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이동휘 목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빌라델비아 교회를 방문하신 예수님은 “내가 네게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계 3:8) 선포하셨다. 능력의 문이 열리고 기도의 문이 열렸기에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서머나 교회와 나란히 추앙을 받는 교회로 부러움이 되었다. 반면에 사탄은 언제나 교회 문을 꼭꼭 닫았다. 6·25 전쟁이 터져 공산군이 밀려와 남한 땅을 점령하는 순간 교회 문부터 깡그리 잠갔다. 코로나19 역시 사탄의 친척인 듯 교회당 출입을 막았다. 깊어가는 시름이나 망상에 묶인 나그네는 자정이 지나도 잠이 잡히지 않는다. 뒤척거리던 그는 교회라도 찾아가 기도하고 싶었다. 빨간 십자가의 강렬한 초대가 소망을 당장 줄 것 같았다. 정다운 교회이기에 바싹 다가가 익숙하게 문을 밀어본다. 성난 듯, 차디찬 침묵이다. 또 다른 교회에 기대를 걸고 찾았지만 문 닫는 문화로 정착된 것 같다. 주야로 자물쇠로 묶여있다. 어쩐지 교회로부터 배신을 당한 느낌이다. 그날 밤, 문 열린 교회당이 그 도시 어디에 있었는가?
새벽의 두시 경이다. 중년 나그네는 공원을 익숙하게 들어와 모종에 털썩 주저앉는다. 매우 두려운 표정이다. 총각 때 있었던 어떤 일로 결혼까지 했고 자식도 있으나 결혼이 중단되고 혼자 산단다. 자기를 뒤쫓아 오는 그 아무개라는 실체가 자객을 보내 괴롭힌단다. 그래서 이곳에 피난 나와야 한단다. 짊어진 등 가방은 묵직하다. 밤은 절대 평온하지가 않다. 맵찬 바람이 불어댄다. 잠자리를 빼앗기고 가슴이 할퀴고 고통을 껴안은 엄청난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졌다. 마음 다듬어 주기를 바라는 한 사람이 당신 교회에도 한밤중 어느 날 찾았다가 애처롭게 발을 돌렸을 것이다.
영하 20도의 겨울밤이다. 천지는 다 얼어붙었다. 나그네는 5시 새벽기도회를 기다린다. 4시 반부터 문을 열기에 혹시나 하고 몸을 녹일까 하여 좀 더 일찍 문을 노크해 본다. 4시쯤 말이다. 어림도 없다. 여유 넉넉하게 일찍 문을 열어놓으면 떼강도를 만나서일까?
이용원이나 미장원이 영업을 쉬어 문 닫는 날은 팽팽 돌아가는 네온사인의 불을 끄고 작동을 멈춘다. 교회가 문 닫는 밤은 십자가의 불을 끄면 어떨까? 비싼 전기세가 들어가는데 불 켤 이유가 없다. 불 밝히는 것은 십자가의 정신을 알리면서 우리 교회에 오라는 초청 광고이기 때문이다. 앞에까지 왔다가 처절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아쉬움은 없을 것이 아닌가.
수십 년 동안 대로변에 있으면서 24시간 문 열어 놓는 교회가 어느 중소도시에 있었다. 도둑이 교회 안에 있는 사무실에서 잔돈을 훔치고 아끼는 기구도 챙겨 갔다. 자물쇠는 그들에게 도무지 문제가 아니다. 교회당 천장에 높이 달린 모니터를 떼어 가는 순간의 동작은 예술이라 할까? 행인들이 들어와 잠을 자고 자리를 더럽히는 등등의 일은 유쾌함이 아니다. 그러나 그 피해는 결코, 결코 큰 것이 아니었다. 피곤한 행인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들어와서 기도하고 묵상하며 머물다 간 훈훈한 은혜는 하늘의 풍요로움이었다. 기계실이나 귀중품은 세콤의 보호 안에 두면 안전하리라. 교회당의 큰 문을 열고 싶지 않으면 지하실 한 방이라도 열고 성경을 놓고 전도지 몇 장을 놓는다면 예수님과 대화하는 기회가 고여 있을 것이다. 한 영혼이 지루한 방황을 밀어내고, 하늘의 기품을 입고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막 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