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이야기  / Mission Story
[선교자료]거룩한 순례자의 길, 같이 걷겠습니다 - 2.예배의 순례자
BY 관리자2013.12.07 09: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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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순례자

 

이동휘 목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 설교자의 모습은 있으나 예배자의 모습은 없다

 

젊은 목회자들이 단출하게 모일 기회가 있었다. 하루는 사모가 예배 끝난 후 남편 목사에게 정중히 말을 꺼냈다. “당신에게서 설교자의 모습은 있으나 예배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쓴 소리다. 영성이 고운 사모님의 지혜로운 충고에 온유한 남편 목사님은 고요히 수용했고 거기 앉은 우리 모두에게 진동을 일으켰다. 각자에게 해당되는 산울림이었기 때문이다. 목사는 강단용일 뿐이고, 성도는 오로지 예배용 혹은 주일용에 불과하다면 사태는 심각하다. 목사도 예배드리라는 거친 충고도 거절할 수 없이 감수해야 할 아픔이다. 예배는 있으나 예배자는 없다는 지적도 받는다. 아벨의 순결 예배를 갈망하여야만 한다.

 

그날 설교가 은혜로우면 본전을 뺀 풍성한 예배를 드렸다고 성취감을 가진다. 그러나 설교만이 예배라는 왜곡된 상식도 역시 시정할 부분이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교회는 은혜 받으러 나오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온다. 그리고 예배는 기도, 찬송, 성경 읽음, 말씀(설교), 성도의 교제, 성찬, 참회, 헌금, 봉사 모두가 예배이고 이 과정을 통해 골고루 은혜를 받는다. 개신교에서 설교가 예배의 꽃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같은 신앙을 가진 정교회나 가톨릭에서는 예전(禮展.미사)이 중심이고 정교회는 설교가 거의 없다. 구약시대는 제물을 바치는 제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찬송가에도 “생명 샘이 흘러 나와 모든 성도 마시니 언제든지 흘러나와 부족함이 없도다.”(찬송가 210장)란 가사가 있다. 언제든지...설교 시간만이 아니다. 찬송 부르는 가운데도 생명수가 흘러 은혜를 받는다. 어떤 성도는 매사에 감사하며 웃고 지내는 할아버지 성도를 교회에서 보는 순간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신앙상태를 보려면 그 사람의 예배에 대한 태도를 보면 안다고 종교개혁자 루터는 말했다.

 

 

 

 

 

※ 예수님의 영과 진리 예배

 

예수님께서 예배할 때는 “영”으로 그리고 “진리”로(요 4:23) 드려야 함을 새겨주셨다. 그리고 이런 예배자를 찾으신다 하셨다. 먼저 성령의 이끌림 받는 예배여야 한다. 그날 예배에 주님의 영광에 참례하고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예배의 신약용어 프로스쿠네오는 키스하다, 절하다, 엎드리다의 뜻이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숭배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예식이다. 그의 뜻을 하달 받고 나를 주의 뜻에 복종시키는 일이다. 두 세 사람만 모여도 주님은 거기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은혜 안에 뛰놀며 주의 영광을 보아야 한다(찬송가 354장) 데이빗 흄은 자기 목사친구의 설교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그 친구(존 브라운)는 마치 그리스도가 자기 곁 팔 닿는 곳에 있는 것처럼 마냥 외치거든!” 설교를 듣기 시작하면서 은혜를 받아 그때부터 뜨거워지는 단계가 아니다.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출발부터 경배 자세여야 한다.

