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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자료]팔복 해설(1)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BY 관리자2018.06.29 10:2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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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8복 해설(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토마스 왓슨의 팔복해설을 요약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팔복의 서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이르시되”(마 5:1-2)

 

설교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의 입술은 꿀벌 집처럼 달뿐만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떨어뜨려 주신다. 그분의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이요, 그의 하신 일은 이적이요, 그의 생활은 우리의 모범이 되며, 그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희생이다. 그는 한량없는 성령을 가지셨으며, 필요할 때 어떤 말씀을 하실 것인가, 언제 겸손하실까, 언제 위로하실 것인가를 아신다. 그분은 말씀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아신다.
그는 권능 있는 설교자이셨다.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마 7:29) 그는 그들의 마음을 그들에게 보여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양심에다 호소하시는 설교자이시다. “마치 그분은 사람 속에 들어가 계신 것 같다.”(루터) 그분은 두 날 가진 검으로 돌 같은 마음도 찔러 쪼갤 수 있다.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 영혼을 회개시키는 기술을 가졌다.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요 10:42) ‘관리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요 12:42)
그의 설교단은 산이었다. 율법을 산에서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해설하셨다. 다볼산이라 한다.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신다. 가난은 부를 축출하지만, 여기서는 가난이 부를 낳는다. 애통은 기쁨을 쫓아내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애통이 기쁨을 낳는다. “저희가 위로를 낳을 것이요.” 물이 불꽃을 끄는 것이 상식이지만, 눈물은 기쁨의 불꽃을 불 붙인다. 핍박은 행복을 축출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핍박이 행복을 만들어 낸다. 신성한 역설이다.

 

