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주기도문
주기도문 강해(하)
(토마스왓슨의 주기도문 해설을 요약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네 번째 간구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매일의 양식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우리는 모두 구제물과 증여물로 생계를 잇는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시고.” 후하신 하나님의 손길로부터 일체를 무상으로 받는다. 기도로 모든 자비를 구한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구제품을 준다 해도 주의 손으로 받은 것을 주께 드릴 뿐이다.(대상 29:14) 만일 우리가 주를 찬양한다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혀도 주시고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감각을 주셨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선물이라면 공로를 자랑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친절을 받을만한 공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본성이 아름다우셔서 가장 품질 좋은 것으로 먹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황금의 자비를 베푸신다. 그는 항상 주시는 손을 가지고 계신다. 그는 주시기를 싫증 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구호물의 꿀벌 집은 아직도 방울져 떨어지고 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주기를 기뻐하듯 우리 입에 자비의 젖을 물고 있을 것을 기뻐하신다. 그의 풍요함은 원수들에게도 식탁을 펴 놓으신다. 이슬을 장미꽃 위에도 내리시지만 가시나무 위에도 내리신다.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여 벌린 입에도 빵을 넣어 주신다. 하나님의 왕다운 대담함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1)
모든 것이 선물이라면, 주는 자에게 죄를 짓는 배은망덕을 보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떡을 주시지만 그들은 그에게 모욕을 준다. 하나님의 자비를 잊어버릴 뿐 아니라 악용한다. “내가 그들을 먹인즉 그들이 행음하며.”(렘 5:7) 그들에게 체력을 주시니 창녀에게 허비한다.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신 32:15) 비열한 대응만 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다면 감사함이 우리가 산출하는 수확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매일의 양식을 주신다면 우리도 매일의 감사를 드려야 옳다. 교만은 감사의 흐름을 정지시킨다. 자기가 받은 것을 자기 자신이 획득한 것이어서 자기가 그 공로로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함으로 강퍅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식단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고기를 먹게 할꼬” 하면서 불평을 말했다. 그래서 고기가 입에 씹힐 때에 그들은 재앙을 받았다.(시 78:30-31) 라헬은 아이를 가지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죽으리라” 앙탈을 부렸다. 아이를 낳았지만 슬픔의 아들이었고(베노니. 창 35:18) 그 아이는 출산되면서 그 어머니의 생명을 희생시켰다. 우리의 간구는 거룩한 목적이어야 한다. 한나는 아이를 위해 기도했지만 그녀의 아이가 하나님께 바쳐지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하나님께 바쳤다.(삼상 1:28)
만일 우리가 현세적인 것들을 위해 기도할진대 하물며 영적인 것을 위해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는가? 우리가 빵을 위해 기도할진대 생명의 빵을 위해 얼마나 더 기도해야겠는가? 먹을 것은 가지고 있으면서 은혜가 없다면 무슨 소용인가? 등에는 옷 입었어도 영혼은 벌거벗었다면 무슨 소용인가? 땅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리스도의 피의 샘물이 없다면 무슨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주여, 나를 먹이실 뿐 아니라 나를 성화시키시옵소서! 황금으로 가득한 집보다 은혜로 충만한 마음을 주옵소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라는 기도를 해야만 한다.
비록 빵이 우리 손에 있다 하더라도 축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며, 그래서 기도에 의해 이것이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꺼내져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축복을 거두신다면 우리가 먹은 것은 나쁜 체액으로 변할 것이며 죽음을 재촉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재물에 축복하시지 않으신다면 그것이 유익보다는 해를 더 끼칠 것이다.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전 5:13)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축복을 받아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창고에 곡식을 가지고 있다가도 갑자기 불이 나서 모두를 태워버렸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바다에서 손해를 보았으며 막대한 재산이 무로 증발해 버렸는가!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1) 그러므로 재산을 가졌어도 ‘주소서’ 하여야 한다. 우리도 모르게 날개 돋친 듯 날아갈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
2) 왜 ‘우리에게’ 주소서 말하는가?
달팽이가 그 껍질 속에 갇혀있듯 자신들 속에 감금되어 있기를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그래서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공적인 정신을 가지시기를 원하신다. 모든 선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의 결핍과 불행에 대해서 동료의식을 가지며 하나님의 자비를 그들에게 베풀도록 원하신다. 선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하듯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한다. 샘물은 그의 수정 같은 시냇물로 다른 사람들을 생기 나게 한다. 태양은 그의 황금 같은 햇살로 다른 사람들을 밝게 비춰준다.
