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주기도문 강해(상)
BY 관리자2018.02.23 10: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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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주기도문

주기도문 강해(상)

(토마스왓슨의 주기도문 해설을 요약함)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1.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십계명이 하나님이 친히 쓰신 생활의 규칙이라면,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기도의 모범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언약궤의 모형을 지시하신 것처럼 말이다.(출 25:9) 이렇게 기도하란 말은 '이것으로 네가 네 기도를 꾸밀 규칙과 모형을 삼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규칙에 따라 점검할 필요가 있다. 모든 간구는 주기도문에 들어있는 내용과 일치하고 조화시키라는 것이다. 기도의 오류를 방지할 수 있게 된다. 견본을 가지고 있을 때 쉽사리 실수할 수 없다. 그의 뜻대로 기도해야 들으시기 때문이다. 도덕법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쓰인것처럼, 이 기도는 예수님의 입술로부터 나왔다. 그 음성은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다. 솔로몬의 아가가 그것의 우수성 때문에 노래 중의 노래가 된 것처럼, 이것은 기도 중의 기도라 부를만하다. 기도의 포괄성과 함축성 때문이다. 몇 마디 말 중에 많은 분량이 진술되어 있다. 조그만 지도 속에 두 천체를 교묘히 그려 넣는 데는 최대량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 짧은 기도는 신학의 한 체계 또는 조직체이다. 명확성 역시 그렇다. 평이한 내용으로 이해가 가능하다. 더 나아가 완전성 역시 뛰어나다. 주요 사항이 모두 이 안에 간직되었다.

 

2.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서문)

아버지는 때때로 개인적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본질적으로 신성 전체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하늘에 있는 너희 성도들이나 천사들이여, 우리를 들으라." 따위의 말은 전혀 없다. 다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한 것이다. 아들과 성령도 포함된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를 붙이시는 것은 사랑과 겸손의 표현이다. 아버지라는 정다운 이름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자비를 지닌 이름이다.

창조에 의해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28) 뿐만 아니라 택하심에 의해서 아버지시다. 우리를 택하시어 성령으로 새로 나게 하시어 하나님께로 난 자가 되게 하셨다.(요일 3:9) 이 특권은 오직 믿음으로이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6) 불신자는 하나님을 그의 창조자, 심판주로 부를 수는 있어도 그의 아버지라고는 부르지 못한다. 세례는 우이로 교인이 되게 하지만 믿음은 우리를 혈족관계를 이루어 자녀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사 43:4)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6) 권능 있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왕자들이다. 믿음으로 발음된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가 하나님을 이긴다.

 

■ 하늘에 계신

나의 애통을 상의할 만한 곳이 하늘 외에는 아무 데도 없다. 소송을 청구하려고 하늘에까지 나아간 그 영혼에게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그는 존귀와 권위를 입으시고 온 인류를 살피신다.(시 104:2)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하늘에서 그는 우주를 다스리시고 자녀들의 사정을 처리하신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셀라). 하나님의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시 57:3) 하늘로 가는 길은 절대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인정해야 한다.

 

■ 우리 아버지

아버지는 공경심을 나타내고, '우리 아버지'는 믿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에서 우리는 믿음을 행사해야 한다. 믿음의 기도에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은 믿음의 기도라고 불리운다. 믿음이 없이는 이것은 지껄이는 것이요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기도에서 필수요건이다. 기도는 사격하는 총이고, 열정은 발사하는 불이고, 믿음은 은혜의 보좌를 꿰뚫는 탄알이다. 기도는 하늘나라의 열쇠라면 믿음은 이 열쇠를 돌리는 손이다. 우리 아버지라고 믿음으로 기도하라. 믿음의 기도를 손으로 잡듯 붙잡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믿음 없이 기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기도에 믿음을 혼합시켜라. 그는 비록 그대에게 얼굴은 보여주시지 않으실지라도 그대에게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이다.

 

■ 첫째 간구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여섯 가지 간구 중 첫째 간구다. 천사들의 노래다. "가장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이라는 노래는 그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고 거룩하게 되어지이다의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할 뿐 아니라 첫째 되어야 한다. 생활보다 더 선행되어야 하고 구원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롬 9:23) 하늘나라는 배고픔이 없기 때문에 천국에 가서는 일용할 양식을 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한 기도도 역시 무익하다. 옛 뱀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이 거룩함 받고 찬양할 일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지정하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 때,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 고대에는 이 날을 빛의 날이라 불렀는데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비상한 방식으로 비취시기 때문이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이야기 하고 싶을 때 애굽인들을 쫓아낸 것처럼, (창 45:1) 땅 위의 작업들을 쫓아내고 온종일 하나님과 함께 지내야 한다. 이날이 강탈당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날이 모독당하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모든 명예를 하나님께 돌릴 때, 그의 이름이 성결케 된다. 헤롯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횡령하여 하나님께 불명예를 돌렸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행 12:23)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시 115:1)