 

진리로의 예배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한다”(히 11:6) 하나님께 경배하는 예배, 십자가 중심의 예배여야 한다. 비 신앙적이고 세속적 예배는 모임일 뿐이다. 리차드 스틸(1629-1692. 영국 청교도 목회자)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시간에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과 생각이 산만해서 예배에 실패를 가져오는 원인을 사탄의 공작으로 지적했다.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막 12:30) 예배해야 한다. 바울사도도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엡 3:15) 오직 너희로 하여금..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 예배로 사용하는 Worship(예배)은 worth-ship(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고대영어에서 유래했다. 거짓 신은 예배 받을 가치가 없다고 제쳐놓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10)에 목적을 둔 천국공동체다(데이브 홀). 마음을 하나님 그분께만 쏟는 것이 예배다. 어김없이 예배시간마다 은혜받기를 원하는가. 이렇게 하라. 찬송 부를 때 가사에 눈 떼지 말고 감격 있게 한 말씀 한 구절 사모하는 마음으로 부르라. 대중기도는 대표자가 하는 기도에 두 손 모으고 바른 자세로 앉아 한마디도 놓치지 말고 잡념 없이 따라서 기도해 보라. 감미로운 공동기도가 될 것이고 역시 은혜가 될 것이다. 설교는 예수님이 하실 것을 설교자에게 위탁한 순간이므로 예수님 말씀 듣는 심정으로 속으로 아멘! 아멘 하고 입속말로 동의하라. 어떤 순서든지 죄다 은혜가 된다. 설교 잘 한다는 말이나 못 한다는 말이 예배시간엔 성립이 안 된다.

 

예수님은 예배에 모범자이셨다. 안식일은 회당에서, 명절은 예루살렘성전으로, 매일 산에서 새벽기도로, 낮에는 전도와 설교 및 교훈으로 하나님의 일로 하루를 꽉꽉 메우셨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시며 안식일에도 거룩한 일에는 쉼이 없으셨다.

 

 

 

 

 

※ 외식적 예배에 하나님은 신물이 나셨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한 주님의 섭섭함은 민망스러울 정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 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8,10)

 

성전 문을 차라리 걸어 잠그란다. 거짓 예배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시다. 헛한 울림만을 되풀이하는 가증한 예배를 폐기 처분하라신다. 체면의 옷자락으로 죄를 가린 채 하나님을 기만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의 절규도 비슷하다(사 1:12-15)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이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절기를 꼬박꼬박 지키면서도 손에 여전히 더러운 피를 묻히고 마음은 멀리 주님으로부터 떠난 저들이 가소로울 뿐이었다. 예배자들이 희귀하여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누가 성전에 가서 드렸느냐가 아니라 누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렸는가가 중요하다. 정의와 공평을 지키는 것을 제사보다 주님은 더 반기시기 때문이다.(잠 21:3)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이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롬 2:21, 22)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감히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눅 19:46) 장사꾼들의 장터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신 주님 앞에 지금도 죄송스러운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것 같다. 영혼이 빠져나간 그 자리에 벼룩시장같이 온갖 취미에 맞는 물건들로 구색 맞춰 파는 인본적인 예배를 오늘의 교회들이 예배라고 즐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성 어거스틴의 참회를 배우자. “나는 당신의 교회에서 거룩한 예배가 이루어지는 시간 중에도 감히 정욕적이었고 죽임을 당할 마땅한 일들을 도모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당신은 비참한 벌로써 나를 징계하셨으나 그것 역시도 나의 잘못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어거스틴 참회록: 생명의 말씀사)

 

※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전(神前)영성(영성의 거장들: 송삼용)

 

