죄를 가지고 어물어물하고 만다. 참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상처가 난 사람과 같다. 의사에게 모든 상처를 구체적으로 보여 준다. 참된 회개자는 낱낱이 죄를 슬퍼한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삿 10:10) 우상숭배를 고백하면서 애통하였다. 개개의 죄에 대해 해결하고 지나가야 한다.
⦁복음적인 눈물은 믿음의 눈에서 떨어져야 한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막 9:24) 믿음의 눈물은 값진 것이다. 그 눈물이 땅에 떨어질지라도 그 믿음은 하늘에 도달한다. 믿음의 눈물은 병에 담는다.(시 56:8) 눈물은 흘리지만 어떤 경우 마음은 완고할 수 있다. 베옷은 입었으나 슬픔은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애통은 자신을 증오한다.
오물 속에 떨어진 사람은 자신을 몹시 싫어한다. 나병환자는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괴로워하고 싫어한다.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불순한 눈을 증오한다. 악이 감추어져 있는 이 마음이여! 죄를 떠날 뿐 아니라 죄를 증오해야 한다.
⦁복음적인 애통은 정결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몰아내기 위해 애통할 뿐 아니라 죄 자체 때문에 울어야 한다. 애통할 뿐 아니라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욜 2:12) 마음에 깔려있는 독을 뱉어내라. 죄를 깨뜨려 버려라.
⦁복음적인 애통은 죄를 미워함과 연관이 있어야 한다.
죄를 금할 뿐 아니라 죄를 소름이 끼칠 만큼 싫어해야 한다. 비둘기는 매의 작은 깃털이라도 증오한다. 작은 동작의 죄라도 증오해야 한다. 가장 치명적인 것으로 여겨라.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평생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이 둘 사이는 어떤 조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평생 전쟁이었다. 참된 애통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시작하고 죄를 미워함으로 끝난다.
복음적인 애통은 빚을 갚는 것이다.
삭게오는 남에게 빼앗은 것을 4배로 갚겠다고 하였다.(눅 19:8) 다른 사람의 재산을 축내었으면 되돌려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의 명예를 더럽혔으면 용서를 빌어야 한다. 되돌려 줌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
⦁복음적 애통은 서둘러 해야 한다.
회개를 늦추다가 죽을 때까지 연기될 수 있다. “이제 우는 자가 복이 있다.”(눅 6:21) 우리에게 다른 날이 준비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순간에는 왜 안 되는가? 미루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복음적 애통은 지속적이다.
히브리말로 ‘눈’이란 말은 ‘샘’을 나타낸다. 죄 때문에 눈물이 샘과 같이 계속 흘러서 그치지 않는 것을 말해준다. 바울이 ‘날마다 나는 죽노라’ 함과 같이 ‘날마다 애통하노라’ 해야 한다. 우리의 영혼을 매일 회개의 소금물에 씻어 병의 재발을 막거나 치료제가 되어야 한다. 회개가 새로워짐에 따라서 용서도 새로워진다.


5.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도 애통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울으셨다.(마 23:37)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해 탄식하셨다.(막 3:5) 다윗도 악인들의 악을 인하여 눈물을 흘렸다.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시 119:136) 나라가 죄의 무게 때문에 쓰러지려 하는데 애통해야 하지 않을까? 신앙의 자유가 죄를 짓는데 특허를 내주어 저주받은 의견들이 득세하고 변덕쟁이들의 말장난이 개방되어 하나님을 향해 불경건하게 불리는 이때에, 울어야 하지 않을까? 애통하는 자가 거의 없는 것에 애통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다.(시 137:1) 예배드리는 곳에 가는 것을 금지당하고 강가에 앉아서 울었다. 예배드릴 수 없이 신앙의 박해 속에서 일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민족이 가득하고 하나님의 교회가 포도즙 틀처럼 밟히는 것을 볼 때 애통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눈물을 그리스도께서 마실 음료로 드려라. 그분의 긍휼로 불붙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눈물의 골방으로 들어가라. 보다 작은 죄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만 보다 큰 죄는 성령을 괴롭힌다. 엘리 선지자는 법궤를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애통이,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애통보다 컸다.(삼상 4:18) 영적인 슬픔은 모든 슬픔보다 커야 한다.
애통에 반대되는 것은 굳은 마음이다. 성경은 돌 같은 마음(겔 36:26)이라 한다. 무감각이다. 돌은 눌러도 빻아도 느끼지 못한다. 죄와 진노에 대해서 무감각하다. 신장에 돌이 끼면 느낄 수 있어도 마음의 돌은 느끼지 못한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가 되어...”(엡 4:19) 지옥은 굳은 마음으로 가득한 자들이 있다.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자는 하나도 없다. 거기에는 우는 것은 있으나 부드러움은 없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회개는 죄를 풀고 죄가 죄 되지 않도록 만든다. 마음이 굳어진 죄인은 회개가 불가능하다.

