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사러가자
시장에서 떠드는 상품선전이 요란히 들린다. “지혜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서 자리를 잡고 서 있다. 마을 어귀 성문 곁에서 여러 출입문에서 외친다. 어수룩한 사람들아 너희는 명철을 배워라. 미련한 사람들아 지혜를 배워라”(잠 8:2-5. 표준) 골치 아픈 문제를 용케도 풀어내는 번뜩 지혜도, 현명한 길만 걷는 깔끔한 자세도 간직하고 싶은 덕망이다. 가슴 뚫고 들어오는 섬뜩한 송곳날에도 너털웃음으로 넘길 대담함도, 어떤 매혹적인 유혹도 슬기롭게 제쳐 놓을 수 있는 단수 높은 실력도, 탄식을 탄성으로 바꿀 지략도 다 지니고 싶은 간절함일 것이다.
살아 있는 아이가 제 아이라고 서로 고집하는 두 여자 사이에 진짜 엄마를 골라내는 솔로몬의 지혜는 어디서 전수 받았을까(왕상 3:27). 반쪽으로 쪼개어 골고루 나누어 주라는 왕의 명령에 불붙는 안타까움으로 “제발 죽이지 말고 차라리 저 여자에게 아이를 주라.”는 진짜 엄마의 그 생명사랑의 열정이 왕으로 하여금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했다. 생명사랑의 지혜다. 생명사랑이 없으면 가짜엄마이고, 가짜선생이고, 가짜목사이고 그리고 가짜교인이다.
독일 나치 시절에 유대인을 죽이는 무자비한 학살사건 당시다. 수녀가 마차 안에 유대인을 숨기고 숨 가쁘게 검문소를 빠져나오려는 찰나였다. 경찰이 마차를 멈추고 당신 혼자인가 날카롭게 묻는다. 수녀는 깔깔깔 웃으면서 대답한다. “혼자라니요! 우리 주님이 언제나 함께 하시는데요.” 재치 있는 답변과 애교 솟는 웃음으로 절박함을 모면했다. 역시 생명사랑의 지혜다.
옆에 앉은 흑인의 냄새 때문에 여행이 힘들다고 거칠게 불평을 늘어놓는 백인 승객이 있었다. 승무원은 사과하면서 비행기 내의 삼등석은 꽉 차서 옆의 분을 옮기기 힘드나 최선을 다하겠다고 부드럽게 달랜다. 다시 찾은 승무원은 정중하게 말을 전한다. “손님을 번거롭게 옮기라 하실 수 없어서 옆 분을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일등석에 자리 하나가 비어 그리로 이동토록 하겠습니다.” 한다. 흑인은 얼떨결에 일등석 승객이 되었고 사람들은 지혜로운 직원의 행동에 일어서서 갈채를 보냈다. 평화를 사모하는 자의 지혜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정리하다가 손자는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어제 또 금을 발견했다. 작년 캔 것보다 훨씬 크다. 이걸 갖다 팔면 부자가 되겠지. 그러면 내 아내와 만든 통나무집, 땀 흘려 일군 채소밭, 뒤뜰의 호수, 아름다운 숲과 나무 등 대자연이 주는 평온함을 누릴 수 없겠지. 양어장에 넣어 물거품 속으로 사라지게 할지언정 아름다운 삶이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손자는 신기한 마음으로 양어장을 수색했다. 과연 2.7㎏ 금덩이가 가라앉았다. 그 지역은 막대한 금들이 지하에 숨어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자연과의 평화를 누리는 쪽을 택했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볼 줄 아는 지혜다.
인류가 가진 모든 지혜를 다 합친 것보다 더 진기한 지혜를 밝힐 차례가 되었다. 십자가의 희생 지혜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임으로 인간 속에 침투된 죄악의 쓰레기를 불태우고 죽음을 깔끔히 몰아내셨다. 잔인한 세상에 생명의 스위치를 탁 켜자 천국과 연결시키는 사다리가 보이고 십자가가 다리가 되어 환희의 천국으로 건너게 하셨다. 나대신 그가 친히 죽으신 십자가의 비밀! 우리도 사용케 될 때 정해진 그 숫자만큼은 많은 사람을 살게 할 것이다. 십자가의 당찬 지혜다. 세상을 화끈하게 살리는 희생적 지혜다.
“진리를 사되 팔지는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잠 23:23) 하신다. 어디서 살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하나님 품속에 그 지혜가 고스란히 놓여 있다. 인수 받아라. 달콤한 흥분에 취해 보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