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교회는 인재가 넘친다. 학원에 보내 피아노와 바이올린 기타 악기들을 습득시켜 웬만한 교회는 수준 높은 달콤한 음악으로 품위를 높인다. 그러나 개척교회나 농촌교회는 커다란 피아노가 덩실 놓였을 뿐 반주할 봉사자를 잃었다. 반반한 인물은 도시로 몰린 까닭이다. 잉여 충성예비군들이 도시교회에 깊숙이 숨어있어 은사를 낭비하고 있다. 주일학교 교사 등 가용 인원들이 작은 교회에 퍼져나가 봉사한다면 일군 모자라 애태우는 교회들이 얼마나 큰 위로를 얻게 될까. 그리고 봉사자 자신들도 신앙의 큰 활력을 얻을 것이다.
당회장 목사가 광고를 내면 어떨까. 1부 예배는 우리교회에서 드리고 작은 교회에 퍼져나가 외로운 형제교회들과 어울려 봉사하자는 제안은 해볼 만한 일일 것이다. 형제와 연합하여 동거함이 선하고 아름다움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시 133:1). 그들 교회 예배시간에 맞춰 봉사할 사람을 구해 파송한다면 작은 교회의 외로움이 녹아내릴 것이다. 이미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도 역시 교회에서 지혜롭게 시간 배정을 받아 성의껏 진심을 담아 봉사한다면 너그러움과 따뜻함은 번져 작은 교회도 살맛이 날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밍밍한 신앙생활을 과감히 은퇴시키고 그리스도인들은 약한 교회나 사회 구석진 곳을 눈여겨보면서 하나님의 생각이 달려들게 하라.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흥분된 삶으로 안내되었으면 한다. 어느 교회는 장로직을 몇 년 시무한 후 몇 년간 개척교회나 어려운 교회에 가서 봉사하고 돌아오는 제도를 시행하는 아름다운 교회도 보았다. 중직자들이나 제자훈련 받은 자들이나 그리고 자원하는 자들이 양쪽교회 목회자들의 합의하에 협력구조를 이룬다면 그 약한 교회는 힘을 얻고 부흥할 것이다.
작은 교회들도 역시 부끄럽게 생각할 것 없이 규모가 있는 교회에 요청하면 좋겠다. 사랑의 짐은 서로 지라 했으니(갈 6:2) 주고받는 사랑일 것이다. 큰 교회는 개척교회 성장을 협력한다는 의미에서 형제교회로 삼는다면 마귀가 시샘하는 친밀함일 것이다. 내 교회 중심이라고 혹평 받는 한국교회가 이웃을 아끼는 교회요 작은 자를 챙길 줄 아는 교회가 되어 세상의 빛으로 다가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말만 살아 있다는 교회에 대한 비난도 이제는 더 듣지 말아야 한다. 옛날에는 대중 기도자들이 즉석에서 기도했는데 요새는 종이에 써서 기도한다. 목사의 기도를 뺨치는 달콤하고 은혜가 쏟아지는 기도다. 한편 말쟁이들의 언어 향연 같기도 하여 언짢은 때도 없지 않았다. 어데서 베껴 왔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그 수려한 기도처럼 우리의 생활신앙도 뒤따랐으면 한다. 교회도 빈익빈, 부익부가 있어서는 안 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다 천국에 들어가지 않는다(마 7:21) 하셨다. 천국에서는 우리 모습이 모조리 밝혀진다는데 야단났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모두 가담되어지기를 바란다. “계단의 처음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 마라 그냥 발을 내딛어라” 루터 킹 목사의 말이다. 부족한 그대로 발을 디디자. 여유로운 내 몸을 빌려주자.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이웃사랑의 깊은 진리에 건강한 내 몸을 멋지게 사용하자. 어차피 호흡하는 순간만 빌린 몸이지 않은가. 세브란스병원에 기부금을 바친 세브란스는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드리는 나의 기쁨이 큽니다.”란 심정을 토로했다. 소유의 기쁨보다는 나눔의 기쁨이 원래 크기 때문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