 

6. 불평자는 많은데 애통자는 많지 않다.

대부분이 습기가 부족한 돌밭과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때문에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는 울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죄 때문에 피를 흘리셨는데 당신은 죄를 가지고 흥겨워하는가?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 당신의 희락거리인가?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배가 파산 당할 위험에 있는데 태평스럽게 잠을 자고 있다. 하나님이 칼을 잡고 계시는데 비파와 수금을 잡는다면 얼마나 시기에 맞지 않는 우스운 일일까? 죄인이 웃으면서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비참한 광경 중의 하나다.(데오필락트) 회개를 헐뜯는 사람은 은혜의 성령을 헐뜯는 것이다. 죄에 대한 애통은 진노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길이다. 회개를 헐뜯는 것을 회개하라.


7. 거룩한 애통의 동기
⦁죄를 위한 눈물: 외적인 손실 때문에 운다면 그것은 마치 바위 위에 쏟아부은 소나기 같아서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죄를 위한 눈물은 소금물이 벌레를 죽이듯이 우리의 부패를 소독한다. 짭짤한 회개의 눈물은 양심을 갉아먹는 죄의 벌레를 죽이는 데 도움이 된다.
⦁복음적인 애통은 은혜의 증거: 비둘기는 슬피 우는 새이다. 성령이 그리스도께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눅 3:22) 비둘기 같이 우는 것이 있으면 성령이 내려오시는 좋은 증거가 된다. 죄를 위한 울음은 새로운 출생의 표다. 아기는 태어나자마자 운다.
⦁눈물의 귀함: 정원 안의 샘은 기분 좋게 만들어 준다. 마음 안에 흐르는 슬픔의 샘이 있으면 하나님께 대단한 기쁨이 된다. 그 여자의 눈물이 그 여자의 향유보다 더 향기로웠다.(눅 7:38) 야곱은 울어 천사를 이길 힘을 얻었다.(호 12:4)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녹인다. “기도는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도록 마음이 기울어지게 하지만 눈물은 그분에게 강요하는 것이다.”(제롬)
⦁눈물의 감미로움: 영혼이 울며 흐느낄 때보다 더 부요하여질 때는 없다. 골방의 눈물이 궁중의 음악보다 낫다. 그리스도인들은 때로는 그가 울 수 있을 때 그 자신이 천국의 변두리까지 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설탕은 녹았을 때 가장 달다. 그리스도인이 눈물에 녹을 때 가장 감미로운 기쁨에 참례한다.
⦁다른 사람을 위한 눈물: 회개하는 눈물은 하나님의 마음을 녹이고 그분의 손을 묶어 놓는다. 하나님의 진노의 손을 중보자의 눈물이 그의 손을 만류한다.
⦁거룩한 애통은 미리 막아주는 약: 지옥은 우는 곳이다.(마 8:12) 화 있을진저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여 울리로다.(눅 6:25) 여기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 나중 절망의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의사는 환자의 피를 흘려 죽음을 막을 수 있다.
⦁길은 오직 하나: 도시로 가는 길은 여럿 있을 수 있으나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애통의 길을 통과하여야 한다.(행 26:20) 사람이 병들었을 때 스무 가지 약으로 낫게 할 수 있으나 죄는 영혼을 죽게 하는 병이다. 회개의 약 외에는 개발한 것이 없다.
⦁회개할 필요성: 특별한 악을 행하지 않은 평범한 자는 회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평범한 것에 대해 회개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장부책에 빚만 잔뜩 채워 놓았다. 당신은 은밀한 죄 가운데 살았다. 회개하지 않는 것도 슬프지만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더 나쁘다.
⦁눈물은 끝날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저희 눈물을 모든 눈에서 씻어 주실 것임이라.”(계 7:17) 죄가 그칠 때 눈물도 그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영원한 햇빛을 볼 것이다.
⦁거룩한 애통의 유익: 골짜기에는 샘물이 흐르기 때문에 곡식이 번성하게 된다. 슬픔이 샘이 흐르는 곳에 마음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애통은 마귀의 유혹을 막기 위해 담을 쳐 준다. 눈물은 마귀의 불과 불화살을 끄기 위한 제일 좋은 소방기구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표적: “당신 스스로가 녹아지고 애통하는 구조를 가진 것을 발견할 때 이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는가, 아닌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버나드) 마음이 죄 때문에 깨어지고 거룩한 눈물에 녹아질 때 그것이 위로며 하나님이 함께 계신 표징이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사 38:5) 다윗의 눈물은 하나님의 귀에 음악이 되었다.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회개하는 사람이 흘리는 진주 같은 눈물은 천사들이 주목하여 바라볼만하다.


