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른 체 하지 맙시다
강도 만난 자의 처절한 신음소리를 들은 여행객은 급히 다가가
기름과 포도주를 부어 응급처치를 하고, 타고 온 나귀에 싣고 급히 주막으로 달렸다. 전혀 알 수 없는 한 생명을 살리려고 그 고통을 싸안아 밤새우며 진땀을 쏟았다. 여관집에 든 비용과 치료비를 쥐어주고 추가 비용은 다시 와서 주겠노라고 약속하고 떠난 흐뭇한 나그네 이야기는
큰 교훈을 준다(눅 10:34). 자비를 베푼 사람이 오묘하게도
당시 유대사회에서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어서 이 비화를 꺼낸 예수님께 불쾌함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
성질 돋운 것은 이 사람이 지나기 전 평소 존경받는 제사장과 거룩한 레위인은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는 폭로 비슷한 줄거리에서는 독기까지 품었을 것이다. 당시 외식적인 종교를 깡그리 무시한 셈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이
번쩍 정신을 뒤집어, 그늘진 자들을 외면한 죄를 자백하면서 고통당하는 자의 편에 과감히 서서 잘못을
깊이 청산했더라면 오늘의 이스라엘의 장래가 저렇게 살벌하게 사는 신세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썩은 종교를
도려내고 화끈하게 털고 나올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심판 날에 벌어질 광경 중에 오른편 양들과 왼편의 염소 떼들의
표정이 선명하다. 죄목은 단순하다. 헐벗은 자 입혀주지 않고
굶은 자 먹여주지 않고 갇힌 자 위문하지 않고 나그네를 영접하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지 않아서란다(마 25:31 이하). 그것도 예수님에게. 염소들은 펄펄 뛴다. 주님! 언제
주님이 그런 처지에 있을 때 우리가 그런 비정한 일이 있었느냐고 서슬이 등등하다. 하찮은 존재라고 업신여겨
사랑 베풀지 않은 일상이 곧 예수님께 한 것과 똑같다며 주님 역시 당당하시다. 오른편 양들은 어리둥절한다. 우리가 주님께 한 번도 그런 사랑 드린 적이 없었는데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었다 하시며 우리 주님은 흐뭇한 모습이시다. 나치 독일시절에 히틀러에
반항하다가 결국 순교한 니묄러 목사의 시는 우리의 삶을 고발하는 것 같다.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갈
때 나는 유대인이 아니어서 모른 체 했고 나치가 가톨릭을 박해할 때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어서 모른 척 했고 나치가 노동조합을 잡아갈 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어서 모른 체 했지. 그들이 막상 내 집문 앞에 들이 닥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 주는
사람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야고보 사도의 단호한 주장은 신앙의 진가를 가린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약 2:15-17) 죽은
믿음 가지고는 하늘나라를 갈 수 없는 법인데 심각한 문제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26) 했다. 더 나아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약 4:17)라고 말했다.
최후 심판대에서 주님의 판정은 매우 실질적이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안다고 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안다)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모른다)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모른다) 하리라”(마 10:32, 33)
마지막 최후 심판의 날! 예수님께서
모른다 하시면 그 순간 어떨까. 묻고 싶다. 예수님과 십자가의
은총을 잘 아는가?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을 떳떳이 자랑했는가. 기독교인
됨을 최고의 행복이라고 뿌듯하게 자부심을 가졌는가. 잘 살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살자고 결심했는가. 이웃을 내 몸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부탁(마 19:19)을 가슴 속 깊이 새기기를 간절히 바란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