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십계명
(토마스 왓슨의 십계명 해설을 요약함)
이동휘 목사
1. 십계명의 서문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1-2)
엄숙한 선포 직전에 울리는 나팔 소리와 같다.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해 발표된 것이라고 말하나(눅 1:70)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쓰셨다. 열 가지 보석을 언약궤 안에 넣어 존귀를 더하게 하셨다.
인간이 자신을 감독할 율법도 없다면 괴상한 동물로 돌아갈 것이다. 도덕적 율법이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으나 인간을 넉넉히 성화시킨다.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쓰신 이 율법에 덧붙이거나 빼는 행위는 악행이다. "이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출 32:16. 처음 판과 글은 하나님이 만들어 쓰셨고, 둘째 판은 모세가 만들고 하나님이 그 판에 쓰셨다. 출 34:1, 28)
1)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관계가 수립된다. 그의 죽으심에 의해 친밀한 연합을 이루어 언약의 경계 안으로 인도하신다. 아브라함은 첩의 자식들에게도 선물을 주었으나 상속은 이삭에게 내려주셨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금과 은을 줘서 멀리 보내 버릴지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당신 자신을 주심으로 본질 자체를, 그의 은혜, 그의 사랑, 그의 왕국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통의 십자가들도 성화시키신다. 십자가는 파괴적 형벌이 아닌 치료약이 될 것이고 십자가들은 죄의 독성을 부식시켜서 소멸할 것이며 십자가들은 우리의 은총을 연마시켜서 세련되게 하리라.
2)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애굽의 종살이에서 인도하심은 구출의 신기함부터 권위를 가진다. 바다를 말리시는 기이함과 기적을 열 번이나 퍼부으셨다. 우상 장소에서 탈출시킴으로 선민의 우월성으로 살게 하셨다. 마른 장작이 불붙기 쉬운 것처럼 우리의 본성은 우상숭배에 기울어지기 쉽다. 새로운 하나님의 법으로 그들은 무장해야만 했다.
종 되었던 집에서 구출한 은혜 또한 평생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안일하게 살아도 된다는 공식 문서를 받은 적도 없고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면제받는 특허장을 받은 적도 없다. 악인들이 달콤한 삶을 영위하는가 하면, 경건한 이들이 종종 눈물에 젖은 삶을 배당받는다. 그러나 경건한 자의 고난은 견책에 불과하지만, 악인의 고난은 형벌이다. 전자는(견책) 아버지에게서 오고 후자는(형벌) 재판관에게서 온다. 경건한 자의 고난은 영원히 보존되기 위함이고, 악인의 구출은 형벌의 보류일 뿐이다. 고난의 종살이에서 구출 받은 자들이여! 찬양을 드려라.
모세는 바로에게, 우상을 가지고 가겠다고 말했다(출 10:9).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다.
'종살이보다 더 가혹한 삶은 없다'(키케로) 노예 신분은 최악의 상태다. 출애굽은 죄, 사탄, 지옥으로부터의 구원, 전체의 해방이다. 수지와 탄식으로부터의 탄성이다. 무자비한 공중권세 잡은 마귀에게서 탈출하여 화평의 왕의 신하가 된 것이다. 종살이에서 이끌어 낸다는 것은 지옥에서 구출한다는 예표다. 지옥의 고통은 영원히 지속된다. 시간도 그것을 끝내지 못하며 눈물도 그것을 끄지 못한다. 그들은 수백만 년의 무수한 세월을 지옥에 살아온 후에도 그들의 형벌은 처음이나 다름없이 끝날 줄을 모른다. 왜 지옥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공의를 실행해야 할 처소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땅 위의 제왕들도 범죄자들을 처벌할 감옥을 마련하거든,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런 감옥이 없으셔야 하겠는가. 하나님의 법이 침해당했는데도 벌을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와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종살이에서 구출 받은 거룩한 백성이 하나님의 계명을 마땅히 지켜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2. 제 1계명 -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1) 왜 계명은 제 2인칭 단수 '너'로 말씀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너희는 다른 신들을..'로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왜냐하면, 계명은 각 개인에게 관계되며 하나님은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인 줄 알게 하려 함이다. 이 계명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우리가 한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우리는 한 하나님 밖에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2) 첫째,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셔야 한다.