3) ‘오늘’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후손을 위해서 저축하는 것은 합법적이다. 그러나 주님은 왜 1년이나 1개월 것을 주시라 말씀하시지 않고 오늘이라 했는가? 장래를 위해서 큰 재산을 어떻게 쌓을까 하여 우리의 정신을 불안하게 하거나 스스로 괴롭히지 않기 위해서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 하신다.(마 6:3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루하루 먹도록 하셨다. 더 나아가,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인 양 매일같이 이 정신으로 살 것을 가르치고자 하심이다. 어쩌면 오늘이 우리가 살 마지막 날이 될 것이고 그러면 내일은 더 이상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하루 동안의 빵만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당신에게 평생 사용할 충만한 양식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4)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인가?
식료품, 연료, 의복, 현세적인 필수품 등 모든 축복을 말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할당액으로 감사하기를 배워라. 그러나 우리에게 심겨진 악덕으로 거머리의 딸들처럼 ‘다오 다오’(잠 30:15) 하면서 할당액이 넘는 욕구로 불만을 소리친다. 많은 사람이 아굴의 첫 번째 기도인(잠 30:8)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를 기도하지만, 그의 마지막 기도인 ‘부하게도 마옵소서’는 극소수만 기도한다. 그들은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탐욕의 병에 걸려 있다. “자기의 욕심을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합 2:5)이다. 헬라어 탐욕어 플렉오네시아는 과도한 욕망을 의미한다. 탐욕은 우상숭배자로 만든다.(골 3:5) 교회에서는 조각한 우상 앞에서 경배하지 않지만 화폐 속에 조각한 우상 앞에는 예배한다.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하신다.(히 13:5) 많은 사람이 황금의 중량 때문에 지옥으로 빠져 버렸다. 우리가 보다 더 적은 양식을 가지고 있다면 올가미도 적어진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딤전 6:9)
만일 하나님이 빈약한 식품을 공급하신다면, 그는 영적인 것에서 메워 주셨다. 값진 진주인 예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과 양자 삼으심과 왕관 수여를 받을 수 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의 바다는 우리의 모든 결핍을 삼켜버릴 것이라고 루터는 말한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곡식과 포도주보다 더 좋은 것을 주셨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라고 했다.(시 16:6) 인생을 안락하게 하는 것은 풍부하게 가짐이 아님을 곰곰이 생각하라. 지팡이가 여행자를 도울 수 있지만 한 다발의 막대기들은 짐이 된다. 큰 재산은 기다라서 질질 끄는 의상과 같아서 더욱 짐스럽다.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보상, 흰 두루마기, 번쩍이는 면류관, 쾌락의 강을 보장받고 있다. 당신보다 더 훌륭했던 사람들도 세상에서는 당신보다 훨씬 비천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세상은 하나의 큰 여관일 뿐이다. 숙박비를 낼 정도면 만족하라. 비록 아래 샘은 끊어질지라도 위의 샘은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만물의 주인 되시는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가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는 그대의 재산을 가지고 무슨 큰일을 했는가? 그것으로 주님을 얼마나 존귀케 했는가? 소득이 더 높으면 높을수록 그만큼 계산도 더 큼을 알아야 한다.
■ 다섯째 간구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
1) 영혼의 탁월성
이 기도에, 몸을 위해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한 가지인 반면, 영혼에 대해서는 두 가지, 즉 죄를 사해주심과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심의 간구다. 영혼의 탁월성 때문이다.
영혼은 하나님의 호흡에 의해 점화된 하늘나라의 불꽃이다. 인간의 보다 세련되고 영적인 부분이다. 이것은 천사적인 성질을 가졌으며 어느 정도 하나님과 희미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몸은 보다 천한 부분이며 비록 정교하게 만들어졌지만 보관 상자일 뿐이며 보석은 영혼이다. 영혼은 거의 천사와 동종이고 이것은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과 영교를 할 수 있다. 영혼은 불멸이며 결코 사멸되지 않는다. 몸은 티끌로 분해되지만 영혼은 살아있다. 그러므로 영혼에 대해 더 주의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영혼보다도 동물적인 몸을 사치스럽고 비싼 돈을 들여 치장한다. 사람들은 영혼은 헐벗고 굶주려 있는데도 개의치 아니한다. 몸은 높은 의자에 앉아 있으나, 왕자다운 존재인 영혼은 마귀의 심부름이나 하는 하인배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 잃어버린다 해도 당신의 영혼은 지켜야 한다. 만일 영혼이 잘 되면 몸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영혼을 구원함으로 몸의 행복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주인으로 보살핌을 받게 해야 한다. 영혼을 잃는다면 그 손실을 보상받을 수 없다.
