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등극한 르호보암 왕이 국민과 약속한 시정연설을 앞두고 상반된 두 의견을 받았다. 참으로 중대한 시점에, 과격한 젊은 모사들의 폭력적이고 비정한 제안을 냉정히 포기하고, 노인 모사들의 온화한 정책을 받아들였다면 나라가 갈라지는 참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왕상 12:14). 결정적인 순간에 뒤집는 선택을 했다. 다윗이 인구조사 명령을 내렸을 때 요압장군은 철회하시기를 간절히 아뢰었다. 그러나 오만과 아둔한 생각에 굳게 잡힌 왕은 고집부리고 오히려 재촉함으로 인하여 온역으로 무죄한 민중 칠만을 죽인 비극을 보았다(삼하 24:15). 게하시는 탐욕을 억제치 못하여 나병을 얻었고(왕하 5:27), 삼손은 정욕을 포기 못 하여 눈알이 뽑히는(삿 16:21) 치욕을 당했다. 취사선택(取捨選擇)! 죽기냐, 살기냐의 장엄한 순간이다.
거의 같은 시대 사람으로 시조를 읊은 두 사람이 있다. 하여가(何如歌)와 단심가(丹心歌)이다.
후일 조선 태종(太宗)이 된 이방원의 하여가다. 이성계가 사냥터에서 낙마하여 병상에 누워 있을 때 친분이 두터우면서도 고려를 살리려고 반대편에 서 있던 포은 정몽주가 문병을 오자 은근히 그의 마음을 떠보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이방원이 읊은 시다. 포은은 지체 없이 단심가로 굳은 의지를 내밀었다.
흔들림이 없는 포은의 강한 심지를 알아차리고 선죽교 위에서 척살(刺殺)했으나 역사는 오히려 정몽주에게 일제히 기립 박수를 한다. 이성계는 버려서는 안 되는 의리를 버린 반면에 정몽주는 나라에 대한 충성을 위해 영화와 권력을 과감히 포기했다. 비록 목숨은 조금 먼저 잃었으나 민족의 가슴 속에 깊이 들어앉아 영원히 추앙을 받는 역사의 인물이 되었다.
동생을 죽이고야 말 것을 아신 하나님은 가인에게 특별 당부를 하셨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의 위험함을 보신 것이다. 불행하게도 가인은 분노를 청산하지 못한 채 용서받지 못할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말았다.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자, 인종차별을 철폐하고 노벨 평화상을 받은 인권 운동가다. 27년간 울음을 싸안고 감옥생활을 겪었지만, 대통령이 되자 과거에 대한 복수를 감행하라는 주변의 요청을 완강히 뿌리치고, 취임식에 자신을 학대했던 감옥의 간수들을 초빙했고 성냥개비 그어 불붙이고 싶은 백인에 대한 원한도 모두 꺼 버렸다. 늙어 죽든 총에 맞아 죽든, 죽어야만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다는 아프리카의 악습을 과감히 깨고 단 한 번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더 이상의 욕심을 포기하고 물러난 멋진 신사다. 진주 같은 보배다.
미적거리지 말자. 미움을 포기해야 포근한 세상이 온다. 꼿꼿한 자존심을 고요히 내려놓아야 나 살고 너 산다. 집착을 몰아내야 망신당하지 않는다. 머리 숙여야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란다(유고). 성경은 버리라 하신다. 망령되고 헛된말을,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딤후 2:23)도 버리란다.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라 하신다(히 6:1).
마지막 남긴 그 옹고집을 과감히 버림으로 대인(大人)이 되어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