8. 애통하는데 방해되는 것들
⦁죄를 사랑하는 것: 죄를 사랑하는 것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는 파이프안의 돌과 같다. 죄짓는 달콤함이 마음을 미혹시킨다. “죄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을 범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제롬) 죄를 사랑하는 것은 영혼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마음을 얼려버린다.
⦁절망: 절망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리스도의 피를 평가 절하한다. 절망은 자비를 시야에서 가려 숨겨버린다. 당신이 큰 죄인일지라도 우는 죄인이기만 하면 왕의 금홀이 내밀어진다.(시 103:11) 자비의 용납하심이다.
⦁눈물은 우울하게 한다는 독단: 우리의 눈물에다 우리의 모든 기쁨을 빠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오해한다. 자연 상태에서 무슨 기쁨이 있는지 이야기하여보라. 죄는 상한 것과 터진 것뿐인데 무슨 기쁨을 제공할 수 있는가? 죄를 지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떨리지 않았는가.
⦁성령의 활동을 막는 것이란 변명: 성령님은 온유하시고 부드러운 분이신데 그를 슬프게 할 때 오히려 눈물은 막힌다. 성령님은 우리 마음에 뜨거운 밀물을 일으키신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하신다.(살전 5:19) 성령이 물러가시면 애통할 수가 없다.
⦁자비에 대해 주제넘음: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비를 베푸셔서 친히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셨는데 내가 기도하거나 애통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여 스스로 대담한 죄인들이 되어 수렁에 빠진다. 주제넘은 죄인들이다. 죄를 버리지 않고는 자비가 없다.
⦁죄를 과소평가하는 독단: 반역은 왕위에 대한 도전이므로 죄가 크다 작다 말할 수 없다. 죄는 작아도 죄이기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 모든 죄에는 죽음과 지옥이 따른다.(롬 6:23) 회개가 없으면 아무리 적은 죄라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떤 죄라도 피 값이 필요하다.
⦁꾸물거림: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이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적의 소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너무 이르다고 미루는 자가 어디 있을까? 병은 치료할 수 있을 때 치료해야 한다.
⦁공의를 비웃는 것: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악용하는 자들이 많다. 하나님께서 소돔에 대해 오래 참으셨으나 그들의 듣지 않는 귀에 유황불로 심판하셨다. 오래 참으신다는 것이 용서하신다는 말은 아니다.
⦁환락과 음악: 많은 사람이 슬픔을 실어 날려 보내고 애통의 눈물을 술잔에 빠뜨린다. 사해로 즐겁게 헤엄쳐 가는 물고기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옥으로 춤추며 내려가는가. 죄는 마귀의 배설물인데 그것을 마시며 도취한다.