감옥에서 아무리 잘 먹는다 해도, 죄가 없어지지 않아 감옥에 계속 있다면 행복할 수 없다. 일용할 양식은 식욕을 만족 시키겠지만 죄의 사하심은 양심을 만족시킨다. 일용할 양식이 풍족해도 당신은 멸망할 수 있다. 날마다 호화스러운 삶을 누렸던 부자가 음부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눅 16:19, 23) 그리스도의 한 방울의 피, 한 그램의 용서하시는 자비는 태양 아래에 있는 모든 기쁨보다 가치가 더 있다.
2) 죄는 빚이라.
죄는 1만 달란트의 빚에 비유한다.(마 18:24) 죄인은 채무자다. 지불하지 않는 데서 또는 마땅히 치러야 할 것을 치르지 않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격히 순종을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만일 치르지 않으면 감옥에 간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유죄 판결의 저주를 받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갚을 능력이 없다. 아담이 우리를 파산자로 만들었고 그의 후손을 가난하게 만들었다. 왕의 인격을 거스르는 범죄는 반역죄이며 하나님을 제외시키려 한다. 영적인 빚은 셀 수가 없도록 많다. 우리의 죄를 부인할 수가 없다.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목전에 낱낱이 드러내리라.”(시 50:21) 하나님에게서 도피할 수도 없다. “내가..주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7, 9, 10) 그런데도 인간들은 사탄의 마취제에 취해 많은 죄를 짓고도 태평하다.
3) 죄를 사해주시라는 고백을 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요일 1:9) 하나님의 자비다. 그는 양자로 삼으시고 성화시키시고 왕관을 씌우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6) 오직 그의 피로서다.(엡 1:7) 회개는 구원의 조건이다. 아무리 적은 죄라도 죽음을 가져오므로 죄 사함은 절대 필요하다. 죄에 대한 통회가 먼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백을 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길을 걸어야 한다. 탕자가 창기 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감과 같다.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막 2:7) 채권자가 채무자를 대가 없이 용서할 때처럼 그렇게 용서하신다. 죄와 형벌까지 모두를 면제하신다. 원어와 영어성경에는 ‘죄들’이라는 복수로 되었다. 셀 수 없는 죄들을 하나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다. 성직자에게 위임된 죄 용서의 권세는 오직 선언적으로만 할 수 있다.(요 20:23) 그들은 상한 심령들에게 용서의 약속을 적용시킬 특별한 권위와 직분을 가지고 있다. 용서받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제사장에게 보내어 깨끗하게 됨을 제사장이 선고하도록 보내심과 같다.(마 8:4)
4) 형제를 용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원인은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조건이 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고백한다.
‘같이’라는 단어는 동등의 의미가 아니고 유사의 의미다. 용서함에 있어서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그를 모방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인류의 죄를 용서할 자격은 없지만 형제의 허물을 용서할만한 은혜는 받았다. 우리가 원수를 신뢰할 의무는 없으나 용서할 의무는 있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복수심이 있다. 이방인 철학자들은 복수를 합법적으로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계시 말씀으로부터 보다 선한 것을 배웠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 11:25)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피해를 복수하는 것보다 파묻어 버리는 것이 명예가 된다.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잠 19:11)
아아, 어디로 사랑과 긍휼이 달아났는가? 만일 인자가 오신다면 땅 위에 사랑을 발견하실 수 있을까? 분노와 악의를 품은 자들이 입으로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한 것 같이 용서하여 달라는 가증한 기도를 어찌하면 좋을까? 복수심에 불타는 정신은 우리의 성찬에 독을 넣으며 우리의 기도는 죄로 변한다. 하나님이 다른 불과 뒤섞인 기도를 받으시겠는가? 유다는 악의를 가지고 유월절에 나갔으며 그래서 한 조각을 받은 후 사탄이 그에게로 들어갔다.(요 13:27)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으로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이 사람을 용서하지 아니함으로도 지옥에 갈 수 있다. 사람에게 무자비한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까? 긍휼이 없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 2:13) “비록 나는 지옥에 가더라도 그를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다. 재앙을 영원히 지고 살겠다는 것이리라. 하나님께는 수많은 반칙을 하면서, 당신을 향한 형제의 서너 가지 반칙은 용납할 수 없단 말인가?