주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

주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공경하였다. 노년의 아들이고 약속의 아들이었지만 희생제사로 드릴 각오가 되었다. 동방 박사들은 무릎 꿇어 어린 왕에게 경배하였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드렸다. 돌아갈 때도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갔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교훈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찬송 가운데, 그 이름을 높일 때 그 이름을 성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 "주를 찬송함과 주께 영광돌림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시 71:8)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 50:23) 기도에서 우리는 인간들처럼 행동하고 찬송에서 우리는 천사들처럼 행동한다. 찬송은 하늘나라의 음악이며 성도에게 합당한 작업이다. 불평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행동이다. 그가 주실 때 많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미할 것이지만 그가 빼앗으실 때 그를 찬미하는 것은 그를 높이 존경하는 것이다. 그가 찬송할 많은 재료를 주셨다. 우리는 그의 찬송을 위한 나팔이다. 하나님의 교회가 땅에 떨어질 때 그의 이름이 고난당함으로 슬퍼한다.

많은 개종자들을 주께 인도함으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 우리의 지붕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노력하자.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하고 그의 자녀들은 그의 부모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하자. 주인들은 그의 하인들이 주를 찾도록 하자. 하나님은 그의 진리를 우리에게 보석처럼 보관하도록 위탁하였다. 그 진리를 많은 사람에게 보물로 주어야 한다.

성도가 수치를 당함으로,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당연한 사람으로 스스로 여기면서 오히려 기뻐하였다.(행 5:41)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보다는 오히려 재산을 잃어버리기를 원한다.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는(롬 8:36) 상황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그의 순교자들의 잿더미 속에서 번영한다. 화형선고를 받은 한 처녀는 만일 우상에게 절하면 생명과 재산을 준다는 제안에 그는 "생명과 재산은 가게하고 그리스도여 어서 오소서" 하였다. "세상에 있는 모든 금과 은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한 시간의 친교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그들의 돈과 함께 망할지어다."(비코의 마르퀴스)

영광스러운 여호와의 이름에 불명예가 던져진다는 것은 슬픈 상황이다. 애굽인들은 황소를 숭상하고 페르샤인들은 태양을 섬기고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쥬피터를, 파르디안인들은 마귀를 섬긴다. 17억의 사람들은 마호메트를 추종하고, 유대인들은 오신 예수님을 부정하고 지금도 메시야를 기다리는 어리석음에 주님을 슬프게 한다. 캐톨릭은 조각한 우상들에게 절함으로 십계명을 반항한다. 동정녀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하늘의 사닥다리로, 낙원의 문으로 부른다. "찬송을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에게"라 말한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위에 놓는다. "아하! 우리의 범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는 복되신 성자의 어머니시여!" 한다. 교황을 성경의 위에 있다고 말한다. 선행에 의한 공로도 가르친다. 더 나아가, 개신교도들에게서도 수치를 당하신다. 혀로서 하나님을 불명예쓰럽게 말할 뿐 아니라 생활에서도 더럽힌다. 무신론, 안식일을 범함, 위증, 부결 부정 등을 행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도 그의 마음에 더욱 사무친다. 악인의 죄는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하나님 자신의 백성의 죄는 그를 슬프게 한다.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암 3:2) 결국 비열하게 여김을 받아 마침내는 비열한 장소로 보내질 것이다.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없게 되었음이라."(나 1:14)

존재 목적은 그를 찬양하기 위함이다. 생존함으로서 우리가 그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생명을 주셨겠는가? 그를 찬미하기 위함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는가? 그를 찬송하기 위함이 아니면 혀를 주셨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 찬송 받으실 여호와(삼하 22:4)라고 하였다. 우리에 의해 존귀함을 받으시고 존대함을 받으셔야만 한다. 하나님은 그를 존귀히 여기지 않는 바로를 통하여도 영광을 받으셨다. 전차들을 바다에 전복시켰을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가 그의 멸망으로 영광을 얻으신 것이다.