에드워드 목사는 노스햄톤(Northampton)의 부흥을(1735년) 일으킨 영성의 대가이다. 여기서 일어난 부흥운동은 미국 전역의 대각성 운동으로 이어졌고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목회자요 선교사인 동시에 신학자요 철학가인 그는 코네틱컷(Connecticut)주에서(1703. 10. 5) 청교도 2세로 태어났다. 영광의 광채로 임하신 하나님과의 교통이 영성의 뿌리를 이루었다. 영국의 설교의 황제라 불리는 스펄전 목사가 그 곳에 와서 설교할 때였다. 널리 알려진 소위 위대한 에드워드 목사는 청중석에 앉아 설교시간 내내 울었다고 한다. 중직자들이 다른 사람의 설교에 감각이 없는 통례는 엄숙함인지 아니면 강퍅함으로 고운 마음이 상실되어서가 아닐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매여 있었다. 말씀의 영광 앞에 떨었으며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의식 가운데 살았다. 또한 영혼을 깨워주신 성령님께 즉각적으로 순종했다. 그의 영적교통이 아름다운 영성으로 피웠기에 신전영성이라고도 부른다. 그는 먹고 마시는 일에서부터 생각과 감정까지 하나님의 차원에 이르기를 갈망했다. 날마다 예배의 삶을 사는 그는 어느 날 독특한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 “나는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속으로 들어가 한적한 곳에 내렸다. 언제나 그렇게 해왔듯이 경건한 묵상과 기도를 하며 걸었다. 그날 나는 의외로 특별한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의 순결하고 감미롭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영광의 모습이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것을 압도해 버렸다. 거의 한 시간 동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울었다.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순수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다. 거룩한 하늘의 성결로 완전히 깨끗해지고 싶었다.” 일 분 일 초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기를 소원했다. 거룩함을 갈망했다. 거룩함은 하나님의 빛 안에 들어가는 열쇠이며 하나님나라 삶의 표준이라고 말했다.

 

또한 자신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를 죽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살았다. 매일, 매월, 매년 마다 죄 죽임을 위해서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성도들이 회개의 강을 건너지 않으면 거룩한 나루터에 도달할 수 없다고 외쳤다. 회개를 통해서 죄를 물리쳐 나갔다. 에드워드 목사의 예배의 설교와 삶은 곧 많은 사람의 거룩한 삶으로 깊이 연결되었다. 은혜 받은 당시 상황은 이러했다. “밤거리를 떠돌아다니던 청소년들이 가정으로 돌아갔다. 모이면 음담패설 하던 대화가 사라지고 술꾼들이 술을 끊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로 교회는 가득 찼다.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예배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아니했다. 하늘의 영광을 찬양하는 노래가 그치지 아니했다.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백성들이 부정행위를 회개했고 심령의 냉랭함도 자복하며 뜨거운 심령으로 바뀌었다. 교인들 사이의 질시와 반목을 말끔히 회개했다. 성령의 불길이 온 도시에 훨훨 타 올랐다. 자신들의 삶과 정신이 세속화되어 있음도 회개했다. 사람들이 모이면 구원의 기쁨을 나누었고 앞을 다투어 그리스도를 간증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통회하기 시작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얼굴에...영원을 옷 입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랑과 경배와 놀라움과 기쁨과 감격과 겸손의 모습이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하늘나라의 모습과 같은 것들이었다. 많은 노인들은 그토록 주님의 영광이 풍성하며 은혜가 넘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시 22:27) 예언의 말씀대로 온 세계가 감동적인 예배로 출렁거렸으면 한다.

 

 

 

 

 

※ 바울사도는 생활의 예배를 촘촘히 가르친다.

 

로마서는 교리와(1-11장) 생활로 나눈다(12-16장). 12장 첫마디는 산 제물로 자신을 드리란다(12:1). 제물은 원래 죽여 드린다. 산제사는 살아있는 생활 속에서 하루가 기우뚱할 때까지, 이어서 밤사이 숨 쉬는 내내 예배자로서 살라는 말이다. 이것이 영적인 예배라 부른다. 주일의 예배는 일주일의 에너지가 되는 양식을 배급받는 일이다. 구체적으로 바울 사도는 승리비법을 공개한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먼저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교훈으로 시작한다. 온 세상은 악한 자(마귀)에게 속했다.(요일 5:19) 세상풍조를 졸랑졸랑 따르면 영혼이 피폐해지는 법이다. 세상의 패턴을 주워 입지 말라는 말이다. 마음을 새롭게 꾸미란다. 하나님 눈에 드는 것을,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만, 기뻐하시는 것만, 하나님께서 온전하다고 하는 것만 칼날처럼 분간해서 받아들이란다. 앉아서 고요히 드리는 예배와 삶 속의 예배를 동일시한다. 순종이(살아서 행동의 예배) 제사(예배) 보다 낫다(삼상 15:22)고 성경은 강조한다. 우리가 가는 곳에 예수님의 영도 가시기 때문에(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님이 가시는 어느 곳이든 예배도 간다는 인식을 품어야 하리라. “비행기 여행 전체가 신성한 제사였고 거룩한 날이었고 예배의 순간이었다.”(코사드의 여행 간증) 코사드는 매순간을 예배로 사는 태도가 거룩함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알고 실천했다. “일 분 일 초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있으며 하늘의 양식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하찮은 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누차 강조했다. 거룩함과 세속을 구분하지 않았다.