칼빈은 악담하는 자에게 “비록 그가 나를 1천 번이나 마귀라 부른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그를 귀하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다”고 말했다. 어떤 박해자가 그리스도인을 향해 욕하면서, 무슨 기적들을 그리스도가 당신에게 행하였느냐고 조롱할 때 “비록 당신이 나에게 그토록 해를 끼쳤지만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고, 그리고 당신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기적을 그는 행하셨소”라는 말로 대답했다. 요셉은 자기를 노예처럼 팔아넘긴 형들에게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1) 요셉은 용서와 사랑으로 깔끔하게 20년의 원한을 날려버렸다. 원수를 한 대도 때리지 않고 굴복시키는 멋진 인생이다.
■ 여섯째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1) 시험들은 어디서 오는가?
① 안으로부터 온다. 마음은 죄의 불쏘시개요, 모든 악의 사육자다. 자신의 마음이 최대의 유혹자이고 각자가 자신에게 사탄이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의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② 밖으로부터 온다. 즉 사탄으로부터 온다. 그는 시험하는 자라고 불린다.(마 4:3) 그는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매복한다. 마귀는 전투준비를 하고 서 있으며 마귀는 우리 은혜의 보루를 폭파시키려고 유혹을 건다. 그는 아직 완전히 옥에 갇히지는 않았고 다만 보석 중에 있는 죄수와 같다. 세상은 그의 감독 관할이다. ‘성도의 전 생애는 시험’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하였다.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의 큰 위험 속에 처해 있으며 그래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라는 기도를 드린다.
2) 사탄은 어떤 존재인가?
① 악의 독으로 가득한 자다. 이 지옥의 뱀은 악의의 독으로 부풀어 올라 있다. 영광스러운 천사였던 그가 낙원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분노가 증오로 가득 차(계 12:12) 격분과 악의로 영혼들을 파멸시키는 일에 기쁨을 가진다. 선택받은 자에게도 신성모독 죄를 짓도록 유혹한다.
② 사탄은 부지런하다.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 우는 사자는 먹이를 구하며 변절자를 만들려고 땅과 바다를 일주한다. 어디에다 시험의 불덩이를 던질까 망을 본다. 그는 휴식 없는 영이다. 시험에 먹혀들어 이득을 본다면 바짝 뒤따라가며 밀어붙인다. 그는 다양한 방법으로 일을 성사시킨다. 육욕이 타오르도록 유혹하지 못하면, 교만하도록 유혹한다. 탐욕으로 성공하지 못하면, 낭비벽으로 유혹한다. 여러 개의 연장을 가지고 목표를 성사시킨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가진다.
③ 그는 강한 자다.(막 5:4) ‘이 세상 임금이다.’(요 14:30) 그는 거룩을 잃어버렸지만 그의 힘은 잃지 않았다. 악한 영향력을 인간의 마음에 넣어준다. 내부에서 부패를 자극시키고 유혹을 전달한다. 어떤 새는 다른 새의 알을 자기 것인 줄 알고 품에 품고 까는 수가 있다. 우리는 가끔 마귀의 의향을 자기 것인 줄 알고 부화시킨다. 다윗도 인구조사 하도록 마귀의 충동을 받아 끔찍한 재앙을 몰아왔다.(대상 21:1)
3) 사탄은 교활한 자다.
① 첫째 교활: 사람의 타고난 체질과 기질을 교묘히 이용한다.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알지 못하지만 맥박을 감지하고 기질을 알아 각자의 개성에 맞는 유혹을 선별하여 공격한다.
② 둘째 교활: 유혹할 시기를 물색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추격한 것 같이 예수님을 막 영접한, 연한 싹을 자르려 공격한다. 잘 때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듯(마 13:25) 우리가 게으를 때도, 궁핍과 궁지에 몰릴 때도, 반면 은혜가 충만할 때도 역시 맹공격을 퍼붓는다.