자기들의 생애를,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는데 소비한 사람들이 보상의 대가를 받게 될 때, 죽음이란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가. 그는 우리를 보석중의 하나로 여겨주실 것이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사 43:4)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였던 성도들은 얼마나 유명했던가.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모세는 그의 온유함으로, 바울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사랑으로, 그의 이름은 귀한 향기처럼 하나님의 교회 안에 향기를 발산한다. 우리의 몸에도 영광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진가를 인정해주는 사랑을 가져야 한다. 자기의 주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존귀하게 할 수 없다.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다.(시 48:14)

 

■ 둘째 간구

 나라이 임하옵시며

이 말씀에 함축된 말은 하나님은 왕이시라는 것이다. 왕궁을 가진 이는 왕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시라."(시 47:7) 그는 홀을 가지셨다.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히 1:8) 그는 왕의 면류관을 쓰셨다. "그의 머리에 많은 관들이 있고,"(계19:12) 그는 법을 제정하시고 죄 사함을 인치실 권능을 가지셨다. 그러면서 위대한 왕이다.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라."(시 95:3) 그는 아무데나 포함되시지 않고 아무데서도 배제되지 않으신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늘"(왕상 8:27)라고 하였다. 한 호흡으로 우리를 부서트려 티끌이 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왕이시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호위병을 두는데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조력이 필요없다. 그는 가장 높은 보좌와 가장 높은 통치권, 가장 긴 소유권을 가지셨다. "여호와께서 영원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시 29:10) 모든 왕들도 그의 치리를 받는다. "나로 말미암아 왕들이 치리하며."(잠 8:15) 그는 의지와 감정도 치리하신다.

높은 왕을 섬기는 것은 영광이요 명예가 된다. 데오도시우스는 황제가 되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더 큰 명예로 생각했다. 왕들에게 섬김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명예롭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국의 영광을 보고 "복 되도다 당신들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왕상 10:8) 말한 것과 같다. 이런 왕을 섬기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만일 우리가 하늘의 왕께 속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최강자의 편에 있는 것이다. 한 번의 눈초리로 꺽으시며 대적을 멸하실 수 있으시다. "모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낮아지게 하며."(욥 40:12)

높으신 왕을 신뢰하자. 그에게 당신의 영혼을 맡기라. 당신은 이 보석을 더 안전한 곳에 맡기지 못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출 15:3) 하나님은 산들을 옮기실 수 있든가 아니면 그것을 뛰어 넘으실 수 있으시다. 그는 결코 당황하지 않으신다.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감시자를 가지는 것이다.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 39:9) 죄를 피할 수 있었다. 두려움은 위험을 더 크게 보이게 하고 그래서 죄를 덜 짓게 만든다. 왕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 외에는 아무 권세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권세는 제한되어 있다. "불꽃같은"(계 1:14) 이 왕을 두려워하자. 그리고 굴복을 배우자. 하나님께 감히 반항의 깃발을 내 걸었던 당신이여! 거룩함을 신봉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낫다."(마틴 루터)

하나님에게는 위로가 있다. 하나님은 그 자녀들을 위해 호위병을 배치하신다.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슥 2:5)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부족하지 않으신다. 터틀리안의 증언에는 페르사인들이 그리스도인과 싸울 때에 큰 바람이 일어나서 그들이 쏜 화살이 방향을 바꾸어 그들의 얼굴로 향했다고 한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잠 16:7)

 

■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성격의 나라인가?

★ 은혜의 왕국이 우리 마음 속에 세워지고 확대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그의 백성의 양심 속에서 행하시는 은혜의 왕국, 하나님의 작은 왕국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 은혜 왕국은 영혼 안에 세워진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이 그의 마음속에 세워지기 전에 얼마나 슬픈 상태에 있었는가? 죽은 꽃은 향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은혜가 없는 마음은 지옥보다 더 검어 보인다. 은혜 없는 사람은 너무나 추악하다. 실물보다 좋게 보이는 거울을 항상 사용했던 여인이 그가 우연히 참 거울 속에 자기 얼굴을 보고서는 미쳤다고 한다. 은혜의 왕국이 세워지기 전에는 사탄의 왕국이 세워진다.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 죄인의 마음은 마귀가 일하는 작업장이다.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마 12:44) 어떤 사람은 더러운 마귀에게 붙잡히고 어떤 사람은 복수심에 찬 마귀에게 붙잡힌다. 은혜의 왕국이 임하기 전까지는 죽을 때에도 위로를 받지 못한다.