제1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1) 심령이 가난한 자
그리스도의 계산서와 세상의 계산서는 맞지 않는다. 세상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바뀌는 재주를 가진 자를 복 있는 자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신다. 세상은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을 복 있다 하나 주님은 산골짜기에 있는 자를 복된 자라 하신다. 모든 성도는 십자가의 상속자들이다.(루터)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천국에 가 있는 것처럼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한다. 의무와 보상을 함께 묶으셨다. 영적인 은혜는 연결되어 있고 묶여져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 하는 자이며, 애통하는 자는 온유한 자이며, 온유한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다. 성령의 은혜들은 한 줄의 진주와 같이 한 줄에 매달려 있고 조합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신부를 장식해 준다.
심령 가난의 뜻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마귀의 가난과 다른 것이다. 그것은 몰지각과 악한 행동으로 스스로를 결핍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또 구별해야 할 것은 은혜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가난한 것이지, 심령이 가난한 것은 아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은 알지 못하도다.”(계 3:17) ‘가난한 심령을 가진 것과’ ‘심령이 가난한 것’을 구별해야 한다. 천박하고 낮은 심령을 가지고 수준 이하의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가난한 심령을 가졌다고 말한다.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색하여 구두쇠로 사는 사람이다. 겉모양만 번드르르한 신앙인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인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들 안에 아무런 선함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절망에 빠져서 전폭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하심만 탄원하는 사람이다. 일종의 자기부정이다.
“그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자비를 구하기 위해 성소로 달려가는 사람을 말한다.”(칼빈)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눅 18:13) 세리의 기도다. 심령가난이 모든 것의 시초가 되기 때문에 서두로 말씀하신 것이다. 심령 가난으로 낮아지면 거룩한 슬픔의 샘물이 거기에 흐르게 된다. 헬라어의 가난에 페네스가 있다. 노동해서 벌어먹어야 하는 물질의 가난이다. 또 하나의 가난은 푸트코스로 자기의 무능함을 깨닫고 무릎 꿇어 구걸하지 않을 수 없는 삶을 사는 심령의 가난이다.
우리가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은혜를 받을 능력이 없다. 스스로 탁월하다고 부풀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 적합하지 않다. 손에 자갈을 쥔 채 황금을 받을 수는 없다. 먼저 비워야 한다. 심령이 가난해질 때까지는 그리스도가 귀중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들어간다고 했기 때문이다. 천국 문은 너무 좁아 가난한 심령으로, 적게 하고 불필요한 것을 잘라 내야 들어간다.
역의 원리로, 심령이 교만하면 저주가 있다. 스스로 의롭다 하는 생각에 감탄한다. 세상에는 너무 선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가 많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만들어 낸 물건이 넉넉하여, 그리스도에게 은총을 입고 꾸어서 사는 자들을 경멸한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경우다. 마귀가 교만으로 부풀려 놓아서 자기의 선을 늘어놓는 가운데 병은 더 깊어진다. 독선보다 더 위태로운 낭떠러지는 없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성격이다. 벌거벗은 것조차 모르는 경지에 이른다. 결국 버림받아 주님의 입에서 토함을 받는다.(계 3:16) 세네카의 계집종이 장님으로 태어났으면서도 그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으려 했다. 집이 원래 어두운 곳이지 자기는 장님이 아니라 고집했다. “유다는 돈을 받고 그의 구원을 팔아버렸고 바리새인들은 그 돈으로 저주를 샀다.”(어거스틴) 자신이 가난한 것을 발견한 사람은 복 있는 자다. “가난이란 보석”을 가진 자다. 어떤 부를 얻기보다는 가난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해결 받는다. “주님! 저에게 그리스도를 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죽습니다.”라 말한다. 그는 자신과는 이혼한 사람이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지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중심이 젖 뗀 어린아이와 같은(시 131:2) 심정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모든 충만함을 흠모한다. 그리스도 예찬론자다. 자신이 상한 것을 깨달을 때 사슴이 시냇물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생명수인 주의 보혈을 갈망한다. 그는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 피난처로 날아간다. 그분의 피에 자신을 씻는다. 자신을 가장 결핍이 많은 사람으로 여긴다. 더 많은 은혜가 없는 것을 슬퍼한다. 위선자는 언제나 그가 받은 은혜를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가 부족한 점을 이야기한다. 자신의 악함을 슬퍼한다. 더 나아가 심령이 가난한자는 겸손하다. 그리고 유순하다. 죄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존경받음도 거절한다.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힘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빠른 진척을 본 것도 성령의 바람 때문이란 것을 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의 탁월함과 자신의 연약함을 본다. 그는 기도를 쉬지 않지만 기도를 많이 했고, 눈물 흘렸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수고하여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한다. 그는 천국 문을 두드리며 눈물을 흘리며 원하는 것을 가지기 전에는 그 문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려한다. 더 많은 은혜를 애걸하고 영적인 자비를 간구한다. 그는 식탁에 떨어지는 조그마한 부스러기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나누는 것으로 만족한다. 아프리카에 선교훈련을 받으러 가는 젊은이가 무슨 준비를 해가지고 가야 하는가의 질문에 선교사는 가난한 마음이면 된다고 말했다.


2) 복이 있나니
①복이 존재하지 않는 곳
행복은 어떤 화학 기술로도 뽑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요한 자가 복이 있나니, 고상한 자가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지 아니하셨는데도, 사람들은 재물을 우상화하고 있다. 학식 있는 사람들이 별 의견을 다 내놓았지만 모두 과녁의 변두리를 맞혔을 뿐이다. 타락으로 사람들은 그 면류관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두뇌까지도 잃어버렸다. 어떤 이교 철학자가 생계수단을 넉넉히 가지는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 하였는데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았으니 평안히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눅 12:19)는 어리석음이 아닐까? 그 날 밤 주님은 그를 호출할 수 있는데.. 복의 나무는 땅의 낙원에서는 자라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죄 때문에 땅을 저주하셨다. 저주에서 복을 끌어내려고 한다. 솔로몬 왕은 가장 재물을 많이 가진 화려한 왕이었다. 호사스러운 음식, 장엄한 건물, 포도원, 물고기 연못, 황홀케 해주는 각종 음악, 기쁨의 향수를 뿌린 물에 목욕을 하였다. 그의 지혜는 세상 지혜자의 으뜸이어서 천하 왕들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 예물을 싣고 와서 드렸다. 영광의 극치였으나 그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전 12:8)란 결론을 맺었다.