 

 

 

 

 

※ 마귀에게 박수치는 시간을 주지마라(이기풍 목사의 삶과 신앙: 이사례)

 

조선기독교 역사상 처음으로 7명의 목사를 배출한 조선교회는(1907년) 그중 이기풍 목사를 당시 외국 땅으로 취급되는 제주도에 최초로 선교사로 보냈다. 그는 1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여 가장 힘든 사역을 감명 있게 감수했다. 황해도 윤진사의 딸인 윤함애는 세례 받고 핍박을 못 이겨 평양으로 피신했다가 이기풍 목사의 부인이 되었다. 사모는 지긋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기초 든든한 신앙으로 자녀교육을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성공적으로 실천했다. 그의 막내딸 이사례 권사가 어머니에 대한 사연을 소개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정심이 쌓여진 어머니는 흠모할만한 신앙인의 흔적을 자녀들에게 조각해 놓았다. 어머니는 딸에게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임재의식을 주입했다.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니라고 똑똑하게 심어 주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사례는 길을 걸을 때 오른손에 가방이 들려지지 않는 한 예수님의 손을 잡고 다니는데 익숙해졌다. 조용한 오솔길을 거닐 때는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 습관이 몸에 박혔다. “예수님!”하고 부르는 순간 온몸에 전기가 흐르듯 전율을 느낀다. 지침처럼 심어준 어머니의 교훈이 있다. “마귀에게 박수치는 시간을 주지 말라” 마귀는 항상 두 손을 벌리고 내 옆을 따라 다닌다고 하셨다. 성이 났다하면 마귀가 흥이 나서 박수를 치려고 기다리고 있단다. 그 순간 성령님께서는 섭섭하게도 옆에서 울고 계심을 알았다. 딸이 결혼해서 많은 자녀를 키우다 보니 때때로 복잡한 일이 공격해 올 때 신경질이 나오려는 순간 사탄을 향해 종종 호통을 쳤다. “나사렛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내가 이런 일 가지고 성을 낼 줄 아느냐”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나면 사탄은 비실비실 물러났다고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마귀는 시비를 걸게 하여 서로 싸움을 붙여놓고 좋아서 박수를 쳐 댄다. 불같은 성령체험을 하고 은혜를 넘치게 받고 와서도 사소한 문제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신경질을 부리고 나면 그동안 주님과 속삭였던 모든 일이 삽시간에 와르르 무너지게 된다. 기도하라고 열나게 외치지만 자신은 기도의 자세가 전혀 없고 기도로 녹아지지 않는 한쪽만 익은 전병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었다.(호 7:8)

 

 

 

 

 

※ 나는 신의 가슴 속에 있다(칼릴 지브란: 예언자)

 

세계적인 명저 “예언자”는 레바논 지브란의 작품이다. 예배에 대한 몇 마디를 소개한다.

 

*사랑할 때 신이 내 마음 속에 있다 말하지 마십시오. 나는 신의 가슴 속에 있다고 하십시오.

 

*모든 행위가 예배가 되게 하십시오. 그대들의 식탁을 제단으로 삼으십시오.

 

*이건 내 영혼을 위한 시간이고 이건 내 육체를 위한 시간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대의 모든 시간은 지금의 나에서, 다음의 나를 향해 퍼덕이며 창공을 날아가는 날개입니다.

 

*또한 예배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창문처럼 여기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집, 새벽에서 새벽까지 창문이 열려있는 그 집에 아직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심지어 손으로 돌을 다듬고 베틀로 옷감을 짜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 속에서 솟아오르는 경이로움과 놀라움, 그것 역시 종교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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