먼저 인정해야 한다. 모든 백성이 엎드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로다! 여호와는 그는 하나님이로다!"(왕상 18:39) 외쳤다. 천하만국에 그만 홀로 하나님이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하나님만 모시는 것은 역시 그만을 선택하는 것이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신앙은 선택의 문제다. 동시에 엄숙한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선택 후에는 결혼 언약이 따르는 것과 같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사 55:5) 도무지 변경될 수 없는 영원하고 굳센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의 주와 왕이 되시고 구주가 되신 이상 이제부터 그에게 경배해야 한다. 두려워해야 한다. 경외심으로 감히 죄를 지을 수 없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육신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삼켜버린다. 그가 든든한 바위가 되어 지켜주심에 우리는 전적으로 신뢰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
3) 둘째, 다른 신을 두어서는 안된다.
'나 외에는' 이 무슨 말인가. '내 면전에'를 의미한다. '나의 시야 안에' 혹은 '내 눈 앞에'를 뜻한다. 실제로 다른 신이란 없다. 발렌틴인들은 두 신이 있다고 믿었다. 다신론자들은 많은 신이 있다고 믿었다. 페르시야인들은 태양을, 애굽인들은 황소와 코끼리를, 그리스인들은 주피터를 숭배했다. 그러나 참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은 없다.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 명심하고."(신 4:39) 만일 전능자가 둘이라면 항상 다툼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세계 내에 있는 질서와 조화, 만물의 일정 불변의 통치는 단 한 분 만의 통치자, 곧 만물을 다스리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명백한 논증이 된다. 나무를 향해 나의 아버지라 하며 돌을 향하여 너는 나를 낳았다 하는 우상 섬기는 자들(렘 2:27)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는 그들의 괴로움으로 보복될 것이다(시 16: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시니라(출 34:14). 한 아내는 두 남편을 한꺼번에 소유하지 못한다. 하나님 보다 재물을 더 신뢰한다든가, 육체나 자기의 지혜를 신뢰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딤후 3:4) 그것을 신으로 삼는 것이다. 사르디나 나라에서는 진통제 같은 풀이 있는데 이것을 많이 먹으면 웃으면서 죽게 된다. 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든가(빌 3:19)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 역시 신으로 삼는 죽을 죄다.
사람이 그 주인과 언약 관계에 들어가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날인하면 그는 되돌아갈 수 없고 계약 기간이 마치기까지 섬겨야 한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기로 언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언약을 성찬에서 새롭게 하였다.
4) 하나님께서 부과하신 임무는 순종이다.
섬기지 말라는 명령은 순종을 절대적으로 전제하는 왕의 칙령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순종해야 한다.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말 1:6) 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 계명대로 실행하라 하신다. 지식 없는 순종은 맹목이고 순종 없는 지식은 절름발이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으면서도 제사만 드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순종이 부족하면 제사도 거부하신다.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 7:22-23) 하셨다. 하나님께서 종교의식을 분부하시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선적으로 순종을 찾으신다는 것이다. 순종이 없었다면 예배는 경건한 사악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신 목적을 순종이다. "너희는 내 법도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그대로 행하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8:4). 지키게 할 목적이 아니라면 왕이 무엇 때문에 칙령을 공포하겠는가.