 

②복은 겉모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덧없는 것들은 영혼의 소망과 부합하지 않는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할 수 없고.”(전 5:10) 이것들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금으로 그 마음을 채우기보다는 은혜로 채워야 된다. 별들 사이에 집을 지어주어도 만족을 모르는 마음과 쉴 줄 모르는 눈은 여전히 더 높은 곳을 바라볼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은 생명 강에 목욕하고 참된 복에 도달할 때까지는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폭풍속의 마음을 잠잠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은 사람에게 복을 줄 자격이 없는 것이다. 외형적인 것들은 양심의 번민을 치료할 수가 없다. 왕 사울이 마음에 괴로운 상처가 있을 때 왕관의 보석들이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종의 방패가 총을 막을 수 없듯이, 세상의 것들은 영혼의 괴로움에서 지켜줄 수 없다.
잠시 동안인 것은 인간을 복되게 할 수 없다. 세상의 기쁨은 참새 떼가 잠시 머물며 떠들다가 후루룩 날아버리는 것과 같다.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향내를 맡는 동안에 시들어져 가는 꽃다발 같고, 손에 있는 동안에 녹는 얼음과 같다.
“나는 너를 떠나겠다.” 고함지르고 가버린다.(버나드)
괴롭히는 것과 저주 받도록 하는 것은 복 받도록 할 수 없다.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되도록 지키는 것이라.”(전 5:13) “그 재물로 인하여 네가 교만하였도다.”(겔 28:5)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렘 5:7) 부는 올가미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딤전 6:9) 재산을 쌓아 모으려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영혼을 무너뜨렸는가? 부는 모을 때에는 가시가 되어 근심으로 찌르며, 잃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마음을 다친다. 지상의 음료수가 낙원의 음료수로 생각하지 않기 위한 교훈이다.

 

③복이 있는 곳
복은 어디에 있는가? 영혼이 원천이 되는 하나님을 만나면 그것은 완전한 복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영혼이 도취할 만한 즐거움으로 기뻐한다.”(어거스틴) 하나님의 입으로 입 맞춰 주실 때 영혼은 거룩한 황홀경에 들어가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외치게 된다. 물 몇 방울이 아니고 복락의 강물로 마시우게 하신다.(시 36:8) 복은 처음부터 끝까지의 복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이 영원성이 있다.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시 33:12)

 

④복의 실체
많은 진리들이 머릿속에서 헤엄치는데 마음으로는 내려가지 않아서 유익을 주지 못한다. 우리를 복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들에게도 금과 은을 잔뜩 실어주시는 경우가 있다. 그는 주신 자에게 감사를 잃고 오히려 그 무게 때문에 지옥에 내려간다. 복된 삶을 살 때, 내려주시는 그 복을 확실히 믿으며 우리의 눈을 거기에 고정시켜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뭇 반대 방향의 코스로 조종하고 있다. 마귀가 그들의 조종사이며 지옥을 향하여 항해하고 있다. 하늘을 향해 비틀거릴 것이 아니라 울면서 가야 한다. 사람이 독약에서 건강을 마실 수 없는 것 같이 죄에서 복을 뽑아낼 수 없다. 비록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행복의 항구를 준비하시고 그리스도의 피의 바다위로 그곳을 인도하시며 성령의 강풍을 돛에 불어 주신다. 우리가 쓰러질 때에는 한 단계 높여 올려 주신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이 우리의 곁을 지나시며 바라보고 계시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쓴 대접 아래 놓여 있지만, 우리들에게는 잔치 집에 인도하시고 천국의 좋은 것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시는지 감격할 뿐이다.