9. 애통하는 자에게 따르는 위로
위로 전에 애통이 먼저 와야 한다. 치료할 때 먼저 상처를 도려내야 함과 같다. 위로를 말하면서 애통은 깎아내린다. 자유사상가들은 기쁨과 위로를 너무 기뻐한다. 약은 핥아 먹고 쓴 부분은 뱉어버리는 사람이다. 반드시 눈물의 소나기 뒤에 기쁨의 햇빛이다. 씨 뿌리지 않고 수확하려는 사람과 같다. 우리 주님은 애통을 처방하시고 위안의 포도주의 마개를 빼신다. 마귀는 정반대이다. 사탄은 죄를 아름답게 꾸미고 기쁨으로 달콤하게 하며 슬픔의 계산서를 내민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신 그분은, 돌 항아리를 눈물로 가득 채우면 그 눈물을 기쁨의 포도주로 바꾸실 것이다. 애통자의 눈물이 부패를 씻어내는 데 도움을 주고 나쁜 것을 훑어내는 세제로 쓰인 후 하나님은 설탕물을 주신다. 위로자이신 보혜사 성령님을 영원히 흐르시게 한다. 사람들은 위로를 주는 척하지만 사기극일 수 있다.


10. 애통자가 충분한 위로를 받지 못하는 이유
① 하나님에 의해서
그분은 우리의 위로를 얼마 동안 보류하시므로 은혜의 값을 올리실 때가 있다. 돈이 너무 흔해서 가치가 떨어질 때는 왕은 돈을 거둬들여 그 가치를 올릴 수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보다 그분을 위한 봉사를 원한다. 남편 그 자신보다 남편의 돈 때문에 사랑한다면 창녀의 사랑이다. 위로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긴다면 그것은 자신을 섬기는 것이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체만을 사랑하기 원하셔서 슬픔의 과정을 잠시 허락하신다.
② 자기의 실수 때문이다.
애통자는 특혜를 받은 사람들이므로 자유를 누릴지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사명의 끈을 늦추는 수도 있고 죄를 억제하는 굴레를 느슨하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가 주신 자유는 거룩한 자유이며 죄를 짓도록 하는 자유가 아닌데도 실수를 한다. 죄로부터 해방하는 자유일 뿐이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하라.”(벧전 2:16) 우리가 성결의 영을 꺼버리면 하나님은 위로의 영을 꺼버리실 것이다. 구름이 하나님의 얼굴빛을 가려 버린다.
③ 불만과 토라진 마음 때문에 위로가 부족하게 된다.
불안한 마음은 거친 바다와 같아서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불안은 외적인 슬픔과 우울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때로는 시기나 교만으로 마음이 흐트러져 어지럽혀진다. 불안한 영에게 위로가 정착할 수 없다. 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황금 기름을 멈추지 않게 해야 한다.
④ 주의 약속에 마음을 덜 쏟기 때문이다. 믿음은 약속의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 그 약속을 믿고 사모할 때 받는다. 애통과 위로의 섭리를 따라야 한다.
⑤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쓰기 때문이다. 흙이 불을 끄듯이 세상적인 것은 영혼 가운데 피어오르는 거룩한 기쁨의 기름을 끈다.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땅에서 습기가 올라오는데 그 습기가 등불을 끈다고 한다.


11. 하늘나라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위로잔치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큰 잔치를 기다리자. 호화롭고 웅장한 왕의 장엄한 잔치다. 만족을 주는 잔치다. 하늘의 음료, 불사의 음식, 모자람이 없는 풍성함, 그리스도께서 그의 신부를 초청한 연회장소로, 다시 목마름이 없는 생명잔치다. 성도와 천사,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쁨의 잔치, 희락의 만찬이다. 사랑의 깃발을 꽂으시고 천사들의 찬양이 있고 성도들의 승리의 노래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만찬을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다 지불하였으므로 계산서를 받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은 눈물을 뿌리고 죄를 위하여 심하게 울지만 눈물이 포도주로 바뀔 것이다. 기도와 금식으로 몸을 쳐 복종시키지만 낙원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을 것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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