5) 순종의 규칙
기록된 말씀이다. 말씀이 요구하는 것은 철저한 순종을 요구한다. 사본이 원본과 부합하듯 우리의 순종은 말씀과 부합해야 한다. 말씀에 기바을 두지 않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전통은 가증스럽다.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사 1:12) 바울사도는 겸손의 겉치레만 꾸몄던 천사숭배를 정죄하고 있다(골 2:18).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직접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하였노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그들은 보다 겸손하고 싶었던 나머지 천사들 앞에 엎드렸다. 천사들이 자기들의 청원을 하나님께 제출해 주겠지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겸손의 겉치레가 하나님의 미움을 샀던 이유는 이것을 보증해 주는 말씀의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3. 제 2계명 - 우상을 만들지 말라
1)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에 관한 형상은 화상이든지 그림이든지 금지할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공경할 것이요 눈에 보이게 공경할 것이 아니다. 이것을 만드는 것은 숭배하려는 것이다. 세우지 말라 했기 때문에 만들어 경배하는 것은 분명 불법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것으로 나타내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이 어디 있을까. 하나님을 생명 없는 것으로, 창조자를 창조된 물건으로 나타내려는 하나님에 대한 반란이다. 하나님은 영적 실체이며 영이시기 때문에 그는 보이시지 않는다(요 4:24). "여호와꼐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신 4:15)이라 하였다. 보이지 않는 것은 그릴 수 없다. 왕 자신이 현존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로마교회는 성상(聖像)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의 매개체라 말하나, 그리스도의 상이라도 존경을 돌려서는 안 된다. 조각한 나무토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하셨다.
2) 십계명의 두가지 구분법에 따라
개신교와 정교회 그리고 성공회는 유대인 필론의 구분을 따라 성경의 순서대로 십계명을 따른다. 그러나 가톨릭이나 루터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구분법을 따르면서 두번째 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없애고 열번째 계명을 둘로 하여 이웃의 재물을 탐내는 것과 이웃의 아내를 탐내는 것을 9계명과 10계명으로 채운다. 일 계명에 '흠숭'이라는 단어에 이미 우상금지가 포함되었다는 해석이다. 이 구분법을 따르는 까닭에 가톨릭이 우상을 세운다는 일방적 해석보다는, 그들이 성경 말씀에 철저히 근거하지 않고 성상을 발전시켰다는 자체의 오류로 봐야 한다. 왜냐하면, 개신교와 같이 필론의 전통을 따르는 정교회도 성화나 성상이 발달되었고, 반면 아우구스티노의 구분법을 따르는 루터교회는 성상공경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직접 쓰신 엄중한 말씀을 삭제했다는 사실이 무서운 죄이다.
3)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아비로부터 자녀에게 이르는 저주까지를 선포하셨다. 3~4대까지 갚는 저주다. 질투하는 남편은 그의 아내가 정조를 더럽힌 줄을 알면 그녀와 그 자녀를 내쫓을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욥 21:19) 우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다. 십자가 수난상을 세워놓고 그곳에 입 맞추고 촛불을 켜 놓는 행위는 투기의 우상이다. 그래서 히스기야나 요시아나 의로운 왕들이 나타났을 때, 반드시 우상을 불태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반면에 그를 사랑하여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의 복을 약속하셨다. 긍휼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공의는 하나님의 왼손이요 긍휼은 하나님의 오른손이다.
그는 오른손을 많이 쓰시고 익숙하시다. 하나님은 노하시기는 더디 하시지만(시 103:8) 용서하시기는 빨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조금 사랑해서는 안된다. 사랑의 물줄기가 그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차갑게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가인은 하나님을 인색하게 섬겼다. 그는 재물은 가져왔으나 마음은 가져오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명을 마지못해 순종하는 것은 자신에게 재앙을 몰고 오는 것이다. 계명은 우리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아니냐."(신 10:13)
우리는 어떻게 그의 계명을 지킬까. 하나님의 성령을 구하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자석이 끌어당기면 쇠는 움직인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성령이 이끌면 우리응 그의 계명의 길로 달려간다.
4. 제 3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왕들의 이름을 언급할 때 존경하는 의미로 '폐하'란 명칭을 사용한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성스러운 경외심을 가지고 말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함으로 인해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롬 2:24). 마귀는 두 개의 거짓 안경을 사람들 앞에 놓는다. 하나는 작은 안경인데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작아서 지금 막 죄를 지으려는 사람들의 눈에 놓아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않도록 하여 죄를 쉽게 짓도록 한다. 또 하나는, 큰 확대경인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죄를 보여주어 죄가 너무 커서 낙심하여 용서받을 수 없도록 생각하여 회개를 포기하도록 한다. 십자가의 은총을 입지 못하도록 하여 그의 이름을 더럽힌다.
