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만 명 탈환작전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일본의 쓰나미로(2011. 3) 사망한 숫자가 무려 15만 명이었다. 천지가 흔들리는 것 같았고 공포자체였다. 이 수보다 266배 더 많은 4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종이 한국기독교 역사에서 별안간 흔적을 감추었는데도 웬일인지 통곡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조기를 달고 조복을 입고 엉엉, 펑펑 울어야 하는데도 하늘 아버지와 우리 예수님만이 천사들을 모아놓고 어이할꼬! 안타까움에 몸부림치시는 것 같다. 6.25전쟁에 국군이나 인민군, 파견된 외방부대, 피아 민간인까지 합해 비통하게 죽은 450만 명과 엇비슷한 내 형제들이 교회를 빠져 나간 참극인데도 무표정일 뿐이다. 나 보기 싫으면 얼마든지 나가라! 회당장의 살벌한 고함에 밀려 지옥행을 결정한 사람, 수십 년간 눈물의 결실로 겨우 등록시켜 열매를 볼 뻔한 그 보석 같은 생명들이 치졸한 교회싸움과 참기 힘든 불미스러운 모습을 견디다 못해 교회까지 버리게 되었다. 결국 마귀의 갈고리에 걸려 우상 종교에 빠진 그 애처로움, 천국티켓을 간신히 얻었다가 취소당하고 지옥행 행렬에 서게 된 그 숫자 400만!
누가 이들을 쫓아냈나? 목사들이다. 또 있다. 장로들이다. 권사, 집사를 포함한 교인들이다. 강아지새끼 하나만 집 나가도 법석을 떨고 찾는 법인데 그저 모른척할 뿐이다.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긴(히 2:3) 막중한 죄를 장차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2000년대까지는 천이백만 기독교인이라고 고유명사처럼 입에 붙였었다. 이 고개를 넘으면서 벽이 허물거리더니 이제는 아예 800만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현실이 된 것이다. 기독교인구 ⅓이 실종된 것이다. 에스더는 민족을 살릴 각오로 죽으면 죽으리라 입술을 깨물고 임금님 방문을 향해 달려갔는데(에 4:16), 모르쇠 전과자처럼(김00) 하나님 앞에서 내 책임 아니었다고 핑계할 수 있을까.
아프리카 르완다가 종족싸움으로(투치족과 후투족) 100만 명이 살육당했다. 기독교 인구가 85%였는데도 종족싸움에서는 기독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상관없이 서로 죽였다. 깊은 회의에 빠진 지도자들은 통회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라고만 했지, 하늘나라로 인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디까지 인도했나. 복 받는 데까지만, 우리교회 부흥시키는 것만으로 만족했는가. 소위 양반출신이라고 우쭐대는 짐승에게 천한 짐승이라고 멸시를 받자 “너희 집은 너로 끝나겠지만 우리 집은 나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당돌한 응수는 누군가가 한국기독교에게 퍼 붙는 조롱 같이만 들린다. 이일을 어찌할까?
병거 3만에 6천의 마병, 해변의 모래 수로 침략한 블레셋의 대군을 삽시간에 섬멸시킨 “큰 떨림”(삼상 14:15)이 일어나면 된다. 단 두 사람이 해낸 업적이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다”(14:6)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다”(14:10) “하나님과 동역한 사람”(14:45)만이 할 수 있었던 요나단의(병기 잡은 자와) 믿음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아끼는 십자가 군사들이여! 지체 말고 탈환작전에 가담하라! ‘내쫓긴 자일지라도,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려는 하나님의 애태우시는 방책’(삼하 14:14)에 힘을 합하라. 탕자를 보는 순간 달려가 포옹하고 무조건 받아들인 아버지 마음이면 된다(눅 15:20). 굶주려 죽기 직전에 가까스로 돌아온 동생의 허물을 들추면서 옳음만 앞세운 알량한 형의 괴변으로는 기독교의 미래는 없다. 기쁜 잔치에 아버지 마음을 상처 낸 옹졸한 형은 또 사백만을 쫓아낼 기세다. 그 날에 진정한 형은 없었다. 진정한 아버지만 있었다. 목을 껴안고 한마디의 책망도 꺼내지 않았던 아버지의 넓은 가슴으로 끌어안아야만 해결이 있다. 날이면 날마다 대문밖에 나가 깊이 울며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이면 다 통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