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태운 나귀새끼가 촐랑거린다
이동휘 목사(사)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벳바게 맞은편 마을에 두 사람의 낯선 행인이 동네를 밟으며 무례한 행동을 거침없이 한다. 나귀새끼를 끌고 가는 것이다. 묻는 말에 주께서 쓰시겠다고만 말한다(눅 19:34). 마음 고운 임자는 허허 웃으며 내어준다. 촌뜨기 나귀새끼가 황홀한 도시 예루살렘으로 곧장 인도된다. 평생 처음으로 인간을 태우는 톡톡한 몫을 신고하는 뜻 있는 날이었다. 초라한 나귀등에는 크신 분이, 그러나 절대로 무겁지 않은 무게의 신사가 사뿐히 앉으신다. 드디어 출발이다. 웬일일까. 길가에는 구름떼 같은 군중들이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대열을 이루어 뒤 따라온다. 열기가 더 하자 인간들은 겉옷을 훌쩍 벗어 나귀가 밟는 땅 위에 펼쳐 놓는다. 평생 자갈밭만 걸었던 나귀는 비단옷을 기분 좋게 밟는다. 게다가 잘 생긴 남자 여자들이 꾸벅꾸벅 절까지 한다. 어리둥절하고 죄송했던 나귀가 점점 기가 난다. 내가 시골출신이지만 이렇게도 유명했단 말인가. 나의 기다랗고 갸름한 두 뺨이 예뻤던가 보구나. 그렇지! 나의 가치를 드디어 알아주는구나. 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콧방귀도 풍풍 뱉어가면서 촐랑거리기 시작한다. 자기 등에 펼친 옷도 어떤 점잖은 분의 겉옷이란 말도 들은 터이다. 자기 옷 벗어 내 몸에 입히다니. 나는 분명 잘 났던 거야. 거만스러운 발걸음을 자박자박 걸으면서 목이 뻣뻣해지기 시작한다. 감히 예수님을 태워 드리는 황송함과 수줍음은 어느덧 흔적도 없고 망령된 짓을 하고야 만다. 고삐 잡은 어른의 말도 하찮게 들려 앙똥해진다. 영광의 함성을 자기에게 쏟은 줄로 착각하고 이상한 나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간다. 예수님과 팽팽히 맞서 밀리지 않은 채 성역(聖役)을 마친 것이다. 성(聖)나귀라는 훈장을 하나 얻어 기념식을 거창스럽게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두 번 다시 그 나귀를 쓰지 않으셨다.
이천 년 전 그 나귀로부터 급히 하소연이 날아온다.
"위풍당당하게 백마(白馬)나 적토마(赤土馬)를 타고 입성하실 크신 분이 하찮은 숙맥 새끼나귀를 타 주신 그 감격을 어찌 잊었겠습니까. 가슴 저미며 거룩한 모습 보존하면서 땀 닦을 짬도 없이 예루살렘까지 열렬한 질주를 하였습니다. 눈 한번 팔 수 없었습니다. 일찍이 빗나간 발람에게 입을 열어 질책한 일은 있으나 그러나 인간에게 한 번도 거역하지 않았던 이력을 가진 가문이었습니다(민 22:30). 예수님 모신 내 등에 어찌 천박한 것을 옮길 수 있으리오 하여 그 후 다른 것은 태우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날의 나귀는 꾀부릴 줄 모르는 청순하고 겸손한 새끼나귀였다. 오로지 인간나귀만이 감히 높으신 분의 영화를 탐내는 오만함으로 건방떨었을 뿐이다. 예수님께 전달되는 영광을 산적(山賊)처럼 잔인하게 빼앗고 걸쭉한 입담으로만 하나님께 영광! 이라고 말하는 습관적인 앵무새가 된 것이다.
"가시나무 새"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권력의 완장을 차고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화려하게 쓴 채 예수님을 제쳐놓고 그 자리를 점령해 버렸다. 땅 바치고 집 바친 사람은 보았으나 자기 성질 뽑아 바친 사람은 못 보았다는 어느 은퇴 목사의 푸념을 풍문에 들었다. 초림 때도 묵을 방이 없어 짐승의 우리간으로 밀렸던 우리 예수님은 지금도 여전히 수욕을 당하신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을 훔친 대가로 창자 썩어 죽은 헤롯왕의 이야기를 차라리 몰랐다면 죄가 묻힐 수도 있으련만!
우쭐대지 마라. 인간은 우악스러운 소질을 다분히 품은 죄인들이다. 날마다 흐느껴 주님 손 잡아라. 순간을 할당받아 사는 인간아! 매 시간 주님을 개입시켜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