압살롬은 "내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사오니 청컨대 나로 헤브론에 가서 그 서원을 이루게 하소서"(삼하 15:7)라고 말했다. 이런 핑계는 다만 그의 반역죄를 가리기 위함이었다. 악한 행동이 종교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된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말 2:17)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한 이유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여기고 모독하는 말에 대한 분노였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의분(義憤)으로 골리앗을(삼상 17:26) 처치한 것이다.
혀는 길들이기 어려운 지체이다. 몸의 모든 부분과 기관들은 더렵혀져 있어 쑥의 모든 가지가 다 쓴것과 같다. 혀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혀보다 더 하나님의 불명예를 솟구쳐내는 몸의 지체는 없다. 혀를 재갈 먹이는 것은 좋은 처신으로 묶여두기 위함이다. 혀를 함부로 놀리는 자를 죄 없다 아니하리라 하신다. 반칙자들에게 중벌을 내리신다는 경고이다. "그 이스라엘 여인의 아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며 저주하므로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 그들이 저주한 자를 진 밖에 끌어내어 돌로 쳤더라."(레 24:11, 23)
성삼위 하나님에 대한 태도와 찬양함이 불손하게 말할 때, 하나님의 이름에 일치하지 않게 살아 그의 위엄을 훼손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잡담에 사용하여 거룩함을 더럽힐 때,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위선에 빠질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도 믿지 않을 때, 자기의 처지를 정당화하려고 하나님의 말씀을 오용할 때, 그의 말씀을 농담 삼아 비웃듯이 말할 때, 어떤 죄를 두둔하려고 편리하게 성경을 인용할 때, 말씀을 그릇된 의미로 왜곡하여 진리에서 벗어날 때, 맹세하지 말라 했는데 맹세할 때,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다.
5. 제 4계명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1)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은 하나님께 엄숙히 예배드리기 위해 따로 떼어둔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소유권에 속한 것을 속된 용무로 사용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안식일'이라 하신다. '나와 너희 사이의 영원한 표징'이라(출 31:13) 하신다. 이 사실을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잊어버리기 쉬울 것을 아시고 자세히 일깨워 주신다. 그리하므로 거룩하게 하신다. 거룩하게 하는 것은 일에서 쉬는 것과 종교적 의무를 이행함이다. 대상자는 아들, 딸, 남종, 여종, 육축, 유숙하는 객(외국인들) 모두를 포함한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 함은 하나님은 종을 심하게 부리는 주인이 아니며 생업을 방해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엿새를 주어 모든 일을 하게 하며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하루만을 취하였다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의 날을 그래도 빼앗아 쓴다면 성일 도둑이요 용납할 수 없는 범죄행위다. 하나님께서 친히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칠 일째 쉬시는 모범을 보이시므로 그의 뒤를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날을 복되게 지정하셨다. 이날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일 뿐 아니라 은혜받는 날이다. 이날에 축복이 하늘로부터 방울져 떨어진다. 축복으로 관 씌우셨다. 일주일에 세상으로 얼어붙었던 영혼을 안식일의 말씀으로 녹여준다. 녹을 씻어낸다.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였다(사 58:13). 옛날 사람들은 날들의 여왕이라 불렀다.
2) 구약의 안식일이 어떻게 주일이 되었는가.