은혜의 왕국에 확실히 서 있는가? 영혼 속에 이루어진 변화를 받아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서다. 하나님을 향한 거짓 없는 소원을 가짐에서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빠져 그 안에 숨어 있기를 바라야 한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면 능력의 왕국이다. 영혼의 활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비록 약한 믿음일지라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노아의 방주에서는 아이도 어른만큼 안전하였다. 비록 약간의 흑암이 괴롭힐지라도 두려워 하지마라. 밭은 그 안에 가라지가 있을 수 있으나 우리는 그것을 밀밭이라 부른다. 은혜로 미화된 마음은 그 안에 하늘 임금의 초상을 걸고 있다. 은혜의 왕국은 그 영혼을 윤택하게 한다.

★ 영광의 왕국, 천국에 이르기를 우리는 기도한다. 은혜의 왕국은 영광의 왕국의 시작에 불과하다. 은혜의 왕국은 씨 상태에서 영광이고, 영광의 왕국은 꽃이 핀 은혜이다. 은혜와 영광의 두 왕국은 밀접 되어 있어서 은혜의 왕국을 통하지 않고는 영광의 왕국에 이를 수 없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되는 나라다. 세상에서는 오랜 고통 거리 외에 무엇인가?(어거스틴) 그러나 하늘의 왕국에서는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 버릴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로부터 오는 미소로 고난을 잊어버릴 것이다. 알곡은 창고에 모아들이실 것이고 가라지 같은 악인은 지옥으로 던져질 것이다. 성도들의 음악에는 잡음을 내는 현악기 줄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예복을 입고 보좌에 앉으며 휴식을 가지며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몸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이별이 없는 영원한 나라다.

★ 세상은 지금 암흑에 있다. 죄가 지배하는 흑암의 권세가 자연의 상태다. 무지의 암흑 아래 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엡 4:18)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빽빽한 암흑 속에 있다.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암흑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함이 우리의 목적이다.

★ 사탄은 왕국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적한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는 기도는 사탄의 왕국에 대적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사탄의 보좌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세워져 있다. 그는 낙원에서 인류를 정복하였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에게 찬사를 바치며 지지를 한다. 불경건의 왕국이고 노예화의 왕국이다. 죄 이외에는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는다. 다른 폭군들은 몸만 다스리지만 사탄의 왕국은 영혼을 다스린다. 사탄은 그의 노예들에게 양식 대신 독약을 주며 휴식도 취하지 못하게 한다.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렘 9:5) 마귀가 유다에게 들어갔을 때 대제사장들에게 보내고 거기서 동산으로 보내졌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팔고 스스로 목을 매기까지 그를 절대로 쉬지 못하게 하였다. 사람들은 사탄을 섬기며 그를 위해 죽으려 한다. 이 세상 임금이라 불러질 뿐 아니라 이 세상 신이라 한다.(요 12:31, 고후 4:4)

 

■ 셋째 간구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간구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 그리고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의 부분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두 가지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비밀의 뜻과 하나님의 계시의 뜻이다.

하나님의 비밀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고, 하나님의 가슴에 간직되어져 있다. 천사도 인간도 이것을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된 뜻은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의 선포로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하기를 원하는 것을 가르친다.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을 다 요구하신다.

 

1)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행하기 위하여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뜻에 능동적으로 순종하기 위하여 우리는 기도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지만 만일 순종이 없다면 그의 지식은 절름발이일 것이고,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없이 아는 것은 사정을 더 악화시킬 것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않은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눅 12:47) 이런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는 동안에 즐거움으로 황홀해진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사랑과 열심이 불탄다. 즐거움의 날개를 타고 실천을 완성한다. '하늘에서 행한 것 같이' 되려면 천사의 충성을 배워야 한다. 그들을 닮아야 하고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천사들은 명령받은 것 이외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종교의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그 아무것도 미완성인 채로 놔두지 않는다.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시 103:20) 만일 그가 그의 천사들에게도 성도들을 섬기라고 명령을 내리시면 그들은 순종한다.(히 1:14) 하나님의 뜻이 아무리 소량이라도 성취되지 않은 채 놔두는 것은 처사로서 순종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뜻을 행할 때 천사들처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왜 필수적인가? 형평의 원칙에 의해서다. 그는 우리의 창설자이며 우리의 존재를 그로부터 받았다. 그 말씀대로 창조함을 받은 그 분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도 우리를 자기의 뜻을 행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 땅 위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하나님을 대항해서 완강히 버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순종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저항할 수는 없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은 마치 아이가 천사장과 싸우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은 원수를 만족시켜주는 것, 우리의 멸망을 노리는 자의 뜻을 행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니라."(신 10:13)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겠고(렘 7:23) 죽은 운명이 피조물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를 가지며 하나님의 친족이 된다. 하늘의 왕족의 혈통을 갖게 된다. 예수님의 형제요 자매가 되는 영광을 가진다.(마 12:50)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어중간하게 행하며 가려서 행한다. 만일 당신의 하인이 명한 일을 자기가 하기 쉬운 것만 행하고 다 행하지 않았다면 좋아하겠는가? 아브라함은 자식을 번제로 바치는 일까지도 순종했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아마사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는 행하지 않았다.(대하 25:2) 악인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사랑보다 지옥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계속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순종을 그만둔다면 이미 행해진 모든 것에 대한 손실이다. "그 행한 모든 일이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겔 18:24) 신기한 그림을 그리고 나서 지우개로 다 지우는 것과 같다.

