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동휘 목사(전주안디옥교회 선교목사, 사단법인
바울선교회 대표이사)
성난 바다는 삽시간에 뱃사람들을 모조리 삼킬 기세다. 제 각기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살려 달라고 아우성이다. 배마저 깨져가는 격한 풍랑 중에도, 그러나 밑창에서 코 골며 깊이 잠든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선장은
다급히 흔들며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 1:6) 소리친다. 내려진
사명을 팽개치고 도망치는 요나 선지자를 향한 세상의 질책이다. 세상은 망하고 있는데 미적거리고만 있느냐는
눈 부릅뜬 노여움이다. “요~나”를 수장(水葬)시키자 즉시 풍랑은 걷혀 살길이
열렸다. 벵갈의 회교도 노파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전도자에게 오히려 질책 한다. “이렇게 나이 많도록 기도를 하고 적선도 하고 금식을 하느라 먼지처럼 되었소.
그런데도 쓸데없는 고생만 했소. 당신들은 어디 있다가 지금에야 오는 것이오.” 페루인 역시 통탄하며 “예수님이 이 귀중한 말씀들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일찍이 들은 일이 없으니 어찐 일이오.” “왜 당신은 이 책을 들고 각처로 다니지 아니했소. 왜 오늘에야
듣게 된단 말이요” 어떤 무어인이 성경책을 파는 사람에게 따지는 호소다. “우리 민족가운데에 성경이
가르치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당신 혼자서만 그 책을 끼고 있었소? 부끄럽지도 않소.” 직무태만! 생명을
죽이는 죄다.
또 다른 이상한 모습도 등장한다. 살인자를 석방시켜 달라고 아우성이고, 오히려 거룩한 선지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는 군중의 살벌한 고함소리에 재판관은 흠칫 놀란다. 치욕스러운 병으로부터 고침 받은 바로 그 사람들이, 며칠 전만 해도
예수님께 매료되어 종려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로 목청 터지게 환호했던 그 입술로, 순결하신 예수님을 죽이라는
배은망덕한 외침에 빌라도는 기겁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했는가하고 되묻는다(막 15:14). 대제사장의 교활한
선동에 쉽게도 넘어간 가련한 저들! 예로부터 마귀는 모략과 권세로 의로운 자의 양심을 마음껏 농락하고
다닌다. 출교 당할까(요12:42) 겁먹은 민중들은 신앙 정조를 쉽게도 버리는 변덕을 부렸다.
신실하게만 보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성도가 성령을 속인 뻔뻔스러운 광경 역시 기막힌 장면이다. 영안이 밝은 베드로는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감추었느냐?” 울분 한다(행 5:3).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준엄한 선고를 내리자, 부부는 제 몫의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더 이상 세상 공기를 마실 수 없었다.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성령님께 한 것이고 예수님께 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교회처럼, 교회가 영적이 아닌 것과 동맹을 맺은(바운즈) 패역 한 시절이 아니었으므로 초대교회는 죄인들이 숨을 공간이 아예 없었다. 평소에는
많은 차이를 보였던 부부들이 악한 꾀에는 그렇게도 쉽게 기울어져 함께 죽는 걸 보면 그것도 부부 일신이어서 그럴까. 한편이라도 바른길로 간곡하게 이끌어야 할 줄을 왜 몰랐을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를 등불 켜고 두루 찾아 벌하시는 사실을(습 1:12) 몰라서
그럴까.
믿기 이전의 흑암 세월에 더 이상 먹이를 주지 마라. 옛 생각을
고사시켜라. 세상과의 타협을 중단해야 영혼이 산다. 전선에
전류가 흐르게 하여 생명을 왕성케 하라. 예수님께 감전되어라. 주님
앞에 서게 되는 마지막 그날! “어찌하여 간사한 자의 꼬임에 빠졌느냐?”
하는 책망을 들을까 두렵다. 침묵으로 떠있는 별이 수많은 생각을 만들어 내듯이,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주님은 쉼 없이 속삭이고 있지 않은가. 좁은
길, 생명의 길만은 놓치지 말라고.
오! 주님