 

⑤믿음이 깊은 자는 벌써 복을 받았다.
갓 태어난 아이도 어른과 함께 그 속에 생명이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에(요일 3:9) 이제 시작한 복을 영원히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 하나님의 복을 같이 누리는 자가 되었다. 빚 장부는 그리스도의 피로 완전히 지워져서 마치 채무자가 빚이 없는 것처럼 같이 되고, 처음부터 아무 빚이 없는 것처럼 된 것이다. 전혀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할 것임이니라.”(렘 50:20)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자이기에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리라”는 기분 좋은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는 특권을 누린다. 아버지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된다면 하나님이 총애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와 긴밀한 관계에서 산다.
하늘나라를 상속하게 되기 때문이다. 지옥 상속이 면제 된 사람이다. 천국 상속권을 손에 쥐고 있다. 지상에서부터 누린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하나님의 백성은 여기서 복을 시식하고 천국을 맛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실제로 소유하기 전에 포도송이를 맛본 것처럼 성령의 비밀스러운 맛을 본다. 그들 자신이 때로는 천국에 있는 것 같이 생각한다.


3)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성도들을 위한 높은 승진이 있다. 왕국에까지 올라간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복의 극치이며 영예를 갖는다. 왕들이 된다. 죄와 죽음은 완전히 정복되고 하나님의 천사와 더불어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영광을 누린다.

 

① 성도들은 왕들로 비유된다.
왕관을 가지고 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믿는 자는 죄의 용서함을 받을 뿐 아니라 면류관까지 받는다. 면류관은 아무 머리에나 맞는 것이 아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의 몫이다.
순수한 관이다. 이 왕관은 다윗의 수금과 같이 슬픔과 불안의 악령을 몰아낸다. 지옥에서 기쁨이 있을 수 없는 것같이 천국에선 슬픔이 있을 수 없다. 세상의 왕들이 쓰는 왕관은 비록 순금으로 만든 것일지라도 고민거리가 생기고 두통을 일으키는 것들이다. 근심을 섞어 만든 합금이다.
이 왕관은 시기심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윗의 친 아들들은 왕관을 자기 머리에 쓰려고 반란을 일으켰다. 세상의 왕관은 탈취하려는 야망을 일으킨다. 성도들이 쓸 왕관은 자기 머리에 맞는 것을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 것이 더 크더라도 시기할 수 없다.
결코 쇠하지 않는 왕관이다. “장미나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터틀리안) 다른 왕관들은 빨리 낡고 달아서 쓰레기 속으로 던져 버리게 된다. 이 왕관을 탐내는 많은 상속자와 후계자가 있다. 죽음이 그 안에서 자라나는 벌레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받는다.(벧전 5:4)

 

② 왕복을 가지고 있다.
“이 일후에 내가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계 7:9) 성도들의 옷은 그들의 영광과 찬란함을 나타내고 흰 옷은 그들의 성결을 뜻한다. 그들의 옷을 얼룩지게 하거나 더럽힐 죄가 없다. 이 옷을 입으면 그들은 천사들처럼 빛나게 될 것이다.

 

③ 왕의 홀을 가진다.
통치의 위대함의 표로서 왕 홀을 가진다. 손에 종려가지를 가진다. 승리와 개선의 상징이다. 죄와 지옥을 이긴 승리자들이다.

 

④ 왕들은 그들의 보좌를 가진다.
높은 보좌다. 땅위의 모든 왕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는다. 이 보좌는 안전한 보좌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계3:21) 지금은 인간의 심판대 앞에 설지라도 잠시 후면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게 된다.

 

⑤ 하늘의 왕국은 뛰어나다.
창건자가 뛰어나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셨다. 천국은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고후 5:1) 사람도 천사도 하나도 이 건물에 돌 하나도 놓을 수 없다. 탁월하다.

 

⑥ 부요함에 뛰어나다.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다.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다.(계 21:19) 진주 문들이다.

 

⑦ 완전함에 뛰어나다.
여기에는 기쁨과 진품으로 가득 차 있다. 아름다움과 지혜, 영광, 장엄함이 있다. 낙원 한 가운데에 생명나무가 있다. 죄와 슬픔을 찾을 수 없다. 왕국의 충만함이 있다.