(1) 그리스도의 지정에 의해서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다(막 2:28).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시 118:24) 그리스도께서 주일의 첫째 날 무덤에서 살아나셨으며 그날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셨다.(요 20:19, 26) 이것은 어거스틴과 아타나시우스가 말하는 바 그가 유대인의 안식일을 주의 날로 옮기셨다는 것이다. '주의 날'(계 1:10)이라 불리는 날을 기독교인의 안식일로 아르노비우스(Arnobius)와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이렇게 이해한다. 따라서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저희에게 강론할 때"(행 20:7, 고전 16:2)라고 하였다. 강론하는 것과 떡을 떼는 것이 아울러 있었다. 어거스틴, 아노게티우스, 그리고 이시도레는 우리의 복음적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사도적인 재가를 얻은 것으로 추정하며 사도들의 관례 때문에 이날은 하나님 예배를 위하여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들이 한 것은 신적인 권위에 의해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으로 감동되어 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주의 날을 대단히 존중하였다. 초대교회의 교부 이그나티우스(Ignatius)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일의 첫째 날 곧 주의 날을 거룩히 지킬지어다."라고 말하였다. 주일의 첫째 날을 창조의 더 영광스러운 사역, 곧 구속을 기념하도록 만드셨다. 창조의 사역도 위대하였으나 구속의 사역은 더 위대하였다. 창조에서는 한 마디 말씀하시는 것뿐이었으나, 구속하시는 데는 피흘림이 있었다(벧전 1:19). 창조는 하나님의 손가락 사역이었고, 구속은 그의 팔의 사역이었다(눅 1:51). 창조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주셨다. 구속에서는 그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주셨다. 창조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담 안에서 생명을 갖게 되며,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갖게 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가리켜 "모든 날의 희망이요 모든 날의 여왕이라" 불렀다. 안식일은 영혼의 잔칫날이요, 제일 귀한 시간이다.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살아나신 날이요, 성령님이 지상에 강림하신 날이다. 다른 날에는 짚을 줍고, 이날에는 진주를 줍는다. 그리스도는 대부분의 이적을 안식일에 행하셨다.
3) 엿새 동안은 힘써 일하고
멜란히톤(Melanchthon)은 게으름을 마귀의 목욕통이라 불렀다. 마귀는 게으른 영혼안에서 기쁨으로 목욕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퍼킨스는 "사람들로 좋은 은사를 받으며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들이며 성례를 받게 하라. 그럴지라도 만일 그가 직업의 임무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위선이다" 했다.
4)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
주의 날은 거룩한 휴식의 날이다. 안식일에 만나 거두는 것도 금하셨다. 만나는 아침 다섯 시와 여섯시 사이에 내렸다. 안식일에도 거두러 나간 사람들에게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책망하셨다(출 16:28).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시체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향유를 준비했으나 안식일이 지나기까지 기다렸다. "계명을 좇아 안식일에 쉬더라."(눅 23:56) 이날에 세속적인 일을 하는 것은 마귀의 쟁기를 따라가는 것이다. 안식에 나무를 주었던 사람을 죽이라 했다(민 15:35). 성소를 위해 돌을 자르고 나무를 베어야 했던 브살엘도 안식일에는 삼가야 했다.
5) 거룩한 일에는 성의를 다해야 한다. 높으신 하나님의 봉사를 위해 성별해드리고 봉헌 드려야 한다. 성스러운 이 날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버나드는 교회 문에 당도할 때 "나의 모든 땅 위의 생각들은 여기 머물라" 했다. 마귀도 틀림없이 우리 집회에 출석해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욥 1:6).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는지라"(슥 3:1). 마귀의 공격을 대빟면서 마음의 자세가 성스러워야 한다. 자기의 죄를 판단하지 않고 설교자를 판단하는 꼬임에 빠질 수도 있다. 말씀을 실천하기보다는 혹평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멜란히톤은 이태리 사람들에게 "너희 이태리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심을 믿지 못하고 빵 속의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책망했다.
6)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 대한 보상을 보라.
"유가야, 네가 안식일에 발길을 삼가 여행을 하지 않으며, 나의 거룩한 날에 너의 쾌락을 일삼지 않으며 안식일을 '즐거운 날'이라 부르며 주의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날을 귀하게 여겨서 네 멋대로 하지 않으며, 네 자신의 쾌락을 찾지 않으며, 함부로 말하지 않으면, 그때에 너는 주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내가 땅에서 너를 영화롭게 하고 너의 조상 야곱의 유산을 먹고 살도록 하겠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사 8: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