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세 개의 종파로 나눈다. 정교회(Orthodox Churches), 천주교 그리고 기독교다. 정교회는 그림책 보여주면서 가르치는 것과 같아서 성화를 발달시켰다. 가톨릭교회는 인형을 보여 주면서 알려주는 식이어서 조각이 발달되어 우상을 만들었다. 기독교는 동화책을 읽어주는 방식을 가진 것이라 보아 성경중심이 되었다. 할아버지 집에 온 손자들이 할아버지에게 절하지 않고 할아버지 사진이나 초상화에 절하고 촛불을 켜고 복을 달라하면 얼마나 웃기는 일일까. 어거스틴의 구분법을 따르기 때문이라 하지만, 제 2계명의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을 아예 삭제하고 열 번째 계명을 두 개로 나누어 10계명을 맞춘 의도가 성경의 권위를 무시한 것이 아닐까. 기독교의 십자가가 아무 형상이 없는 빈 십자가인 반면 다른 종파의 십자가는 죽은 예수상이 반드시 걸려있다. 이 부분의 본부파괴가 필연적이다. 개혁을 용납하라.
‘나’ 라는 본부도 파괴해야 한다.
자존심에서 주(主)존심으로 순위를 바꾸라. 자존감은 주안에 있는 ‘나’ 라는 테두리 안에서 발견해야 한다. 비천한 나를 천하보다도 귀중히 보시는 하나님의 시야에서 나를 발견할 때 가치가 높아진다. ‘나’ 라는 본부를 지부로 과감히 강등시키고, 본부는 오직 천국, 본부장은 예수님으로 교체해야 길이 열린다. 비열함이 아닌 온유함으로 자신을 발견하라. 예수님으로 주연을 삼고 자기는 조연을 맡으라. 그래야 인생 드라마가 행복으로 끝이 난다.
일등정신에서 2등 정신으로 내려앉으라.
처녀와 총각이 연애 중이었다. 처녀가 하루는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여자 중에서 두 번째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한다. 이상하다. 모든 여자 중에서 자기가 지금의 연인을 두 번째 사랑한다니. 이유를 물었다. “아무리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 해도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요. 당신 어머니가 당신을 사랑하는 그 다음으로는 내가 사랑해요”라고 말한다. 총각은 이 지혜로운 말에 감동을 받고 황홀함에 빠졌다.
이기주의를 타파하고 이타주의(利他主義)를 앞에 두라.
형편이 어려운 제레미는 농장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도시락을 쌀 수 없어 점심시간만 되면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어느 날, 수돗가로 향하는데 감독이 큰소리로 “집사람은 내가 돼지인줄 아나봐. 도시락을 뭐 이렇게 많이 싼거야. 누구 내 도시락 나눠먹을 사람 없어?” 투정을 부린다.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제레미는 같이 먹겠다고 성큼 나섰다. 다음날도 그는 역시 푸념한다. 그는 감독의 점심을 나눠 먹으며 농장 다니는 상당기간 배고픔을 해결했다. 농장을 그만두게 된 그는 감사의 말을 드리고자 감독을 만나려 하지만 찾을 수 없어 경리 아가씨에게 부탁했다. 사모님의 배려가 컸을 것이라 생각되어 “감독 내외분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이 말을 들은 경리는 “사모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혼자 사세요.” 한다.
선교는 나눠먹을 사람을 찾는 일이다. 진리에 굶주린 자, 마귀채찍에 맞아 상처받은 이웃이 헤아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중심본부에 ‘내’ 가 놓인 이상은 이 거룩함에 도달할 수 없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그들의 자리 수준으로 화끈하게 내려가서 호흡을 같이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