 

⑧ 안전성에 뛰어나다.
세상 나라는 외부의 침략이나 내부의 분열을 두려워한다. 여기는 마귀는 결박하여 가두었고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평온하다.

 

⑨ 견고함에 뛰어나다. 앗수르, 헬라, 바벨론, 로마 등 세계에 명성을 날렸던 강국들은 다 뒤집혀지고 티끌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그 위에 ‘영원’이라고 써 붙였다. 흔들리지 않는 나라다.(히 12:28)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라.”(계 22:5) 우리에게 이 영원한 나라를 주셨다.

 

⑩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
수고를 가로채고 보상을 무시하는 분이 아니시다. 회개의 교훈을 듣고, 죄를 슬퍼하는 비판의 눈물에 적시며, 고행의 교훈을 듣고 마음의 오른 눈을 뽑고 죄의 왕을 목 자르게 될 때, 이 쓴 약을 삼키기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왕국이 따라오고 거기서 모든 보상을 넘치도록 주실 것이다. 정탐꾼들이 좋은 땅에 나쁜 보고를 한 것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방법에 헐뜯었음이 탄로 날 것이다. 벌레들이(시 22:6) 왕이 되는 셈이다. 바로 왕이 요셉에게 영예를 주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지만 왕국만은 자기가 잡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왕국을 주시고 보좌에 앉히신다. 영광으로 끝을 맺으신다. 세상의 비난을 머리 둘레에다 면류관으로 묶으라. 그들의 비난을 그들의 칭찬과 마찬가지로 경멸하라. 죄는 지옥으로 이끌지만 은혜는 면류관으로 인도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왕국으로 올라가게 하는 계단이다.

 

⑪ 하늘에 속했는지? 정밀 검사를 하자.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은혜의 왕국이 마음에 세워졌는가? 교만과 정욕 그리고 불신앙을 억제하는 왕인가? 은혜의 왕국이 있어야 영광의 왕국에 들어간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아랫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는 말씀대로 사는가? 용감하고 당당한 영, 거룩한 야망을 가지고 있는가? 세상의 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는가? 천국이 여러분의 눈에,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마음에, 세상이 여러분의 발아래 있는가? 왕 같은 영을 가진 사람은 높은 곳에 살게 될 것이다.

 

⑫ 진지한 권면
천한 정욕에 도취하여 왕국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 쾌락을 핥아 먹다가 생명의 면류관을 잃지 마라. 죄의 웃는 얼굴을 쳐다보지 말고 그 결말을 보아라. 왕국을 버리느라고 정신없이 서두를 만큼 어리석은 바보짓을 했을 때, 마지막 날에 마귀가 그 사람을 오히려 꾸짖고 비웃지 않겠는가? 그것은 인디안들이 그림 몇 장이나 유리구슬을 얻으려고 그들의 금덩이를 내 주는 것과 같다.
왕국을 얻었는가? 이제부터는 주님께 마음껏 쓰임을 받아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을 보여라. 하나님을 위하여 한 일이 얼마나 적은 것임을 깨닫고 울고 울어라. 여러분의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돌려라. 은혜 받기 알맞은 환경과 봉사의 기회를 만들라. 일을 더하면 할수록 여러분은 영광을 더 얻을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더 봉사할수록 그의 왕국이 더 커질 것이다. 지옥의 왕국에도 등급이 있다.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눅 20:47) 그렇다면 천국의 등급에도 그럴 것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계 22:12) 면류관이 더 빛나게, 왕국이 더 크게, 종려나무가지가 더 무성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우리가 투자를 하면 하나님은 비축을 하신다.

 

이 왕국에 어울리게 걸으라. 왕답게 살라. 거룩한 위엄이 얼굴에 나타나게 하라. 천사의 얼굴과 같아라.(행 6:15) 천사의 밝음이 스데반의 용모에 보였다. 지금 세상에 누더기 옷을 입고 산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얼마 안 되어 생명수를 마시리라. 천국이 내 것이 될 것이다. 비길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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