 

2)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절실한 기도도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였다. 불평을 토하는 것은 성급함의 극치로서 영혼 안에서 하나님을 항거하는 일종의 반란이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되"(민 21:5) 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고 그의 지혜에 묵종하는 것, 이것이 영혼의 은혜로운 상태다. "이는 여호와이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이루어지이다."(삼상 3:18)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자기의 눈 앞에서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을 때도 "오 주여, 당신의 모든 행위는 의로우십니다." 라고 외쳤다. 눈물의 골짜기에서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뜻을 참을성 있게 순응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교육방침은, 진실성은 지옥으로부터는 보호하지만, 세상에서는 중상으로부터는 보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치욕으로도 양육하신다. 농부가 그 가지를 자르고 수액을 흘리게 할 때도 그의 포도나무를 사랑한다. 가장 우울한 섭리 속에서도 약속은 구름 가운데 무지개처럼 나타난다. 요나는 배속에서는 잠을 잤지만 고기 뱃속에서는 기도했다. 환난은 교만의 종기를, 육욕의 열병을 치료한다. 우리의 녹을 닦아내는 줄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추문이나 올가미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환난의 찔레나무에 빠지게 한다. 사자의 뱃속에 벌꿀이 들어있는 것처럼.(삿 14:8) 고난 중에서도 다윗은 순례자의 노래를 가졌고, 바울은 감옥의 노래를 가졌다. 환난의 날에 위로의 공문서를 보내시며 희년을 선포하신다.

자기의 백성을 쓴 규정식으로만 먹이고 큰 시련으로 단련시키시는 일이 하나님의 통상적인 방법이다. 환난은 모든 성도들이 걸어왔던 밟아 다져진 길이다. 그리스도의 백합화는 가시밭 가운데 자라났다. 베드로는 그의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십자가에 못 박혔다. 야고보는 헤롯에게 복을 베었으며, 요한은 밧모섬에 귀양을 갔고, 도마는 창으로 찔렸고, 누가는 올리브 나무에 교수형을 받았다. 세상이 감당치 못했던 성도들은 회초리 밑을 통과하였다.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십자가에서는 구원하시지 않았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찔레덤불을 통과해서 하늘나라로 행군하였는데 왜 우리는 장미화를 밟고 갈 생각만 하는가?

 

그대의 혈통이 하늘나라에서 비롯된다는 것, 하나님에게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일인가? 그런데 "왕자여(암논), 어찌하여 나날이 이렇게 파리하여 가는가?"(삼하 13:4) 하늘 임금의 아들과 딸이 왜 하찮은 일에 괴로움을 받는가? 그리스도가 그대의 친구가 아닌가? 나는 나무십자가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과 함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가? 십자가는 눈물을 흘리게 하겠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눈물을 씻어주시지 않는가?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 최대의 자비를 주시고져 의도하실 때는, 환난 가운데 낮추시다는 것을 곰곰이 생각하라. 까마귀들이 배고플 때 소리 지르며 요란 피우는 것과는 달리, 독수리들은 시끄럽게 떠들지 않는다. 그 기백의 고귀함과 위대함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아무 일도 하지 말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환난 중에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일치시키는 일이 그에게 존귀를 돌리는 일이다. 병든 체질을 씻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약효가 약한 약이다. 우리의 불만을 굴복시키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복음의 능력이 부족함이다. 예수님은 얼마나 하나님께 고분고분 하셨는지 예수님의 모범을 생각해야 한다. 피가 흘러나올 때 옆구리를 열어주었지만 불평함으로 자기의 입을 열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내 뜻을 바칠 때, 죽음의 시각에 당신의 영혼을 그에게 마음 편히 위탁할 수 있다.그가 우리를 멋대로 굴도록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는 가장 나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과 겨루는 것은 어리석다. 꺾이기 전에 그에게 굽혀야 한다. 그는 엄하실는지는 몰라도 불의하시지는 않으신다. 환난의 아픔보다는 이점을 봐야 한다. 옹고집을 순응으로 바꿔야 한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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