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우리 캠페인
1950년대에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우수한 문학 지망생들이 각자의 발전을 위해서 모임을 만들었다. 한 모임은 정기적으로 모여 각자가 쓴 글에 대해서 서로 비평만 했다. 항상 비평과 문제점만 말하다 보니, 모임은 언제나 얼굴을 붉히는 가운데서 진행이 되었다. 전혀 다른 방향을 가진 모임도 있었는데, 그 모임에서는 상대에게 최대한 좋은 부분을 찾아서 격려해 주고 칭찬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좋은 말로 서로 격려를 해주던 모임의 학생들은 대부분 훌륭한 작가로 성공하게 되었지만, 비평만 했던 모임의 학생 중에서는 뛰어난 작가가 나오지 못했다.
성경 로마서 12장 10절 말씀은 대인 관계에서의 예의를 말씀하신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형제를 ‘사랑’ 하고, ‘서로’ 우애하고. ‘먼저’ 존경하라는 단어로 강조점을 둔다. 지금까지 사랑하지 못했고, 서로 우애하지 못했고 존경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네가 나서서 시작하라, 개척하라는 뜻이다. ‘먼저 네가’라는 순서다. 우리는 미적거리는 습관이 있다. 주저 말고 네가 나서라는 부탁이다. 사람은 95% 좋은 점이 있고 5%의 단점이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있는 단점의 숫자만큼 내게도 꼭 그만큼 있다는 말이다. 내게 장점이 있듯이 상대방에게도 역시 장점이 붙어 있다는 지식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셨다.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화평함이 없는 곳에 가서 화평을 만들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갖춘다.(마 5:9)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 했다.
어느 노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다. 화가 난 할머니는 그날부터 입을 닫고, 할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때가 되면 밥상을 차려놓고, 한쪽에 앉아 말없이 TV만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식사를 마칠 때쯤이면 또 말없이 숭늉을 떠다 놓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밥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때가 그리웠다. 어떻게 해야 할머니의 말문을 열게 할지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잠시 뒤 할머니가 마른빨래를 정돈해서 옷장 안에 넣고 있었고 말없이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옷장 문을 닫고 나가자, 옷장 문을 열고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뒤지며 옷을 방에 벌여 놓고 부산을 떨었다. 저렇게 해놓으면 나중에 치우는 것은 할머니 몫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소리를 질렀다. “무엇을 그렇게 찾아요” 앙칼지게 말하자 할아버지는 능청스럽게 “이제야 임자의 목소리를 찾았구먼!” 할머니도 같이 웃고 화해했다는 포근한 이야기다. “당신의 적에게 늘 화해의 문을 열어놓아라”라는 명언을 잊지 말자.(발타자르 그라시안)
자존심을 상하면서까지 내가 먼저 굽혀 손 내미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요일 4:19) 다가오셨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또 부탁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