③ 셋째 교활: 성경말씀을 유혹의 도구로 삼는다. “기록되었으되”(눅 4:10)로 넘어뜨리려 한다. 양심에 어긋난 부정한 승진을 제시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에게 선을 베풀기 위함 때문이라고 변명케 한다. 교활한 공작원이다.
④ 넷째 교활: 점진적으로 죄짓도록 유혹한다. 옛 뱀은 점점 칭칭 감아 들어온다. 처음에는 작은 죄로 유혹하여 우정의 노끈 속에 엉켜 들게 하여 결국은 소름 끼치는 죄에게로 인도한다.
⑤ 다섯째 교활: 신임할 만한 사람을 이용한다. 욥은 아내를 통해 “순결을 지키는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공격을 받았다.(욥 2:9)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십자가 피하라는 유혹을 받았다.
⑥ 여섯째 교활: 쉽게 먹혀들 사람을 고른다. 분별력이 없는 무식한 사람, 하나님의 존재와 지옥을 믿지 않는 죄의 심각성을 모르는 불신자, 교만한 자, 우울한 사람, 게으른 사람을 고른다.
⑦ 일곱째 교활: 도망가는 척하는 속임수를 쓴다.(눅 4:13) 사람들이 안전감을 가질 때, 승전감을 가질 때 갑자기 공격한다. 항상 깨어 있으라는 예수님의 당부를 단단히 가져야 한다.
⑧ 여덟째 교활: 경건생활에서 떼어놓는 교활이다. 기도의 가치를 의심하게 하여 낙담하게 한다. 신앙의 발전의 미약함을 들어 아예 포기하게 한다. 경건생활의 막중함을 부각시킨다.
⑨ 아홉 번째 교활: 죄를 미덕으로 꾸민다. 복수심을 후환을 없애려는 신중성이라고, 낭비벽을 선한 손님 대접이라고, 탐욕을 검약이라고 해석한다. 독약 병 위에 향수라고 써 붙이는 것이다.
⑩ 열 번째 교활: 합법적인 일을 통해 패망케 한다. 먹는 것은 합법적이나 과식함으로 올가미가 된다. 친척은 합법적이나 도에 지나친 사랑은 질서를 파괴한다. 계명을 외식으로 행한다.
⑪ 열한 번째 교활: 일반적인 부르심인 하나님을 섬김과 특별한 부르심의 직업을 가짐에 혼란케 한다. 믿음으로 산다는 구실로 생활에 근면하지 않거나 먹고사는 일로 주의 일에 태만하다.
⑫ 열두 번째 교활: 거룩을 지겨워하도록 신앙을 우울한 것으로 표현한다. 면류관을 숨기고 십자가만 보여주고, 사람들로 무신론에 빠지도록 성경의 진리를 왜곡시킨다.
⑬ 열세 번째 교활: 거짓 것을 믿게 하도록(살후 2:11) 거짓말하는 영으로 활동한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고후 11:14)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벧후 2:1) 성도들을 올가미에 들게 한다.
⑭ 열네 번째 교활: 즐거운 미끼를 놓아둠으로 함정에 빠뜨린다. 황금이나 쾌락에 맛 들게 하고 번영을 약속하여 진리의 핵심에서 비껴가게 한다.
⑮ 열다섯 번째 교활: 상인은 거짓말하지 않고는 장사할 수 없다는 필요성의 구실로 죄짓도록 한다. 구실이 자기의 죄를 가볍게 해주지는 않는다.
⑯ 열여섯 번째 교활: 억측하도록 한다. 은혜 없을 때도 자기는 웬만한 은혜가 있다고 억측한다. 실수를 하고도 하나님의 자비는 이 정도는 용서해 줄 것이라고 억측한다. 주제넘게 한다.
⑰ 열일곱 번째 교활: 우정을 베풀면서 유혹한다. 40일 굶주려 배고프신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우정으로 왔다. 하와에게는 지혜를 가질 비결을 알려주는 친한 벗으로 왔다.
⑱ 열여덟 번째 교활: 자기의 의도를 드러내지 말라고 설득한다. 몹쓸 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의사에게 병을 숨겨 죽으라는 논리다. 숨길 수 있는 줄로 믿게 하여 죄사함에서 멀게 한다.
