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모두가 변하기를 기대하지 말라 내가 변하면 모조리 변한다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사글사글하던 결혼 초 남편의 사랑스런 숨결은 코믹한 연기였는지, 섭섭하기만 한 고운 아내는 후미진 곳에서 서럽게 우는 신세가 되었고, 남편 역시 아내에 대한 원망스러운 앙금만 삐죽 솟아 피해의식이 몸에 붙은 것 같다. 목사와 교인 사이도 역시 비슷한 지루함이다. 얼추 변할 것 같던 기대가 거세된 희망으로 처지고 피곤만 겹쳤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다. 내일로 달리는 팔팔 끓는 대단한 그대를, 감히 발목 잡고 있는 괘씸한 그 작자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당신을 십분 동정한다. 너만 변하면 얼마나 좋을 거나! 넋두리는 꼬리를 문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응어리진 케케묵은 노여움은 옛사람 아담의 찌꺼기다. 새사람이 된 이상 새사람의 지식을 따라야 한다. 인간을 변화시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를 위한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나를 비롯한 모두가 변화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변변치 않은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이 변화되어 만사형통하려는 이기적 사고의 틀을 깨트려야 한다는 사실을. 비슷한 수준의 약점을 그대 역시 그 상대자만큼 가졌지 않은가. 나의 눈부신 앞날을 짓누르는 까다로운 적수는 오히려 내 속에 교묘히 잠복된, 아직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은 정욕과 탐심임을(갈 5:24) 알아차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상처는 이 세상 만물 모두에게 골고루 나누어 가진 배당임을 체득해야 한다. 풀잎에도 상처가 있단다. ‘상처 많은 꽃들이 가장 향기롭다(정호승)’란 시도 있다. 상처는 희망이 된단다. 단 한 사람 예수님이 죽어 인류문제를 해결했듯이, 당신이 주저 없이 예수님 안에서 죽으면 만사를 해결하는 열쇠를(Master Key) 하사받는 희열의 순간이 된다. 어정쩡하게 죽지 않고 제대로 죽는 자가 받는 선물이다.
사도바울을 보라.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그는 녹아버렸다. 아라비아 황량한 사막에 몸을 던졌다. 하나님의 빚어짐에 맡겼다. 그리고 원수까지도 친구로 삼는 진짜 예수쟁이의 품새로 변했다. 그는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죽었다(고전 15:31). 몸을 쳐 복종시키기를 날마다 했다(고전 9:27). 훈련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란다. 인생은 주어지기를 원하지만 만들어가는 법이란다. 예수님처럼 피 뚝뚝 흘림으로 내 십자가를 내가 져야(마 16:24)한다. 십자가에 푹 죽어야 영광에 안기게 되는 진리의 과정을 건너뛰려는 얄미운 생각을 접어라. 믿음으로 구원을 성취했는가. 믿음도, 인격도 완성시켜라. 예수님의 수준에 이르는 사랑과 거룩함이다(엡 4:13).
니고데모에게 던진 예수님의 핵심진리는 새로 태어남이다(요 3:3). 예수님 믿는 것을 중생(重生) 혹은 거듭남(Born Again)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요 4:12) 새 생명의 싹틈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통쾌한 선포다. 산천도 초목도 새것이 되었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는 싹 바꿈이다(찬송가 436장). 옛 사람은 갈보리에서 이천년 전에 그리스도와 함께 네 번째의 십자가에 이미 달려 죽어 장사 지낸 바(갈 2:20) 되었다. 천국사람으로 사는, 이 세상에서는 그 종족을 찾을 수 없는 별난 종자다. 신의 아들들이다. 천국국민(天國民)이 된 것이다.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평화의 도구로 변신하라. 이유는 단 한 가지,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주님께로부터 흘러내리는 진한 사랑이 거룩한 파이프를 통하여 중단 없이 공급되기 때문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