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 미워하는 자를 선대, 저주하는 자를 축복, 모욕하는 자에게 기도
양손과 두 발에 칼 못을 박고 얼굴에 침 뱉는 지옥의 종신형을 받을 저질 인간들을 용서해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두목으로 모시고 산다. 우리 주(主)님은 변경 못할 계율을 하달하셨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 28) 기독교 역사에 수많은 거룩한 성도들이 이 성스러운 외길을 간직하면서 지구의 기후를 향기롭게 했다. 뒤를 이은 천국의 자녀들은 "그들이 병들었을 때에 나는 굵은 베 옷을 걸치고 금식하며 고행까지 했건만... 친구나 친척에게 하듯이 나는 그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모친상을 당한 사람처럼 상복을 입고 몸을 굽혀서 애도했건만... 그러나 정작 내가 환난을 당할 때에 오히려 그들은 모여서 기뻐 떠들고 순식간에 나를 치고 사정없이 나를 찢었다"(시 35:13-15 표준) 마치 승산 없는 소비적인 싸움만 즐기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터인가 기독교 브랜드를 변형시킨 것 같다. 십자가 정신없는 십자군으로 색깔을 바꾸었다. 적당한 구실을 붙여 살벌한 종교재판을 열고 서슴없이 숱한 인간을 짓눌렀다. 모임마다 수군거림이 집요하고 성회라 칭하는 비중이 큰 모임이라면 으레 파벌이 스며들었다. 따라서 종교를 께름하게 여기는 풍조가 이 땅을 파고들었고 싸움계책이 뛰어난 마귀를 살짝 모사로 삼고 비밀회의를 자주 하는 눈치다.
원수를 사랑!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몰아넣고 야비하게 비웃고 서 있는 지긋지긋한 평생원수를 따지지 말고 냅다 달려들어 사랑을 부으란다.
미워하는 자를 선대! 시답잖은 문제로 다툰 이후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나를 능멸하고 비방하는 섬뜩한 자를 우리 집에 오신 천사로 여기고 풍성히 대접하라고 하신다.
저주하는 자를 축복! 칭찬에는 철벽같은 농아가 될지라도 악담하며 꼬치꼬치 헐뜯는 능글능글한 자에게 입을 넙죽 열어 두 손 높이 들고 축복해 주라고 기막힌 명령을 하신다.
모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 지탄의 손가락으로 살벌하게 내 가슴을 후비고 화살 겨누어 내 인격과 체면을 망가뜨린 그 비열한 작자를 포근하게 감싸며 기도해 주라고 부탁하신다.
나도, 저들 원수들처럼 못된 짓거리만 할 때(롬 5:8, 10), 그런 나를 위해 치욕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은덕에 대한 보답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요, 미워하는 것은 살인(요일 3:15)행위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하늘상이 없다(마 5:46)는 상벌기준이 신비하기 때문이요, 말로만 사랑하고 행동으로 미워하면 거짓말쟁이가(요일 4:20) 되기 때문이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갈증 날 때 목축여주는(롬 12:20) 품위 있는 행동은 마땅한 일(요일 4:11)로 가르쳐 주셨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수는 하나님이 갚으시니(롬 12:19) 너는 상관 말라는 어명을 받은 처지이기도 하다. 낫을 빌려 주지 않은 사람이 말을 빌려 달라고 했을 때 빌려 주지 않은 것은 복수이고, 너는 나에게 낫을 빌려 주지 않았으나 나는 네게 말을 빌려 준다 하는 것은 증오란다(탈무드).
이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 죽음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은 죽을 계획을 짜고 지구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살리려고 그 설계대로 죽으셨다. 중세유럽에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가 몰아붙여 당시 유럽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에서는 프랜체스코 수사들이 2만 명가량 죽었다. 몰사한 것이다. 전염성이 강한 병인 줄 알았음에도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다가 수사들은 깡그리 목숨을 잃은 것이다. 희생적 영성은 유럽을 감동시켰다. 죽고자하는 자가 산단다. 살고자하면 죽는단다(마 16:25).
할렐루야!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