⑲ 열아홉 번째 교활: 흉계를 진행시킬만한 적절한 자를 고용한다. 족장과 지도급 인사를 끌어들여 고라는 대적자가 됐다.(민 16:1) 설득하여 자기 패거리로 만들고 우정의 끈으로 묶는다.
⑳ 스무 번째 교활: 믿음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믿음이라는 방패(갈 6:16)가 부서지면 자기방어가 안 된다. 은혜를 파괴할 수는 없지만 약화시킬 수는 있다. 믿음은 은혜들의 왕이다. 믿음은 모든 것을 믿게 하는 사탄에게 가장 손해를 끼치는 힘이기 때문이다.
㉑ 스물한 번째 교활: 육신을 즐겁게 하는 교훈을 장려한다. 하늘나라에 가는 쉬운 길이 있다고, 엄격한 경건과 열심은 필요 없다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함으로 방종하게 한다.
㉒ 스물두 번째 교활: 거룩한 의무를 방해한다. 묵상하는 것, 금욕하는 것, 자기반성 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의무를 감당함에 낙담하게 한다. 의무를 과도하게 하여 지치게도 한다.
㉓ 스물세 번째 교활: 죄지어도 회개만 하면 회복된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죄를 쉽게 짓게 한다. 들릴라의 품에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오기가 쉬울까? 죄 회개를 쉽게 생각하여 지옥에 간다.
㉔ 스물네 번째 교활: 선을 행하되 시기적절하지 않게 한다. 성경 읽는 것은 선한 일이지만 성찬식에나 설교 중에 읽는 것은 선하지 않다. 금식하라 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즐겼다.(사 22:12, 13)
㉕ 스물다섯 번째 교활: 회개를 지연시킨다.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학 1:2) 아직 젊다는 핑계로, 바쁘다는 구실로, 이 직업 청산 후 회심하리라는 핑계로, 회개의 기회를 놓치게 한다.
㉖ 스물여섯 번째 교활: 성도들의 평화를 급습하여 약화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좋은 교제와 사귐을 시기하여 평화를 어지럽힌다. 간교하게 악한 생각을 전달하기도 한다.
㉗ 스물일곱 번째 교활: 사람들을 자멸하도록 유혹한다. 자살이 안위를 줄 것으로 생각하게 한다. 염세주의나 무신론적인 책을 통해서도 절망에 빠지게 한다.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라는 기도를 간절히 드릴 수밖에 없는 나약한 육체들이다.
4)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죄는 가장 증오할 악이다. 복음을 훼손시키는 고약한 죄의 행위와 죄의 권세와 관행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① 죄의 기원: 죄의 족보는 마귀에서 나온다.(요 8:44) 악은 옛 뱀(마귀)이 우리의 순결한 성품 속에 뱉은 독액이다.(어거스틴) 마귀는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다. 악의 발명자다.
② 죄의 본성: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므로 본성으로 악이다. 죄에 대한 히브리어 단어는 반란을 의미한다. 배은망덕이다. 사람을 비열하게 만든다. 영혼의 평화를 깨트려 지옥 만든다.
③ 경건한 자의 편에서 보면: 모세는 세상 낙을 누림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고난받는 것을 택했다.(히 11:25) 사자 밥이 되는 것을 택하면서 우상 앞에 절하지 아니했다.
④ 비교해 보면: 최대 나쁜 것은 죄다. 바다만 한 환난보다 한 방울의 죄 속에 더 많은 악이 있다. 죄의 상자를 열면 세상의 무서운 저주들이 다 거기에 있다. 죄는 지옥으로 이끈다.
⑤ 죄의 치료방법: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려고 죽으신 은혜 오직 이것뿐이다. 예수님의 온 육체가 하나의 상처였다.
⑥ 참담한 결과: “죄의 값은 사망이다.”(롬 6:23) 죄는 그의 동반자로 부끄러움을, 그의 급료로 죽음이 지불된다. 세세토록 지옥의 불 속 외에는 영원한 상실이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야만 하기에 악에서 구출해 주시라는 애원의 간구를 붙들어야 한다. 자기의 고통을 없애달라는 기도보다는 죄와 악함에서 구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요셉을 감옥에서, 세 청년을 풀무 불에서,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구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악에서도 건져내실 것이다.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단 3:29) 악에서 언제나 건짐 받는 은혜를 구하고 누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