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셔서 8가지 복을 말씀하신 예수님꼐서는 따끔하게 결론 지으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심각한 실례를 드셨다. 선지자 노릇 했다고 장담하는 성직자, 귀신을 쫓아낸 대단한 능력자, 많은 권능을 행했다는 어마어마한 주의 종에게 우리 예수님은 도무지 알지 못하신다고 외면하신다. 기겁할 노릇이다. 진노의 음성으로 소리치신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나님을 높이고 그 분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면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천국은 어림없다는 경고이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당대 권위 있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지만 외식으로 인해 예수님께 화 받을 자라고 버림을 받았다. 말만 하고 도무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따르지 않는 부류였기 때문이다. 넓은 길을 택한 자들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날카롭게 추궁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하려 함이로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렘 7:10, 11, 24).”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딛 1:16) 교회 안에 있는 현실적(실천적) 무신론자다.
반석 위에 집 짓는 자와 모래 위에 집 짓는 자, 두 가지 인생교훈으로 예수님은 끝을 마무리 하셨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에 집 지은 자요, 듣고 준행하지 않는 자는 비 내리고 바람 불 때 곧 넘어져 멸망당하는 인생임을 알려주셨다. 사도 바울의 삶을 책잡을 데가 없었다. 유대인 공회에 호출당했을 때 늠름한 태도로 담대히 말했다. “오늘까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 섬겼노라.” 하나님께 그 백성 노릇 하였노라는 뜻이다. 바른 양심으로 살았다는 고백이다.(행 23:1) 뿐만 아니라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고전 4:4) 양심의 가책 받을 일은 안 했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의롭다 함을 얻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양심에 대하여는 떳떳해야만 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이다. 양심의 책망을 아예 묵살해 버리면서 성령을 근심되게 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였고 동일한 보조로 행했다고 고린도 교회에 그 심정을 토로했다(고후 12:18). 미가선지자는 세 가지를 하나님꼐서 원하신다고 제시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나다나엘이 나오심을 보신 예수님은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칭찬하셨다. 얼마나 듣고 싶은 부러운 말인가. 노아를 향하여서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 6:9)
성경의 불명예의 사람을 따라서는 안 된다.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왕상 13:26),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함으로 저주받아 죽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행 5:3),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절실하게도 안타까운 사람들이다.(갈 3:3)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눅 1:6)
신자되기 원합니다! 사랑하기 원합니다! 거룩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닮기 원합니다!(찬송 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